기독교인순교기념관 (영광 야월교회/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영광 야월교회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시대에는 야월리에 일본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일진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지방유지 들을 매수하여 친일 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를 저항하는 뜻있는 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소위 상록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농촌 잘 살기 운동, 애국사상 고취운동, 생활개선운동, 한글 가르치기 운동 등을 펴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중앙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극심하여 잘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YMCA에 몸을 담게 되고 여기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월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수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영광 야월교회
영광 야월교회
영광 야월교회 측면
영광 야월교회 측면
영광 야월교회 뒷면
교회 내부
야월교회와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1990.11.22 준공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준공석
순교기념탑 건립 의의
순교기념탑 순교자명단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1904년부터 광주를 무대로 활동했던 배유지(유진 벨) 선교사가 배를 이용하여 야월도(당시는 섬이었다)에 교회를 세움으로 이 지역에 복음이 들어왔다. 야월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해 문을 닫고 각 교인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과 더불어 곧 재건된 야월교회는 조양현 허숙일 두 영수가 교회 강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닥친 이념의 갈등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족이면서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씨앗을 뿌렸고 결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왔다. 생각하기도 힘들만큼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하는 일은 이 조용한 마을에도 생겨났다. 인민군은 야월교회에도 들어왔다. 교인이래봐야 고작 65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지만 야월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다. 인민군과 함께 들어온 내무서원(북한의 사회안전원을 일컫는 말:편집자 주)은 야월교회를 접수하고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때도 교인들은 가정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각각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야월교회 교인들의 이러한 소식을 들었던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마을의 좌익 청년들은 밤에 몰래 모여서 예배하는 이들을 색출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교회로 모이게 했다. 모든 교인을 불러모았다는 보고를 받은 내무서원의 명령에 따라 인민위원회 위원들은 교인들이 모인 교회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교회에는 3년만에 안창근 전도사가 부임하였지만 '예수믿고 망한 동네'라며 주민들의 냉대가 심했다. 하지만 교회는 자라나는 유년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계속했고 광주선교부의 도움으로 교회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은 2006.6월 전국 교회의 헌금과 영광군청의 지원으로 연건평 2백50평 규모로 건립되었다. 기념관은 야월교회 순교자 뿐아니라 영광군의 기독교인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2층으로 된 기념관은 1층에 역사 전시실과 기도의 손이 있으며 2층에는 대예배실과 순교자들의 모습들이 그려져있다. 신앙선배들이 한국전쟁 당시 흘렸던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다. 기념관은 야월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순교비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승리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천성을 향해
천성을 향해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익투스 십자가, 익투스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하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자이다.
익투스 십자가
생명의 그루터기
생명의 그루터기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순교의 의미
순교자 명단
야월교회 순교자 명단
염산교회 순교자 명단
기타 교회 순교자 명단
관람안내
입구 전시물
귀출라프
초기 선교사들
초기 선교사들
초기 선교사들, 아펜젤러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
1층 전시실 입구
1층 전시실 입구
한국교회 연대표
한국교회 연대표
순교기념관
야월교회 순교자
야월교회 순교자
야월교회 순교자
야월교회 순교자
1층 전시실
유진 벨 선교사 (배유지 선교사)
유진 벨 선교사 (배유지 선교사)
호남지방 기독교역사
1층 전시실
선교사들의 전도
여행중인 선교사
전도중인 선교사
1층 전시실
6.25 한국전쟁
인민군
1층 전시실 십자가
1층 전시실 십자가
1층 전시실 십자가
1900년대 초기 성경
1950년대 성경
전쟁 속 폐허된 교회
전시실
1층 전시실
순교자
불에 탄 서적
불에 탄 서적
1층 전시물
1층 전시물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1층 특별전시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김수진 목사, 고 김나미 권사가 기증한것이다)
도서 기증자 김수진 목사에 대하여
1894년 언더우드 찬송가
1894년 언더우드 찬송가
한국교회 최초의 찬송가는 1892년에 감리교 선교사 존스와 로드 와일러가 편집한 <찬미가>이다. 그 전에는 중국 찬송을 중국식으로 발음하여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장로교에서는 1894년에 언더우드가 편집한 <찬양가>와 1985년에 리 부인과 기퍼드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를 발행했다. 이처럼 장로교와 감리교가 찬송가를 별도로 발행하다가 1908년에 위에 언급한 세 찬송가를 합하여 <찬숑가>를 발행했다. 1931년에는 이 <찬숑가>를 개편한 <신정 찬송가>가 나왔으나 장로교에서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감리교만 사용하였고, 장로교에서는 1935년에 별도로 <신편 찬송가>를 발행했다. 이외에도 개인 혹은 군소교단에서 발행한 많은 찬송가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초교파 합동찬송가 편집이 추진되어 1949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참여한 한국찬송가위원회에서 <합동 찬송가>를 발행했다.
1912년 신약주석
1912년 신약주석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념관- 사랑과 평화, 화합>
1층 전시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맞잡은 손(기도하는 거룩한 손)
기도하는 손
기도하는 손
1층 기도하는 손
맞잡은 손
1층 전시실
1층 전시실
1층 전시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장면
1층 전시실, 토마스 선교사
1층 전시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장면
순교 전 야월교회와 순교자들 사진
순교 전 야월교회와 순교자들 사진
2층 입구
2층 대 예배실
2층 십자가 고난화
<2층 추모관>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 문준경 전도사(우)
맞잡은 손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순교자 명단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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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원문보기 글쓴이: 영혼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