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기까지 말한 것은 사실, 몸을 써서 수련해야 하는 대다수의 운동이나 기예, 심지어 두뇌 게임 등에서도 얼마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 전통 활쏘기에는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바로, 선조들의 남다른 정신 세계와 교감하며 그 속에서 거니는 경험이다. 나는 사실 이것이 우리 활쏘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활 관련 책 중에 <활이 바꾼 세계사>라는 것이 있는데 그 책 표지에 써 있는 카피 문구가 다음과 같다.
“활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도 없었다!”
무슨 얘기인가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민족이 숱한 외침(外侵)과 고난 속에서도 5천년 이상 생존과 번영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밑바탕은 바로 활쏘기라는 뜻이다. 그렇다.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의 남다른 장기(長技)였고, 숱한 외적의 침입에 시달렸던 우리 민족에게 활이란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무기였다. 또한 활쏘기는 왕으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긴 생활 무예이자 여가 스포츠였으며, 글 읽는 많은 선비들에게는 몸과 마음을 함께 단련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이에 관해선 졸고, ‘한국의 전통 활쏘기와 청소년 전인교육’에서 좀더 자세히 얘기했음). 따라서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활쏘기를 한다는 건 단지 그 몸짓을 따라 한다는 걸 넘어, 그분들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교감(交感)하는 일이다. 나는 우리 활쏘기의 뛰어남과 놀라움, 멋스러움과 즐거움, 그리고 어려움 등을 점점 알아가면서 조상님들의 남다른 지혜와 탐구 정신, 호연지기와 나라 사랑, 열정과 집념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며, 감동하게 된다.
특히 조선의 무장들 사이에서 전수 되던 중 19세기말 무과 폐지와 함께 명맥이 끊겼다 최근에야 복원된 철전 사법을 공부해 보면, 본래 우리 활쏘기는 단지 과녁 잘 맞추기를 넘어, 바른 자세로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맹렬하게 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활의 힘과 사람의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끌어내 결합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고(몸에 무리를 주지 않음) 호쾌하면서도(보기에 시원하고 아름다움) 강력한(같은 궁사, 활, 화살 조건에서 최대의 힘을 실어 보냄) 쏘임을 추구한 것이다. 아직 확실한 단정은 못 지어도, 현재 계승되고 있는 세계 모든 지역의 활쏘기 가운데 최고 수준이라 감히 자부할 수 있다. 오직 쏘임의 정확도만 겨루는 양궁에서도 지금 우리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지만, (기계장치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쏘임의 효율성과 강력함을 겨루는 시합이 만일 있다면, 거기서도 단연 우리가 가장 앞설 것이라 짐작해 본다. 과연, 동서고금을 통틀어 활쏘기 종주국(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적어도 복합 각궁에 관한 한 거의 진실이라 본다)에 걸맞는, 기가막힌 유산을 우리 조상님들은 남겨 주신 것이다. 진지한 활꾼이라면 이 어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활을 만들고 쏘았던 조상님들의 그 깊은 정신세계를 오늘날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활을 내면서 나는, 조금이라도 그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인다. 단지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옛날 그분들의 몸짓과 마음을 되도록 제대로 알고, 닮기 위해, 있는 힘껏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보낸다. 그러다가 가끔 맛보는 신비 체험(?)은 그야말로 은혜요 축복이요 기적이다. 맞출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별로 안 하고 몇 발을 쏘아 봤는데 화살이 4~50미터 밖의 작은 우윳곽이나 145미터 밖에 세워 둔 A4 크기의 스티로폼 판을 시원하게 꿰뚫는다든지, 50미터 앞도 채 안 보이는 새벽 활터의 짙은 안개 속을 마음의 눈으로만 보면서 보낸 화살이 145미터 과녁을 네 번 연속 때리는 소리를 안개 너머로 듣는다든지(관중 때 들어오는 신호등 불빛은 아예 안 보인다), 하는 경우를 말한다. 또한, 이는 앞엣 것보단 좀 더 있는 일인데, 정말 잡음 하나 안 섞인 날카롭고 맑은 시위 소리와 함께,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깨끗한 포물선을 그리며 맹렬히 날아간 화살이 과녁 한복판에 맞아 깊고 묵직한 소리를 낼 때이다. 당연히 아직은 원하는 만큼 자주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니니, 때때로 그런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하면 정말 크나큰 기쁨을 느끼면서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게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멋진 유산을 물려 주신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그런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더라도, 탁 트인 활터에서 하늘과 산을 보며 시원하게 활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이제 마무리를 하자. 사람마다 활을 쏘는 까닭은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첫째는 무엇보다, 즐겁고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나도 당연히 거기 동의를 하면서, 이 글이 그 재미의 내용을 나름대로 좀더 자세히 펼쳐본 것이라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물론 어떤 이는 건강에 도움이 되니까, 또 어떤 이들은 대회에서 단을 따거나 상금을 타기 위해, 열심히 활을 내기도 할 것이다. 충분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활터를 간다면 아무래도 너무 속물적이지 않은가. 우리 모두 그런 건 그냥 가볍게 바탕에 깔고서(나도 속물근성이 없지는 않다^^), 숱한 다른 운동들 놔두고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우리 활을 쏘는 이유에 대해 깊이 한번 생각해보고, 더 나은 답변을 찾아보자는 뜻으로 다소 긴 글을 끄적거렸다. 활꾼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격려와, 짧은 글이라도 나름의 동참을 기대한다.
아마 이번 주말 어둑한 새벽에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활터를 향해 차를 몰고 있을 것이다.
첫댓글 발이부중 반구저기라는 성어가 참 마음에 들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 은은한 한국의 지혜로운 전통을 느낄 수 있는 어르신들이 모인 곳이 더 좋고요,
전통 활쏘기 하시는 분들은 진짜를 아는 멋진 분들로 보여요. 고리타분? 전혀!!!
그리고, "신비감"이라는 것이 감히 이해가 되네요... 어질고 현명했던 옛 선조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연얘도 이해가 되요... 벌써 국궁 사랑에 빠진 거 같아요...
갈길이 먼데 말이 많다... :)
격려의 댓글 고맙습니다.
요즘 2~30대 젊은 분들은 의외로 국궁에 대해 '멋지다'는 선입견을 가진 경우들이 꽤 있더군요. 국궁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전통 활터에 멋진 어르신들도 가끔은 계시지만, 참 드물구요.. 좀 고리타분하고 이상스러운 분들이 더 많은 건 제(또한 여러 분들) 경험상 사실이랍니다. 안타까운 일인데, 앞으로 서서히 바뀌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으니, 천천히, 설레며 내 딛는 님의 발걸음에 응원을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전통 활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