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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하11장14~27절
제목 : 다윗의 음모
사무엘하11장은 중요한 장입니다.
승승 장구하던 다윗이 추락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함으로 범죄하고 맙니다.
다윗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자기의 약함을 기도로 관리하지 않음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8:22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께 기도하라’는 뜻은 원어로 “묵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약함을 묶어야 살 수 있습니다.
날이 더우니 수영장에 많이 갑니다.
수영조끼를 입은 사람은 수영 할 줄 몰라도 물을 즐기며 삶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간음죄를 덮으려고 우리아를 소환하여 밧세바와 동침 시키려 하였던 첫 시도가 우리아의 우직한 충성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간음한 다윗은 그를 전장으로 보내어 죽게 합니다.
그리고 태연히 밧세바를 취하여 아내로 삼습니다.
1.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다윗(14~17절)
1)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냅니다(14절)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우리아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편지(15절)를 자신이 배달하리라고는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역이용,
우리아를 죽이는 도구를 이용하였습니다.
이는 사전에 치밀히 계산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교묘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다윗의 배가(倍加)된 가증스러움과 사악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를 맞아 죽게 하라 하였습니다(15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너희가 우리아를 죽게 하라. -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23:39).
따라서 그가 일단 싸움에 임하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전쟁의 선봉장(先鋒將)이 되게 하여 전사(戰死)당하도록 꾀하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일단 우리아를 제거하기만 하면 자신의 부정행위(4절)가 영원히 감추어지고, 또한 밧세바까지도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을 것(27절)이라는 생각 하에 이같은 죄악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반드시 적발해 내시므로(합 1:13) 다윗의 죄악 역시 결국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12:1-23)!
3) 요압이 용사들이 있는 곳에 우리아를 두었습니다(16절)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요압이 그 성을 살펴. - 여기서 '살펴'('솨마르')는 본래 '방어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성을 포위하여 경계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대개 '관찰하다', '유의하여 감시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삼상1:12;시 59:10;사42:20;창 2;15).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분부를 받은 요압(15절)이 우리아를 적군의 손에 죽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그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Lange).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곳에. - 여기서 '용사들'(아네쉐-하일)은 '힘센 남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지금 랍바 성 내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는 거민들과은 구별되는 전쟁에 능한 용사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랍바 성 안에서 이스라엘을 방어하고 있는 자들이 모두 다 암몬의 특별한 용사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군사 전략상 성의 견고한 곳에는 일반 거민들이,
성의 취약한 곳에는 암몬의 용사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아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사변적(思辨的)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출 14:4;삿15:11;삼상29:9).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그동안 적의 동태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요압이 가장 위험한 지역에 우리아를 배치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우리다도 죽었습니다(17절)
“[17]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 여기서 '다윗의 부하 중'이란
다윗의 군사 고문들을 의미합니다(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들의 죽음은 이스라엘 군의 막대한 손실이었습니다.
즉 우리아 한 사람을 죽이려던 다윗은 자신의 불의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결국 유능한 많은 신하들을 잃고 만 것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 요압의 맹목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요압의 비정함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아는 다윗의 서른 일곱 용사 중 한 명이며 요압의 직속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우리아가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권력에 아부하는 자세로 다윗의 명령만을 준행했던 것입니다.
사실, 만일에 요압에게 진정한 충성심과 또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최소한 아무런 죄 없는 우리아를 위해 다윗에게 탄원 정도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기의 출세를 위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하였으며(10:12),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현실 타협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Wycliffe, Matthew Henry).
2. 우리아의 죽음을 보고받는 다윗(18~25절)
1) 요압이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보고합니다(18,19절)
“[18] 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19]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요압이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 요압은 다윗에게 전쟁의 결과를 보고할 사자(使者)을 불러 전에 없던 특별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번 전쟁에서 예상 외로 많은 손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17절). 즉 이로 인해 왕의 문책을 두려워한 요압(20절)은 이번의 패배를 무마시키는 방편으로 우리아의 죽음을 보고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21절).
2) 우리아도 죽었다고 보고합니다(20,21절)
“[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여룹베셋. - 이는 기드온(Gideon)의 별명입니다.
본래 기드온의 별명은 여룹바알(Jerubbaal)이었으나(삿 8:35), 후대에 '바알'이란 명칭이 이방신의 이름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그것이 베셋(besheth)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2:8 주석 참조.
아비멜렉 - 기드온이 세겜의 첩을 통해 낳은 아들입니다(삿8:31).
그는 부친의 사후(死後)자기 형제 70인을 모두 죽이고 므낫세 족속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세겜 사람들은 '가알'(Gaal)을 지도자로 하여 아비멜렉(Abimelech)을 대항하였으나, 아비멜렉은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성을 헐며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 천 명을 불살라 죽였습니다(삿 9:46-49).
그리고 이러한 여파를 몰아 아비멜렉은 데메스마저 치려 하였는데, 그때 도리어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삿 9:50-57).
그러므로 아비멜렉의 이와 같은 역사는 전쟁에 능한 다윗 왕과 요압 이외에도 많은 군지휘관들에게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전술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수세(守勢)에 몰린 적의 성에 가까이 가는 것은
우발적인 죽음을 초래하기 쉬운 위험스런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대 내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다윗 뿐만 아니라 많은 지휘관들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알려졌을 것입니다(Lange).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익숙해 있던 요압이 암몬의 랍바 성 근처에서 이스라엘의 귀중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고 하는 사실은 다윗 왕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의 진노가 있을 것을 예상한 요압은 전령(傳令)에게 보고(報告) 내용을 특별히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아비멜렉의 역사를 요압이 언급한 사실에 대해 아마도 사사기가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이미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 이는 성 가까이에서 많은 인재를 잃은 요압(17절)이 자기의 실수를 무마시키기 위한 자구책(自救策)이었습니다.
즉, 이 말은 이번의 실수가 다윗 왕의 명령(15절)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인 불상사(不祥事)였다는 요압의 그럴듯한 해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으로는 요압은 병법에 능한 자였으나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성 밑 가까이에 군대를 투입하였던 것입니다(16절).
3) 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요압이 이른 대로 다 아룁니다(22,23절)
“[22] 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23] 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 이는 수세(守勢)에 몰리고 있던 암몬 사람들 중 힘센 용사들(아네쉐 하일)이 랍바성을 포위하고 잇던 이스라엘군 중 가장 취약한 지역을 골라 집중적으로 공격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곳은 요압이 의도적으로 우리아를 배치한 선진(先陣)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우리아의 군사들은 성에서 후퇴하여 들로 나올 수 밖에 없었으며, 다른 진의 군사들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다시금 성문 어귀까지 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우리아도 죽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24절)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 여기서 우리아를 가리켜 '왕의 종'이라 함은 그가 다윗에게 마치 노예와 같이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한 신하였음(11절)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다윗은 우리아의 전사(戰死)보고를 받고선 속으로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쾌재(快哉)를 불렀을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불의한 죄악을 감추려 한 계략(15절)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자, 우리아가 자신의 충직한 신하였다는 사실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Matthew Henry).
이는 우리아의 충성과 대비되는 다윗의 폭정(暴政), 배은(背恩)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5) 다윗이 전령에게 이 일로 걱정말라고 요압에게 이르라고 합니다(25절)
“[25]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 신하들의 전사(戰死)소식에 대하여 다윗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반응은 평상시에 보여 주던 그의 자애로운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1:12;3:31, 32;18:33).
이는 그가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도 쾌재를 감추기 위해 태연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입니다(Lange).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다윗이 유능하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들의 아까운 죽음(17, 24절) 보다도 자신의 은밀한 죄를 감추기 위해 오직 한 사람 우리아의 죽음 여부에만 온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한 번 실수(4절)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고력과 판단력을 잃음은 물론 그 심령 또한 완전히 메말라 있는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3. 우리아의 장례와 입궁하는 밧세바(26~27절)
1)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웁니다(26절)
“[26]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우리아의 아내. - 이처럼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1)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부정한 관계를 나누었음(4절)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여인의 이름을 들먹이지 아니하던 히브리인들의 관습 때문입니다
(3) 억울한 죽임을 당한 우리아에 대하여 조의(弔意)를 표하기 위함입니다.
소리내어 우니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파드'는 '죽은 자를 위해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왕상 14:13;창23:2;렘4:8;슥12:10).
한편 히브리인들은 대개 죽은 자를 위해 7일간 호곡하였는데(창 50:10;대상 10:12; 삿 16:24), 특별한 인물이 죽었을 때는 30일간 호곡하기도 하였다(민 20:12;신 34:8).
따라서 밧세바는 자기 남편 우리아를 위해 보통의 경우처럼 7일간 호곡하였을 것입니다.
2)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27절)
“[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 - 다윗왕은 우리아의 장례식을 마치자 곧바로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왔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처사는 밧세바의 임신을 백성들로부터 은폐시키기 위한 재빠른 행동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즉 다윗은 밧세바가 아이(5절)를 낳기 전에 얼른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 이처럼 밧세바가 낳은 아들은 다윗과의 부정한 관계에서 출생한 죄악의 씨앗입니다(4, 5절).
따라서 12장에 의거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을 징치(懲治)하시는 차원에서 그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아이 외에도 밧세바는 이후 다윗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더 낳았는데 곧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입니다(대상3:5).
*역대상3:5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 여기서 '악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다음과 같이 서너 가지 뜻을 지닙니다.
즉 (1)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불의한 행동(룻 1:21;왕상 17:20),
(2)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부도덕한 행동(사31:2;습1:12),
(3)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습관적인 행동(창19:9;렘4:22;13:23;잠4:16;17:4)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상의 사실에 의거할 때 이 말은 반드시 보응이 뒤따르는 극악한 죄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의 행한 그일, 즉 본장 전체에 걸쳐 다윗이 계획하고 실행했던 모든 행동이 악하다고 결론지어진 것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정욕에 사로잡혔을 때,
결국 여호와 앞에서 악인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음을 교훈해 줍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이를 경고삼아 지극히 하찮은 안목의 정욕(요일 2:16)에 미혹되어 다윗과 같은 엄청난 죄악에 빠져들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욥 31:1;시119:9).
*시119:9“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죄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를 발견하게 합니다.
첫째, 죄는 바로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확대 재생산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작은 죄는 큰 죄로, 일상적인 죄는 점점 중독으로 변해갑니다.
다윗은 간음을 통해 죄를 졋습니다.
이후 죄는 거짓을 넘어 살인으로 이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아 한 사람 만이 아니라 여러 병사들을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죄는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이후에 죄는 멈출수 있습니다.
때문에 말씀이 들리는 때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때가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회개 때가 지나면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개입하셔서 멈출 기회를 주셨습니다.
충직한 우리아를 보여 주시며 다시 회복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노친 이후 끝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즉시 회개 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그럴때 살 수 있고, 다윗의 잘 못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습니다.
들키지 않고 잘 넘어 간 것은 용납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관도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엄중히 경고하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한 것이 있으면 즉지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둘째,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장 큰 실수는 싸움의 대상을 잘 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아닌 자신의 죄와 싸워야 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다윗이 함락시켜야 하는 것은 랍바 성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성적인 욕망,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영적 기만을 함락시켜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죄에 빠질때 죄와 싸우지않습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상황과 사람과 싸웁니다.
하지만 진짜 싸우고 다루워져야 하는 것은 내면의 죄입니다.
우리는 주변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하고 계신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모든 일의 최후 관찰자이자 판결자이십니다(26,27절).
다윗이 아무도 모르게 죄(간음)를 짓고 그 죄를 더 큰 죄(살인)로 덮는 동안, 하나님은 사건의 전말과 마음속의 모든 의도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처리했다고 믿겠지만 하나님 한 분만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악하게 여기지 말라’(25절)고 한 일을 하나님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는 자기 죄를 정당화하는 데만 능숙할 것입니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방관은 아닙니다.
이제라도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다윗은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최후의 수단을 강구합니다(14~17절).
요압과 공모하여 우리아를 죽일 계략을 세웁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충직한 우리아를 죽일 만큼 비열하고,
적국의 칼을 빌려 살해하는 교활함까지 보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간음은 거짓에 이어 살인으로 확산됩니다.
그의 추악한 죄만큼이나 그의 영적인 추락도 끝이 없습니다.
한 번, 두 번 아무렇지 않게 시작된 죄가 어느덧 내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죄에 무디어지지 않게 늘 경성해야 합니다.
2) 왕의 의도를 간파한 요압은 어쩔 수 없는 죽음으로 가장하여 우리아를 전사하게 합니다(18~21절).
그리고 승리보다 성공 여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왕에게 이 모든 사실을 즉각 보고합니다.
요압은 권력에 아부하여 무고한 부하를 죽인 비정한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는 악을 지적하고 악에 저항하는 충신이 아니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악을 감추고 악에 동조하는 하수인일 뿐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순응하는 것은 야합일 뿐 결코 충성이 아닙니다.
3) 다윗은 전재에서 전사하는 것이 으레 있는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22~25절).
우리아의 죽음을 우연으로 희석해 요압에게 면죄부를 주고 자신이 개입한 흔적을 지우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무너뜨려야 할 성은 랍바 성이 아닙니다.
가책도 죄책도 느끼지 못하는 비정하고 완악한 자신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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