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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받는 행복
마 5:6
■ 이야기 속으로
1960년대와 70년대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5060이후 세대는 참으로 굶주림과 헐벗음의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낸 세대입니다. 그야말로 절대빈곤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그 당시 부모님들이 그 어려움과 맞서서 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옷 한 벌 음식 한끼 정말 제대로 된 것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이야 정말 건강을 위하여 먹는 음식들을 보면 정말 그 당시의 시간들을 더욱 기억나게 합니다. 그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벌려서 모든 국민들을 한 마음으로 묶었고 그 정부의 뜻을 따라서 잘 살아보겠다는 꿈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한국을 만든 초석이 된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또한 억울한 일도 당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 이같은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이겨낸 고난의 터 위에서 지금 우리들은 가난이란 말을 모르고 너나 할 것 없이 배부르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배고픔 때문에 슬퍼하고 굶주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한층 성장한 이제는 의에 대하여 굶주리고 목말라해야 할 때입니다. 먹지 못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대는 “의”가 무너지기 때문에 가난하고 배고파하는 것입니다.
■ 먼저 확인해 볼 질문
당신은 무언가에 굶주린 경험이 있습니까?
■ 주제 속으로
그렇다면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구원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받기 바라는 조건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에게 책임으로 주어진 정의와 도덕의 조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준으로 주신 것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도덕과 정의의 기준이 되는 것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생명을 사모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음식을 중요시 여기고 먹듯이 곧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먹는 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말씀을 사모하며 먹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서 순종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내신 자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는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믿음의 표준이고 생활의 기준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로 우리들의 굶주린 배를 배고픈 배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수 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만족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의”란 원어의 뜻은 올바른 관계와 관련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사랑하면서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서로를 도와가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하늘나라에 관한 부분과 땅에 관한 부분 그리고 영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 주제에 대한 확인
‘의에 주린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 말씀속으로 “의리 주린 사람의 복”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굶주린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시대에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굶주림이란 큰 낫이 위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며, 목마름이란 손을 가지고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다른 어떤 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걸려 있기에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의 욕구들을 무엇인가를 통해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들이 갈망하는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여 일시적으로는 고통을 덜지만 그러나 곧 다시 나를 삼키려는 굶주림과 배고픔은 나를 다시 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손안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는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굶주린 성도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1)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죄 값으로 영원한 사망과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며, 강력한 의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분, 겉으로는 교회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인격적으로 관계성이 없는 분은 “반드시 내가 구원받아야 돼” 하는 사모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를 소유해도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22절에 보면 “곧 예수 그리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즉,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죄 값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인이라고 칭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입니다. 이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한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결혼하여 살았지만 이혼을 거듭하면서 남편을 다섯이나 갈고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행복이 남자와의 사랑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행복을 위하여 사랑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도리어 죄의식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그런 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해갈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정한 인생의 목마름과 굶주림에서 해갈을 맛보며 살줄로 믿습니다.
2)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교회 왔다 갔다 하고 밥 먹을 때 기도하고 누가 물으면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입니까? 그게 신앙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란 갈라디아서 2장20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즉,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한계적인 것일 겁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여러분의 속생각까지 안다면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단지 예수님이 아니라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버리시기 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이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면서 나를 사랑하셨단 말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니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란 말입니까? 진정 그분을 알고 싶어 하고 가까이 가서 하룻밤이라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즉, 그런 사람은 주님을 갈망하면서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셨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저 주신 그 은혜를 알고 싶어 하면서 그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어떠한 행동이 나오겠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주고 싶고 희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 사람의 의중을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동시에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말하였습니다.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삶이 결여된 것입니다. 삶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는데 그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데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큰 치부요 복음의 영광을 가리게 하는 주범이요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교회의 병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삶이 따라가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 인구 천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네 명중의 한 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믿고 싶지 않은 종교 1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실망이 커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하여 야고보 사도는 무서운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2장17절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잘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순종이 없다면 그 믿음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라면 그 믿음 가지고 구원 받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유능한 성경선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며 세례요한과 같은 동일한 저주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경각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십니까? 다만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 교회 나갑니까? 또 아니면 정신수양 겸 나의 정신의 때를 벗기기 위해서 나갑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가족들의 손에 이끌리어서 나갑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26절에 보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는데 감동만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 말씀대로 순종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는 좁은 의미로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로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이 완성되는 것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기도제목을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나라가 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나 깨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6장3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이 모든 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앞세우는 문제이며 날마다 눈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세상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즉, “세상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을 앞세우지만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앞세워라 너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 나라요 그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먹는 것보다 앞세워라 마시는 것보다 앞세워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앞세우면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고 앞세우는 것 내가 다 알아서 채워 주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나의 혼신의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를 일컬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정리와 확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배부름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왜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간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 갈급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위해 정의롭게 도덕적으로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고, 더 큰 의를 이루는데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고 에너지를 쏟고 돈을 쓰고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을 복은 “배부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행복해 지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린 배는 채워질 것이고 갈증은 해소 될 것입니다. 항상 우리들은 이러한 삶을 원하고 찾고 있지만 그것을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는 찾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지만 오직 그것을 받을 만한 자리로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의는 항상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 의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또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은 우리의 갈망은 결국 충족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복음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며 어린아이가 선물을 받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아야 할 선물인 것입니다.
■ 확신의 질문과 결단
1. 육적인 굶주림과 영적 굶주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2. 의에 주리고 영혼의 목마른 자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3.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때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우리는 육적인 굶주림만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이 시간 돌아봅니다. 믿음으로 의에 주린 자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영에 메마름을 채울 수 있는 주님의 자녀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만을 따름으로 우리의 인생 참된 배부름을 앋도록 인도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