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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파미르종주기-고선지장군의 격전지 연운보
(1) 랑가르의 라틈고성
평화로운 랑가르에서 며칠 더 머물며 조랑말이나 타면서 목가적인 흥취를 맛보고 싶었지만, 길 떠나지 않으면 어찌 나그네일까? 하여 다시 길 위에 오른다. 방랑의 나그네라도 그러할지언정, 하물며 특히 오늘은, 조국과 민족을 잃은 망국의 유민이 되어 천리타향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쓸어져 간, 이른바 단결병(團結兵)1)이란 이름의 해동의 혼령들이 깃들어있는 옛 전쟁터를 찾아가서 분향재배해야 하는 필자 같은 나그네야 어찌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까보냐?
어렵게 대절한 사륜구동차를 타고 마을 뒷산의 급경사 길을 5km쯤 지그재그로 올라가니 비로소 시야가 시원하게 트이는데, 마침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며 ‘라틈, 라틈’하면서 무언가를 향해 손짓을 해댄다. 아, 벌써 라틈요새에 다 왔나보다… 혼자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려 그쪽을 바라보니, 정말 저 멀리 야성이 살아있는 고산지대의 찬란한 햇발 아래 고풍스런 고성이 듬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게 아닌가?
과연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같은 분위기였다. 삼면이 온통 깊은 협곡에 둘러싸이고 한쪽 면만이 겨우 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벼랑 끝에 외로운 고성은 자리 잡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산(Karl Marx, 6,723m)의 기슭에 해당되는 마을 뒷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맑고 차가운 물이 가득 넘쳐흐르는 수로(水路)가 그 성안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물 흐르는 소리만 들어보아도 그 수량을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나그네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전략적으로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2) 일당백의 천혜의 요새였다.
이 고성은 역시 기원 전후 시기인, 쿠샨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는데, 그 이름은 ‘첫째’라는 뜻을 가진, 옛 페르시아어의 ‘후라탐(Fratam)’에서 파생되었다 한다. 와칸주랑 길목을 지키는 ‘첫 번째 성루’ 또는 와칸에서 ‘가장 큰 성’ 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이름이라니 그것부터가 무언가 기대를 자아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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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으로 판지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랑가르 북쪽 산기슭, 삼면이 협곡인 곳에 라틈고성이 자리 잡고 있다
▲ 파미르천의 항공사진
▼ 고선지의 길깃트원정 전도
그런데, 해동의 나그네가 어렵게 구해 가이드북 삼아 보는 역사책[The Pamirs-History]3)에는 이 성에 대해 무척 흥미로운 기록이 눈에 띤다. 바로 랑가르 답사를 오매불망 벼르고 별렀던 또 하나의 이유였던 셈인데, 다름 아닌 바로 고선지(高仙芝,?~756)장군에 대해서 비록 간략하지만, 무척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여기서 먼저 이 부분을 번역해보자.
“라틈요새는 747년 고선지장군[Korean-Chinese General Kao Hsien-chih]이 티베트4)군대를 와칸에서 축출하기 위해 전투를 벌렸던 곳이라고 한다.”
▼ <파미르의 역사와 문화> 책자
고선지에 대한 원초적인 자료는 물론 신, 구 『당서』속의 「고선지열전」같은 중국 쪽의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또 다른 주변자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둔황석굴을 세계에 알린 유명한 영국의 고고학자 아우렐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1862년~1943년)의 글이 그것인데, 그는 고선지의 서역원정 루트를 3회에 걸쳐 실지답사한 뒤『고대 중앙아시아의 발자취 』이란 책에서 다음과 논평을 하고 있다.
직면했던 어려움과 이를 극복했던 점만으로 판단을 한다면 고선지 장군이 다르코트령을 넘은 것은 유럽의 역사에서 대 알프스 산맥을 넘은 유명한 지휘관이었던 고대의 한니발, 나폴레옹, 수보로우에 비해서 월등히 앞선 것이다.
이렇게 스타인은 ‘한국계 중국인 장군(Korean-Chinese General) 고선지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선지가 알프스보다 더 높고 험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나들면서 소발율국[현 파키스탄 Gilgit]을 기습하는 작전을 펴서 당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중국으로 돌려놓았다는데 있다.
(2) 과연, 「고선지 루트」에서의 ‘파밀천(播密川)’은 어디인가?
자, 이제 우리도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돌아가 선혈이 난자했던 옛 전쟁터로 들어가 보자. 때는 천보(天寶) 6년(747년). 당시 안서도호부(安西都護部)5)소속의 사진도지병마사(四镇都知兵马使)라는 2인자에 지나지 않던 고선지에게, 당 현종(玄宗)은 절도사 부몽영찰을 대신하여 토번의 세력을 토벌하여 실크로드의 패권을 다시 되찾아 오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고선지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6)라는 막강한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보검7)을 하사받고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庫車]를 출발하여 카슈가르를 거처 먼저 총령수착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파미르고원에 올라선 다음 ‘파미르천’을 지나 ‘톡륵만천’이란 곳에서 군대를 세 갈레8)로 나누어 진군하게 한 다음 토번군이 지키고 있는 서역 최고의 군사요충지인 연운보[連雲堡) 앞에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2010년 3월에 3부작으로 방송된 <KBS 역사다큐 ‘고선지 루트 1만리’>는 새로운 소제와 스케일이 큰 해외 현지로케로 인해 이런 방면의 다큐에 관심 많은 마니아들에게 완성도가 높은 명품다큐로 평가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러나 티베트와 와칸에 대하여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필자가 보기에는 특히 <제2편 와칸계곡의 혈투> 편은 뭔가 2% 미진함을 금할 수 없기에 뒤늦은 감이 있지만, 몇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우리들의 오늘의 키워드는 물론 연운보 요새가 현재 지명으로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할 과제가 한, 두 가지가 남아 있다. 바로 고선지군이 총령을 넘어서 20일 만에 도착했다는 ‘파밀천’이 어느 곳이며 또한 안서를 떠나 1백여일만에 도착하여 3갈레로 갈라져서 연운보를 공격하기 위해 떠났다는 ‘톡륵만천은 과연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파밀천’ 또는 ‘파미라천’은 서역에 관련된 중국 쪽 사서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비중 있는 곳이다. 먼저 『구당서』에서는,
식닉국에는 큰 골짜기 다섯 개가 있는데, 각자 우두머리가 다스리고 있어 서 오식닉(五識匿)이라 한다. 그리고 파밀천(播密川)의 4개 골짜기는 왕의 명령이 별로 소용이 없으며 사람들은 보통 굴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다섯 골짜기로 이루어진 식닉 제국(諸國) 외에 4골짜기로 이루어진 파밀천에 있는 군소 부락들이 더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그러나 사서에서는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이는 <KBS ‘고선지 루트 1만리’>에서도 마찬가지로 파밀천이 어디인지 명확한 지점을 찍어주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 버렸다.
사실 파밀천은 ‘천(川)’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듯이 어느 지명이 아닌, 길이가 7백리나 되는 긴 시냇물의 이름이기에, 어느 한 좌표를 꼭 집어서 비정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그러나 필자는 그 해답을 혜초사문의 대파밀천(大播蜜川)9)과 또한 현장법사의 파미라천(波謎羅川)이란 구절에서 구체적인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식닉국의] 국경의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위험한 길을 따라서 7백여 리를 가면 파미라천에 도착한다. 동서로 천여 리, 남북으로 백여 리이며 폭이 좁은 곳은 10리를 넘지 못한다.… [중략]…파미라천 속에는 커다란 용이 사는 호수10)가 있는데 동서로 3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0여 리이다. 대총령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염부주11)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의 파밀천은 식닉국의 국경을 이루며 흐르는 7백리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는 현대 지리학에서 '대파미르[Great Pamir]'로 분류하고 있는, 글자 그대로의 파밀천의 발원지인 조로쿨=사리쿨=빅토리아 호수 또는 대용지(大龍池)=아호(鵝湖)라는 많은 이름을 가진 호수 일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 호수는 본 종주기의 다음 행선지이기에 여기서는 부연설명을 생략하고 다사 본 주제로 넘어가기로 한다.
(3) 과연 연운보 요새는 사르하드 이 부로길(Sarhad-e-Broghil)일까?
파밀천 다음으로는 톡륵만천(特勒滿川)은 어딘가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난제이다. 모든 고전들은 이구동성으로 고선지군은…→총령수착→총령→파밀천→톡륵만천까지 진군한 다음 그곳에서 3갈레로 군을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톡륵만천은 파밀천에서 이동하기가 비교적 용이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다 고전들은 이 톡륵만천을 식닉국(識匿國)라고만 기술12)하고 있다. 식닉국이라면 우리 <파미르종주기>에서는 친근한 곳이다. 바로 혜초사문을 비롯하여 법현, 송운, 혜생, 현장 등의 순례승들이 거처 갔던 곳임을 우리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되새김질 해보면. 이곳은 혜초사문이 ‘9개 식닉국’14)으로, 『당서』15)와 현장법사는 ‘5개 시기니국’16)으로 불렀던 바로 그곳으로 현 지도상에 표기된 슈그난(Shughnān) 또는 쉬키난(Shikinān)이란 지명의 음사(音寫)에 해당된다. 또한 졸저『실크로드 총서』의 부록인 <파미르고원 횡단지도> 의 ‘와칸북로’ 상의 나라들이다.
“식닉국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산과 강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으며 모래와 돌이 들판에 두루 깔려있다. 보리가 많이 자라고 곡식은 적다. 나무가 성글고 꽃과 과일도 매우 적다. 기후는 매섭게 추우며 풍속은 난폭하고 용맹스럽다. 살육하는 것을 태연스레 저지르고 도적질을 일삼고 있다. 윤윤” 또한 예부터 한문권에서는 식닉, 시기니, 슬닉(瑟匿), 적닉(赤匿) 식닉(式匿)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좁게 보면 식닉국을 현 타지크령 고르노바닥샨(Gorno-Badakhshan)주의 중심지인 호로그(Khorog)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넓게 보면 5개 또는 9개 쯤 되는 파미르지역 전체 골짜기에 해당되는 광대한 지역 속의 군소왕국중의 하나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연운보의 좌표확정에 따라서 톡륵만천의 정확한 위치도 비로써 확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연운보 요새는 어디인가? 하는 문제로 들어가 보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KBS ‘고선지루트 1만리’>의 영향력에 의해 ‘사르하드 이 부로길 설(說)’ [이하 ‘부로길 설’로 약칭한다]로 굳어진 상태지만, 그러나 중국에서는 ‘랑가르(Langgar,蘭加爾) 설’,17) 즉 바로 필자의 오늘 목적지인 랑가르의 라틈요새가 연운보라는 주장도 일찍부터 대두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적불당로(赤佛堂路)’18)라는 루트가 사료적인 기록이 전혀 없기에 두 가지 설 모두 미완의 연구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먼저 <KBS 고선지루트> 팀에서 주장한 ‘부로길 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이 다큐가 명품다큐 대열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현지지형에 대한 정보나 고증부족 탓인지, 옛 지명을 현지지명으로 비정하는 중요한 작업을 대충 생략하고 그냥 옛 지명 그대로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필자도 많은 역사다큐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해본 경험이 있기에 일정 부분은 이해한다 치더라도 다음 몇 가지 문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고선지군의 행로를 그린 몇 장의 <KBS CG 행군도>는 고전속의 행군로19)와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위성사진 위에 CG로 작업한 이 행군도는 문제의 식닉국을 본 전투의 주무대인 와칸에서 너무 멀고 생뚱맞은 곳에다 그려 넣었다. 실제 이 지점은 현 지도상으로 본다면 파미르하이웨이[PHy]의 출발점인 호로그에서도 훨씬 북쪽인, 바르탕계곡의 입구인 루샨(보마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톡륵만천=식닉국을 군트계곡의 호로그 한곳으로 보는 것도 거리상 무리가 있고 또한 호로그가 최하 9개나 되는 그 많은 골짜기에 산재한 군소왕국의 대표적인 부락이라는 뜻이지 식닉국=호로그가 아니다. 그럼으로 호밀국=이스카심 이외의 군소왕국들은 모두 <고선지 루트>상의 특륵만천=식닉국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식닉국은 와칸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닌 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위에서 고증해본 대로, 특륵만천을 식닉 제국(諸國) 중의 어느 곳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KBS CG 행군도>의 오차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하더라도, 위 지도는 이미 이 3갈레 진격로의 분기점을 파미르의 시발점인 총령 근처로 그려 넣었다는 점에서 시작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고선지군은 총령, 파밀천, 특륵만천까지는 갈라지지 않고 함께 진군했기 때문에, <KBS CG 행군도>대로라면 그들은 식닉국으로 표시된 현 호로그 근처까지 함께 올라갔다는, 서로 상충되는 모순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당서』「서역전」에는 “와칸(穫侃,Wakhan Valley)은 폭은 4-5리이지만, 길이는 1,600리이다.” 하였으니, 만약 <CG 행군도>가 사실이라면, 그런 먼 거리를 평평한 초원도 아닌, 평균 4, 5천m가 넘는 험준한 고산과 협곡지대를, 고선지군이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으로 누볐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비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CG 행군도>에서의 제3의 고선지본진의 행로는, 너무 멀리 북쪽의 식닉국=호로그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의 호밀국=이시카심으로 내려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밀국로’를 통해 연운보로 향한 것처럼 그려진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실 이 루트는 CG지도상에서 본다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지형을 여러 차례 답사해본 경험에 의하면『당서』에 기록된 날짜20)인 20일 안에 고선지의 기마병이 이 루트를 전부 주파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 <KBS 고선지루트 1만리> 2편 와칸계곡의 혈투
▼ <KBS CG 행군도>
▼ 필자가 수정한 행군도
파란색이 수정한 고선지의 행군로이고, 힌색 글씨가 고전지명, 검은색 글씨가 현지명이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KBS ‘고선지루트 1만리’>는 문제의 CG지도를 가이드맵으로 삼아 마치 영웅적인 고선지군이 토번의 주력부대가 있는 연운보나 소발율을 점령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전략에 의해 먼저 후방의 위험요소였던 서쪽의 토번의 동조세력들인 식닉국들을 제거하기 위해 먼 우회로를 택한 것처럼 결론을 내리고 있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모래위에 쌓은 누각 같은 추론인 셈이다.
(4) 아니면 랑가르(Langar)의 라틈요새 일까?
한편 필자가 보는 타지크의 역사책의 기록처럼, 오늘 우리들의 목적지인 라틈요새가 고선지군과 토번군의 격전장이라는 가설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료상으로 또 한편 실제 지형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있다.
첫째 이를 지지하는 중국측 포털사이트21) 들은, 비록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기사를 온라인상에 올려놓고 있다. 그 중 한 예를 살펴보자,
“고선지는 병사를 셋으로 나누어, 토번의 연운보[지금의 아프간 동북부의 분적하 남쪽 발원지인 랑가르(兰加尔)]를 공격하도록 하였다.[高仙芝兵分三路,会攻吐蕃的 连云堡(今阿富汗东北部喷赤河南源兰加尔)}”
둘째로 랑가르의 라틈요새의 지형적 모양이 기록상의 연운보를 닮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우선 이를 뒷받침할 전거22)를 읽어보자.
연운보는 지금의 아프간 동북부 한 산위에 세워졌는데, 동,서, 남쪽의 3면이 모두 절벽에 둘러 싸여있고 오직 북쪽만이 평지로 이어져 있고 [앞으로는] 분적하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산위의 보(堡)에는 수비하는 토번군이 1천명 정도 있고, 또한 6리 근처에는 목책으로 만든 진지가 있어 역시 토번군 8, 9천명이 주둔하고 있어서 지키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려운 함한 요새이다.[连云堡在今天阿富汗东北部,建筑在一座山峰上,东南西三面皆陡峭山崖,只有北部是平地,有喷赤河做屏障山上堡内驻守的吐蕃军有一千人,在城南侧五、六公里左右修筑有木栅护墙,还驻扎有八九千人,是易守难攻的险关]
연운보의 지형을 설명한, 위 사서의 밑줄 친 부분은 마치 랑가르의 라틈고성과 종의 비단 성 그리고 건너편 판지성을 묘사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러니까 6리 밖 , 즉 24km 떨어진 곳에 있다는 또 다른 토번군의 진지도 마치 ‘종’의 토번군의 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독자들은 필자가 본 <파미르종주기 15회>에서 이야기 했듯이 ‘종’이라는 마을의 어원이 티베트어로 보인다는 대목을 기억하실 것이다.
▼ 와칸주랑의 랑가르와 부로길 인근지도 지도
▼ 아프간 령 콸라판자성의 유지
셋째로 무엇보다 ‘랑가르 설’에 무게가 쏠리는 점은 이곳의 인근지형이 한눈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랑가르는 파밀천과 와칸천(穫侃川)23)이 만나 판지강이 시작되는 분기점이자 또한 세 갈레 ‘와칸남, 북로’24) 길이 갈라지고 또한 합쳐지는 지형적 요지이다.
한 마디로 대 실크로드의 목줄기인 와칸주랑의 또 다른 목줄기인 셈이다. 누가 이 랑가르 일대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실크로드 전체의 판도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성전(功城戰)이 전투의 주된 전술이었던 중세시대라면 어느 누가 이 외통수 길목에 난공불락의 튼튼한 성을 쌓고서 실크로드 상에 오고가는 온갖 기이한 물건들을 통과세 명목으로 거두어들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랑가르와 인근거리에 있는 ‘종’25)이란 마을의 어원과 비단처럼 아름답다던 아부레심이란 성의 존재 그리고 이곳들과 마주한 분적하(喷赤河, Piandj R) 건너의 아프간 땅에, 아직도 강변 둔치에 의연히 서 있는 와칸 최대 요새였던 판쟈성(噴札城)의 존재도 이 심각지점의 전략적 중요성을 증명하는 좋은 근거에 해당된다.
그럼으로 랑가르의 라틈요새가「고선지열전」에서의 엣 토번의 연운보 요새일 것이라는, 그리고 특륵만천=식닉국이 현재 판지강 너머 아프간 땅에 당당히 솟아 있는 ‘콸라 이 판자(Qala-e-Panja)’, 즉 판쟈성이라는 필자의 또 다른 가설도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각설하고, 연운보가 어디이든지간에, 하여간 이제는 좀 앞으로 나가보자.
하여간 세 갈레로 나누어 진군하던 고선지군이 모두 연운보 아래에 도착했을 당시는 여름철이라 만년설이 녹아내린 강물이 불어있었기에 건너기가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양단간 결정을 내려야할 지휘관인 고선지는 잠시 고심했지만, 지체하면 더욱 불리해질 것이 자명한지라, 그날 밤에 제물을 바쳐 천지신명에게 고사를 지내고는 병사들에게 3일치의 식량만 주고 새벽녘에 무조건 강을 건너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에 병사들이 동요했지만, 거짓말처럼 강물은 고선지군의 돌격대의 도하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절벽위에 세워진 연운보 요새를 함락하고 토번군 5천명을 죽이고 1천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갑옷과 말 등 수많은 노획물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고「고선지 열전」은 기록하고 있다.
참, 이 때 맥도병(陌刀兵)이라는 결사대가 선두에 서서 강을 건너 요새에 기어오르고 한술사(韓術士)라는 무당이 뒷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서 두려움에 떠는 군사들에게 필승의 사기를 북돋는 등의 활약을 했다고 하니 당시에도 이미 종군무당(?)이 있었나 보다.
삭막한 폐허의 고성에서 바쁘게 옛 전쟁터의 구석구석을 기웃대다보니 벌써 햇님은 중천을 가로질라 설산 뒤로 넘어 가려고 서쪽으로 기울고 이윽고 성벽의 그림자도 점차로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 문득 돌담 밑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야생 열매들이 나그네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기우는 햇살을 받아 더욱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아, 어느 이름 모를 소년병사의 피우지 못한 꿈이 송이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 아닐까?
▼ 라틈고성의 이름모를 야생 열매들
1) 단결병(團結兵)에 대해서는 “「舊唐書」卷43 職官二 『관내에 團結兵이 있었다. 秦,成,岷,渭,河,蘭 6주에 살고 있는 고려와 羌兵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고선지 휘하에 많은 고구려유민이 있었다고 한다.
2) 易守难攻
3)『The Pamirs-History』, Archaeology and Culture, by Robert Middleton
4) 당시의 상황은 졸저『티베트 역사산책』176에 자세하다. “토번과 당나라는 730년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효력은 7년을 넘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당시 토번은 37대왕 티데줍쩬 때였는데 당이 이 조약을 어기고 운남(云南)의 토번의 영토를 침공하자, 다음 해인 735년 동맹국 돌궐이 당의 영토였던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을 공격하자, 이에 토번도 행동을 같이하고자 게쌍돈줍이 출정하여 대발률[현 Scardo]을 거처 인더스 계곡을 따라 실크로드의 최대의 요충지인 소발률[현, Gilgit]에 도착하자 수실리디 왕은 투항하고, 이에 주위 20여 서역 제국도 연이어 항복하여 토번은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거의 장악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후 토번은 소발률국의 국왕에게 토번공주를 시집보내는 정략적인 결혼을 맺어 힌두쿠시 산맥 이남의 맹주국이 되면서 서역의 주도권을 차지했고,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서 사라센 제국과 연합하는데 성공하여 서역의 국가들은 조공을 당나라 대신 토번에 바치기 시작했다.
5) 당나라는 수도인 장안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여섯 도호부(六都護府)를 설치하였는데, 그중 서역쪽을 담당하는 안서도호부는 그 비중이 무거웠다. 그러나 ‘안사의 난’에 이후에는 급격히 영향력이 쇠퇴했으며 772년 토번의 난주함락에 이은 돈황함락으로 교통로가 단절되어 토번에게 서역의 패권을 내어준 뒤 청나라에 이르러 그것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고선지 당시의 도호부는 쿠차에 있었다.
6) 행영절도사는 활동지역의 제한 없이 작전권을 갖는 막강한 관직으로 당시 안서절도사인 부몽영찰이 아닌 그의 부관에 불과한 사진병마사인 고선지에게 토번 원정의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7) 황제가 멀리 변방으로 떠나거나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수에게 하사하는 검을 말하는데, 이 검을 소지한 장수는 황제를 대신하여 전쟁터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고, 선참후주(先斬後奏)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종의 '살인면허'에 해당되는 막강한 권위를 갖는 것이다.
8) 제1진은 소륵수착사 조숭빈(趙崇玭)으로 하여금 3천 기병을 거느리고 북곡(北谷)쪽으로 진군게 하고, 제2진은 발환수착사 가숭관(賈崇瓘)으로 하여금 적불당(赤佛堂)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제3진은 고선지 자신이 감군 변령성(邊令誠)과 함께 식닉국과 호밀국(護密國)을 경유하여 7월 13일 진시에 연운보 요새 앞으로 집결하도록 약속하였다.
9) 혜초의 정확한 표현 그대로 현대 지리학에서는 파미르고원를 대, 소 파미르로 구분하고 있는데, 중국 신장자치구의 접경지대의 와크지르 부근을 ‘소파미르[Little P]’로, 조로쿨호수 부근을 ‘대파미르[Great P]’로 부르고 있다.
10) 조로쿨 일명 빅토리아 호수의 서쪽에서 파미르천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소 파미르지방에서 아프간령 와칸계곡을 통과하여 흘러온 와칸하와 랑가르 근처에서 합류하여 아비이판자((Ab-i-Panja/분적하(噴赤河))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소그드 지방에 이르러 아무다리아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내륙의 바다인 아랄해로 스며든다.
11) 범어 잠부디파(Jambudipa:skt)라고 하며 수미산의 남쪽 해상에 있다는 대륙으로 후에 세계 또는 현세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되었고 구체적으로는 아시아대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염부제 (南閻浮提), 남염부주(南閻浮洲), 염부(閻浮), 염부제 (閻浮提), 염부주(閻浮洲)라고도 한다.
12)“:特勒滿川,即五識匿國也”.
13) “또 호밀국 북쪽 산 속에는 아홉 개의 식닉국이 있다. 아홉 왕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는데, 그 중에 한 왕은 호밀국왕에게 예속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 독립해 있어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 그 근처에 두 명의 석굴 속에서 사는 왕이 있는데 중국에 투항하여 안서도호부까지 사신을 보내어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다. 운운”
14) 『신당서』권221 하「식닉전」을 보면, “식닉국은 동남쪽에서 곧바로 장안까지는 9천리이고 동북방 5백리에는 총령수착소(守捉所)가, 남방 3백리에는 호밀이, 서북방 5백리에는 구밀(俱密)13)이 있다. 큰 골짜기 다섯 개가 있는데, 각자 수장이 다스리고 있어 오식닉(五識匿)이라고 한다. 파밀천(播密川)의 4개 골짜기는 왕의 명령이 별로 소용이 없으며 사람들은 보통 굴속에서 산다.“
15) 구밀은 『대당서역기』권1 중의 ‘구밀타(拘密陀)’, 『오공행기(悟空行紀)』중의 ‘구밀지(拘密支)’, 아랍 문헌 중의 ‘쿠메르(Kumedh)’ ‘쿠미지(Kumiji)’이며 현 다르와즈(Darwaz, 달이와자達爾瓦玆)이다.
17) .http://www.baike.com/wiki/%E9%AB%98%E4%BB%99%E8%8A%9D/互動百科/ 高仙芝/ 高仙芝兵分三路,会攻吐蕃的连云堡(今阿富汗东北部喷赤河南源 兰加尔)
18) 고선지군은 특륵하천에 3갈레로 나누어 연운보로 향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적불당로라고 하지만, 현재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사료가 부족하여 필자도 이를 찾는 중이다.
19) -『구당서』,自安西行十五日至撥換城,又十餘日至握瑟德,又十餘日至疏勒,又二十餘日至葱嶺守捉,又行二十餘日至播密川,又二十餘日至特勒滿川,即五識匿國也。仙芝乃分為三軍:使疏勒守捉使趙崇玭統三千騎趣吐蕃連雲堡,自北谷入;使撥換守捉使賈崇瓘自赤佛堂路入;仙芝與中使邊令誠自護密國入,約七月十三日辰時會于吐蕃連雲堡。
-『신당서』,仙芝乃自安西過撥換城,入握瑟德,經疏勒,登葱嶺,涉播密川,遂頓特勒滿川,行凡百日。特勒滿川,即五識匿國也。仙芝乃分軍為三,使疏勒趙崇玼自北谷道、撥換賈崇瓘自赤佛道、仙芝與監軍邊令誠自護密俱入,約會連雲堡。
-『책부원귀(冊府元龜)』,自安西行十五日至撥換城三十餘日至握瑟德. 又十餘日至疏勒. 又二十餘日至蔥嶺守捉. 又二十餘日至播密川. 又二十餘日至特勒滿川仙芝乃分爲三軍 使疏勒守捉趙崇玭統三千騎趨吐蕃連雲堡自北谷入 使撥換守捉賈崇瓘自赤佛堂路入 仙芝與中使邊令誠 自護密國入 約七月十三日辰時會于連雲堡
20) 『구당서』권104「고선지열전」에 의하면 고선지군은 안서도호부(庫車, 현 쿠차)에서 특륵만천까지 1백여 일 걸렸다고 하는데, 특히 총령수착→20여일→파밀천→20여일→특륵만천으로 되어 있다.
21) .http://www.baike.com/wiki/%E9%AB%98%E4%BB%99%E8%8A%9D/互動百科/ 高仙芝
-高仙芝兵分三路,会攻吐蕃的连云堡(今阿富汗东北部喷赤河南源兰加尔)
22) http://baike.baidu.com/view/694329.htm/百度百科//唐击小勃律之战
…总之,高仙芝在特勒满川将大军化整为零,分为三路…连云堡在今天阿富汗东北部,建筑在一座山峰上,东南西三面皆陡峭山崖,只有北部是平地,有喷赤河做屏障。山上堡内驻守的吐蕃军有一千人,在城南侧五、六公里左右修筑有木栅护墙,还驻扎有八九千人,是易守难攻的险关
23) 아프간령 와칸의 동쪽 끝지방인 소 파미르의 호수지대애서 발원하여 와크지르천으로 흐르다가 사르하드 부로길을 경유하여 와칸주랑을 흐르다가 랑가르 근처에서 파미르첨을 만나 판지강의 상류가 된다. 고선지열전에서는 파륵천(婆勒川)이라고 하였다.
24) 바로 졸저인 <실크로드 고전 여행기총서> 부록의 <파미르횡단도>의 그 와칸남, 북로를 말한다. ‘와칸북로’는 혜초와 현장의 순례로로써 랑가르에서 파밀천을 따라 올라가는 루트이고, 법현, 송운의 순례로인 ‘와칸남로’는 와칸천을 따라 바로 총령을 넘는 루트이다.
25) 바로 우리 종주기 15번의 종의 아부레심성을 말한다.
첫댓글 혹 무리한 주장이 눈에 띠면.... 지적해주시기를.....
대KBS다큐팀에게 한 방 먹이신거네요? 그쪽에서 가만 있을까요? ㅋㅋㅋ
@이식쿨 그렇지 않아도 수위조절에 애를 먹었지요. ㅎㅎㅎ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좀 어렵긴 하지만, 집필의 노고는 눈에 보입니다.
이젠 지도까지 직접 그리시나여??
窮卽通 이라고 ...남한테 부탁하려니 답답해서 조금씩 하다보니 좀 제미가 붙습니다. ㅎㅎㅎ
랑가르와 판자... 그리고 야생의 열매... 지성과 감성의 교차...
역시 격조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