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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여럿 있었습니다. 김용삼 기자는, 북조선을 강점한 김일성은 여러 명의 김일성의 활약상이 혼합되어 조작된 신화의 인물이라고, 다양한 사료를 취재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일성 전설의 실존 인물인 김광서와, 만주에서 의병투쟁을 했던 김창희가 혼성되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수령이 된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다. 희한한 것은 김성주가 사용한 가명인 <김일성>을 표기하는 한자가 4개나 되는 와중에 본명인 김성주의 한자 표기도 金聖柱, 金誠柱, 金成柱 세 가지나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일성 장군이라는 신화의 진실은 무엇인가? 김일성을 오랜 기간 연구한 이명영은 1887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를 진짜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김광서는 일본 육사에 입교하여 1911년 줄업(23기),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3.1 운동 때는 도쿄 제1기병연대 중위로 재직했다. 육사 3년 후배인 지석규(지청천), 이응준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계획을 논의했다 서울에 온 김광서는 1919년 6월 지석규와 함께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망영했다. 두 사람은 남만주 유하현 고산자에 있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서 청년들에게 군사학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는 구 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다. 그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충북 진전으로 낙향해 교육 사업에 매진했으며, 신민회 청년들이 만든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당에 참여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서간도와 북경에서 항일투쟁을 했했으며, 신흥무관하교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세 사람은 조국 광북을 위해 투쟁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天)자가 들어가는 호를 지었는데, 신팔균은 동천(東天). 지석교는 청천(靑天), 김광서는 경천(擎天)이었다. 후에 이들을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 불렀다.
1919년 겨울 무기 구입을 위해 러시아로 넘어간 김광서는 그 지역 한인들이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한인청년들을 모아 러시아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일본과 전투를 벌였다. 동아일보는 1923년 7월 29일자에 <병설 쌓인 시베리아에서 홍백(紅白)전쟁의 실지 경험담. 아령(俄領) 조선군인 김경천>이란 제목으로 김광서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제했다. 김광서는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1937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했다. 김광서는 카자흐스탄의 콜호즈 작업반장이라는 말단 직위로 노동을 하다가 1939년 재차 체포된 뒤 소식이 끊겼다.
또 한 사람의 김일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1907년 의병투쟁 때 실재 인물이었던 함경남도 단천 출신 의병장 김일성(金一成)이다. 그의 본명은 김창희(金昌希)로, 1926년 사망했다. 김광서, 김창희 두 항일투사의 활약상이 혼성되어 마치 한 사람의 일처럼 전설화되어 김일성 장군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김성주에게 김일성이라는 당호를 써 준 사람이 최형우라는 사림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삼성학교 교사 최형우가 김성주에게 "만주에서는 중국사람 식으로 당호(堂號)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당호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하고 말했다. 김성주는 "좋은 당호를 하나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최형우가 몇 개를 지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하였고, 김성주는 "일성(一星) 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리하여 최형우는 김성주에게 <일성(一星)>이란 당호를 써 주었다. 1930년 겨울 오가자에서 최형우로부터 일성이란 호를 받은 이후 김성주는 그들 조직원들 사이에서 김일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김성주가 해방 후 소련군의 음모로 김일성 장군으로 등장하기까지 金一星으로 불렸을 뿐, 金日成으로 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김성주는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 만경대)에서 김형직과 강반석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성주의 어머니 강반석은 교회 장로인 강돈욱의 딸로서, 이름 반석은 예수의 제자 배드로가 돌을 베게 삼아 잤다고 하는 것에서 따온 기독교적인 이름입니다. 김용삼 기자는 김성주의 주체사상은 어린 시절의 기독교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김성주의 기독교와의 접촉은 북한에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요인을 제공했다. 오늘날 김일성을 신처럼 떠받드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기독교의 프로토콜의 전형이다. 하나님의 자라에 김일성을, 예수의 자리에 김정일을 갖다놓고 기독교 외양을 입혀 오늘날 북한을 주체교하는 사이비 왕국으로 변모시켰다.'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를 나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구해 놓고 한의원을 열어 재산을 축적하여 장백현에서 자산 1위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헌금도 하고 약도 지어주었으나 공산주의 활동가들에게는 돈을 주지 않고 냉대하자, 적색청년단 패거리들이 1926년 6월 김형직을 납치하여 집단폭행하고 돈을 뜯어냈습니다. 김형직은 반동분자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14세에 아버지를 잃은 김성주는 소년 가장이 되어 살아갈 길이 막막해지자 마골(馬骨)폭력집단에 가담하여 돈푼깨나 있는 집을 반동분자의 집이라 하여 털고, 사람을 함부로 해치고 다녔습니다. 이런 가운데 가정형편 때문에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마땅히 할 일도 없던 김성주는 마골 패거리에 가담하여 잔심부름을 하게 됩니다. 김영삼 기자는 어린 시절의 김성주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소년 김성주는 폭력을 숭상하게 되었고, 공산혁명이라는 구호만 내세우면 모든 약탈과 살상이 합리화된다는 힘의 논리에 눈을 뜨게 된다. 서구의 사회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그는 부친의 사망으로 인해 집안이 몰락한 영향을 받은 사고뭉치나 반항아, 아니면 소년범이었다.'
김성주의 어머니는 남편 김형직이 1926년 사망하자 어린 세 아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중국인 공안총사령(경찰대장)이자 지방의 토호인 무한장(穆漢章)에게 재가를 합니다. 저자는 강반석의 재가로 인해 김성주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강반석의 재가는 장남 김성주의 이상성격 형성에 중대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강반석이 고국의 시가나 친정으로 돌아왔더라면 김성주는 외가의 종교적 성향으로 볼 때 목사 아니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쁘장하게 생겼던 그의 어머니 강반석이 중국인 공안경찰대장에게 재가하는 바람에 김성주의 일생이 그릇되게 설정된 것이 민족 비극의 실마리 역할을 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김형직은 사망 전 전 일가가 모두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를 했습니다. 김성주에게 중국식 교육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김성주는 양부인 중국인 무씨의 도움으로 육문중학에 들어갔으나 공산주의 모임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령이 내리자 도주하는 바람에 자퇴하게 됩니다. 1929년 5월, 김성주의 나이 17세 때였습니다. 김용삼 기자는 김성주가 주로 중국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화되었다고 합니다.
'김성주는 소학교 입학부터 중학교 3학년 중퇴까지 7개 학교를 전전했다. 어머니의 고향 만경대에서 다녔던 창덕학교 2년과 화성의숙 5~6개월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인 학교에서 중국식 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김성주의 머리엔 중화사상이 자리잡게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익힌 유창한 중국어는 그가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김성주는 1929년 17세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만주는 온통 붉은 물이 들어있어, 김성주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독립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만주에서 한인들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고 죽는 비극을 연출하게 됩니다. 북한은 중국공산당계 한인 공산주의자들인 연안파들의 활동기록을 통째로 누락시키고, 대부분 과장되고 날조한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만 내세워 선전합니다. 김일성이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의 실상은 마적질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가장 흔히 사용한 방법은 만주군이나 관동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산간오지의 가난한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습격하여 인질을 잡고 그들에게 보급물자나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빨치산들은 주민을 살해하거나 마을에 방화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여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강탈했다. 전형적인 공산비적, 즉 공비(共匪)로 전란한 것이다.'
김성주는 일본의 만주지역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에 쫒겨 소련 연해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도용하여 사용하게 됩니다. 저자는 김성주의 동생 김영주의 증언을 언급합니다.
'당시 안도현 치안대장으로 공비토벌에 앞장섰던 이도선이란 한인이 있었다. 그는 1937년 초 공비토벌 과정에서 김영주라는 빨치산 소년대원을 체포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부모는 사망했고 둘째형도 일찍 죽는 바람에 김일성 부대에 있는 큰형 김성주를 따라 동북항일연군 유격대에서 소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김영주의 증언에 의하면 큰형 김성주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의 유격대원>으로 근무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2 김성주는 제2의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에 소속되어 전투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항일동립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조작합니다. 김용삼 기자는 보천보 전투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김일성이 그토록 자랑하는 보천보 습격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적(일본군)도 없는 조그만 마을을 습격 방화 약탈하고 젖먹이 어린이와 음식점 주인이 유탄에 맞아 사망케 한 것이 전부다. 이처럼 낯 뜨거운 습격 강탈 사건을 항일 무장투쟁의 기념비적인 대승이었다고 선전하고 있으니, 그 밖의 다른 전투의 실상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소련 공산당은 만주와 소련에 퍼져있는 김일성 신화를 조작, 소련공산군 88여단의 대위였던 33세의 김성주를 신화속 김일성으로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시킵니다.
'소련군정은 김일성이란 가명을 사용하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이고, 만주지역에서 항일 빨찌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찌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소련군정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만들기 작전 아이디어를 얻었다. 소련군은 김성주를 조선인민들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수령에 오르게 만들었다. 김일성 정권 창출은 스키코프 선에서 구상됐고, 제25군사령부가 집행했으며, 레베대프와 로마노프, 메크레르와 강미하일 등이 도와 탄생시켰다. 말하자면 김성주는 철저하게 스탈린에 의해 선발되고 소련 정치장교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련의 작품이었다.
김성주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공설운동장에서 군중들 앞에 등장했다. 이날 행사 때 김성주가 착용한 양복과 구두는 소련군 장교 강미하일 소좌의 것이었다. 김성주는 넥타이를 매본 적이 없어 메크레르 중좌가 대신 매주었다.
김일성은 이승만 박사가 귀국(10월 16일)하기 이틀 전, 평양에서 대규모 군중대회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다. 이승만보다 먼저 김일성을 대중 앞에 내세우기 위해 소련군정이 김일성 환영대회를 급조한 것이다. 김성주라는 애송이 대위를 "조선 인민의 절세의 애국자, 항일의 민족영웅, 영명한 지도자"로 내세운 이유는 소련은 "위대한 지도자"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들의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의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은 6.25를 일으켜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1994년 사망했습니다. 그 이후 현재까지 김정일을 거쳐 김정은에 의해 김일성의 남한 적화공작이 이어지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깨어있는 국민들과 자유우방 국가들의 지원으로 저지되고 있습니다.
김용삼 기자는, <김정은 할아버지, 김일성 진실을 말하다> 끝머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려 죽어갈 때 남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위해 매년 수천 억 원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김일성은 만주국 시절 토벌대에 쫓기고 굶주림, 학살 , 납치라는 어두운 추억을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도 그대로 답습했고, 토벌대에 포위되듯 폐쇄, 쇄국, 자급자족, 우리식대로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나라를 지구촌에서 가장 실패한 국가로 고립시키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북한은 <항일>을 빼면 당장 쓰러지는 나라다. 항일이라는 자리에 미 제국주의를 적대하기 위한 <반미>가 자리 잡은 것 외에는 항일 코드에서 변한 것이 없다. 와다 하루키는 이런 점을 들어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정의한다.
반면 박정희와 만주군 출신 리더 그룹은 만주국 시절 자신들의 체험을 통한 시스템을 고스란히 이 땅으로 옮겨 와서 개방, 교류, 통상, 국제화, 중화학공업화를 대한민국에 이식시키는 데 성공하여 국제사회의 모범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창출해낸다.
박정희는 1979년에, 김일성은 1994년에 고인이 됐다. 그것으로 한반도에 새겨진 <만주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 수령으로 통치하고 있고, 남한에서는 자유선거에 의해 정권이 부침하고 있다.
아직도 북한은 김일성체제에서 비롯된 파탄을 수습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고, 남한은 박정희체제가 낳은 산업화 근대화의 단물을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한편에선 박정희체제의 저항적 체제로 탄생한 민주화세력중 일부가 박정희의 경력을 공격하며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을 민족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흠모하고 있다.'
김용삼 기자의 심도있는 취재글을 읽으면서, 중국 만주와 소련 연해주에서 펼쳐진 김성주의 민낯과, 해방 후 소련공산당에 의해 북한에서 선동선전되어진 김일성의 민낯을 잘 살펴보게 됐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며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부흥시킨 박정희 前대통령께 새삼 감사드리게 됩니다.
증산상제님이 보신 북학주 공사입니다.
@ 하루는 증산상제님께서 전주 백남신을 거느리고 전주 남문루각(南門樓閣)에 오르시더니, 종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한참 계시다가 또 종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한참 계시다가 또 종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풍채가 잘생긴 호걸 장부가 증산상제님 앞에 대령하여 고개를 공손히 숙이고 살려주시기를 간청하며 서 있더라. 그를 보시고 호령하여 가라사대 "한 번 부르면 즉시 올 것이지, 어찌하여 세 번씩 부르도록 대령치 않으니 무슨 곡절이뇨." 하시니 그 사람이 아무 대답을 못하고 서 있을 뿐이더라. 이 때에 증산상제님께서 숯검정을 줏어들어 그 사람의 양미간에 먹점을 찍으신 후 "가라." 쫓으시니, 그 사람이 말없이 물러가더라. 이 공사를 끝내고 누각을 내려오시어 가라사대 "그는 북학주니라. 그를 그대로 두면 앞으로 무고한 창생을 무수히 죽이겠기에, 천도에서 벌함이니라." 하시니라. (「삼계회통지」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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