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산 개암사
변산반도
우금산성
우금암
복신굴?
군사들 옷감 짯던 베틀굴
원효굴
보령원, 김유신 장군 사패지.(전승 공로로 나라에서 토지를 내림)
<白村江 戰鬪>
백제 부흥군 세력(부안 우금산성.주류성 추정)
661,9, 백제 부흥군(복실.도침,)의 요청으로 왜에서 부여풍 함선 170척에 군사 만여명 거느리고 귀국,
662.3, 왜나라 백제 구원군 27.000명 큐슈 가라츠(唐津) 출발.(왜 濟明천황,天智천황)
장수,가미쓰케노 기미 와카코, 아베노 히라우, (화살 10만척,곡식 종자 3천석,피륙300단)
663.8. 왜군 10.000명 추가 도래,(장수,이호하라기미(盧原君) 왜 함선 합 1.000여척,
당나라 유인궤 군사 17.000명.당함선 170여척,+신라군 문무왕,김유신,
당시 왜 수군과 당 수군 및 신라군의 동태를 보면, 663년8월 13일 풍왕이 왜군을 백촌에서 맞이하였고, 동월 17일 나당군은 주류성을 포위하며 공격을 한다.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은 7월 17일 부안진성(부안읍)에서 진을 치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은 부안진성에 진을 치고, 두포천의 하류에 있는 구지리산성, 염창리산성, 수문리산성, 용화동산성, 반곡리산성 들의 여러 토성들을 점령했으며, 중방인 고사비성으로 통하는 뱃길인 고부천과 동진강이 합수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백산산성을 점령하여 제왜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안방책지들이 당군에 점령당한 백제왜연합군의 수장인 풍왕은 663년 8월 13일 두포천의 상류인 백석에서 왜 수군을 맞이하였다.
현재 부안의 향토사학자들은 백촌을 주산면 백석리로, 백사는 백석리 위의 도성과 돈계로 비정하고 있다. 왜 전함들은 백촌을 중심으로 해서 주류성 부근의 고잔리의 목포(나무깨)지역에 정박을 했었을 것이다. 왜군은 지금의 상서면사무소와 우덕초등학교 일대의 저기(猪基)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전한다. 저기마을은 돼지터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大陣터라는 지명이 변하여 된 것이라 전한다.
한국 서해안 간석지의 넓은 습지는 조수차가 심해 겉으로는 바닷물이 가득 찰 때는 수심이 깊어 보이지만, 실제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은 갯골로 한정된다. 따라서 왜 수군 일부는 두포천 상류의 백석과 나뭇께 등에 정박해 있고, 다른 함대는 상서와 하서 일대의 해안의 갯골을 따라 정박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당 수군은 어디에 진을 치고 있었을까? 당 수군은 7월 17일부터 부안진성(상소산)에서 진을 치고 지형과 조류를 조사하고 전략을 짜고 있었을 것이다. 8월 13일에 도착한 왜 수군이 두포천에 정박을 하고 있었다면 두포천은 백촌강의 직접적인 전장터가 될 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면 왜 수군은 밀물을 타고 백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급속히 빠지는 썰물을 모르고 있다가 배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배들이 펄 속에 쳐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당군은 화공을 퍼부어 왜함선 400여척을 불태웠다, . 간석지의 넓은 습지는 물이 빠지면 개벌이 되기 때문에 배를 돌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왜군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걸어 가려했지만 질퍽한 갯벌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주변의 방책지로 이동을 하였으나, 나당군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4번 선제공격 하였으나 4번 모두 실패.1000여척의 함선중 400여척 소실되고,병사 만여명 전사,병마1.000여필 피해.
왜 수군이 정박한 곳은 현재의 주산면 백석리와 도계리, 그리고 상서면 고잔리의 목포 및 상서와 하서의 변산반도 산 아래의 주요한 포구들이 되었을 것이다. 두포천은 감조하천으로 조수차가 심해 포구의 발달이 미약할 것이다. 왜 함대 천척이 한꺼번에 두포천 지류에 정박을 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당군은 부안의 진성인 상소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함선은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의 하류 부근(부안군 백산면)에 진을 치고 왜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좁은 갯골만을 의지해서 전 함대가 정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포천 상류의 백석부터 하류의 계화도 내해 서안으로 정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먼 바닷길을 넘어온 왜 수군은 현재의 상서면 가오리의 돼지터(대진터)에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우금산성설 주창자; 오타쇼고,今西龍,안재홍,전영래,이도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