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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작
<제11회(2020) 천강문학상 대상>
나비 정첩 / 안이숲
무릎에 나비 한 마리가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사뿐히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개를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애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어지는 서러운 날갯짓 소리 수없이 들었어요
빗장에 방청 윤활제 솔솔 뿌리면 마당 한 귀퉁이의 세월에 퍼렇게 멍든 잡초가 피어오르고
당신은 눈코입이 삭아 자꾸만 떨어져 내립니다
붉은 눈물이 소리가 되어 공중을 묶어놓고,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이제 편안하게 쉬세요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십 년, 뒷목부터 낡아가는 수의는 그만 벗으셔도 돼요
염습을 마친 8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겹겹이 에운 문틈 사이로 녹슨 쇠 울음소리 선명하게 들려오는 밤
당신의 평생 그 어디쯤에서 터지는 발성법을 익혀 이리도 가늘고 긴 곡비를 준비했을까요
우리 한번은 서로를 열어야 하는데
어머니, 어느쪽이 제가 들어갈 입구일까요
심사평
시어가 생경하지 않고 시상이 난잡하지 않고 정갈하면서도 붓에 듬뿍 묻힌 먹물처럼 마음속에 번지는 발묵이 고운 선을 남긴 작품이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여닫이 옷장의 나비정첩이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녹슬어 가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한 생을 보는 딸의 마음이 아련한 슬픔으로 젖어든다.
“놋쇠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을 떠올리면서,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십 년“ 인 어머니의 생애를 돌아보며”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편히 쉬셔요“ 하고 어머니의 타계 앞에서 나비정첩과 어머니의 생애를 하나로 융합한다.
비교적 긴 행으로 이어졌으면서도 운율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도 이 시에 내재한 정서의 흐름이 유연함을 방증한다 하겠다. 고 평하였다
<제10회(2019) 천강문학상 대상>
허공버스 / 김대호
허공은 만원버스다
발 디딜 틈은 고사하고 숨쉬기도 힘들다
곗돈 떼인 여자가 친정 언니에게 무선 전화를 한다
말을 내보내는 동안에도 여자의 몸은 점점 뚱뚱해진다
머리에 파일로 저장된 분노는
압축이 풀리면서 온몸으로 번진다
여자의 입에서는 속기로도 받아적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일부만 언니의 귀에 담기고 나머지는 허공을 탄다
다음 정거장에서
무단 질주하는 카 오디오의 고음이 승차한다
심지어 소리가 되지 못한, 그러나 충혈된 눈빛으로 읽을 수 있는
억울하고 치욕스럽고 한 맺힌 생각들 승차한다
잠자는 사람의 헛소리까지 보태진다
이제 허공버스는 멸균 안 된 말과 생각의 승객으로 인해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퀴가 펑크가 날 지경이다
중력도 없이
비어 있다고 믿었던 허공
죽은 다음에 내 혼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 그곳,
무색무취의 노선을 오가는 버스는 지금 만원이다
약력) 2010년 수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심사평
‘허공버스’는 일상에서 일어날법한 소란과 우울의 장면들을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필연적인 미적 반응의 한 양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 순간 “중력도 없이/비어 있다고 믿었던 허공”은 만원으로 붐비게 되고, 시인 스스로는 “죽은 다음에 내 혼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 그곳”에 전혀 새로운 질주와 충혈의 세속성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상작들의 언어, 상상, 전언이 모두 단단하게 결속돼 있다
<제9회(2018) 천강문학상 대상>
나비물 / 유종서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 수도가 박힌 마당은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콸콸콸 물의 박수를 쳐준다
꾸지람을 듣고 온 날에도 그늘이 없는 박수소리에
손을 담그고 저녁별을 바라는 일은 늡늡했다
그런 천연의 박수가 담긴 대얏물에 아버지가 세수를 하면
살비듬이 뜬 그 물에 할머니가 발을 닦으셨다
발등의 저승꽃에도 물을 줘야지
그런 발 닦은 물조차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
한 번 박수를 부은 물의 기운을
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눈치 보는 바랭이풀 잡초까지 물너울을 씌워주고도
박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쯤을 남긴
세숫대야 물을 내게 들려 손님을 맞듯 대문을 여신다
뿌리거라, 길이 팍팍해서야 되겠냐
흙꽃*에게도 물을 줘야지
최대한 물의 보자기를 펼치듯 헹가래를 치는 물
마지막 박수는 이렇게 들뜬 흙먼지를 넓게 가라앉히는 일,
수도꼭지가 박수쳐서 보낸 물의 여행은
아직도 할머니 발등을 적시고 유전(流轉)하는 박수소리로
길을 떠나 사루비아 달콤한 핏빛에도 스며뒀으니
실수하고도 박수를 받으면
언젠가 갸륵한 일들로 재장구쳐오는 날도 있으리라
끝없이 마음의 꿀을 물어오는 저 물의 호접(蝴蝶)은
어느 근심의 그늘 밑에 두어도 내내 환하다
*흙꽃: 흙먼지의 방언
심사평(송희복): 말의 몸짓과 삶의 율동으로서의 시
'마당은 박수를 쳐주고, 나는 박수소리를 듣는다.'라는 말이 되지 아니한 말의 상황에서 시상이 비롯되고 있는 시다. 나는 애최 이 도발적인 언술 상황을 주목했다. 시의 소재가 되고 제목으로 활용된 '나비물'이라는 말도 재미가 있었다. 나비물의 사전적인 의미로는 '옆으로 쫙 퍼지게 끼얹는 물'을 가리킨다. 마치 나비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시각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말이다. 말들이 쌓여 있는 창고 속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말도 이제 주인을 만난 셈이다. 「나비물」은 말의 내면적인 몸짓을 가졌고, 또 이것은 삶의 율동이라는 내용을 추스르고 있다. 마당에 물을 뿌리는 일도 비범한 것으로 승화시킨다. 7080과 같은 지나쳐온 삶의 내력이 후락한 풍경화처럼 그려져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무수한 기억들, 숱한 사연들이 소환되고 있거니와, 이 가운데서도 마당에 나비물을 끼얹거나 한 바가지나 한 대야의 물도 유전하거나 한다는 생각에는 우리에게 무언가 '재장구쳐오는'울림과 감동 같은 게 있다.
< 제8회(2017) 천강문학상 대상>
빈 목간木簡을 읽다 / 최분임
도토리 몇 알이 칭얼대는 허기를
달래기도 전 보름달이 도착했네요
채집의 종족에게 식욕은
말린 생선 비린내에도 체면을 차리지 않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끼니를 기다리며
생선뼈로 저녁을 불다 지친 아이들
여러 차례 달이 흘리는 육즙을 기웃거릴 때
당신을 마중 나간 길은 금세 어두워지죠
그림자로 일렁이던 당신이 영원이 되기까지
따로 내 영혼은 자라지 않았죠
주인 잃은 돌베개가 웅크린 짐승을 닮아가는 밤
당신의 팔베개에서 식은 잠이 갈비뼈 한 귀퉁이를 뒤적여
사그라진 불씨, 당신을 이룩하네요
식은 것은 뜨거웠던 것의 표정이라고 말한 게
둥근 당신이었나요, 날카로운 나였나요
토기를 빚던 손을 빌린 나무둥치가
수신인 당신의 눈 코 입을 묻네요
빗살무늬 캐던 동물 뼈는 잠의 미간처럼 생각이 많아
기다림을 새기기 적당하죠
좀처럼 속내 드러내지 않는 보름달이
당신에게 대신 전할 목간木簡을 읽기 위해
더 밝은 높이에 눈동자를 띄우네요
산길을 향해 구부정하게 걷는 달빛
반짝, 허리가 펴지네요
거미줄처럼 널린 감정들이 강물의 명경明鏡 속
뾰족한 빗살무늬로 비칠까 옹이는 지우고
새순처럼 돋아날 나를 고르고 고르죠
달빛이 나를 다 읽었다는 듯이
끊기고 번진 그림문자들
새벽빛으로 고쳐 멀어질 때까지
심사평
시어의 표징성이 뛰어나고 시를 이끌어 가며 주제로 육박해 들어가는 집중력과 힘이 탁월하다. 능수능란한 언어의 마술사적 필치로 목간의 표징성을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시인의 렌즈에 잡힌 목간은 빗살무늬 토기를 빗던 어느 먼 선사의 것일 수도 있고, 당신에게 전할 나의 간절한 마음결일 수도 있다. 그러한 시적 소재와 모티프를 요리조리 끌고 다니며, 언어로 요리해 내는 솜시가 훌륭한 세프의 칼놀림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 또한 최분임씨의 다른 작품인 부활초에서 "간절하지 않는 생은 어디에도 없다'사막의 모가지는 어직 자라는 중이다"와 같은 결구에서 보여주고 있는 생명애의 약동과 부활의 소망이라는 주제가 무리한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맞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새닷낙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제7회(2016) 천강문학상 대상>
현고수 / 박형권
나는 북을 걸어둔 느티나무다
몇 발자국 뒤의 생가에서 나와 둥두둥! 북을 두드리는
마흔 살 선비다
그 선비의 붉은 철릭이어서 뿌듯하다
육백년을 살았어도 불혹의 깊은 속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선비와 나는 한 몸이다
나는 성리학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었고
별시문과에 뽑혔으나 임금의 비위를 거스른 문장이라
합격이 취소되었다
첫 줄기의 생장점이 꺾인 것이다
그리하여 잎눈과 꽃눈을 내지 않았다
한양 쪽으로는 이파리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나의 북소리는 주경야독에서 나왔고 은둔에서 나왔다
임진년 허술했던 봄, 임금은 벌벌 떨고 관군은 도망할 때
나는 스스로 의병을 일으켰다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입에 오르내린 사재를 털어
천강홍의장군이라는 깃발 아래로 의병들을 불러들였다
나는 알았다
북은 스스로 운다는 것을
정암진에서 붉은 철릭을 입고
이천의 의병으로 이만의 왜군을 수장시킬 때도
관군은 도망치고 시기 질투하였다.
나는 날랜 병사를 불러 핏빛 옷을 입혔다
홍의장군은 어디에나 있었다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잠깐 하다가 손을 놓았다
그건 모두 어린애를 홀리는 단물과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나는 패랭이 장사를 하며 솔잎을 먹으며 출사를 거절했다
모든 것이 북소리로 시작되었다
마침내 오늘에 와서 다시 북을 건다
명예롭게 남고 싶은 백성들은 누구라도 와서 두드려라
오늘 밤 바람이 몹시 차다
너희를 덮을 만큼 잎을 떨어뜨린다
따뜻한가?
*현고수(懸鼓樹): 이 느티나무가 현고수(懸鼓樹)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었던 곽재우는 4월 22일 이곳 유곡면 세간리에서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고 의병들의 의식주는 가재를 털어 해결하였다 한다. 이때부터 이 나무는 느티나무보다는 현고수로 불리며 뜻있는 이들의 아낌을 받아왔다.
<제6회 천강문학상 대상>
꽃피는 칼 /최정아
칼자루도 없이
칼은 새파랗다
봉안鳳眼이 조각되어 있는 칼날, 칼이 하는 일은 바람을 베는 일이지만
자투리 필요한 한 뭉치 바람이 스스로 와서 베일 때가 많다.
이 칼은 광석이 아니다. 양쪽 날을 가지고 있는 검劍의 끝은 여전히 벼려지는 중이어서 휘어져 있다. 누가 산속에 칼을 꽃아 두고 갔나. 새파랗게 녹슬면서 가끔 꽃도 피우는 그 칼을 누군들 쉽게 뽑겠는가.
칼 한 자루를 오래 감상했다
향기가 일획으로 지나간다.
정점으로 향한 떨림의 순간, 바람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칼은 별자리 방향을 따라 빛이 바뀐다.
칼은 스스로 시들어 칼집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간다.
칼 가는 사람도 없이 파랗게 날을 세우고 휘두르는 힘이 다 빠지면 절옆으로 휘어진다. 한 데 엉키는 칼끝을 조심해야하며 봄이면 멀리 동쪽에서 찾아오는 꽃이 있어 서리와 동풍을 빼내야 한다.
일합一合의 불꽃도 없이
꽃피운 칼
갈라지는 칼끝에서 꽃잎 떨어진다.
심사평
<꽃 피는 칼>에서 보여주는 비약적인 은유와 상상력, 식물이미지와 광물이미지의 결속 등을 높이 살만 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은 항용 꽃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만 잎이 주인이 되는 변용의 묘, 충돌하면서 합일하는 비유의 심안은 만만찮은 기량을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굽힘 없는 생명의지, 그리고 생명의 순환 과정을 그린 사색의 깊이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었습니다.
<제5회 천강문학상 대상>
뿔 / 변희수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서면 늘 바람이 거세다
조금만 불어도 윙윙, 사나운 소리를 낸다
공기의 흐름을 막아놓아서라고 했다
바람이 뿔났다, 사실
막힌 곳이 많은 우리 집에도 여러 마리 뿔이 산다
공기의 흐름이 심상찮은 날이면 서로 으르렁거린다
그런 날엔 뿔을 함부로 세우는 바람에
잠시 격리될 뻔 한 뿔도, 제 뿔에 제가 걸려 넘어진 뿔도 있다
막힌 곳이 제일 많을 것 같은 아빠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모자 속에 뿔을 숨겨 두었다가
상한 줄도 모르고 꺼낸 적이 있다 꼭 중국산 가짜 같았다
뿔 중에서 가장 약발이 센 뿔은 단연 엄마의 뿔이다
엄마는 알래스카 순록처럼 우아하게
뿔을 장식하고 다니지만 한 번 찔리면 오래 간다
TV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뿔 갈이 하는 순록들을 보았다
순록들은 바위나 나무에 뿔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순해졌다
통증의 깊이로 까맣게 익어가는 순록들의 눈망울을 보면
아니, 서로 엉덩이에 난 뿔을 뽑아주려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 뿔들을 보면 후시딘 같은 거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끝없는 설원을 헤매다가 온 것 같은 밤이면
아무리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잠들어도 뿔 근처가 욱신거린다
우연히 한 우리에 갇히게 된 짐승들처럼
뿔과 뿔이 엉키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막다른 곳에 서면 예민해지는 우리 집 뿔들
툰드라의 이끼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바람의 출구를 살핀다
쓰자마자 벗어야하는 순록들의 아름다운 冠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웃자란 내 뿔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뿔 대신 쫑긋해진 두 귀,
온순하게 한 철을 보낼 작정이다
<제4회 천강문학상 대상>
밤 외출 / 최은묵
문 없는 방
이 독특한 공간에서 밤마다 나는
벽에 문을 그린다
손잡이를 당기면 벽이 열리고 밖은 아직 까만 평면
입구부터 길을 만들어 떠나는
한밤의 외출이다
밤에만 살아 움직이는 길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문을 닫고 잠들었다
나도 엄마 등에서 잠든 적이 많았다
엄마 냄새를 맡으며 업혀 걷던 시절엔
갈림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
나의 발은 늘 여유로웠다
어둠에서 꿈틀대는 벽화는 불면증의 사생아
내가 그린 길 위에서 걸음은 몹시 흔들렸다
걸음을 디딜수록 길은 많아졌고
엄마 등에서 내려온 후로
모든 길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알았다
열린 벽, 문 앞에 멈춰 냄새를 맡는다
미리 그려둔 여름 길섶
펄럭 코끝에 일렁이는 어릴 적 낯익은 냄새
오늘은 그만 걷고 여기 가만히 누워
별을 그리다 잠들 수 있겠다
하늘에 업힌 밤
오랜만에 두 발이 여유롭다
심사평(문후란, 문태준)
활달한 상상력과 트인 수사를 보여주었다.'업다'라는 행위를 변주한 작품이다. 어릴 적 엄마의 등에 업혔던 기억에서 이 시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 업힌 기억은 평온과 자유로움의 그것으로 노래되고 있다. 이 시의 백미는 시의 후반부이다., 별을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화자가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화자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화자가 되레 밤하늘에 입히는 입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지상과 하늘이라는 두 공간. 그리고 주체와 객체라는 두 입잔을 역전시켜 버린다. 이런 반전은 읽는 이에게 어떤 인식의 새로운 열림과 그러 인한 쾌감을 경험하게 한다.
<제3회 천강문학상 대상>
공터의 풍경 /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든 난蘭 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이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蘭잎 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이란 저렇듯 각이 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터의 담 벽이 비스듬히 그늘을 만들고 있고
어쩌다 풍경화 한 점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담벽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공터의 배접으로 드러눕는 시간
흔들리는 그늘들은 모두 저녁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제, 그 어떤 풍경도 이 액자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듯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심사평(김종해, 송희복)
버려진 그림이 있는 공터의 풍경을 묘사해 가면서 추보식으로 구성한 현대적인 의미의 서경시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정후정이 없다. 시 쓰는 이의 주관적인 감정의 실마리를 끝내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오래된 이미지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삶의 이면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버려진 의미를 탐색해 가는 가운데 무언가 채워놓을 수 없는 삶의 아쉽고도 그리운 부분들을 여백처럼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고, 그래서 한결 인상적인 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회 천강문학상 대상》
토구(土狗) / 박은영
나는 삽 한 자루를 가지고 부화했다
밤늦도록 땅을 파며 놀던
나의 멱살을 쥔 아버지처럼 손아귀 힘이 강해진다
파도 파도 배고픈 날들
밥그릇 수만큼 삽은 커다래지고
손톱은 삽날에 찍혀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
한 삽 한 삽 퍼 올린 흙더미에
아내가 딸려오고
부화한 새끼들이 배고픈 줄도 모른 채
흙가루를 털며 웃어댄다
움켜쥐는 법을 터득한 후 빨라진
삽질의 속도,
밥그릇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드러낸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자락
수평선 안쪽으로 각혈처럼 노을이 고인다
세상이 한 삽 가득 어둠을 떠먹는 시간
갈기를 세운 사자자리별똥별에 어깨는 움츠려들고
삽자루를 쥔 흙투성이 손은 굳어 펴지질 않는다
이제 삽을 내려놓아야 할 때
한평생 파놓은 깊고 어두운 구덩이
겨우, 내 한 몸 뉠 자리다
심사평: 대상에 대한 차분한 사색
토구는 땅강아지과에 속하는 곤충을 소재로 쓰여진 우화적 터치의 시다. 토구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데, 일상이라 했지만 사실은 생애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난해하지 않고 토구의 특색에 맞추어 나직 나직 말하고 있다. 욕심을 크게 내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인다. 어쨋든 토구가 살아감에 있어 대신할 수 없는 삶, 그 실존이 벗어날 수 없는 멍에라는 점을 각인시켜 준다.
<제1회 천강문학상 대상>
물풀 /백점례
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
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
물길이 빠져 나가다 멱살 잡혀 누워있다
골풀의 부추김에 울컥 솟은 부들이며
핏줄 푸른 마름곁에 웃자란 생이가래
한 평생 반듯한 자리 올라설 수 없었다
부푸는 소문의 늪 뻗쳐 오른 결기마저
시간이 지나가면 너겁이 되고 만다
숨었던 실뱀 한 마리 심란하게 지나가고
흔들리는 그 바닥고 우주임을 알았을까
수렁에 빠진 무릎 수면 위로 기어올라
한켠에 노랑어리연 발 씻으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