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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선택
히브리서 11:24-26 2020/03/22 사순절 4주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거절하고’ ‘좋아하고’ ‘바라봄이라’ 모두 선택과 관련된 단어들이지요.
선택
작고 사소한 선택이 있습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작고 사소하지만 그에 다른 결과는 늘 달라질 것이고, 다양한 빛깔의 삶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선택도 있이만 크고 결정적인 선택도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박차고 나갈 것인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이 뒤 따를 뿐만 아니라 나의 선택이 나와 관계된 이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포도원 주인이 아주 과감한 선택을 합니다.
눅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삼년이 지나도록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삼년동안 아까운 땅만 버리게 한 무화과나무.
그 나무를 향한 포도원 주인의 마지막 선택은 ‘찍어버리라’였습니다. 거절이지요.
땅만 버리게 할 수 없으니, 아까운 땅만이라도 되찾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삼년동안 투자하고 애써 가꾸었던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의 생각은 포도원주인과 달랐습니다.
‘한 해 더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포도원지기에는 선택의 권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권한이 없는 포도원지지.
하지만 그는 포도원주인을 찾아가 진심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간청합니다.
눅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13: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만약입니다.
만약, 한 해 더 기다려 달라는 포도원지기의 진정어린 간청이 없었다면,
무화과나무의 미래,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포도원 지기는 패역한 이스라엘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상징합니다.
만약입니다.
만약, 그들의 눈물어린 간청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중에 ‘아모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아모스’란 ‘짐 진 자, 짐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짐꾼, 그가 아모스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짐꾼 아모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범죄 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파국의 심판을 선포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짐꾼이라 할지라도 쉽게 따를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심판의 대상, 파국의 대상은 북이스라엘의 왕조와 고위대작이었습니다.
힘 있는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우선 아모스에게는 이스라엘의 파국을 선포할 만한 힘이나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처럼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선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짐꾼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권위와 먼 하찮은 목자였습니다.
일개 양치기였다는 말입니다.
설사,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양치기의 말을 귀담아 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모스가 살던 시대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흥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여름 별장과 겨울별장이 있고(3:15), 상아 침상에 눕고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6:4) 시대였습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6:6) 아까움을 전혀 모르는 풍요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다.’
누가 일개 양치기의 말을 듣겠습니까?
하지만 아모스는 잠시도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향락에 취한 북이스라엘의 왕과 고관대작을 향해 외침입니다.
(새)암6:4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 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6:5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6:6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6:7 이제는 그들이 그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아모스의 선택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북이스라엘 왕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 벧엘 성소의 제사장 ‘아마샤’는 자신의 빵을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불의한 왕의 비위를 맞추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모스의 정직한 입을 막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약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시대 같은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사람은 빵을 선택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운명.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추방당한 아모스
그는 목자의 길에서 선지자의 길로 묵묵히 나아가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약은 길을 선택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빵을 선택한 제사장 ‘아마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됩니다.
(새)암7:17 그대가 바로 그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누어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 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아주 끔찍한 심판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이라고 성경은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의 삶을 아주 짧게 요약한 히브리서 기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모세의 삶을 아주 짧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첫째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는 삶의 길을 선택합니다.
둘째, 25절입니다.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공주의 아들이 되어서 죄의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왜요? 그 길이 좋아서입니다.
셋째, 26절입니다.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애굽(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모욕)을 더 값진 것으로 여겼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나름대로 모세의 삶을 정리합니다.
의의 최후 승리 주심을 바라본 것이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 한 사람.
둘째, 공주의 아들이 되어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좋아한 사람.
셋째,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모욕)을 더 값진 것으로 바라보는 사람.
저는 이것을 보면서 자지러질 뻔 했습니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생이지.’
모세를 향한 더 이상의 설명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물론 모세의 선택이 우리 모두가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반대로 공주의 아들이 되는 길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공주의 아들이 되어 누릴 수 있는 향락, 그 향락의 즐거움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애굽의 모든 보화 곧 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닌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어쩔 수밖에 없는 이유와 어쩔 수밖에 없는 상황과 어쩔 수밖에 없는 변명이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모세의 삶 3가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 '공주의 아들'이라는 높은 자리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공주의 아들'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애굽의 왕자’라는 말이 됩니다.
화려한 궁중생활에 익숙한 ‘애굽의 왕자’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40년을 궁정에서 살게 하십니다.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한 사람으로 그리고 애굽 권력의 핵심인 왕자로 40년 동안 화려한 궁중에서 살게 하십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하나님은 모세보다 늘 앞서 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인도된 곳이 광야였습니다.
‘광야교회’지요.
그리고 그 광야교회에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우선 ‘영원한 칭호’ 곧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 받는 최초의 사람이 됩니다.
출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학대당하는 이들을 이끌어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는 언약, 곧 말씀의 지도자가 됩니다.
더 나아가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는 자유의 지도자, 해방의 지도자가 됩니다.
비록 광야였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의 전능하심을, 그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몸소 경험 한 사람이 됩니다.
심지어 전무후무하게 하나님을 본 유일한 사람으로 성경은 기록합니다.
신명기 34장입니다.
신34: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34: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새 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셨다.’
이것이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말할 수 있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복이지요.
둘째, 모세의 선택입니다.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애굽의 왕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당하는 광야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어찌 보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요.
하지만 모세가 선택한 그 속을 들어가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향락’ '자기에 대한 병적인 탐닉'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흔히 ‘이기주의’ 또는 ‘자기애’라고 편히 부릅니다.
‘이기주의’ ‘자기애’
사실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고 본능이지요.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누군가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깊고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면 ‘이기주의’ ‘자기애’는 심각한 질병이자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병을, 그 죄악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를 위해 과감하게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광야,
광야 40년의 고생길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참된 목회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함께’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 목사님들처럼 성도가 아파하면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굶으면 함께 굶고, 빈 쌀독을 몰래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방끈이 짧아도, 설교를 못해도, 찬양을 못해도 옛날 목사님들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셋째 모세의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모세의 선택,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광야의 길을 그것도 40년을 이끌어가야 하는 모세의 마음.
그 누가 알겠습니까?
마침 사순절 때마다 늘 붙들고 부르는 찬양과 모세의 마음이 함께 겹쳐 이 시간 소개할까합니다.
찬송가 372장입니다.
원곡은 흑인영가로 가사는 이렇습니다.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my sorrow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Sometimes I'm up, sometimes I'm down, oh, yes Lord Sometimes I'm almost To the ground, oh yes Lord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but Jesus Any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If you got there before I do, oh yes Lord Tell all my friends, I'm Coming too, oh yes Lord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but Jesus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Glory, Hallelujah Although you see me Goin' on so, oh yes Lord I have my trials, here below Oh yes Lord
그 누가 내가 겪은 괴로움을 알까?
아무도 내가 겪는 슬픔을 모르지.
아무도 내가 겪은 trouble고민을 모를 거야.
영광 할렐루야!
때로 나는 up상기되고,
때로 나는 down우울해지지
오, 그래요, 주님.
때로 나는 땅바닥까지 내려가지요.
오, 그래요, 주님.
그 누가 내가 겪은 괴로움을 알까?
아무도 내가 겪는 슬픔을 모르지요.
아무도 내가 겪은 고민 몰라요.
영광 할렐루야!
오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보세요.
그렇게 계속요. 오! 그래요! 나의 주님!
오! 주님! 나는 내 고민을 여기 아래 내려놓습니다.
오! 그래요! 주님!
아무도 내가 겪은 고민을 몰라요
아무도 예수님을 모르지요.
오! 아무도 내가 겪은 고민을 몰라요.
영광 할렐루야!
사람들이 나를 비천하게 만들고, 나를 아주 미워해요
오! 그래요! 주님! 보시지요.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나 주님이 나를 보내주었어요.
오, 그래요 주님!
원곡의 가사와 좀 다르지만 우리말 찬양으로 함께 봉헌찬송으로 부르겠습니다.
찬송가 372장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