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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73권 / 정조조 5 / 15년(신해, 1791)
○ 2월. 경기 유생이 상언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을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성군(錦城君)ㆍ화의군과 같은 절의(節義)가 종실에서 나온 것이 어찌 더욱 기특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그 밖에도 사육신에 뒤지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으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한다면 실로 절의를 장려하고 충성을 기리는 은전에 부합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조사해서 여쭙게 하라.”
하였다. 마침 영월부(寧越府)에 화재가 나서 민가가 불탄 자리에서 자규루(子規樓)의 옛터가 드러났는데, 바로 단묘(端廟)가 일찍이 지냈던 곳이었다. 감사가 중건하였다고 보고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이상도 하구나. 갑자기 불이 나서 민가를 태우더니 옛날 기왓장이 흙 밑에서 나타나고 무늬 있는 주춧돌이 터 위에서 드러났으며, 깊은 겨울 외떨어진 산골짜기에 큰비가 사흘 동안 내려서 찬 눈을 다 녹여버려 돌을 캐고 나무를 벨 수 있었다. 정월에 터를 닦고 2월에 기둥을 세웠으니, 일이 신속하게 진행된 데서 신령의 이치가 사람의 마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누각의 체모는 도리어 정자각보다 더 낫다. 배식(配食)할 사람을 조사해서 정하는 일과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있어서 마치 나의 마음을 이끌어주는 것 같았으니, 어찌 ‘때가 있다.’고만 할 일이겠는가.”
하였다. 이어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도총관 성승(成勝), 별운검 박쟁(朴崝),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에게 시호를 하사하고, 박계우(朴季愚)ㆍ하박(河珀)을 증직하고, 절의를 다한 신하들을 배식하는 전례를 정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여섯 종실, 다섯 외척, 세 상신(相臣), 세 중신(重臣), 두 운검(雲劒), 육신(六臣)과 육신의 아비나 자식 가운데 탁월한 자, 허후(許詡)ㆍ허조(許慥)ㆍ박계우 등 문경(文敬)과 문헌(文獻)의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서 뛰어난 자,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도진무사 정효전(鄭孝全) 등 31명을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라. 일이 자세하지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12명, 연좌되어 죽은 의춘군(宜春君) 등 224명은 별단(別壇)에 제사지내라. 목숨을 내걸고 의리로 분발하여 장례지내는 데 힘을 다한 자는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뿐이었으니, 절의로 죽은 반열에 있지 않다하여 홀로 배식하는 데서 누락시키겠는가. 증 참판 엄흥도(嚴興道)를 31명의 위차(位次) 다음에 두도록 하라. 고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과 태학생 남효온(南孝溫)을 함께 창절사에 붙여 배향하라. 32명의 제단에는 응당 축문(祝文)이 있어야 할 것이며, 사판(祠版)에는 ‘충신지신(忠臣之神)’이라고 쓰도록 하라. 별단에는 세 개의 사판을 만들어 계유년, 병자년, 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쓰라. 제사지낼 때에는 지방(紙牓)에다 성명을 나열해 쓰고, 축문은 없게 하라.”
하였다. 이어《배식록(配食錄)》을 편성하고 《장릉지(莊陵誌)》를 증수할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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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잡기 제4권 / 성언(醒言) / 단종(端宗)의 한
영월(寧越) 매죽루는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에 거처하던 곳이다. 두견새를 읊은 단종의 시 두 수가 있으므로 자규루(子規樓)라고 개칭하였으며, 명월루(明月樓)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누각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 38)에 큰물에 무너졌는데 금상(今上) 경술년(1790, 정조 14)에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부사(府使) 이동욱(李東郁)과 상의하여 중건하려 하였으나 옛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 자리를 물색하려 하였는데 천둥번개와 뇌우(雷雨)가 쏟아져 일을 방해하였다. 그다음 날 큰 바람이 불어 민가 다섯 채를 불태웠는데 그 재를 날려 보내자 문양이 새겨진 주춧돌이 드러났으니, 그곳이 바로 매죽루의 옛터였다. 마침 겨울이라 얼음과 눈으로 사방이 막혀 나무나 돌을 운반할 수 없어 염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흘 동안 큰비가 내려 강의 얼음이 전부 녹아서 재목을 운반해 오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다음 해 봄에 완공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해에 상이 특별한 예로 장릉(莊陵)의 홍살문 밖에 단을 설치하고 계유년(1453, 단종 1), 병자년(1456, 세조 2), 정축년(1457)에 절개를 지켰던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여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향하게 하였다. 네 개의 단을 두었는데 충신단(忠臣壇)이 중앙에서 북쪽을 향해 약간 높이 있고, 조사단(朝士壇)이 좌측 조금 앞쪽에, 악사ㆍ내시ㆍ군인ㆍ노비단이 아래쪽에 서향으로 있으며, 여인단이 우측에 동향으로 있는데 조사단에 비해 약간 낮다. 제사를 흠향하는 32명은 제향할 때 축문을 쓰며, 사적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사람 8명과 연좌된 사람 228명이 있다. 단을 설치하기 하루 전에 붉은 빛이 정자각(丁字閣)에서 나와 단을 설치할 자리까지 무지개처럼 이어졌다. 능을 지키는 자가 불이 난 줄 알고 급히 달려가 보니 그냥 붉은 기운이었다.
단종의 장릉과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은 모두 숙종 기묘년(1699, 숙종 25)에 복위되었다. 이해 8월에 숙종이 사릉에 참배를 갔는데 비가 오자, 세상 사람들은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이 복위되던 날 내렸던 세원우(洗冤雨)에 비하였다. 영조 병진년(1736, 영조 12) 8월에도 참배를 갔는데 또 비가 내렸다. 금상 신유년(1801, 순조 1) 9월에 장릉에 참배 갔는데 날씨가 청명하자, 상께서 신하들을 돌아보시며 “오늘 틀림없이 비가 올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비가 왔다. 아, 장릉과 사릉은 이제 잘 받들어 여한이 없을 텐데도 여전히 신기한 자취를 보임이 이와 같으니, 아마 아직 맺힌 한이 남아 있는가 보다.
[주-D001] 계유년 …… 신하들 :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에 죽은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병자년에 상왕(上王)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참살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과 정축년에 상왕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려다 사사(賜死)된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등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혜경 오윤정 (공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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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2권 / 시(詩) / 가대인을 모시고 금강정을 유람할 적에 장침랑 심중현헌영 도 함께하다〔陪家大人遊錦江亭莊寢郞沈仲賢 獻永 亦會〕
이름난 정자 높은 언덕에 있으니 / 名亭位置占崇邱
정자 아래 긴 강은 만 번 꺾여 흐르네 / 亭下長江萬折流
창렬암 앞에는 붉은 해 비치고 / 彰烈巖前紅日照
청령포 위에는 푸른 구름 자욱해라 / 淸泠浦上翠雲稠
빈산의 백마는 남은 그림자 없고 / 空山白馬無遺影
밝은 달 두견새 우는 곳에 옛 누대 남아 있네 / 明月啼鵑有古樓
감히 당시의 일을 다 말하지 못하니 / 未敢索言當日事
천추의 빈 골짝에 부질없이 배를 감추었네 / 千秋虛壑漫藏舟
[주-D001] 장침랑(莊寢郞) 심중현(沈仲賢) : 심헌영(沈獻永, 1776~1835)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현, 호는 장재(莊齋)이다. 오희상(吳熙常)의 문인이다. 1813년(순조13)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고 벼슬이 정읍 현감(井邑縣監)에 이르렀다. 1819년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재직 중이었으므로 장침랑이라고 한 것이다. 본집 권37에 홍직필이 지은 묘지명이 있다.[주-D002]
창렬암(彰烈巖) : 1457년(세조3)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寧越)에 유배된 단종이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금장강(錦障江)에 투신하여 죽으니, 마을 사람들이 이를 슬프게 여겨 투신한 곳을 낙화암(落花巖)이라 부르고 단을 설치하여 이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그 후 1742년(영조18)에 왕명으로 이곳에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愍忠祠)라는 사액을 내려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1746년에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낙화암을 창렬암으로 개칭하였다.[주-D003]
청령포(淸泠浦) : 단종이 유폐되어 살았던 곳으로 영월군 광천리(廣川里)에 있다. 남쪽이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ㆍ북ㆍ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지형으로 단종은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하였다. 단종은 1457년(세조3) 유폐되어 이곳에 살았는데, 그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이 일대가 침수되자,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에 옮겨 지내다가 몇 달 만에 승하하였다.[주-D004] 빈산의 …… 없고 : 단종이 승하할 당시, 추익한(秋益漢)이 백마를 타고 가는 단종을 배알하였다는 민간의 전설을 들어 말한 것이다. 한성부 부윤을 지냈던 추익한이 벼슬에서 물러나 평창(平昌) 등지에서 은거하다가, 단종이 유배되자 산과(山果) 등을 따서 진상하면서 어린 왕을 위로하곤 하였다. 하루는 머루와 다래를 따서 단종을 만나러 가던 중, 단종이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단신으로 동쪽 골로 행차하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어디로 행차하시는지를 물으니, 단종이 태백산으로 간다고 대답하고 홀연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추익한이 급히 영월로 뛰어가 보니, 단종은 이미 승하한 뒤였다. 추익한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절명하였다고 한다.[주-D005] 밝은 …… 있네 :
관풍헌(觀風軒) 주변에 자규루(子規樓)가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두견새를 일명 자규새라고도 하는데 단종이 지은 〈자규사(子規詞)〉가 유명한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대 머리에 기대었네. 네 울음 하도 슬퍼 내 듣기 괴로우니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오.[月白夜蜀魄啾, 含愁情依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幕登春三月子規樓.]”[주-D006] 천추의 …… 감추었네 : 사람의 운명은 조화옹(造化翁)의 힘을 피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사람들이 깊은 골짜기 속에 배를 숨겨 두고 산을 못 속에 숨겨 두면 안전하다고 여기지만, 한밤중에 힘센 자가 등에 지고 달아나면 어리석은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다.[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 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 하였는바, 한밤중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이르며 힘센 자는 조화옹을 가리킨 것으로, 곧 인간 만사가 조화에 의해 정해짐을 말한 것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성백효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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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3010책 (탈초본 137책) 고종 28년 6월 4일 병신 18/18 기사 1891년 光緖(淸/德宗) 17년
〈○〉慶尙道儒生進士臣柳膺睦等, 伏以人臣盡節, 死生雖殊, 而其心則同, 國家褒賢, 前後或間, 而其典則一, 此殷之三仁, 或死或生, 而孔子竝稱之, 宋之祀賢, 有前有後, 而理宗竝擧之。 洪惟我國家列聖朝, 褒忠奬節, 靡不用極, 而獨於寧越府彰節祠躋亨之禮, 猶有未遑之典, 此臣等所以始焉而疑之, 終焉而慨之, 繼之而有今日陳請之擧者, 伏願聖明, 澄省而垂察焉。 粵在端廟遜位之日, 伏節死義之臣, 有世所稱死六臣·生六臣者, 忠正公臣朴彭年·忠文公臣成三問·忠景公臣柳誠源·忠烈公臣河緯地·忠簡公臣李塏·忠穆公臣兪應孚, 此六臣者, 卽死六臣是也, 貞節公臣趙旅·靖簡公臣李孟專·貞肅公臣成聃壽·貞簡公臣元昊·淸簡公臣金時習·文淸公臣南孝溫, 此六臣者, 卽生六臣也。 趙旅之杜門晦迹, 托意薇蕨, 李孟專之終身托盲, 不改其志, 成聃壽之棄官謝世, 晦迹漁釣, 元昊之挈家東隨, 洫血方喪, 金時習之佯狂自晦, 南孝溫之慷慨終身, 皆足爲卓越千古之節, 而臣等竊伏見魯陵事實有曰, 誓死同志, 期會子規樓者, 趙旅也, 向越面壁, 日拜朝暾者, 李孟專也, 坐臥必東, 傾心越中天者, 元昊也, 遊神越海, 夢與白鷗飛者, 成聃壽也。 嗚呼, 四臣之貞忠大節, 其心則死六臣之心, 而事之難處, 反有甚焉, 其迹則金時習·南孝溫之跡, 而考之載籍, 明如日星。 宜其褒揚之典, 腏亨之禮, 似無異同, 而彰節祠死六臣列亨之席, 金時習·南孝溫, 旣蒙陞配之典, 而趙旅·李孟專·元昊·成聃壽四臣, 則尙未有躋亨之擧, 玆豈非朝家數百年未遑之事? 是以正廟辛亥, 以錦城·和義兩宗臣, 追配於本祠, 有敎略曰, 錦城·和義外, 亦多有不下於死六臣者, 今於追配之時, 一體施行, 實合朝家褒奬之典。 卽令內閣·弘文館, 博考公私文籍, 以又命立生六臣傳, 別下傳敎, 略曰, 生六臣·五宗英, 危忠大節, 咸推伯仲, 有不可容易取舍於或配或否之際, 則別求無於禮而合於禮之禮而行之, 不亦可乎? 又敎曰, 禮緣於情, 神人無間, 不惟彼烈烈精靈之壹鬱不沫者, 永有依歸, 恭惟莊陵陟降, 亦必悅豫於芬苾焄蒿之時。 是擧也, 孰曰無稽乎? 又於錦城賜祭文曰, 讀魯陵誌, 不涕非人, 生六·死六, 爲臣盡臣。 純廟甲午, 禮曹因幼學臣徐相說等上言回啓, 略曰, 生六臣·李孟專·趙旅·元昊·成聃壽等, 追配於彰節祠事, 四人貞忠大節, 與死六臣竝爲伯仲, 而或生或死, 雖有時勢之差異, 其褒其奬, 宜無彼此之各殊。 況其同志六人中, 金時習·南孝溫, 旣蒙陞配之典, 而此四臣之不得竝亨, 非特有欠於朝家一視之澤, 無怪齎菀於多士公共之論云云。 況四臣之一生心神, 只在於越中山川, 則不沫精英, 亦必上下於蒼梧珠邱之鄕, 而於彰節祠一體君臣之席, 旣不與同志死六而竝亨, 又不與同節二臣而共配, 則此非特志士之齋恨, 抑亦爲朝家之欠典也。 臣等每伏讀正宗大王追配之敎, 至於烈烈精英, 永有依歸, 莊陵陟降, 亦必悅豫等句, 未嘗不三復感涕, 而獨惜乎同節四臣之靈, 徘徊於密邇之雲鄕而不得依歸之所也。 方今聖明特命在上, 幽鬱畢闡, 玆敢千里裹足, 聯籲於黈纊之下。 伏乞聖明, 特命有司之臣, 六生臣中趙旅·李孟專·元昊·成聃壽等未及陞配之四臣, 卽令追配於寧越彰節祠, 上以遂朝家未遑之典, 下以循百世公共之論, 褒揚忠節, 以樹風聲之地。 臣等無任云云。 答曰, 省疏具悉。 齊論容或其然, 而追腏亦係難愼, 爾等諒悉退去。
승정원일기 > 고종
고종 28년 신묘(1891)6월 4일(병신) 맑음
28-06-04[20] 생육신 가운데 조려 등을 영월 차얼사에 추가하여 배향할 것을 청하는 경상도 유생인 진사 유응목 등의 상소
○ 경상도 유생인 진사 유응목(柳膺睦)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하가 절개를 바치는 것이 죽고 사는 것은 비록 다르지만 그 마음은 같고, 국가가 어진 이를 기리는 것이 앞에 하고 뒤에 하는 것이 더러 차이가 있지만 그 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은(殷) 나라의 세 어진 이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였지만 공자는 아울러 칭찬하였고, 송(宋) 나라가 어진 이를 제사한 것이 앞에 하기도 하고 뒤에 하기도 하였지만 이종(理宗)은 모두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열성조(列聖朝)가 충성한 자를 기리고 절개 있는 자를 장려한 것이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유독 영월부(寧越府)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는 예에 있어서는 오히려 아직까지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이 신들이 처음에는 의심스럽게 여기다가 끝내는 개탄스럽게 여기고 이어서 오늘 사정을 말하며 간청하는 거조(擧措)가 있게 된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시고 헤아려주소서.
단종(端宗)이 왕위를 내놓던 날에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리에 죽은 신하들을 세상 사람들은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라고 일컫습니다.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이 여섯 신하가 바로 사육신이고,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 정숙공(貞肅公) 성담수(成聃壽),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 청간공(淸簡公) 김시습(金時習), 문청공(文淸公) 남효온(南孝溫), 이 여섯 신하가 바로 생육신입니다.
조려는 세상과 단절하여 종적을 감추고서 고비와 고사리에다가 자신의 뜻을 부쳤고, 이맹전은 종신토록 장님이라 핑계 대고서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고, 성담수는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사절하고서 낚시하며 종적을 감추었고, 원호는 가족을 데리고 동쪽 영월(寧越)로 떠나 눈물을 흘리며 삼년상을 치렀고, 김시습은 미친 척하며 자신을 감추었고, 남효온은 비분강개하면서 삶을 마쳤는데, 모두 천고(千古)에 뛰어난 절개라고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들이 삼가 노릉(魯陵)의 사실을 보니, ‘죽음을 맹서한 동지들과 자규루(子規樓)에서 모이기로 기필한 자는 조려이고, 영월을 향해 면벽(面壁)하고서 날마다 아침 해에 절한 자는 이맹전이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마음을 영월의 하늘로 기울인 자는 원호이고, 영월을 그리워하여 꿈속에서 흰 기러기와 난 자는 성담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네 신하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그 마음은 사육신의 마음이지만 일의 난처함은 도리어 그보다 심한 점이 있고, 그 자취는 김시습과 남효온의 자취입니다. 재적(載籍)을 상고해 보면 해와 별처럼 분명하므로 기리는 은전과 배향(配享)하는 예(禮)가 다름이 없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창절사에 나란히 배향된 사육신의 자리에 김시습과 남효온은 이미 배향되는 은전을 입었으나, 조려, 이맹전, 원호, 성담수 네 신하는 아직도 배향하는 거조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수백 년 동안 미처 행하지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정묘(正廟) 신해년(1791, 정조15)에 금성(錦城 이유(李瑜))과 화의(和義 이영(李瓔)) 두 종신(宗臣)을 본 사당에 추가하여 배향한 것과 관련하여 교서를 내렸는데, 그 대략(大略)에, ‘금성과 화의 이외에도 사육신 못지 않은 자들이 많이 있으니, 지금 추가하여 배향할 때 일체 시행하라.’ 하였으니, 실로 조정에서 기리고 장려하는 은전에 부합됩니다. 즉시 내각(內閣)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공사(公私)의 문적(文籍)을 상고하도록 하소서.
또 생육신전(生六臣傳)을 짓도록 명한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전교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생육신과 오종영(五宗英)의 높은 충성과 큰 절개는 모두 비슷하여 배향하거나 하지 않는 즈음에 쉽게 취하고 버릴 수 없는 점이 있으니, 특별히 예(禮)에는 없지만 예에 부합되는 예를 구하여 행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하교하기를, ‘예는 정(情)에서 기연(機緣)하는 것이어서 귀신과 사람이 차이가 없다. 저 울분이 가시지 않은 열렬(烈烈)한 영령으로 하여금 영원히 귀의할 곳이 있게 할 뿐만이 아니라, 공손히 생각건대 장릉(莊陵)에 오르내리는 신령도 반드시 분향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니, 이 거조에 대해 누가 상고할 길이 없다고 하는가.’ 하였습니다. 또 금성대군(錦城大君)에 대한 사제문(賜祭文)에, ‘《노릉지(魯陵誌)》를 읽고서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생육신과 사육신은 신하로서 직분을 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순묘(純廟) 갑오년(1834, 순조34)에 예조가 유학 서상열(徐相說) 등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회계(回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생육신인 이맹전, 조려, 원호, 성담수 등을 창절사에 추가하여 배향하는 일에 있어, 네 사람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사육신과 모두 비슷합니다. 혹은 산 것과 죽은 것이 비록 시세(時勢)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 기리고 권장함에 있어서는 피차의 구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뜻을 같이한 여섯 사람 가운데 김시습과 남효온은 이미 배향되는 은전을 입었으나 이 네 신하는 함께 배향되지 못하였으니, 다만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대우하는 조정의 정사에 흠결이 될 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와 공공(公共)의 의론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네 신하는 일생 동안 오직 영월의 산천을 그리워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울분이 가시지 않은 영령 또한 반드시 창오(蒼梧)의 주구(珠邱)에서 오르락내리락할 것입니다. 군신이 일체가 되는 창절사에 이미 뜻을 같이한 사육신과 함께 배향되지 못하였고, 또한 절개를 같이한 두 신하와도 함께 배향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만 지사(志士)가 한을 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흠전(欠典)이 되는 것입니다.
신들은 매양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추가하여 배향하라는 하교를 삼가 읽다가 ‘열렬한 영령이 영원히 귀의할 곳이 있어야 한다. 장릉(莊陵)에 오르내리는 신령 또한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는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되풀이하여 읽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유독 애달픈 것은 절개를 같이한 네 신하의 혼령이 장릉의 하늘 가까이에서 배회하면서 귀의할 곳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한맺힌 답답함이 모두 풀려야 한다는 밝으신 성상의 특명이 있어 이에 감히 천리 먼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연명으로 성상께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리시어 생육신 가운데 조려, 이맹전, 원호, 성담수 등 미처 배향되지 않은 네 신하를 즉시 영월 창절사에 추가하여 배향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의 미처 행하지 못한 은전을 이루시고 아래로는 백세(百世)토록 한결같은 의론을 따라 충절(忠節)을 기림으로써 풍속을 바로 세우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한목소리로 의론하는 것은 혹시 그럴 수 있으나 추가로 배향하는 문제는 또한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니, 그대들은 양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주-D001] 은(殷) 나라의 …… 칭찬하였고 : 은 나라의 세 어진 이는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다. 미자는 주왕(紂王)의 무도(無道)함을 보고 떠났고, 기자는 간언(諫言)을 하다가 종이 되었고, 비간은 간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행동은 같지 않으나 똑같이 지성스럽고 측달(惻怛)한 뜻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仁)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의 덕(德)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공자가 이들을 아울러 칭찬한 것이다. 《論語 微子》[주-D002] 송(宋) 나라가 …… 것입니다 : 남송(南宋)의 이종(理宗)이 도학(道學)을 존숭하여 처음으로 도학자들을 선성(先聖)에게 종사(從祀)한 사실을 말한다.[주-D003] 고비와 …… 부쳤고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자 말고삐를 잡고 간하였고, 무왕이 상(商) 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이와 숙제는 주(周) 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주 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끝내 굶어 죽은 고사를 말한다.[주-D004] 오종영(五宗英) : 오종영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육종영(六宗英)은 단종(端宗)의 복위와 관련하여 세조(世祖)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종실(宗室), 즉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영풍군(永豐君) 이전(李瑔),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이양(李穰)을 말한다. 《典故大方 4卷 十二士禍錄》[주-D005] 주구(珠邱) : 제왕(帝王)의 능(陵)을 말한다. 순(舜) 임금을 장사 지낸 들에 새들이 청사주(靑砂珠)를 물어 와 언덕을 만들었는데 이를 주구(珠邱)라고 하였다. 《拾遺記》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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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차얼사에 추가하여 ->영월부(寧越府)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는 예에 있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