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피와 땀으로 한국교회 주추 놓아
▲ 차쿠성당
역사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잇는 다리다. 특히 교회사는 인간 구원을 위해 각 민족에게 특별히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구원의 역사'로 일반 역사의 탐구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 당대 쌍벽을 이뤘던 역사적 인물들을 집중 조명,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신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살펴본다. <편집자>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로 대별돼 불린다. 그만큼 사제로서 닮은 꼴이 많은 동시에 각기 강한 개성을 지닌 사목자라는 뜻일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목생활 1년 만에 순교했으나,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7000리 길을 걸어다니며 사목활동을 하다 과로로 쓰러졌다.
이들의 생애에서 보듯이 김 신부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피로써 신앙을 증거 했다면, 최 신부는 그 피흘림 위에 세워진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순교의 원의를 참아가며 사목활동에 전념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21년생 동갑이다. 굳이 따지자면 3월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태어난 최양업이 8월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한 김대건보다 몇달 연장자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진외 6촌간이다. 김대건의 증조모 이멜라니아는 '내포의 사도'이존창의 딸이고,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이존창의 손녀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6살되던 해인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모방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최양업과 최방제(최양업의 사촌) 두 소년이 사제의 꿈을 안고 마카오 유학길에 오를 때 김대건은 원래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지 얼마 안되고, 서울에서의 수련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 심사단계에서 모방 신부가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신학생을 파견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그를 유학길에 합류시켰다. 만일 이때 김대건이 끝내 유학길에 동행하지 못했다면 한국 가톨릭교회사는 최양업 신부 중심으로 재편집되었을 것이다.
최방제가 요절한 탓인지 두 사람은 마카오 유학시절에 교수 신부들로부터 늘 비교 대상이 되었다. 교수 신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건은 병약했지만 활동성이 강했다. 반면 최양업은 내성적이었으나 학구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교수 신부들은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최양업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김대건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병을 앓아 교수 신부들은 "신학교 공부나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했다.
이처럼 신학생 시절에는 최양업이 김대건에 비해 항상 앞서 있었다. 그러나 마카오를 떠나 만주에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둘의 관계는 역전됐다. 연대기적 중심의 일반 역사와 달리 하느님의 구세사를 서술하는 교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첫째보다 꼴찌(?)를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 역시 처음엔 김대건에 비해 최양업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서한에는 "최양업은 신학공부를 계속하며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한살만 더 먹었더라면 금년에 서품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는 1844년말 조선 입국을 계획하면서 이미 조선의 서북방과 동북방 입국로 개척 경험이 있는 김대건을 조선 입국의 동반자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김대건을 먼저 사제품에 올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페레올 주교와 동행했던 메스트르 신부는 이 상황을 다르게 해석한다. 메스트르 신부는 1844년 5월15일자 서한에서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에 관해 여러 의견을 제시한 최양업 부제에게 반감을 품었다"고 밝혔다. 시기적으로 볼 때 이 문제가 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김대건은 1845년 8월17일 중국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다. 이때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최 부제는 1846년 두차례에 걸쳐 변문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최양업 부제는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김대건 신부 순교자전'을 라틴어로 저술, 동료의 거룩한 죽음을 추모했다. 또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김 신부보다 4년 늦은 1849년 4월15일 중국 상해 서가회성당에서 한국인 두번째 신부로 서품된 최 신부는 그해 12월 변문을 통해 고국땅을 밟는데 성공했다.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지 7년6개월 만의 일이다. 그후 최 신부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12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래서 '땀의 순교자', '길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김 신부는 짧은 생애 동안 25편의 서한과 일종의 행정지도인 '조선전도'를 남겼다. 또 최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을 남겼고, '성교요리문답', '천주성교공과' 등 2편의 교리서와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영성적인 측면에서도 두 사람은 대별된다. 김 신부는 서한에서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고 교회의 성장을 위해 피 흘리는 것은 영광이다"라며 순교 열의에 불타 있었다. 또 "고통은 교회 성장의 불가분의 요소로, 죽음을 통해 복음이 승리할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최 신부는 '성모성심회'에 가입할 만큼 마리아 신심이 뛰어났다. 또 '사제적 소명'에 대해 강한 자의식을 가졌다. 그는 사목자로서 교구장에게 순명을 다하기 위해 피흘림을 억제하며 모든 것을 참고 때를 기다렸다.
이처럼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는 '피'와 '땀'의 순교자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되었다.
[평화신문, 2000년 6월 25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