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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탐방 보고
오영환 (서울여대 명예교수)
Ⅰ. 서언 - 탐방의 의의 Ⅱ. 탐방을 위한 기초자료
1.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과 아시아 진출
2.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 천주교회 Ⅲ. 피리외방전교회 탐방
1. 파리 본부
2. 마카오 극동대표부
3. 홍콩 극동대표부 Ⅳ. 맺는말
1) 이글은 오영환 교수가 2010년 3월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주소지를 탐방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정리·발표한 《상교우서》, 2010년 여름·가을호 원고(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위치를 찾아서)를 보완, 수정한 것이다.
2) *(저자의 감사의 글) 이글은 본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1847년 홍콩으로 이전한 후 그 주소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난 3월 현지를 탐방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경위와 3년 전 파리 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모습과 홍콩으로 이전하기 전 마카오의 주소지 모습도 함께 올렸다.
답사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데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원 원장 김용재 신부님과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장 부르노루페(Bruno Lepeu) 신부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울러 자료 확인과정에서 도움주신 홍콩 한인성당의 오주현 라파엘, 배진옥 요안나님과 그곳을 방문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신 박상호 사도요한 신부님과, 홍정민 크리스티나 사무장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안내를 맡아 차량 편의를 제공해 준 홍콩 거주 제자 이지영, 도가구 내외의 수
고를 잊을 수 없다.
I. 서언 - 탐방의 의의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의 활동을 통하여 중국으로부터 복음을 들여옴으로써 태동되었다. 그 이후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빠르게 조선 전 지역으로 전 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교회 활동은 선교 사들의 참여와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브뤼기에르(B. Bruguière, 1792~1835) 주교가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 천주교 회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로 하나 된 신앙의 형제로서 유대를 맺어 오고 있다. 2008년 설립 350주년을 맞은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창립 후 오 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민족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4,000여명의 선교사들을 아시 아에 파견하였고 그 중 170여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편 파리외 방전교회는 약 2,000여명의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였으며 그 중 한국인은 첫 사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1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치교회로 성장해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선교의 책임을 맡을 만큼 성장하는 밑거름이 돼왔다. 설립 후 350년간 파리외방전교회는 170여명의 순교자를 배출하 였다.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L.M.J. Imbert, 1796∼1839)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시 성됐다.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이룬 큰 성과에도 불하고, 또한 박해로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시아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극동대표부의 위치는 모호하였으며, 그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곳들이 단순히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일 뿐만 아니라 초기 우리 신학생들의 사제 양성과 시복 준비 등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로서도 역사적 기록이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탐방 조사는 마카오와 홍콩 지역에 위치해 있던 극 동대표부 소재지를 확인함으로써 초기 한국 천주교 전래과정에서 이 곳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회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확인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II. 탐방을 위한 기초자료
1.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과 아시아 진출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MEP)는 1658년 7월 29일 창설되었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 음화성)3)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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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7세기 당시 아시아에서는 포르투갈이 교황청으로부터 ‘선교 보호권’(Padroado)을 위임받아 중국 난징과 베이징, 마카오, 인도 고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일대 선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선교 보호권이란 그 지역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교구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십일조 징수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이 행사한 권한을 말한다. 그러나 교황청 의도와 달리 선교 보호권이 해외 선교에 도
움이 되기보다 국왕의 권한 남용으로 폐단이 더 심했다. 특히 선교지에서 수도회간의 불화가 점차 심해지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 재위 1621~1623)는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 교황청에서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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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로 로드(A. de Rodes, 1591∼1660)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극동 아시아 지역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고, 1650년 교황 인노센트 10세(Innocent X, 재위 1644∼1655)는 재속신부와 주교들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도록 승 인하였다.
로드 신부는 1653년 파리외방선교회 설립을 위해 성체회 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조직에 필요한 지원을 받았고, 또한 재속 성직자 중 1659년 팔뤼(F. Pallu, 1626~1684), 모트(P.L. de la Motte, 1624~1679)와 코톨랭디(I. Cotolendi, 1630∼1662) 신부를 지원자로 받아들여 이들이 최초의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포 르투갈의 강력한 반대와 교황 인노센트 10세의 서거로 그 일은 몇 년간 주춤하였다. 하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 재위 1655~1667)가 1658년 라오스와 코친차이나(Cochinchina, 베트남 남부지역), 중국 남부 지역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됐다.
이 대목(代牧, Vicarius Apostolicus)들의 임명이 외방 전교회의 시 초가 되었다. 창립 회원인 팔뤼, 모트, 그리고 2년 후 추가로 임명된 코톨랭디 등은 아시아 선교지의 주교로 임명되었다.4) 곧이어 1664년에는 선교지에 파견할 후속 선교사의 양성을 위해 교황청의 공인을 받아 파리, 뤼드 백(Rue du Bac)에 신학교를 설립 하였다. 파리에 설립된 이 신학교는 1663년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664년에는 교황청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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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팔뤼는 통킹(Tonking) 대목(代牧)으로 라오스(Laos)와 중국의 남서부 지방을, 모트는 코친차이나 대목으로 중국의 남부 지방을, 코톨랭디는 남경(南京) 대목으로 중국의 중부와 북부는 물론 몽골과 조선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게 되었 다. 교황은 그들에게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할 임무를 주고 지정받은 선교지를 포교성 직속 대목의 자격으로, 다시 말해 포르투갈의 보호권에서 완전히 독립된 자주적인 관할권으로 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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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받았다. 이로써 아시아의 선교 발전에 새 시대를 열게 될 파리 외방전교회는 신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더욱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아시아 선교 지역은 선교사 수의 증가에 따라 점차 확대되었다. 18세기 당시까지 인도차이나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던 선교지는 중국 및 인도의 남부로 확장되었고, 19세기 에는 여러 나라가 추가되었다.
1831년에는 조선과 일본이, 1838년에는 만주, 1841년에는 말레이 반도, 1846년에는 티베트, 1848년에는 중국의 광동과 광서성, 1855년에는 미얀마, 1899년에는 말레이지아가 잇달아 위임됨으로써 선교 지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와 같이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선교하는 과정에서 선교사 170명이 순교하였다.
최근 50년 동안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과 만주에서 추방되었고(1949∼ 1953), 1970년대에는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철수해야만 되었다(1975∼1976). 파리외방전교회는 1666년 최초로 시암(Siam, 현 태국)의 수도 아유티아(Ayutthaya)에 그 대표부를 두고 출발하였다. 또한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코친차이나 대목 모트 주교와 통킹 대목 팔뤼 주교는 1665년 시암의 수도 아유티아에 신학교를 설립5)하였다.
1765~1767년 미얀마가 시암 왕국을 침공하는 등 정세가 불안해 지자 신학교가 여러 번 이전하게 되었다. 1767년 캄보디아 국경에서 가까운 시암의 항구 도시 찬타부리(Chanthaburi)로 피신하였다가 몇 달 후 다시 캄보디아의 혼다트(Hondat)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 역시 안전하지 못해 1770년 말라카를 거쳐 인도 남동부 해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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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당시 이곳에는 시암을 비롯하여 중국 ․ 코친차이나 ․ 인도 ․ 일본 등 여러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공부를 하였고,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성 요셉 가톨릭 대신학교’(St. Joseph's Catholic Major Seminar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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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퐁디세리(Pondicherry)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퐁디세리는 안전하긴 했지만 신학생들을 파견하는 중국 ․ 인도차이나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기후도 학생들의 건강을 악화시 켰다. 그래서 다시 1804년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페낭에 신학 교를 세웠다.6)
이 페낭 신학교와 외방전교회에 위임된 대부분의 선교지 신학교 에서 배출된 현지인 성직자 수는 1850년에 150명, 1900년에 612 명, 1925년에 1,218명, 1940년에 3,800명에 달하였고, 20세기 후 반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현지인 성직자 수의 증가에 따라 현지인에게 이양된 교구도 점차 많아져 1922년에 중국 두 곳의 지목구장을 필두로 1923년에 인도 인이, 1926년에는 6명의 중국인이, 1927년에는 일본인이 주교 서품을 받았다.
현지인에게의 교구 이양은 1990년에 이루어진 한국의 안동교구가 마지막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이룬 큰 성과에는 그만큼의 희생이 뒤따랐다. 약 200명의 선교사들이 박해로,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야 하였다. 그중 23명이, 즉 1984년에 한국인 순교자들 가운데 10명, 1988년에 베트남 순교자들 가운데 10명, 2000년에는 중국인 순교자들 가운데 3명이 포함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 성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1685년에는 극동 아시아의 선교 필요성 때 문에 중국 광저우(廣州, Canton)7)에 두 번째 대표부를 설치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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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807년 12월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롤리비에(M. Lolivier, 1764∼1833) 신부가 페낭에 도착하면서 이듬해인 1808년 조지타운(George Town) 내의 풀라우티쿠스(Pulau Tikus)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페낭 신학교는 설립 이후 아시아 지역 사제 양성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70년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현지 교구로 운영권이 이관되었으며, 1984년에는 풀라우티쿠스에서 현재의 위치인 마리오필
(Mariophile)로 이전하였다.
7) 중국 광둥성[廣東省]의 성도(省都)이자 화난[華南]지방 최대의 무역도시이다. 15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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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732년 광저우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래서 당시 포르투갈 보호아래 있던 마카오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그러나 보호권(Padroado)의 압력과 마카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1847년 초 홍콩으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2.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 천주교회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천주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교황 그 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재위 1831∼1846)가 1831년 9월 9 일자 소칙서(小勅書)8)로 조선을 대목구로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 회의 회원인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1792∼1835) 주교를 조 선의 초대 대목구장(재위 1831∼1835)으로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의 조선 선교사 지원은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그 선교지를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포교성성 장관직을 수행하다.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 16세는 장관 추기경 시절, 1826년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한 조선 신 자들이 성직자 요청을 위해 교황께 보낸 편지를 읽고 조선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조선의 신자들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파견을 재촉하였다.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 움피에레스(R. Umpierres, 재임 1823 ∼1835) 신부는 이 서한에 “조선에 필요한 것은 조선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수도회이고, 또 조선 선교지는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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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으로 광저우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1517년에 해외 무역을 독점하였으나 1557년에 광저우에서 축출되고 17세기 초 네델란드가 상륙할 때까지 대신 마카오를 사용하도록 허가 받았다.‘Canton’은 포르투갈어 ‘Cantão’에서 로마자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8) 간단한 교황서한을 가리키며, 교황청 국무장관(이전에는 소칙서 비서관)이 작성하며 ‘어부의 반지’(fisherman's ring)로 날인되어 있다. 대칙서(bull)에 비해 훨씬 간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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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의견서를 동봉하여 교황청으로 보냈다. 포교성은 이 의견에 따라 우선 예수회와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자, 파리외방전교회에 의뢰하였다. 그러나 역시 선교사 부족, 선교지 운영 예산 부족, 조선 입국로 불확실, 회원들의 동의가 필수적임을 이 유로 거절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청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그레고리오 16세는 교황으로 즉위하 자마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에 파견했으며 이에 파리외방전교회는 1833년 조선 선교지 책임을 수락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 방(P.P. Maubant, 羅, 1803~1839) 신부, 1837년에 샤스탕(J.H. Chastan, 鄭, 1803~1839) 신부와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L.M.J. Imbert, 范, 1796~1839) 주교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 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 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배출되었다.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 해’(1866년)때 선교사들이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도피하는 수난을 겪었으나,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선교의 자유를 묵인 받 았다.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안전이 보장되 었고, 포교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대목구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박해 때부터 교계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수 많은 험로를 거쳐 오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시성됐다.
III. 파리외방전교회 탐방
1. 파리 본부
파리 뤼드백(Rue du Bac) 128번지에 위치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순교자의 방’과 ‘정원’은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고 있다. ‘순교자의 방’(Salle des Martyrs, Room of the Martyrs)은 본부 지하에 있는 전시 기념관이다. 이곳 전시실에 서는 회원 순교자의 유품과 박해의 도구,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전시실 중앙에 사다리 같은 이상한 모양의 전시물을 보게 되는데 이는 베드로 보리(Pierre Dumoulin-Borie, 1808∼1838) 신부의 목에 채워졌던 칼이다. 이 칼을 축으로 하여 벽을 빙 둘러 게시된 베트남 순교화도 볼 수 있다. 진열장 안의 물건들은 치명자들의 것이거나 박해도구로 사용되던 것 들이다. 목에 거는 쇠줄, 목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물은 주로 순교자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성해는 지하 성당의 순교자 제단 아래와 지하 성당에서 순교자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두 계단 옆에 있는 유해함에 모셔져 있다. 한국 순교 성인에 관계되는 유해는 순교자 기념관에서 지하 성당으로 올라가는 좌측 계단의 중간 부분에 놓여 있다.
한국의 순교자들의 유품은 따로 보관되어 있는 데, 김대건 신부의 편지도 있다.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들에게 어떻게 입 국해야 되는가 하는 방법을 알리는 내용의 라틴어 친필도 있고, 1839년 ‘기 해박해’ 상황을 라틴어로 기술하고 박해 장면을 그린 복사본 그림도 볼 수 있다. 그밖에 한국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의 몇 가지 유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 이외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수 집한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자료들과 순교한 외방전교회 회원들의 유품을 비롯하여 순교와 관련된 형틀, 그림, 도서와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방전교회와 관련된 역사적 문서들과 그림 자료들도 보인다. ‘순교자의 방’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일요일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무료로 개관한다. 파리외방전교회 정원은 파리에서 가장 큰 사유지 정원이다.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해군 제독 리고 드 주누이 (R. de Genouilly, 1807∼1873)가 중국 광저우에서 프랑스로 가져온 중국 종(鐘)도 있고, 한국 순교자와 시성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 명단을 기록한 순교 현양비도 전시되어 있다. 한국 순교자 현양비는 명동 성당 신자들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목하다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및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증한 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한국의 순교자들’(Martyrs de Corée)이란 제목 아래 10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순교 성인과 한국 순교 성인의 대 표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외 92명의 순교자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1866년 순교했지만 시복 대상에서 제외된 가경자 푸르티에, 프 티니콜라 신부의 이름도 함께 새겨 놓았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뒷 정원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그 당시 신학생들이 선배 선교사들의 순교 소리를 듣고 테 데움(Te Deum, 사은 찬미가)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정원은 매주 토요일 3시 30분에 개장한다. 프랑스 작가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77∼1849)9)은 파리 외방전교회 옆 뤼드백 120번지에 살았는데, 그 정원을 바라보면서 그의 유명한 자서전 《무덤 저 너머에서의 추억, Mé moires d'outre-tombe》(1848∼1850) 마지막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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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세기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그리스도교의 정수》(1802)는 그리스도교를 고양하는 범신론적 경향이 강했다. 대혁명 후 황폐한 민심에 큰 영향을 끼쳤고, 낭만주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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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마치는 지금은 아침 6시, 나의 열린 창너머로 파리외방전교회 정원을 바라본다. 동쪽에서 비추는 첫 황금빛이 닿자마자 앵발리드의 첨탑 뒤로 저물어 가는 서쪽편의 창백하고 부어버린 달을 보고 어떤 이는 묵은 것이 가고 새것이 온다하겠지만 나는 내가 생전에 보지 못한 일출의 여명을 보았노라 하겠다. 나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내 무덤의 끝에 앉아 용감하게 예수님의 수난상을 손에 모시고 영원으로 스러지는 것이다.”
2. 마카오 극동 대표부 (1732년∼1847년)
주소지 : Cai. do Befelho, Macau; 澳门 白鴿巢前地 麗豪花園
현 주소내 건물 : 5층 주상 복합 아파트
1732년 광저우로부터 추방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마카오로 이전하여 카모에스
공원(Camoes Garden, 嘉模公園, 백합소 [白鴿巢] 공원 또는 흰비둘기 공원)10) 입구 성 안토니오 성당 길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는 바로크식 2층 석조 건물이었으나 1847년 극동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한 후 ‘카노사의 애덕의 딸 수 녀회’가 매입한 후 건물을 한층 더 증축하여 고아원으로 사용했다. 현재 옛 건물은 모두 헐리고 대신 5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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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군인인 카모에스를 기리는 공원. 카모에스는 포르투갈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결투 중 실수로 상대방을 사살, 마카오로 추방된다. 마카오에 온 그는 당시 동인도회사를 경영하던 친구 회사 옆에 자택을 마련하고 정원을 가꾸며 지냈는데, 그곳이 바로 카모에스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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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여기서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다.’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대서 사시인 카모에스(Camoes)가 이렇게 읊었던 마카오(Macao)는 동서 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곳이며,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유학하며 사제 꿈을 키워 온 곳이다. 마카오는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동방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곳이다.
16세기부터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됐다. 지금은 중국의 행정특별자치구로 운영되고 있다. 전체 면적은 29㎢로, 서울 여의도의 3.5배 크기다. 인구는 50여 만 명이며, 대부분 중국인이다. 포르투갈은 1553년에 대(對)중국 무역권을 획득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마카오의 실질적인 사용권을 인정받고, 1557년에는 포르 투갈인이 해적을 토벌한 공으로 광동의 중국 관리로부터 도시 건설 허가를 얻게 되었으며, 다시 1575년에는 교황이 포르투갈 정부의 후원으로 그 곳에 마카오 관구(管區)를 설립하였다.
그 이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대(對)아시아 진출을 위한 거점이 되는 동시에 1841년 영국이 홍콩에 식민지를 개설하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유일한 교류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에는 그리스도교 외에 서양‘대륙 여기서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다.’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대서 사시인 카모에스(Camoes)가 이렇게 읊었던 마카오(Macao)는 동서 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곳이며,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유학하며 사제 꿈을 키워 온 곳이다.
마카오는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동방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곳 이다. 16세기부터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됐다. 지금은 중국의 행정특별자치구로 운영되고 있다. 전체 면적은 29㎢로, 서울 여의도의 3.5배 크기다. 인구는 50여 만 명이며, 대부분 중국인이다. 포르투갈은 1553년에 대(對)중국 무역권을 획득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마카오의 실질적인 사용권을 인정받고, 1557년에는 포르 투갈인이 해적을 토벌한 공으로 광동의 중국 관리로부터 도시 건설 허가를 얻게 되었으며, 다시 1575년에는 교황이 포르투갈 정부의 후원으로 그 곳에 마카오 관구(管區)를 설립하였다.
그 이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대(對)아시아 진출을 위한 거점이 되는 동시에 1841년 영국이 홍콩에 식민지를 개설하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유일한 교류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에는 그리스도교 외에 서양에서 발달한 천문학 ․ 유클리드 기하학, 근대적인 지도 투영법, 대포 주조 기술 등이 있고, 특히 동서양의 지리적 지식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11)도 마카오를 거 쳐서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뒤, 아시아에서의 세력 유 지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은 아오먼(澳門) 반도 전역과 타이파 ․ 쿨 로와내 두 섬을 점령하고, 1887년 청(淸) ․ 포르투갈 조약을 맺어 그 지역에서 식민지 건설을 합법화하였다. 그 후, 마카오는 식민지로 존속되어 왔으나, 1951년에 포르투갈은 헌법을 개정하여 모든 해외 영토를 식민지가 아닌 해외주(海外州)로 바꾸어 본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따라서 마카오도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 하에 들어가 행정 ․ 재정상의 자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1966년 중국 에서 문화혁명(文化革命)이 일어나자, 마카오의 중국인 주민과 마카오 정청(政廳) 사이에 분쟁이 벌어져서 정청의 권한이 축소되고, 1976년 3월에 다시 해외주에서 자치령(自治領)으로 바뀌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의 기지였던 마카오에는, 오늘날 에도 가톨릭 신자가 많고, 또 많은 그리스도교계의 학교 ․ 병원 ․ 사 회시설 등이 있다. 한편, 마카오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항해의 수호신 천후원군(天后元君)을 모시는 마카오 묘(媽閣廟)를 비롯하여 관음묘(觀音廟) ․ 캉쿵묘(康公廟)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전통적 신앙이나 행사도 그대로 전래되고 있다. 유럽 문화와 중국 문화의 혼재(混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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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선교하였다.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1583년 조경(肇慶, 廣東省)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를 개시하였다.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 서양의 학술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 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 圖)》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있다.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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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모습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돌을 깐 길이나 남유럽풍의 주택과 한자(漢字) 간판을 내건 상점가가 서로 이웃하고 있다. 마카오가 가톨릭 신자들, 특별히 한국 교회 신자들의 이목을 모으는 것은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선교회 들의 극동 선교 전초기지로 활용되며 일본 및 중국선교의 중요 거점 이었다는 점이다.
선교 단체 중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1565년 본부를 설치하고 성 바오로신학교, 성 요셉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직 자를 양성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지역 대표부는 1732년 대표 부를 광저우에서 마카오로 이전해 아시아 선교 활동의 교두보로 삼 았다.
이 부분에서 마카오는 한국교회와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되 는데, 1808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 이어 조선 교회 관할권을 계승했던 수자 사라이바(J. Souza de Saraiva, 1744∼1818년) 주교는 1811년 바로 이곳 마카오에서 한국 교회 신자들이 보낸 2통의 편지를 받고 이를 번역해 교황청에 보냈다.
또 1825년경에 쓰여진 조선 교회 교우들의 청원서 역시 북경을 거쳐 마카오에 전달됐는데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부대표 움피에레스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해 1826년 교황청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기폭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적으로도 마카오는 조선으로 입국하는 선교사 들의 경유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거쳐 조선 입국을 시도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마카오를 연상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성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이다.
1835년 마카오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모방 신부는 그 이듬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는데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한 이들은 1842년까지 6년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12)에서 칼레리(J.M. Callery, 1810∼1862) ‧ 데플레슈(M. Desfleches, 1814∼1887) ‧ 르그레즈와(P.L. Legregeois, 1801∼1866) 신부 등에게서 수학했 다. 그 중간에 민란으로 잠시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의 도미니크 수도원으로 피신해 있기도 했으나 다시 귀환해서 철학 ‧ 신학 과정을 이수했다.
마카오의 가장 상징적인 랜드 마크로 꼽히는 성 바오로 성당 앞 계단은 김대건 신부가 무릎으로 오르며 기도한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김대건 신부는 당시 사제들만 통과 할 수 있는 성당 정문 앞 돌계단을 무릎기 도로 오르면서 ‘반드시 사제가 되어 이 문을 통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고한다. 100여 년간 유지 해오던 마카오의 극동대표부는 포르투갈의 보호 권(Padroado) 압력과 마카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1847년 초 홍콩 으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당시 홍콩은 아편전쟁 후 1842년에 난 징(南京)조약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은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으로 마카오 지역 몇 곳에는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는 상징물들이 남아있다. 한국 가톨릭의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37년부터 1842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 전교를 맡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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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시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대표는 리브와(N. Libois, 1805∼1872) 신부로, 1842년부터 1866년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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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신학교가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바오로 성당에서 골동품· 재활용 가구 거리인 루아 데 산토 안토니오 거리를 지나면 카모에스 공원이 나온다. 공원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신부의 동상은 갓을 쓴 도포 차림에 영대를 걸치고, 왼쪽 가슴에는 성경을 안은 모습이다.
마카오의 이곳은 16세기 후반 마카오에서 살았던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즈 카모에 스를 기려 만든 공원이지만 옛 신학교 인근이기에 이곳에 그의 동상이 서게 됐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198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제막한 것이 며, 홍콩과 마카오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이를 다시 보수해 1997년 새로 봉헌했다.
3. 홍콩 극동대표부 (1847년∼현재까지)
홍콩은 주장(珠江) 하구의 동쪽, 난하이(南海) 연안에 있으며, 광 저우(廣州)로부터 약 140㎞ 떨어져 있다. 홍콩섬과 주룽반도(九龍 半島)의 주룽(九龍), 신제(新界)와 부근의 섬들을 포함하며, 면적은1,104㎢이다. 홍콩은 샹강(香港)의 광둥어(廣東語) 발음을 영어식 으로 표기한 것이다. 주민은 약 98%가 중국인이며, 나머지 2%는 필리핀·영국·인도·미국 등의 국적 인구가 차지한다. 광둥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현재는 중국에서 흔히 보통화라고 일컫는 베이징어(北 京語)를 배우는 추세가 잇따르고 있다. 공식 언어는 중국어와 영어를 사용한다.
홍콩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까지 그 기원이 올라간다. 이 지역은 진시황제 시절에 첫 번째로 병합되었으며, 당나라와 송나라 당시 무역항과 해군 기지로써 활용되었다. 이 지역의 첫 번째 서구인은 1513년에 상륙한 포르투갈인인 알바레스(Jorge Álvares, ?∼1521) 이다. 영국과의 접점은 동인도회사가 광둥 성 근처 도시에 무역항을 건설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19세기 초에 영국 무역상들은 홍콩에서 중국의 은, 비단, 차와 향 료를 아편과 교환하여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결국 중국 정부는 새로운 아편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영국은 이에 반해 중 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안전한 항구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1839 년에 청나라의 승인으로 이루어진 아편 수입 금지안은 중국과 영국 과의 제1차 아편 전쟁(1840∼1842)을 낳았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퀸 빅토리아 함대를 앞세운 영국군에 패 하게 되고 1842년에 난징(南京)조약을 맺으면서 홍콩 섬을 영국에 양도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신제(新界)를 영국으로 99년간 양도 하게 되었으며, 헨리 포팅어(Henry Pottinger, 1789∼1856)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99년간의 영국 식민 기간이 만료되면서 1997년 6월 30일 홍콩은 다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현재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서 1국가 2체제의 자치권을 행사하며 5천여 년을 넘는 장대한 중국의 역사와 100여 년 동안 이식된 영국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독특한 국제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의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다.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써 활용되는 자유 무역항으로 선언되었고 구룡 반도와 광동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또한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1870~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개화된 지역이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은 홍콩을 침략했다. 홍콩이 일본 제 국에게 지배 받는 동안 시민들은 강제적인 배급에 의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전쟁 국채 발행을 위한 통화 환율 정책의 강제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전쟁 전 홍콩의 인구는 160만이었으나, 영국이 식민지 지배권을 회복한 1945년 8월에는 거의 60만으로 줄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더 많은 이민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박해의 공포를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 왔다. 1978년 중화인민 공화국이 경제 개혁안을 시작했을 때, 홍콩은 중국 본토로의 외국인 투자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이듬해 경제 특구가 홍콩 바로 북쪽에 있는 선전에 건립되었고, 재정과 금융 분야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홍콩의 산업은 제조업과 섬유에서 점진적으로 서비스 업종으로 대체되었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의 연합성명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주권을 회복하고 특별행정구로 지정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1국 2체제를 취하여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지방행정구역으로서 5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자본주의 사회·경제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1847년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 하였다. 홍콩은 1841년 영국령으로 귀속되던 당시만 해도 평범한 어촌지역에 불과했다. 그 시기에는 단순한 불모의 암석지대로 표시될 뿐이었지만, 영국의 통치구역이 홍콩섬에서 주룽반도를 거쳐 신 제(新界)까지 확대되면서 홍콩은 무역지로 대두되었고 오늘날 중국 본토의 중요한 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 첫 번째 주소지(1847년∼1890년)
주소 : 6, Staunton Street, Hong Kong(香港 士丹頓街[사단돈가] 6號)
현 주소내 건물 : 현재 레스토랑이 있는 汛和大廈(신화대하) 빌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는 마카오에 있다가 1847년 홍콩으로 이전하였다. 첫 번째 이전한 곳은 현재는 소호(Soho) 거리에 있다.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과 항생은행 위로 연결된 ‘미들레벨행 에스켈레이터(Hill Side Escalator,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 이터)’를 타고 끊임없이 가다보면 주위에 보이는 동네가 소호이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스탠튼 스트리트에서 내리면 현재는 스탠튼 스트리트 6호와 8호로 두 번지를 사용하고 있는 신화대하(汛和大廈) 6층 건물이 있다.
물론 그 당시 건물은 아니다. 그곳에는 ‘Soho 8’이라고 표시된 푸딩(Pudding)과 씨푸드 (Seafood) 가게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이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 부가 처음 홍콩으로 이전하여 자리 잡은 곳이다. 첫 번째 이전한 이곳이 중요한 사적지인 이유는 시기적으로 이곳에 위치했던 기간 중에 두 가지 중요한 교회사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첫째, 이곳은 최양업 부제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자료를 준비하던 곳이다. 1839년의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말에 몇몇 신자들이 체포되자 그에 대한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시작되었다.
1847년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기록한 기해년 (1839)의 순교자 73명과 병오년(1846)의 순교자 9명의 행적 등 총 82명의 행적을 담고 있는 프랑스어본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하여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이 기록들은 1847년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최양업 토마스 부제가 기해 순교자 73명을, 메스트르(J.A. Maistre, 1808~1857) 신부13)가 병오 순교자 9명을 각각 라틴어로 번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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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메스트르 신부는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의 은사였다. 그
는 1842년 마카오를 떠나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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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으며 최양업 토마스의 후기가 담겨 있다. 이것이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cta Martyrum)14)이다. 이 행적은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되어 시복 소송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857년 9월 24일 교황 비오 9세(Pius IX, 재위 1846~1878)의 윤허를 받아 예부성성은 ‘Positio super Introductitione Causae’를 발표한다.
이로써 82명의 순교자는 ‘가경자’가 되었으며 교황청 수속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의 조사와 검증과정을 거친 후 1905년 7월 26일 예부성성에 《기해 ‧ 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 록》을 제출하였다. 교황청에서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관계자 회의를 마무리하여 그해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Pius XI, 재위 1922∼1939)에 의해 79위 순교자들이 시 복되었다.
둘째, 이곳은 김대건 최양업 신부 이후 바로 다음 조선 신학생들 3명을 위해 임시 신학교를 대표부 안에 설립하고 라틴어를 가르친 곳이다. 우리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선발한 이만돌 (바울리노, 22세), 김 사도 요한(19세), 임 빈첸시오(17세) 등 3명의 신학생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세 신학생은 1854년 3월 황해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오는 장수(Jansou, 楊, 1826~1854) 신부를 만나 그가 타고 온 중국 배에 갈아타고 홍콩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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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입국한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로부터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 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 대리를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嬰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1855년 제천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였다.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져 병사했고 황무실에 묻혔다가 후에 대전교구 성직자묘지로 이장되었다.
14) 1857년 82명이 가경자로 선포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이며, 특히 후기는 최양업 토마스의 신심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서 초본 및 수정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글 번역본은 1997년 천주교 청주교구에서 배티 사적지편,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부록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으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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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학생을 맞은 리브와 대표 신부는 그들을 위해 임시 신학교를 대표부 안에 설립하고 세 명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리브와 신부는 이미 마카오에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 양업 신부를 가르쳤던 바로 그분이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855년 10월 리브와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페낭으로 가도록 명하였고, 그해 10월 12일 말레이 반도의 영국령 말래카(현 쿠알라 룸프르 남쪽의 해안 도시)를 거쳐 마침내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낯선 풍토와 음식으로 조선을 떠난 뒤부터 몸이 좋지 않 았던 연장자 이만돌(바울리노)이 열대 섬 특유의 풍토병에 걸려 대 표부에서는 바울리노를 홍콩으로 데려오도록 하였고, 그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울리노는 풀라우 티쿠스에 있는 페낭 신학교에 도착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1856년 10월 12일에 그곳을 떠나 홍콩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만돌 바울리노의 홍콩 귀환이 이별의 슬픔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예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57년 3월 30일. 한참 공부에 열중하던 이만돌 바울리노는 그해 초 제주에서 풍랑을만나 광동 앞 바다까지 떠내려 갔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온 김기량을 만나게 되었다. 대표부의 루세이(Rousseille) 부대표 신부는 다음 날부터 김기량의 교리 지도를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맡겼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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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후에 이만돌 바울리노는 다시 페낭 신학교를 보지 못한 채 1861년에 귀국하고, 김요한과 임 빈첸시오도 1862년 2월에 페낭 신학교를 떠나 홍콩에 머무르다가 다음해 3월에 귀국했다. 그 후 이들은 배론 골짜기에 설립되어 있던 ‘성 요셉 신학교’에서 기쁨의 상봉을 했지만, 아쉽게도 김 요한은 얼마 안 되어 신학교를 떠나고 만다. 1864년 말, 교구장 베르뇌(張敬一, 시메온) 성인 주교가 임 빈첸시오에게 소품(小品) 을, 이만돌 바울리노에게는 삭발례를 주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스승 신부들[푸르티에 교장 신부, 프티니콜라 교수 신부]은 체포되어 순교하고, 신학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페낭 유학 1기는 이렇게 하여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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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곳은 위에서 말한 제주의 첫 순교자이며 2009년 시복시 성대상자로 교황청에 올린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 Felix Petrus, 1816∼1867)이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김기량은 42 세가 되던 1857년 2월, 동료 4명과 함께 배에 약재와 그릇들을 싣고 무역차 정의현 서귀포를 거쳐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갑자기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한 달 가까이 표류하던 중 해류에 밀려 중국의 광동 해역까지 흘러갔을 때, 다행히 바다를 지나가던 영국 배에 발견되어 구조를 받고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김기량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서 80 여일 머무르는 동안 그는 루세이 신부의 지도 아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웠다.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베르뇌 주교의 1858년 8월 14일자 서한이 있다.
“당시 조선 배 한 척이 폭풍에 밀려 광동 해역에 이르렀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허기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김기량)만이 구조될 수 있어서 우리 조선 학생들 중 한 사람(이 바울리노)이 있던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중략)… 루세이 신부 지도 아래 그 표류인은 이 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 그러나 큰 섬(제주도)을 위해서는 한층 더 기도해 주십시오. 조선 사람 하나가 광동 근처의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의 우리 대표부 신부에게 거두어졌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아시지요.” 김기량은 1857년 5월16)에 루세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제주 출신의 첫 번째 신자로 탄생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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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김기량은 1857년 성령강림주일에 영세와 동시에 첫 영성체를
했다. 부활절이 4월 12일이므로 그의 영세일은 5월 31일이 된다. 그리고 김기량의
족보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입수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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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1년 2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이웃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병인박해 때(1867년 1월) 통영에서 대못으로 가슴을 박혀 순교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하느님의 종 김기량 펠릭스 베 드로가 운명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된 거룩한 곳이다.
(2) 두 번째 주소지(1890년∼1918년)
주소 : 34, Caine Road, Hong Kong(香港堅道[견도] 34號)
현 주소내 건물 : 嘉諾撒聖心商學書院(가낙살성심상학서원, 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 of Commerce)
파리외방전교회가 홍콩에서 두 번째로 이전한 주소 지에는 현재 이태리 ‘카노사 애덕의 딸 수녀회’(the Canossian Daughters of Charity)가 1860년에 설립한 가낙살성심상학서원(嘉諾撒聖心商學書院, 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 of Commerce)이 있다. 초 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종합 캠퍼스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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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확한 생몰연대와 집안 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김관후, 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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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 애덕의 딸 수녀회’는 성녀 카노사의 막달레나(Magdalene of Canossa)인 막달레나(Magdalene) 후작 부인이 이태리 토스카나(Tuscany)에 있는 카노사의 집(the House of Canossa)에서 창립하였다. 이 학교는 홍콩과 마카오에 카노사 선교회에서 세운 9개의 천주교 여자중학교 중 첫 번째 학교이다. 1860년에 이태리에서 이곳에 온 수 녀회에서는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1960년에는 이 학교를 카 노사성심대학(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으로 등록하였다.
(3) 세 번째 주소지(1918년∼1953년)
주소 : 1, Battery Path, Hong Kong(香港
炮台里[포태리] 1號) 현 주소내 건물 : 終審法院(종심법원 ; The Court of Final Appeal)
파리외방전교회가 1917년 세 번째 이전한 곳은 현재 배터리 패스 (Battery Path) 1번지에 있는 홍콩 종심법원(終審法院, The Court of Final Appeal) 건물이다. 성 요한 성당17) 정원 안쪽으로 법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센트럴 역에서 나와 입법부 건물 쪽에서 올 려다보면 높은 빌딩 사이로 고색창연한 건물 한 채가 언덕위에 자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1842년 지어진 이 건물은 초기에 홍콩 총독 헨리 포팅어(Henry Pottinger, 1789∼1856)경과 후임 총독들이 살았으나 나중에 홍콩 입법부(Legislative Council) 건물로 사용한 적도 있다. 몇 차례 소 유주가 바뀌고 파리외방전교회가 1917년 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기존 건물을 개축하였다.
지붕 위로 돌출한 원형 지붕의 경당을 북서쪽에 짓고, 신고전주의 형태로 화강암과 붉은 벽돌로 3층을 건축하였다. 1953년 홍콩 정부에 되팔아서 이제는 홍콩 종심법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종심법원은 최고 항소법원을 말한다. 홍콩 사법부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종 심법원(대법원)의 3심제로 운영된다. 그밖에 아동·청소년 범죄를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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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회 성당이다. 1847∼1849년 사이에 홍콩에 주둔 중인 영국 군인들을 위해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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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하는 소년법원, 노사분쟁을 조정·심판하는 노동법정 등 특수법원이 운영되고 있다.
홍콩이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 된 이후 사법부의 경우는 기존 영국의 추밀원대신 종심법원을 구성, 최고 항소심을 담당하게 했다. 하지만 종심법원은 국가안전법에 대한 사안을 심리할 수 없어 홍콩 반환후 사법권의 독립이 어느 정도 지켜질지 관심이다. 현재도 종심 법원 건물 법관 출입문과 창문에는 1917년 파리외방전교회 건물이 었음을 알리는 표지들이 있다.
(4) 네 번째 주소지(1953년∼1968년)
주소 : 1, May Road, Hong Kong(香港 梅道[매도] 1號)
현 주소내 건물 : THE MAYFAIR Apartment House
파리외방전교회가 네 번째로 옮긴 이곳은 앞의 세 곳이 홍콩섬 북쪽 번화 가인데 비하여 산 중턱에 위치한 다소 한적한 곳이다. 1950년대 초인 것을 감안하면 무척 한적한 산 중턱으로 이전한 것 이다. 현재 이곳에는 메이페어(Mayfair) 아파트가 고층으로 한 채 서 있다.
(5) 다섯 번째 주소지(1968년∼1975년)
주소 : 139, Pokfulam Road, Hong Kong
(香港 薄扶林道[박부임도] 139號)
현 주소내건물 : Béthanie The Academy's Landmark Heritage Campus (演藝學院古蹟校園)
홍콩섬 남쪽에 위치한 베타니(Béthanie, 伯大尼修院)는 187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요양원으로서 건축한 역사적 건물이다. 당시 요양 원으로서는 홍콩 최초의 건물이며, 여기에서는 외방전교회 신부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모든 신부들을 위해 열대성 질환(熱帶性疾患)을 치료해 주던 곳이다.
초기에는 베타니(Béthanie)는 치료하기 어려운 결핵 확산과 미숙한 치료기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75년에서 1886년 사 이에 50세 이하 신부들이 11명이나 사망하였다. 이 요양원은 거의 100년간 수백 명의 선교사들의 병을 치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외방전교회 신부
들이 영적 휴식을 위해 머물고 생활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양원은 인도 닐기리 (Nilgiri) 산중과 파리 등 세 군데에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은퇴의 집과 인쇄시설이 있어 극동아시아에서 필요한 사전, 신학도서, 신심 서적, 교리서 및 교수법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1886년에는 스코트랜드 외 과의사 맨슨(Patrick Manson)과 다섯 명의 홍콩 사업가가 창립한 낙농회사가 8각형의 우사(牛舍)를 베타니 주변에 건축하였다. 이는 증가하는 홍콩 주민들에게 위생적인 우유와 낙농 제품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베타니 건물은 1974년 홍콩 정부에 매각되었고, 1981년 2급 역사건축물로 등재되었다.
이 유서 깊은 건물은 1978년부터 1997년까지 홍콩대학에서 관리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이곳에서 업무를 보았고, 홍콩이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 전환된 뒤 2003년 베타니(Béthanie)와 주변 낙농장의 우사는 홍콩 ‘공연예술아카데 미’(the Hong Kong Academy for Performing Arts)로 바뀌었고, 2006년에는 ‘영화 및 TV 아카데미’(the Academy's School of Film and Television)가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시설 외에 두 개의 공 연장, 전시관, 경당 및 박물관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건물은 개축을 하여 박물관으로 변형되어 사용 중이다. 개관 시간에 맞추면 언제든지 입장할 수 있다.
(6) 여섯 번째 주소지(1975년∼현재)
주소 : 14, Mount Kellett Road, House B, Hongkong(香港加列山道[가 열산도], 14號 B座)
현 주소내 건물 :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 건물
홍콩에서 이전한 여섯 번째인 이곳은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중국 지부가 있다. 홍콩섬 정상(Hong Kong Peak) 쪽에 있는 고급 빌라 단지 내에 있다. 빌라 단지의 정문 수위실을 지나 우측 안쪽으로 끝 까지 들어가면 끝에 있는 건물이 파리외방전교회이다. 단지 정문 수 위실에서 문의하면 된다. 현재 이곳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대표부) 지부장 (Superior) 루페(Bruno Lepeu, 회장, 중국명은 龐樂培) 신부, 총무(Proculator) 티스랑(Emile Louise-Tisserand, 중국명은 呂德能) 신부 외 세분의 신부가 더 계시나 모두 외부에서 활동 중으로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있으며, 방문 중에는 총무 신부 만을 만날 수 있었다.
IV. 맺는 말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애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파견가 중에서)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사제들이 아시아 선교지로 파견될 때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 모여 동료 선교사들이 함께 부르던 노래다. 남아있는 사제들은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지상에서의 이별을 고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떠나는 선교사들도 “하 느님의 부르심에 모두가 복종해 칼과 도끼에 용감히 맞서 죽어야 한 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 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땅 부엉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에 소재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모체가 된 것이다. 1914년에는 대구교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근간을 이루게 하 였다. 신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교육에도 참여하여 1922년 ‘남대문상업 학교’를 시작하였고, 1924년에는 이 학교 내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소신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동성중고등학교로서 존속하고 있 다. 한편 박해시대 때 회장과 공소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회장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한글본 신심서적들을 저술 해냈다. 1880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불자전(韓佛字 典)》이, 1881년에는 《한어문전(韓語文典)》이 각각 간행되었다. 이들 모두는 한국 최초의 것들로서 한국의 언문(言文)에 있어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있던 성서활판소를 서울 정동으로 이전함으로써 오늘날의 가톨릭출판사가 있게 되었다.
또 1906년 10월에는 《경향신문》과 부록인 〈보감(寶鑑)〉을 창간하여 구한말 개화운동을 추진하다가 1909년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부록 〈보감〉을 《경향잡지》로 제호를 바꾸어 종교 잡지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고,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대구에서 《천주교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가톨릭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존속하고 있다.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을 조사함으로써 제8대 조선대목 뮈텔 (Mutel, 閔, 1854∼1933) 주교 재임 중인 1925년 7월 79위의 치명자 들이 복자(福者)의 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 들이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부에 보낸 보고서와 각종 서신을 통하여 같은 회의 소속인 달레(Dallet) 신부는《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를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코스트(Coste, 高) 신부는 약현 (藥峴) 성당(현 중림동 성당)과 종현(鐘峴) 성당(현 명동 성당)을 설계 건축함으로써 서양식 고딕식 벽돌건물을 한국에 소개시켰다.
이밖에 파 리외방전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포교활동 뿐만 아니라 교육 활동 및 시약소(施藥所) 운영 등의 의료 활동 등도 전개하여 한국 천주 교회를 포함한 한국 전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와 같이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인연을 갖고 있으며 아시아 포교의 거점인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그 위치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소외되고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지는 못했지만, 이번에 그 위치를 직접 탐방 조사하여 역사적 사실의 한 부분을 밝혔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그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기대하는 바는 이 탐방 조사는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장 부르노루페(Bruno Lepeu) 신부의 진술에 근거하여 조사된 것이므로 교회 사가들이 더 많은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들 위치들을 재확인하여 공인함 으로써 중요한 교회사적 사건이 있었던 첫 번째 홍콩 이전지라도 그 역 사적 의미를 살려 사적지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