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임 일시
: 2022년 5월 24일 (화14:00~17:00)
2. 참여 회원
: 권화자, 윤인준,지종석, 황보명숙 이상 4명
3. 활동 내용 (6월 답사 대비 해설 시연)
1) 우리나라 비구니승 배출과정에 있어 운문사와 석남사의 위치 ~> 황보명숙
2) 운문사 ~> 윤인준선생님, 황보명숙
2-1) 운문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는 운문사의 역사
(1)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어느 도승이 갑(岬)가 들어가는 5개의 절을 지었는데, 대적갑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대비갑사, 소보갑사인데, 대적갑사가 운문사이며, 대비갑사는 현재 대비사로 남아 있으나 나머지 갑사들의 위치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2) 원광법사가 가슬갑사에서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내림
(3) 후삼국 쟁패 가운데 왕건과 인연을 맺은 보양스님이 전탑(현재 작압전의 전신)을 세우고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함. 이후 왕건이 운문선사 사액을 내리고 지원하면서 운문사로 불리기 시작.
(4) 고려중기 원응국사(1052-1144) 때 사세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원응국사비가 남아 있음. 비문은 고려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대감국사 탄연의 글씨.
*원응국사비
*탄연의 글씨
(5) 일연스님이 5년간 주지로 머무는 동안 삼국유사 집필이 시작된 역사적인 사찰
2-2) 작압전
(1) 작압전의 역사
보양스님이 절을 세우려고 북쪽 산마루에 올라가서 보니 산 아래 5층 황금탑이 보여 내려와보니 아무것도 없었고, 까치들이 땅을 쪼으고 있었다. 그곳을 파보니 무수한 벽돌들이 묻혀있어 탑을 세우고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
->벽돌탑, 즉 전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는 목조 전각이 작압 편액을 달고 있다.
이 건물은 1941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일제 시대 자료를 보면, 같은 편액을 달고 있는 전탑이 있었다.
*1941년 이전 일제시대 작압전의 모습
지금과는 달리 벽돌로 축조되어 있어 보양스님의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긴 한데, 기와지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전탑도 1718년 일부가 무너지면서 이렇게 목조건축과 전탑의 혼합형으로 세워놓았던 같다.
이 사진에서, 우측을 자세히 보면, 석등(지금의 금당 앞 석등)이 보이고 그 뒤로 맞배지붕 건물이 보이니 금당이다. 즉, 이때의 작업전 위치는 지금과는 달리 금당-석등-전탑(작압전)이 일직선상에 놓였었덨음을 알 수 있다.
(2) 작압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작업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정교함이 떨어지고 단순한 조각에서 여말나초 작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불상 대좌 밑에 발견된 사리함에 함통6년(865) 명문새겨 있어 다양한 학설들이 있다.
(3) 작압전 사천왕석주(보물)
작압전의 석조여래좌상 좌우로 사천왕을 새긴 석주가 놓여 있다. 모두 두 발로 악귀를밟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으며 몸에는 갑옷을 걸쳤다. 양감이 높지는 않은데 사천왕의 얼굴이 함상궂지 않고 곱상한 선비 모습이라 특이하다.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을 기준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전탑을 세울때 지지를 위하여 부분부분 화강암을 사용하는데, 아마도 전탑을 세울때부터 설치되었던 것 같은데, 양식으로 보아 보양스님이 전탑을 세웠다는 나말여초에 부합하는 자료가 되겠다.
2-3) 금당 앞 석등(보물)
- 석등의 지대석은 사각형이며..
- 불을 켜는 화사석은...
- 옥개석의 추녀는...
*비로전 앞에도 석등 2가 있으나 어디 무너져 있던 것을 보완 조립해 놓았는데, 금당 앞 석등과 양식은 유사하다.
2-4) 쌍삼층석탑(보물)
- 두 탑의 규모나 양식은 같아 동시에 조성한 준수한 쌍탑.
-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형식
-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앙화,보주 등이 남아 있다.
- 옥개석 층급받침이 5단이며, 기단부 탱주가 2(하층기단)+1(상층기단)으로서 통일신라 9세기초 양식이 보인다.
- 기단은 탱주로 나누어진 면석에 팔부신중(천, 용, 아차,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을 양각하였는데 모두 앉아 있는 자세로 머리 부분을 크게 묘사하여 흥미롭다. 기단부에 조각 장엄은 9세기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데, 이 탑은 9세기 초기와 중기의 과도기의 작으로 보인다.
다만, 무너져 있던 탑을 복구하면서 일부 기단부에 새로운 부재로 보완하는 바람에 일부 신중상은 옛맛이 없는 점이 아쉽다.
2-5) 만세루
- 정면 7칸 측면 4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주춧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막돌 초석이며 내부 바닥의 마루판이 닐반적인 다른 누각에 비해 높지 않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서까래를 노출시켜 연등천장으로 한 조선후기의 누각이다.
- 선운사 만세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규모 면에서 손꼽히는 운문사 만세루(약 200여평)는 사방이 창호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것이 특징이다.
- 옛날 북쪽에 있었을 대웅전을 향하여 위치하면서 법회나 설법 시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신도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
- 사찰 입구의 범종루를 짓기 전에는 종각을 겸하여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하던 동종이 있는데,종신에 보살 입상 2위가 새겨져 조선 시대 범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2-6) 비로전
(1) 건물 (보물)
- 비로전은 지금의 대웅보전이 1994년에 신축되기 전까지 대웅보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서, 일부 문화재 안내문에는 아직도 대웅보전으로 명기되어 있다.
- 1653년 건축연대가 분명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고 있어 건물 자체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는 보물 2점이 더 있으며 살펴볼 것이 많다.
- 1105년(고려 숙종 10년) 원응국사가 건립하였으며 정면 어간에 꽃살문을 새겨 부처님께 시들지 않는 꽃 공양을 올리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정면의 창호가 맞은 편 금당의 꽃살 창호와 함께 매우 아름답다.
(2) 비로전 소조비로자나불
- 려말선초 양식으로 보이는 소조비로자나불상은 좌우보처도 없이 넓은 법당에 홀로 가부좌한 오른발을 풀어 편안한 자세 (상원사 문수보살상과 동일한 사례)로 앉아 있다.
*참고)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 (오늘발이 가부좌에서 풀려 편안하게 놓여 있다.)
(3) 비로전 후불탱화 비로자나 심심불회도 (보물)
- 1755년 처일 스님의 주도로 총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로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삼신불탱(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 석가불)으로 우수한 작품이다
이 불화는 18세기 작품 중 삼신불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드문 형식의 삼신불화로서 안정된 화면 구성과 균형잡힌 인물표현, 적색과 녹색이 대비를 이루는 차분한 색감등에서 18세기 불화의 높은 격조를 잘 보여준다.
(4) 비로전 불단 후벽 벽화 (보물)
불단 뒤로 돌아가면 후벽에 불화가 그려진 사칠이 10여곳 있는데, 자칫 모르고 놓치기 쉽다. 비로전 불단 뒤로 돌아가면 특이하게도 관음보살과 달마대사를 한 화면(畵面)에 나란히 배치한 벽화를 만난다. 제작연대와 작가는 알 수 없지만 운문사 대웅보전의 중창과 보수 그리고 중수가 이루어진 17세기 중반~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장식성이 강조된 의복, 중첩된 산봉우리 표현과 세밀한 나뭇잎 묘사 등 표현법에서도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불화의 특징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후불벽화로 흔히 제작된 관음보살도에 중국 선종의 창시자 달마대사를 함께 묘사한 것은 이 벽화가 조성된 시기에 선종이 불교계의 사상적 주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관음보살과 달마대사를 따로 그려 한 공간의 서로 다른 벽에 배치한 벽화는 몇 있지만, 한 화면에 둘을 함께 그려 넣은 예는 이 벽화가 국내에서 유일하다.
그런 이유로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은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의 전통을 잇는 선찰(禪刹) 운문사의 성격을 대변하는 벽화라 할 수 있다.
(5) 악착보살
비로전 불단 서쪽(향 좌측) 위에 보면 공중에 동자상이 달려 있다. (붉은색 원 안에)
종을 매단 용가(龍架:용머리를 한 선반)를 흔들어 울리게 하는 줄이 달려 있는데 이 줄에 동자상이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반야용선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고 해서 악착보살이라고 재미 있게 부른다.
일설에는, 악착보살이 전 먹던 힘을 다해 반야용선의 외줄에 매달린 것처럼 오로지 수행자로서의 일념으로 악착같이 용맹정진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도 한다.
2-7) 오백전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보처 제화갈라보살, 우보처 미를보살과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소승불교 시대에 부처님의 제자들을 수행 정도에 따라 나누는데, 모든 번뇌가 소멸하고 더 이상 육도윤회를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제자를 아라한이라 한다.
대승불교 이후 불보살에다가 성문승으로 신앙의 대상이 넓어지고 아라한을 숭배하는 신앙이 생기면서 아라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혹은 응진전이라고 한다.
아라한은 한문으로 번역될 때 응진(응당 공양을 받을 만한 참사람) 등으로 되면서 응진전 편액을 달기도 한다.
보통 나한전과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는데, 운문사에는 500 나한을 모셨다하여 오백전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운문사 오백전에 모신 오백나한은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백나한 한분한분께 각각 공양을 올리는 오백미 공양이라는 돋특한 전통이 있다고 한다.
운문사에는 오백전과 더불어 16나한상을 모신 응진전도 있다. 운문사가 수행승들의 요람이라서 같은 의미의 전각이 모두 있는 것 같다.
나한전의 주존은 아라한들의 스승인 석가불로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보살 대신에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과 아난상을 세우기도 한다 (사례; 광주 증심사)
3) 석남사 ~> 권화자 선생님
*비구니 전문 수행 사찰로 유명한 울주 석남사는 수림 울창한 진입로를 통과하는 것 만으로도 수행이 될 듯 마음이 청정해진다.
(1) 연혁
일부 자료에는 821년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선종을 도입한 도의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이라고하나, 당나라에서 선종의 종지를 받아 귀국한 도의는 경주에 포교하려다가 이단으로 배척당하자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조용히 제자들 양성에만 전념하였기에, 석남사와의 연관은 근거 없는 이야기다.
6·25전쟁 이후에 크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한 이래,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을 받은 이 절에는 항상 100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나말여초 양식의 석탑과 승탑이 있으므로 창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2) 삼층석가사리탑
마당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대웅전 앞 큰 삼층석탑 안내문에는 '도의국사가 호국의 염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15층의 대탑으로 임진왜란 때 손실된 것을 1973년에 삼층석탑으로 복원하고 스리랑카의 승려가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였다 해 놓았다.
(3)삼층석탑
원래 대웅전 앞에 있었는데, 1973년 석가사리탑을 세우면서 눈에 잘 띄지 않은 극락전 앞에 고풍스러운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이야 말로 통일신라 후기 혹은 고려초 양식의 석탑이다.
(4) 낭공대사탑
전형적인 나말여초 후삼국시대 승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많은 자료에는 아직도 예의 도의국사 사리탑이라는 엉터리 내용이 실려 있다.
*탑신의 남북면에 문비가 있고 양쪽에 수호신인 신장상이 낮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조각이 도식화 되어가는 나말여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승탑이 통일신라 말 낭공대사의 탑으로 볼 수 있는 증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3층 서화실)에 있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의 비문 내용이다.
낭공대사 일생을 기록해 놓은 비문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경주에 머물던 낭공대사는 석남사 주지로 부임하여 916년 이곳에서 입적했다. 당시, 국사는 입적지에 승탑을 세우는 전례에 비추어 석남사 승탑은 낭공대사의 탑이 분명해 보인다. 더군다나, 880년경 세운 장흥 보림사 보조국사탑과 923년 세운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중박)의 중간 양식을 띄고 있어 낭공대사의 입적 시기에 해당되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한 만큼 먹는다는 백장청규를 지키는 석남사 채마밭에 울력 나온 비구니스님들
4) 간월사지
석남사에서 가까운 간월산 자락 간월사지에는 통일신라 고전미 풍기는 쌍 석탑이 깃발처럼 우뚝 서 있다. 쌍탑이 유행하던 시기에 산지 지형의 암반 지대에 간신히 북석탑을 세울 수 밖에 없었던지 양쪽 탑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
옥개석 층급받침이 5단이며 기단부 탱주가 2+2로 불국사 석가탑과 멀지 않은 시기에 제작된 아주 품격 넘치는 통일신라 전성기 석탑이다. 비록 복원하는 과정에 일부 새로운 부재가 들어갔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1층 탑신의 문비 양쪽을 수호하고 있는 인왕상(금강역사상)은 사실미 넘치는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간월사지 입구에 작은 전각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얼굴과 신체가 풍만하지만, 어깨는 좁아지고 몸은 양감이 줄었고, 대좌는 복잡하리 만큼 화려해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