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받은 축복을 나누라
2022년 5월 일 / 수 19:49-51, 24:14-15 / 찬송가 204장
수 19:49-51 / [땅 분배를 마치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줄 땅을 다 분배한 뒤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도 차지하고 살아갈 땅을 떼어 주었다. 50)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달라고 하는 성읍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있는 딤낫세라를 달라고 말해 두었다. 여호수아는 이 성읍을 다시 잘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51)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땅을 나누어 받았는가를 이야기하였다. 대제사장인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각 지파에 딸려 있는 집안의 어른들은 실로에서 여호와께 여쭈어 땅을 나누는 제비를 뽑았다. 실로에서 만남의 장막문 앞에 모여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땅 분배가 끝났다.
주의 말씀 듣고서 (찬송가 204장 가사)
1.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비가 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쳐도 반석 위에 세운 집 무너지지 않네
(후렴)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2. 주의 말씀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비가 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칠 때 모래 위에 세운 집 크게 무너지네
3. 세상 모든 사람들 집을 짓는 자니 반석 위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짓네
우리 구주 오셔서 지은 상을 줄 때 세운 공로 따라서 영영 상벌 주리
서 론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놀던 놀이 가운데 땅 뺏기가 있었다. 별다른 놀이 기구가 없던 시졀에 재미있던 놀이였다. 넓은 마당 양쪽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힘껏 한 발짝을 뛰어 줄을 긋고 이것이 내 땅이라고 하는 것이다. 넓지 않은 마당에서는 이기는 사람이 한 뼘씩 자기 땅을 넓혀나가기도 하였다. 열심히 내 땅을 뺏느라 애를 써서 넓은 땅을 마련해 놓았지만, 저녁이 되면 다 지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히 11:8-10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9)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땅뺏기를 하고 있다. 땅 투기, 아파트, 주식, 예금통장, 고가의 골동품 등 하여튼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소유하려는 세상이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한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을 모두 다 내놓고 가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갈 것이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실례를 들어보자.
눅 12:13-21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제 형더러 제 몫의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14) 그러자 예수께서 `누가 나를 그런 것이나 판결해 주는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참생명과 참삶은 우리가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16) 그러고 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기름진 농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풍년이 들었다. 17) 그래서 곳간을 가득 채우고도 곡식이 남아 더 넣어 둘 데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18)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야겠군. 그러면 충분히 쌓아둘 수 있겠지.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물건을 몇 해 동안 쓰고도 남을 만큼 쌓아두었다. 이제는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찾아가리라. 그러고 나면 네가 모은 재산이 다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21) 그렇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않고 땅에 쌓아두는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마태복음 8:1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군중이 떼 지어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때 율법학자(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우와 같이 하찮은 동물도 자기 집(부동산)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참새나 비둘기)도 떠돌이일 것 같지만 어엿한 둥지가 있다.
그렇다면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살라는 말씀인가? 아니다. 이 말씀은 쉴만한 안식처가 없다는 말이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안식처가 없으셨을까? 예수님에게는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셨다. 그 능력으로 얼마든지 작은 안식처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이 안식처를 마련하는 데 있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안식이 없는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들의 병약함과 질병을 짊어지고자 오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서기관)는 어떻게 했을까? 제자들 중에 율법학자 출신이 없는 것을 보면 그는 말없이 돌아간 것 같다.
그렇다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참뜻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난 집이 없어!’ 하시면서 자랑스럽게 얘기하셨을까?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로서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 3:20을 보면 예수 님의 심정을 이해가 될 것이다.
계 3:20 /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주님 안에 살며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라고 하시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빌 2장).
오늘날 교회도 그러했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도 다툼과 분열로 얼룩져 있는 교회를 향해 외친 말씀은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함께 성령을 받았고 주님 안에서 형제가 되어있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마음을 열어 화합(和合)해야 할 것이다. 화합이란 ‘한 마음과 한 생각과 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 본위가 되거나 남에게 과장된 행동을 하지 말고 겸손하게 남을 존중해 주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남에게도 눈을 돌려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되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라.’는 것이다.
▶ 믿는 분들에게 누구를 닮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받은 축복을 나누어준 요셉을 … .
창 41:1-7 / 요셉이 애굽에 팔려온 지 13년,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준지 2년이 지난 후 바로(Amenemha3세)는 기이한 꿈을 꾸고 번민하여 해몽(解夢)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술사와 박사들을 불렀지만 그 누구도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바로는 나일강 강가에서 살진 일곱 암소가 풀을 뜯어 먹는 꿈과 후에는 흉악(凶惡)하고 파리한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처음 일곱 암소마저 잡아먹는 꿈과 무성(茂盛)하고 충실(充實)한 일곱 이삭과 세약(細弱)하고 동풍(東風)에 마른 일곱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을 연속으로 꾼다. 연속으로 또는 반복하여 꾸는 꿈은 그 꿈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예고하는 것이다.
창 41:8-13 / 꿈으로 인해 번민하는 왕과 그 꿈을 풀지 못해 쩔쩔매는 신하들의 모습은 술 관원장으로 하여금 2년 전 감옥에서 자신의 꿈을 해석해주었던 요셉을 떠올리게 한다(창 40:14).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적합한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인의 가는 길을 잠시도 잊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은혜로 이끄신다(시 121:3-8, 사 49:15-16).
창 41:14-24 / 바로의 부름을 받은 요셉은 그동안 길렀던 수염을 깎고 바로 앞에 나아갔다. 바로는 요셉에게 어떤 신비한 꿈 해석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요셉은 꿈 해석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꿈 해석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대답해주실 것이라 말한다.
창 41:25-36 / 바로의 꿈을 들은 요셉은 애굽의 술객들과는 달리 즉시 명쾌(明快)하게 해몽(解夢)한 후, 구체적인 대책(對策)까지 제시한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36절) 물론 이 해결책(解決策) 역시 요셉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세상풍조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분명한 해석에 근거한다. 이것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과 관련하여 바로와 바로의 나라도 하나님의 섭리속에 깊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아야 함을 뜻한다.
창 41:37-45 / 명쾌한 꿈 해석과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자 바로는 요셉이야말로 그 계획을 추진시키기에 가장 합당한 명철하고 지혜있는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술 관원장이 요셉의 인격과 정직하고 성실하며 지혜롭고 성결한 삶에 대하여 바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평상시에 성실한 것이 나중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바로는 그 즉석에서 왕의 직권으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공식 등용시킨다(33-36절). 실로 요셉은 바알을 숭배하는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고(16, 25, 28, 32절), 그러한 요셉을 하나님은 바로의 면전에서 영광(세상적인 것이지만)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창 41:46-52 / 요셉의 해석대로 전기 7년은 연속적인 대풍이었다. 이 기간 요셉은 장차 닥쳐올 7년의 대흉년에 대비하여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즉 33-35절에 근거해 요셉은 인재 등용과 곡물 수확량 조사 및 수확량의 1/5을 비축하고, 합당한 세금 징수와 국고(國庫) 성(城) 건축 등 많은 국책(國策)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수행했다. 실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나 보디발의 집에서나 시위대의 감옥에서나 애굽의 권좌에 오른 지금이나 변함없이 주어진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이었다.
창 41:53-57 / 마침내 기근의 날은 요셉이 예고한 대로 닥쳐왔고 그 정도는 앞의 7년 동안의 풍년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했다. 바로는 기근 대책에 대한 전권을 요셉에게 일임했고 요셉은 탁월한 지혜와 성실로 곡물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였다. 성경을 보자.
창 41:53-57 / 애굽 땅에 그토록 풍성하게 곡식이 나던 일곱 해 풍년이 지나갔다. 54) 그리고 요셉이 해몽한 대로 정말 흉년이 시작되었다. 주변 여러 나라는 기근이 하도 심해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애굽은 미리 곡식을 저장해 두었기 때문에 먹거리 문제에 걱정이 없었다. 55) 그런데 급기야 계속되는 흉년으로 애굽 사람들이 굶주리기 시작하였다. 애굽 사람들은 왕에게 먹을 양식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자 왕은 요셉을 찾아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56) 기근은 점점 더 심해져 온 땅에 난리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요셉은 곡식을 저장해 두었던 창고문을 열고 애굽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기 시작하였다. 57) 가까운 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먼 나라 사람들도 모두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요셉을 찾아왔다. 애굽뿐 아니라 온 세계에 엄청난 기근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의 생애가 말해주고 있듯이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사람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걸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자신도 철저히 신앙적으로 살아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지라도 끝까지 신앙을 유지함으로 보디발 집의 청지기로, 감옥에서 시중을 들기도 하였고, 바로 왕의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7년 풍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재산 축적을 위해 애쓴 흔적도 없거니와 비록 동족은 아니지만 오직 굶주리는 애굽 백성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바로를 비롯하여 애굽 사람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까지 염려하여 자비를 베푸는 모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겸손과 온유를 겸비하였다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요셉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나누었다고 한다면 당시 7년 풍년을 맞이했던 애굽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요셉과 바로 왕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7년 풍년 뒤에는 7년 흉년이 온다는 소문을 못들었을까? 나는 그렇치 않다고 본다. 흉년을 대비하여 창고를 짓고 저장했더라면 비참한 지경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가나안에 살고 있는 형들에게도 그 소문은 전해졌을 것이다. 형들은 무엇을 했는지? 최소한 신앙인이라면 그것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에 대한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겠는지? 하나님의 비밀이기에 숨겨져 있었다 할지라도 야곱에게는 어느 정도의 힌트라도 주어지지 않았겠는가? 이렇게까지 앞날에 대하여 캄캄무소식이었다면 너무 어이가 없다.
이러한 기사들을 성경을 통해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성경을 주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쓰여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성령님을 통해 주시며 때로는 되어질 일까지 미리 알려주시니 감사할 뿐이다(딤후 3:16-17). 그렇다면 우리도 요셉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2의 요셉, 제3의 요셉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론을 길게 한 것은 미쳐 깨닫지 못하였던 여호수아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본 론
여호수아
1. 인적 사항 /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며 눈의 아들이다. 본명은 호세아였으나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로 불리게 되었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2. 성품 / 모세의 수종자로서 회막을 떠나지 않고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 강하다. 가나안 정탐 후 부정적 견해를 보고한 다수 앞에 소신껏 자기의 긍정적 견해를 나타내는 담대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리고 성 주위를 행진함으로써 그 성을 함락시킬 만큼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자신이 먼저 모범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강권하는 신실함과 강력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다.
3. 생애 / 출애굽 직후 아말렉과의 전투를 지휘하여 공을 세웠다. 가나안 정탐 후 이스라엘 자손이 능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으며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에 사명을 다하였다. 끝까지 하나님을 섬겼고, 백성들에게도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그들과 언약을 맺었다.
4. 여호수아를 통한 교훈 / 출애굽 후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고, 이후 그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땅을 분배하기까지의 대 사역을 감당했던 여호수아는 먼저 모세와 온 백성들과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는 그가 맡은 바 임무에 충성을 다하였고, 진실하고 담대한 신앙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백성들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된 기업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역시 여호수아와 같은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써 끝날까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 무엇보다 본문을 보면 유종의 미(有終-美)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실례였다. 본문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 지대한 공을 세운 여호수아가 가장 마지막으로 기업을 받는 장면이다. 이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인 가나안의 기업 분배가 끝이 나게 된다. 여호수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나안 정복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 여호수아이지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업을 다 받을 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절대 내놓지 않는 여호수아의 모습에 우리가 함께 주목해 보았으면 한다.
더군다나 여호수아가 받은 성읍 딤낫세라는 어떤 지역이 아니라 성읍 하나였을 뿐이었으며,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납을 받아들여 얻은 기업이었다. 그나마 여호수아가 요구한 딤낫세라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산간지대로 ‘중건하였다’(50절)라는 말은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라는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말해 여호수아가 자신의 거처로 정한 딤낫세라는 말이 성읍이지 허허벌판의 불모지 산악지대를 요구한 셈이다. 여호수아의 참된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서 11:24-25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한 모세에게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던 여호수아를 통해 섬김의 리더십을 배우게 된다.
조금 더 들여다보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땅 분배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리시자, 여호수아는 이 일에 온전히 매진했고 그 결과 각지파별 땅 분배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수 19:49 /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줄 땅을 다 분배한 뒤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도 차지하고 살아갈 땅을 떼어 주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 일부 지파도 있었고 이 일에 나 몰라라 하면서 뒷짐만 지고 서로 눈치만 보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지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혹은 강한 질책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땅 분배를 마쳤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한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여호수아는 정말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군대 총사령관과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었고, 실수를 통해서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인생 말년에 이르러 땅 분배작업까지 완수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결코 모세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은 그가 땅 분배를 마친 후에 보여준 모습이었다. 49절에서 볼 수 있었듯이 그는 모든 지파가 다 땅을 분배를 받은 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몫을 받았다. 더군다나 그가 받은 땅은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라는 곳이었다. 본래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다. 따라서 에브라임 지파의 한 일원으로써 땅의 일부를 분배받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도자 자격으로 자신의 땅을 취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역을 마친 후에는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로부터 받은 딤낫 세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차지하게 된 이 지역은 거친 산간지대였다. 더욱이 그곳에는 변변찮은 성읍 하나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직접 성읍을 세워서 살아야만 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에 일등공신 중의 공신이다. 그는 충분히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그 역시 모세의 뒤를 이은 것이다. 모세는 어떠했을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이끌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백성을 이끈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무덤조차 변변히 세우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우상화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세는 광야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모세는 가나안 땅의 문턱에서 ‘너는 여기까지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여호수아서를 볼 때 단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 이야기를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행을 저지르는 가나안 백성을 심판하시고, 영적으로 훈련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거룩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특단의 조치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가나안 족속들이 가지고 있었던 악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바라본다면, 비록 그 과정이 인간적으로 과격한 면이 있다 해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우시고자 하는 뜻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여호수아가 받은 축복을 나누려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 분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성경이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다.
마 6:9-10 /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단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분배하는 일을 잘 마친 지도자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의 삶을 통해서 과연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다.
인생의 말년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었다. 여호수아 24:2-13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17가지 설명한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여기에 나온다.
수 24:14-15 / 자, 그러니 이제는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시오. 여호와를 섬기며 살되 온전히 여호와만을, 진실되이 여호와만을 받들고 살아가시오. 그대 선조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살 때, 또 애굽에서 살 때 다른 신을 섬기고 살았다고 해서 그들을 본받지 마시오. 그들을 뒤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시오. 15) 하지만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못마땅해한다면, 그것이 싫다면 지금 그대들이 누구를 섬기며 살아갈 것인지 분명히 선택하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살 때 섬겼던 그 신들을 모시며 살 생각이 있소? 그도 아니면 지금 그대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고 받드는 신들을 모시며 살 생각이 있소? 그대들 마음대로 선택하시오. 어찌하든 좋소! 그러나 나와 나의 집안만은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겠소.
이처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족속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하나님만을 바로 섬기는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몸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도 했고,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 한 명 두 명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게 될 때 말 그대로 강력한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고, 나아가 이방민족을 향해서도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대관심사로 마지막 승천하실 때에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염려하며 궁금해서 묻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요 10:14-16 /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그들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6) 나에게는 우리 안에 살고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리고 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행 1:6-8 /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 사도들이 물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땅을 분배받고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그럼으로 믿을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귀감이 되게 하시려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도 같은 것이었다.
롬 12:1-2 /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가루약, 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 2)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동일하게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목적은 거룩한 삶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삶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고난도 주시고, 은혜도 베푸시고, 때로는 심판도 하시고, 용서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술이나 도박을 끊고, 말도 조심하고, 때로는 다른 종교처럼 수행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이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본질은 아니다. 거룩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거룩을 논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없이 아무리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결국 헛된 노력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회복할 것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진정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은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세상 풍조를 따라서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칠 때가 있고 잠시 낙심할 수는 있어도 절대 절망하지는 않는다. 왜일까?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변덕스럽지 않으시고, 흔들리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결 론
결론으로 여호수아의 간곡한 설교(수 24:14-15)와 이스라엘 백성의 화답을 본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 내용들을 요약한다.
❶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❷ 너희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❸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이렇게 명령을 한 여호수아는 자기와 자기 집안 사람들의 결의를 다짐한다.
수 24:15 / 하지만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못마땅해한다면, 그것이 싫다면 지금 그대들이 누구를 섬기며 살아갈 것인지 분명히 선택하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살 때 섬겼던 그 신들을 모시며 살 생각이 있소? 그도 아니면 지금 그대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고 받드는 신들을 모시며 살 생각이 있소? 그대들 마음대로 선택하시오. 어찌하든 좋소! 그러나 나와 나의 집안만은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겠소.
여호수아 24:16-33은 앞서 나오는 여호수아의 첫 번째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과 여호수아의 명령과 백성들의 대답 형식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온다. 그리고 세겜에서의 언약 체결과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여호수아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수 24:16-18 / [여호와만을 섬기리라]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호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그분께 등 돌리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1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올라오신 분 아닙니까? 우리 선조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고생하던 그곳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아니신지요? 우리는 그곳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놀라운 표적을, 엄청난 표징을 베푸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밟는 곳마다 우리를 지켜 주신 분 또한 여호와 아니신지요? 또 우리가 수없이 많은 뭇 백성들의 땅을 지나갔지요. 그때에도 우리를 보호해 주신 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지요. 18) 여호와께서는 뭇 백성들을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던 아모리 사람들을 몰아내 주기도 하셨지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쫓아내셨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찌 다른 신을 따라가겠습니까? 우리도 또한 여호와를 섬기렵니다. 여호와는 분명히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백성들이 이렇듯 다짐을 보이자 여호수아가 다시 백성들을 향해 말하였다. ‘그대들이 여호와를 분명히 섬기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오. 또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오. 그대들에게 허물이 보일 적엔 어지간해서는 눈감아 주시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어디 한번 여호와를 저버려 보시오. 아예 다른 신들을 따라가 보시오. 그분은 그대들을 본체만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오. 안중에도 두지 않으실 것이오. 철저하게도 경멸하실 것이오. 혹독하게 대하실 것이오. 아니, 아예 그분하고는 더 이상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마시오. 그분께서 혹시 따뜻한 눈길로 쳐다봐 주시기라도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조차하지 마시오.’(수 24:19-20).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수 24:21).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다시 다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좋소. 그대들이 분명히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결의한 일에 그대들 자신이 증인이오.’ 그러자 백성이 ‘증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호수아가 다시 당부하였다. ‘그대들이 지니고 있는 이방신상들을 모두 없애 버리시오. 오직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만 향하시오. 그분께로 온 정성을 모으시오.’(수 24:23).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을 우리가 섬기며 그분의 말씀만을 따르겠습니다(수 24:24).’
이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세겜에서 계약을 맺고 따라야 할 법과 규정을 지키게 하였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겠지만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여호수아는 더 나아가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계약을 맺는다.
수 24:25-27 / 그리하여 그날 여호수아는 백성을 위하여 세겜에서 계약을 맺고 따라야 할 법과 규정을 지키게 하였다. 26) 그런 다음 여호수아는 이러한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성막이 서있는 알라라고 하는 상수리나무 아래의 큰 돌을 가져다가 기념으로 세워 두었다. 27) ‘보시오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물로 남아 있을 것이오. 이 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모두 다 들었소. 그대들이 하나님께 결코 등 돌리지 못하도록 그대들에게 분명히 증거물로 남아 있을 것이오.’
여호수아는 이렇게 온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나서 백성들을 각자 사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성경은 이어서 ‘이런 일들이 있은 뒤 눈의 아들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가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가 110세였다(수 24:29).’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이런 행위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
이에 대하여 사사기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삿 2:6-8 /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돌아가라고 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에게 유산으로 돌아온 땅으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7)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잘 섬겼다. 또한,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큰 일을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겼다. 8) 여호와의 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110년을 살고 죽었다.
여호수아가 백성을 위하여 세겜에서 계약을 맺고 따라야 할 법과 규정을 지키게 한 것을 계약에 동참했던 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잘 섬겼다. 그러면서 다시 ‘여호와의 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110년을 살고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누기에 힘썼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대목이 마음에 크게 감동을 주고 있다. 아울러 우리 모두의 감동이 되어 우리 모두도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으면 한다.
♬ 나의 남은 생애는
나의 남은 생애는 복음의 편지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섬김의 향류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주님의 기쁨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사랑의 샘물되어 살리라
일년을 살지 한달을 살지 모를 나의 남은 생애 주님이 주신 사랑 주님이 주신 은혜
빛을 갚으며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은혜의 통로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축복의 통로되어 살리라 일년을 살지 한 달을 살지 모를 나의 남은 생애
범사에 감사하며 쉼없이 기도하며 주님 뜻대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하늘에 속한 자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행복한 전도자로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