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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중철 요한(5.29) 기본정보
성인명 유중철 요한 (柳重哲 John)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양반, 동정 부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79-1801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유 요한, 유요한,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柳重哲) 요한(Joannes)은, 1779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 루갈다가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 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유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인데도 무게가 있고 점잖은 어른 대접을 받았다.”
유중철 요한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야고보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 야고보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에게서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주 야고보 신부는 전주에 사는 유 요한을 염두에 두고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마침내 1797년 가을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98년 10월 유 요한은 아내 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 요한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유 요한의 아내 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에 포졸들은 유문석 요한을 가족에게서 떼어 내, 형 유중철 요한에게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요한의 나이는 22세였다.
유중철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곧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중철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동정 부부 (1) 유중철 · 이순이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신유박해 뒤 폐허에서 교회를 재건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신자들 생활에서 교우촌, 동정, 대소재 지키기 등이 주목된다. 한국 교회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추구했다. 신자들은, 육체에 갇혀 세속에 살면서 동정을 지키는 이는 본성이 동정인 천사보다 우월하다고 배웠다(「칠극」 참조). 동정으로 맑은 영혼(지혜)을 지니고 애덕을 실천하는 힘을 얻고자 했다. ‘잠시나마 천사로 가장한 인간들’이 되기를 원하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당시 사회가 ‘동정 생활’을 인정하지 않아서 신자들은 동정을 지키는 삶의 방편을 고안했다. 신유박해 순교자 윤점혜와 정순매 등은 머리에 쪽을 찌고 과부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동정 부부가 탄생했다.
초기 신자들이 읽었던 「칠극」에도 그 예가 있다. 부모에 의해 강제로 출가한 성녀 체칠리아는 남편을 설득하여 동정을 지켰다. 또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부모의 명에 의해 혼인했는데, 첫날 신부를 교화하여 남매처럼 10년을 살았다. 그리고는 각자 헤어져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찾아갔다. 우리가 다룰 부부도 부모가 돌아가신 뒤 헤어져서 애덕을 실천하자고 약속했었다.
숲정이에서 치명자 산까지
우리 교회에서는 ‘피 묻은 쌍백합’(동정 부부) 두 쌍이 알려져 있다. 첫 ‘쌍백합’은 주문모 신부가 맺어 준 전주의 유중철(1779-1801년)과 서울의 이순이(1782-1802년) 부부였다. 이순이는 1797년 가을에 혼인성사를 하고 전주 초남리로 들어갔다. 이들 부부는 신유박해 순교자가 되었다.
유중철이 1801년 봄 체포되어 전주옥에 갇혔다. 9월 중순에는 이순이를 비롯하여 다른 가족도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14일 유중철은 동생과 함께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이는 혹시라도 남편이 마지막 순간에 순교하지 못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며칠 후 시신을 거두러 갔던 사람이 발견한 쪽지가 있었다. 유중철의 옷 속에서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이순이에게 쓴 글이 발견되었다. 이순이는 1802년 1월 31일 다른 가족 3명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되었다. 다른 가족들은 이미 처형되었거나 유배 가는 등 이리저리 흩어졌다.
유항검의 가족이 전멸된 뒤 가산은 물론, 마름과 노복마저 몰수되거나 유배를 떠났다. 당시 유항검과 연루된 신자가 200여 명이나 체포되었으니 그들을 도울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의 삶의 지향이 울림이 있었는지, 누군가 이때 약 4개월에 걸쳐 각각 처형된 사람들을 김제군의 재남리 야산 비탈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그 땅이 일본인 소유가 되어 묘를 파내겠다고 하자, 신자들이 전동성당 보두네 신부(Baudounet, 1859-1915년)에게 알렸다. 보두네 신부는 1914년 유항검을 비롯하여 식구 7명의 유해를 각각 옹기에 담아, 인적 사항을 기록한 백사발에 넣고 숯으로 채워, 전동성당이 마주 보이는 치명자 산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는 유항검 등 순교자가 참수 치명한 풍남문 일대에 1908년부터 전동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14년에 외형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는 전동 성당이 마주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원해서 치명자 산의 땅을 마련했다. 이로써 이 땅에 순교자들의 유해가 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선종해서 순교자들 하단에 묻혔다.
그 뒤 전주교구는 시복 시성을 준비하면서 1993년에 이 봉분을 열어 유해를 확인하고 다시 새 백자 항아리에 담아 매장했다. 이렇게 유중철 일가 순교자들은 200년 동안 사람들에 의해 보전, 전수되고 확인되어 왔다.
동정 부부는 서로에게 걸림돌인가?
동정과 혼인은 서로 모순된다. 「칠극」에 “소금은 본디 물과 같으나 물과 섞으면 변하고, 따로 있으면 그 성질을 보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남녀가 정결하다 할지라도 가까이하면 변하는(더럽혀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혼자 동정을 지키기도 힘든데, 믿고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함께 있으면서 동정을 지키기는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이순이 부부는 4년을 동거하면서 오누이로 지냈다. 동정 서원을 깨뜨릴 뻔한 유혹을 10여 차례 겪었다. 특히 1800년 12월에는 심한 유혹을 느껴 ‘마음이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피나도록 간구하여 천주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이들의 신뢰심은 오히려 더 철석같이 굳어졌고, 이들의 사랑과 성실은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곧 동정 부부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서로에게 더 반석 같은 격려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얻은 힘으로 젊은 데도 이미 세속의 모든 허영을 가볍게 여길 줄 알았으며 애덕을 실천했다. 그야말로 하느님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동정 생활 본연의 목적을 실현해 냈다. 그리하여 ‘모든 순교자 가운데 우뚝 솟은 진주’가 되었다.
그래도 인간이 천사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이순이가 평생 지니고 있던 묵주에 달린 십자고상은 그 몸체가 다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 끝없는 기도의 동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이의 옥중 편지
이순이는 옥중에서 어머니와 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초기 교회의 신입교우였고, 성사도 두세 번밖에 받지 못했지만, 그의 붓끝은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신심과 생활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 서한을 수집했고, 1874년 출간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이 서간의 전문이 실렸다. 그러나 한글로 된 원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1955년 여름, 원본에 가까운 필사본이 나타났다. 1868년 경남도 울산에서 순교한 김종륜 복자가 친히 복사하여 소지했던 수택본이었다.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이 필사본 「옥중서간」 1권과 「사후묵상」, 「신명초행」 등을 김구정에게 기증했다. 박해 시기 신자들이 이루갈다의 옥중 서간을 필사해서 읽었는데, 이 필사본은 결과적으로 순교자가 직접 필사해서 지니고 있던 편지가 되었다.
이 옥중 서간은 뒷날 김구정이 김진소 신부에게 헌정해서 현재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는 동정 부부가 육체적 절제로 얻은 영성, 또 동정 부부가 탄생하도록 도운 부모와 친지, 이웃들의 희생을 담아, 박해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신자들의 진정한 삶, 특히 남녀 상호 존중의 길을 비추고 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 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1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3.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124위 시복 특집]
“순결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두 고귀한 마음의 결합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 이승훈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순이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어린 이순이는 일찍부터 모친에게서 글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어려서부터 「효경」 등 경전을 배워 익힌 이순이는 학문과 지식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필가 집안의 재능도 물려받아 그녀가 남긴 「옥중 편지」는 문장이 깊고 맑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이미 오래전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크게 놀란 어머니는 대견함과 현실적인 염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앞장서 삼강오륜을 지켜야 했던 양반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혼인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한 어머니는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는 이들의 결심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주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멀쩡한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동정’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궁리 끝에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아예 두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평소 유중철과 이순이의 신덕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 신부는 두 사람의 중매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이순이를 소개하며 의향을 물었습니다. 유항검은 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이순이의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서울주보 6면]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2편
[124위 시복 특집] 동정부부
“어머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천하고 약한 자식인 제가 끝없는 행복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모든 천상 기쁨이 넘치는 마음으로 어머님의 손을 잡아 영원한 고향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마침내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유중철과 열여섯 살 이순이가, 겉으로는 부부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당시 서류부가(?留婦家)라 하여 혼례를 올린 신부가 한동안 친정에 머무르던 풍습에 따라 이순이는 1년 동안 친정에 머물다가 이듬해 10월 전주의 시댁으로 내려갔습니다. 재회한 유중철과 이순이는 부모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오누이로 지내며 동정을 지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본능적 욕구가 불쑥 치솟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은 매 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지는 영신 수련의 삶이었습니다.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의 불길은 그 해 2월 이순이의 큰외삼촌인 권철신을 덮쳤고, 이 비보가 전주에 당도하기 무섭게 유항검이 체포되었습니다. ‘전라도 천주학의 괴수’라 소문난 유항검이고 보니 도무지 무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항검은 즉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유관검과 유중철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유항검과 유관검은 전주 풍남문 밖,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 능지처참 되었고 유중철은 큰칼을 쓴 채 무한정 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항검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이와 가족들은 머지않아 닥칠 환난을 예감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9월 15일, 전주 감영의 포졸들이 몰려와 이순이와 가족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순이는 옥에 갇히면서도 지필묵을 챙겨 들었습니다. 언젠가 유항검 집안이 박해를 당하거든 박해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라는 주문모 신부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9월 27일에는 옥졸들의 눈을 피해 어머니에게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1월 14일, 옥졸이 옥에 갇힌 시동생 유문석을 불러냈습니다. 이순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옥졸은
“관장의 명령이다. 유문석을 큰 옥으로 데려가서 제 형과 함께 가둘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순이는 유문석에게 “서로 잊지 맙시다!” 하고는, 가거든 형에게 같은 시간에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그림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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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서울주보 6면]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3편
[124위 시복 특집]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유문석이 떠나고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유중철과 유문석 형제가 교수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유중철이 22세의 나이로 순교한 뒤, 옥중의 이순이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순이와 가족들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에 파견했습니다. 그 결과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유배형을 받았고, 이순이는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순이는 가족들을 대표하여 “우리들은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하고 항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순이와 가족들은 결국 유배지를 향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습니다. ‘하마터면 치명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한 이순이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전주 감영에 당도한 이순이와 가족들은 서슬 퍼런 심문에도 다만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감사는 사형을 선고한 후 몽둥이로 정강이를 치고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라 감사가 의금부에 장계를 올린 지 20일이 지나도록 이들을 처형하라는 기별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소일 삼아 친정 언니와 올케 등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이는 편지에서 유배지의 관비가 되는 것보다 치명자가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내가 죽는 것을 산 것으로 알고,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의(義)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천지의 죄인이라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않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형 판결이 났습니다. 1802년 1월 31일, 이순이는 판결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숲정이라 불리는 전주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스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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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서울주보 6면]
4. 시복 결정 동정부부의 순교의 의미와 가치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들이 복자로 선포될 예정이다. 그들 가운데 유독 관심을 끄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모든 조선 순교자들 중의 진주’라고 불리는 전주 초남이의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이다. 우선 그들의 호칭에서 드러나듯이 동정부부라는 특이한 삶의 방식이 남들과 두드러지게 구별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이 사실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던 젊은 남녀가 신앙이라는 이유로 함께 동정을 지키다 순교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범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의 형태는 박해와 같은 특수한 환경 속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섭리적인 삶이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권장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기념하고 기리는 것은 이들의 진가가 단순히 혼자 지키기도 어려운 동정의 삶을 함께 살면서 지켜냈다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 전반에 서려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동정의 출발점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동정부부를 생각할 때 함께 동정을 지키기 위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았던 동정남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를 그들 성덕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처럼 간주하기도 한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혼기가 되면 양가 어른이 맺어 주는 짝을 만나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다. 이처럼 인간사의 지극히 정상적인 기쁨을 충분히 누릴 여건을 갖춘 이들이 왜 자진해서 이를 포기했었고 죽음까지 각오하였던 것일까? 그 출발점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바로 그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는 확신 자체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 받았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뿌듯한 확신을 지녔고 세례 때 모시게 된 성체 성사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을 지녔다. 그런 전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하도 커져서 자신들의 존재 모두를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동정의 삶을 결심하게 만든 계기였다. 자기가 가장 아끼는 것을 내놓는 것 이상으로 높은 충성과 헌신의 표현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추상적이지 않고 살아 있었기에 삶의 다양한 순간들, 특히 고난과 잔인했던 순교의 순간에도 모든 것을 의탁하면서 오히려 평안함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들처럼 모든 일이 영광이고 은총이고 기쁨이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늘 감사한 사람은 없었다.
동정의 본질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
특히 요즘처럼 정결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뭔가 어려운 수덕적인 가치처럼 여겨지고, 자신의 쾌락을 기꺼이 채우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정결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원천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들은 몸소 가르쳐 주었다. 성性은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며, 남녀가 혼인 안에서 성적 소통을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내어맡기는 것이지만, 성적 쾌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대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은 자신의 소유이기에 자신의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머물고 만다.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에서 동정과 정결의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이를 접하는 이들 역시 사랑의 감정이 있고 양쪽의 동의만 있다면 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전세계적으로 미혼자들은 마음만 있다면 혼전 성관계와 혼전 동거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혼인한 부부의 상당수가 이혼을 하거나 커다란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다들 정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현실에서 정결한 삶은 마치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이상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성은 인격적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상호 통교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전혀 주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성욕이나 성적 충동을 해소하고 충족시키는 것으로 성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초남이 동정부부는 정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정결할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겉으로 볼 때 동정이란 단순히 혼인하지 않고 살거나 혼자 사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어떤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요한과 루갈다가 그랬던 것처럼 동정(정결)의 본질은 무엇보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으로 사실 그들의 삶에는 어떠한 단절과 소외도 존재하지 않았고 더욱 적극적인 상호 헌신과 끊임없는 소통이 있었다. 즉 동정부부는 성이 창피하거나 수치스러운 것이어서 억제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아름답고 엄청난 일이기에 이를 기꺼이 봉헌하였고, 이를 통하여 하느님만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천상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에 그 누구보다 충실
이처럼 함께 동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아온 모습에 감탄을 하지만, 그들의 진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현세를 넘어서서 천상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에서도 그 누구보다 성실하였고,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 이들의 일상 속에 고스란히 스며든 깊은 신앙과 순박한 정신을 알아갈수록, 그들이 함께 살아온 정결한 삶, 부부생활, 가정생활, 이웃과의 관계들이 모두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바로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동정부부가 이처럼 어린 나이에도 덕스럽고 신심 있는 자들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장한 환경 속에서 신앙적이고 인성적인 양성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가정이 해체되어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신앙과 인성을 교육하지 않거나 교육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의 교훈을 주고 있다. 요한의 당숙이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 땅의 첫 순교자로 당시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지방 최고의 갑부였던 아버지 유항검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열렬한 사람으로 활발하게 신앙을 살고 전하였다. 특히 아버지 유항검이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을 전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몸소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였기에, 자연스레 집안에서부터 살아 있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루갈다의 친정 집안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 집안으로, 외숙인 권일신과 권철신은 뛰어난 학식과 신심을 갖추어 널리 신앙을 전하였다. 특히 루갈다의 어머니는 헌신적인 사랑과 열렬한 신앙의 귀감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었기에, 루갈다뿐 아니라 오빠와 남동생 모두 비슷한 삶을 살다가 순교할 정도로 일가족 모두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초남이 가정에서의 삶이었다. 부부 관계와 자녀 출산을 염두에 두는 여느 부부들과는 달리 함께 동정을 지키며 살았지만 위아래 할 것 없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꾸준한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 특히 어른들에게는 효심을 다하여 뜻을 받들었고 늘 기쁘게 해드렸으며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으로 대하였다.
동정부부로 산 것은 서로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 때문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다른 부부들의 귀감이 될 정도였다. 그들이 동정부부로 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지향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였고, 오로지 두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삶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함께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일에 있어 늘 동반자였다. 특히 순교의 여정을 걸으면서 평소 서로에 대하여 지니던 애틋한 마음과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상대방의 고통은 늘 아픔으로 남지만 그 여정을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였다. 단순히 인간적인 이해나 배려에서 멈추지 않고, 늘 함께 기도하며 서로 간의 감정 이입과 소통을 원활하게 해 나갔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동정의 삶을 함께 지켜나갈 수 있었다. 보통의 부부들이 영위하는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지만, 이 밖의 생활에서는 여느 부부들보다 더 깊고 성숙한 부부애를 표현하면서 살았다. 즉 서로를 이해하고 믿으며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했다. 한창 피끓는 나이에 젊은 남녀가 함께 동정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상호 간의 훌륭한 인격적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훗날의 육체적 순교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이웃에 관심 … 집안 종에게까지 예의 갖춰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전주 초남이라는 집안에서 4년가량 함께 살았지만, 동정부부의 마음은 늘 그 울타리를 뛰어넘고 있었다. 가족만이 삶의 전부였던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어려운 이웃들에게 많은 관심을 지니고 살았으며 종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이웃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집안에서 성장한 이들은 훗날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때가 오면 물려받은 가산을 서너 등분하여, 먼저 한 몫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다른 몫은 막내동생에게 후히 주어 부모님을 부탁하자고 하였다. 비록 실제 나눔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는 평소에 그만큼 상당한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부호가 일찍이 계획을 세워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세상에 환원하고자 한 일은 당시에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 당시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하였고 우리에게 순교자들에 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겨준 다블뤼 성인이 유독 동정부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가능한 모든 교우들이 루갈다의 글을 읽도록 강하게 권했던 것은 그들의 삶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150년 전 그가 한 권고와 메시지는 당시 조선의 교우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지금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도 더욱 긴박하고 요긴한 부탁이 되고 있다.
[쌍백합 44호, 2014년 봄, 김성봉 프레드릭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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