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탄생"관련성지
19. 귀국길(2차,3차)
1844. 2.4일,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우해 훈춘 으로 출발 (4 차 탐색 )
1844. 3,8일 훈춘을 거쳐 조선에 귀국 (2 차 입국 ), 경원에서 조선 교우 상봉 .
1845. 1.1일, 조선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 (3 차 입국 )
1845년 1월 초 의주쪽으로 해서 몰래 김대건 혼자 입국하니, 참으로 10년 만에 대하는 고국산천이었다.
1845. 1,15일, 서울 도착 . 돌우물골 (석정동 )에 유숙 .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고 주교를 맞아들여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서울 돌우물골에 작은 짐을 풀고 꼭 만나야 하는 교우들만 접촉하면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병을 몹시 앓았다.
1845. 4.30일,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등 11 명의 조선인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 .
1845.6.4.일, 상해 도착
하느님의 보호로 건강이 회복되자 준비해 온 150냥으로 배 한척을 사서 성직자를 맞을 채비를 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기해박해 때 남편이 순교하고 이리저리 떠 돌며 유리걸식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어머니를 찾아 뵈올 엄두도 못내니 김대건은 현석문 등 11명의 교우들과 그해 4월에 상해쪽을 향해 배를 띄웠다.
교우들 중에는 배를 타 본 일조차 없던 6명의 농부도 있었다.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 밤낮없이 시달리어 김대건은 끌고가던 종선과 두 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대건 역시 심하게 배멀리미에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마리아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일행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산동 배가 가까이에서 그대로 지나가려는 것을 김대건이 옷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구조를청해 상해까지 배를 끌고 가 주기로 결정받았다.
김대건 부제 일행이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교는 마카오에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접한 고 주교는 다블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로 와서 김대건을 반갑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