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상황에서도 만주국과 대한제국이 영토 다툼이 있던 시기이다.
"중국"이라는 국호가 만주 지역에 공식적으로 적용된 시점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 인물 | 출생지 | 국적(당시) | 민족 정체성 | 중국의 주장 | 반박 근거 |
| 윤동주 | 룽징, 간도 | 일본 신민(조선인) | 조선인 | 중국 조선족 | 한글 시, 항일운동,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재판 |
| 안중근 | 황해도 해주 | 대한제국 | 조선인 | 중국 조선족 | 대한제국 국민, 동양평화론, 하얼빈 의거 |
윤동주 부모의 기록
대한민국은 과거나 지금도 혈통주의(속인주의)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부모가 대한제국 국민이었기 때문에 윤동주는 당연히 부모 국적과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nvZ0SBlubqM&list=WL&index=1
대한제국의 간도 관할 기록
*주요 기록 및 증거
1902년: 고종이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 간도에 파견
1903년~1904년: 이범윤이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해 간도 내 치안 유지 및 행정권 행사
1901~1906년: 간도에 경찰서 설치, 5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 (북간도, 정성간도 등)
1907년: 간도 지역을 대한제국 영토로 표시한 지도 발행
1909년 간도협약 이전까지: 일본 통감부도 간도를 대한제국 영토로 인정하고 간도파출소 설치
*관련 자료:
*대한제국의 만주 침공과 간도 점령
*대한제국기 간도 자료집 (동북아역사재단)
1917년 윤동주가 태어난 후 1920년 일본군은 용정 연길 훈춘 지역 한인들을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만약 이들이 만주족이었다면 왜? 당시 청나라는 개입하지 않았을까?
왜? 일본에 항의하거나 맞서지 않았을까?
한인(조선인) 일본군에 의해 살해 될 때 가장 슬퍼하고 분노한 사람이 누굴까?
중국인일까? 한인(조선인)일까?
윤동주를 중국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 중국인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까?
| 출생 | 1917년 12월 30일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明東村)[1] |
| 사망 | 1945년 2월 16일(27세) 일본 제국 후쿠오카 후쿠오카 형무소 |
| 국적 | 대한민국 |
| 민족 | 한민족 |
| 언어 | 한국어 |
| 학력 |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사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중퇴 (1942년 1학기) 도시샤 대학 문학부 제적 |
| 친지 | 윤하현(조부) 윤재옥(증조부) 윤인석(조카) 김약연(외숙) 김학연(외숙) 송창희(고모부) 윤신영(삼촌) 송몽규(고종사촌 형) 송한복(고종사촌 여동생) 송우규(고종사촌 남동생) |
윤동주의 생애 초반
1886년 길림성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독실한 장로교회 장로인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尹永錫)은 1910년 명동학교의 설립자인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세기 말 조선인들이 간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간혹 미국의 청교도처럼 종교적인 이유에서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구세동(救世洞)·영생동(永生洞)·낙원동(樂園洞)·명신동(明信洞)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달리 유교를 신봉한 김약연은 처음에는 맹자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신(信)·식(食)·병(兵)'의
이념을 실천하는 유교적인 이상촌을 세울 생각으로 1901년 서당인 규암재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이상설 등이 이웃 대불동에 설립된 서전의숙을 통해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명동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때 김약연은 서울청년학관을 졸업한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하였는데,
정재면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것을 부임하는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김약연은 며칠을 숙고한 후 장로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이로써 마을에는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에는 신앙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기독교 공동체로 변모하는 한편,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을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열어서 신앙훈련과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출처 : 위키백과 사전 ----
윤동주가 공부한 명동학교 교육 내용
명동학교는 일반적인 초등 교육을 넘어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했다.
김약연은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8년 11월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1919년 3월에는 '간도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에 동참하고 동간도의 3·13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탓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일본군 간도토벌대는
1920년 10월 20일 명동학교를 파괴한데 이어, 1925년에는 명동학교를 폐쇄 조치했다.
이때까지 명동학교는 17년에 걸쳐 1,200여 명의 민족지도자를 배출하였다.
1900년 이전에 제작된 대한제국 국기. 독립군이 사용했으며,
명동학교에서 교실에 걸고 사용했다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전언이다.
윤동주가 공부한 명동학교 교가
민족운동가들의 대한제국 계승 주장
1917년 「대동단결 선언」은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선언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융희황제가 삼보(土地·백성·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이다.
황제권이 소멸한 시점은 곧 민권이 발생한 시점이다.”
이 선언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민족에게 ‘선위’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인은 대한제국의 정통 계승자임을 천명했다.
일제강점기(대한제국) 조선인 배순례 씨 신분증
명동학교 관할 관계
-- 출처: 중앙일보 --
일본이 간도에 설치한 파출소 및 영사관 지역 (1909년 이후)
일본은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 체결 후, 간도파출소를 철수하고 위 지역에 총영사관 및 분관을 설치했다
일본이 청나라에게 팔아 넘기 간도 협약 (연변지역 포함)
1910년 외국지도 “간도는 조선땅”
https://www.youtube.com/watch?v=4xNxv6bkewk
윤동주의 작품 중 조국을 표현하는 글
( 윤동주의 글은 모두 한글이었고 중국어로 된 작품은 전혀 보이지 않음)
만약 윤동주가 중국인이었다면 한글이 아닌 기본적으로 중국어로 작성해야 한다.
또한 윤동주 작품 어디에도 중국을 조국이라고 하는 표현은 전혀 없다.
🇰🇷 「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학교에 가면 조선어를 빼앗기고…”
이 시는 일제의 언어 탄압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조선어를 빼앗긴다’는 표현은 민족 정체성의 상실과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상징하며,
조국에 대한 애정과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별 헤는 밤」 중에서
“어머니, 어머니 / 그리고 나에게 주신 별 하나에 조국…”
‘별 하나에 조국’이라는 구절은 조국을 별처럼 소중하고 그리운 존재로 표현합니다.
윤동주는 별을 통해 조국을 이상화하며, 그리움과 동경을 담아냅니다.
「참회록」 중에서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24년을 무가치하게 살았소.’”
이 시는 윤동주가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조국을 향한 죄책감과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윤동주의 글 등에서는 당시 조국을 중국이라고 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윤동주가 말하는 당시의 조국은 '대한제국의 조선인'이었다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 판결
1944년 3월,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판결문)을 한 혐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_P4YY_m0t9A
대한제국 시기에는 눈여겨볼 소장품으로는 개항 이후 외국인들에게
발급해주던 일종의 여행증명서인 ‘호조(護照)’가 있으며,
황국협회 회원임을 증명하는 신표였던 ‘대한 황국협회(皇國協會) 배지’가 있다.
일제강점기 엄정섭 씨 신분증 (왼쪽) / 오른쪽은 중국인 신분증
윤동주 시인의 생존하는 현재의 친척 6촌 관계 윤형주
윤형주 (가수)
윤형주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포크 음악 가수로, 1960~70년대 ‘쎄시봉’ 활동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족 내 친척 관계입니다.
윤형주는 여러 인터뷰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하며,
그의 정신을 음악과 삶 속에서 계승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윤동주 업적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 한국 문학과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업적은 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민족의 저항 정신을 대표합니다.
1. 문학적 업적
*대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사후에 출간된 이 시집은 윤동주의 시 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인간의 고뇌와 민족의 아픔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2. 주요 작품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시.
*자기 성찰과 도덕적 순결을 강조.
《별 헤는 밤》: 고향과 가족, 별에 대한 그리움과 존재의 의미를 담은 감성적인 시.
《자화상》, 《참회록》 등: 내면의 고통과 시대적 고뇌를 표현한 작품들.
3. 민족적·역사적 업적
*한글 문학의 수호자
일본 유학 중에도 모든 시를 한국어로 집필하며, 한글의 문학적 가치를 지키려 노력함.
4, 저항 정신의 상징
시를 통해 직접적인 정치적 구호 대신, 내면의 저항과 도덕적 각성을 표현함.
5. 옥중 순국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사인은 생체실험설 등으로 논란이 있음.
6.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 추서
7. 문화적 영향
*윤동주 문학관 및 시비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고, 서울 서촌 등지에 윤동주의 흔적을 기리는 공간이 조성됨.
8. 창작 공연·음악
그의 생애를 다룬 창작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등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재조명됨.
9. 광복 80주년 헌정 앨범
대표작 ‘서시’를 바리톤 유영광이 노래로 재해석한 앨범이 발표됨.
윤동주는 “시로 저항한 청년”이자 “도덕적 순결을 지키려 한 양심의 시인”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시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보충 자료
서양 고지도가 대부분 간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한 것은 무인지대를
조선의 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을 받아 이 지역을 실측했던 레지 신부가
무인지대를 사실상 중국의 땅이 아니라고 지도에 표기한 것이다.
레지 신부의 실측을 기초로 작성한 프랑스인 듀 알드의 지도에서
“봉황성 동쪽에 조선국 서쪽의 국경이 있다.
그런데 만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조선과 싸워서 이를 정복했으나
그때 장책과 조선의 국경 사이에 무인지대를 두기로 정했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무인지대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조선과 직접 국경을 맞닿지 않기 위해 완충지대를 둔 것이다.
조선인과 청인 다툼 외교문제 비화
무인지대는 흔히 봉금(封禁)지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봉금지대란 순전히 중국 측 입장에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만주지역을 벗어나 베이징까지 진출할 때 만주는
사실상 빈 공간이 되었다.
만주족 대부분이 이동해 사실상의 중국 영토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는 만주를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고향으로 여겨
이곳에 한족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는 뜻에서
봉금지대란 명칭을 붙였다. 봉금지대의 경계선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이를 유조변책(柳條邊柵)이라고 했다.
지금도 만주 일대에는 버드나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지역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17세기 시대만 해도
중국은 유조변 밖을 중국 땅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출처: 주간경향
https://weekly.khan.co.kr/article/17076/?pt=nv#c2b
https://www.youtube.com/watch?v=8ZW50e0T96k
https://www.youtube.com/shorts/x7onULSQ2rY
https://www.youtube.com/watch?v=IMSENl5zw38
-- 토픽김 정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