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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자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것-은 무언가 어떤 사물과의 탁월한 만남을 의미한다(존재와 시간의 현상 개념 중)
*표상- 머리 속에서 재구성한 현상의 2차적 인식
표상 이전에 그때마다 이미 선행적으로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것” 즉 현상이 우선 있어야 한다. 표상과 같은 인식론은 지금 여기에 발딛고 있는 생생한 삶의 철학에서 멀어진 것이다.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 97. ≪현상≫(Phänomen)- 제7절
≪현상≫(Phänomen)-제7절
“〈현상>이라는 표현의 뜻으로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그것 자체에 있어 내보여 주는 것’, ‘드러나는 것'이다. 이 경우#파이노메나, 즉 <현상들>은 '백일 하에 또는 빛에로 데려올 수 있는 것의 총체이며 그리스인들이 때때로 간단히 #타_온타(Ta ovta, 존재자)와 동일시하고 있는 그것이다.”(28)
해설: @ #가상, #나타남, #순전한_나타남, #통속적_현상, #현상학, #현상학적 현상)
독일말 “페노멘”(Phanomen, 現象)은 그리스말 "#파이노메논"(QaLVolevov)에로 소급되고, "파이노메논”은 동사 “#파이네스타이" (@alveoBal)에서 나왔다. “파이네스타이"는 ' #자신을_내보여_준다’를 뜻한다. 파이네스타이는 “파이노”(ⓓauvw)의 중간태이다. “파이노”는 대낮의 밝음 속에 놓다', '밝은 데
놓다’를 뜻한다. “파이노”는 “포스”($ws)와 같이 "파"($a-)라는 어근에 속한다. “포스”는 '그것 속에서 어떤 것이 명백하게, 즉 그것 자체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 즉 빛이나 밝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1) 따라서 “#현상”은 ' #자신을_내보여_주고_있는_것', '스스로 드러나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해 #자기를 자기 자신에서 내보이는_것’ 또는 '명백한 것’을 뜻한다. 〈현상들>은 “대낮의 밝음 속에 놓여질 수 있거나, 빛에로 가져와질 수 있는 것 또는 #존재하는_것의 총체”이다.
2) 그런데 존재하는 것은 그것에의 접근양식에 따라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심지어 자기를 "자기 자신이 아닌 것으로서”, 즉 자신을 마치 "...인 것처럼 그렇게 내보일 수 있다.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현상은 "자기를 ...처럼 그렇게 내보이는 것”의 뜻도 갖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을 우리는 “#가상”(象,Schein)이라 부른다. 가싱은 우리들에게 그것이...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자신을 자기가 아닌 어떤 것으로서 내보일 수 있고, 그래서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처럼 보일 수 있으려면, 그것은 먼저 어떻게든 자신을 내보여야만 한다. 아니 적어도 그것은 내보이는 척은 해야만 한다. 가상은 "자신을 내보이는 것”, 즉 #현상의_결여적_양태 이다. 이로써 우리는 현상의 근원적 뜻, 즉 “자신을 내보임"이 현상의 두 번째 뜻, 즉 “자신을 ...#처럼_내보임”의 토대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_증세의_나타남”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 #나타남”(Erscheinung)이란 표현을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뜻의 “현상”과 혼동하는 것 같다.
*칸트의 "나타남”(Erscheinung)은 표상과 같은 말로 보임.
예컨대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는 것은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려 주거나 지시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의 몸의 이상은 어떤 질병을 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반점의 나타남은 질병을 알려 줌이다. 그러나 #질병_자체는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나타남”에는 1)어떤 것[반점]의 "자신을 내보임"과 2)어떤 것 [질병]의 "자신을 내보이지 않음"이 놓여 있다. 증세나 징후 또는 상징 등은 모두 나타남의 구조를 갖는다. 우리는 “나타남”을,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자기를 내보이는 어떤 것’을 통해 “ #자기를_알림”이라 규정한다.
그러나 어떤 증세의 나타남, 즉 증세를 통한 질병의 "자기 알림”은, 만일 "자신을 내보이는 것”, 즉 현상이고자 하는 것, 여기서는 증세와 같은 것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나타남”은 “어떤 것이 자신을 내보여 준다는 것”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나타남은 '자신을 내보여 주는 어떤 것'을 통해 ‘자신을 알려 옴'이다.
‘#나타나는_것’은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알리고 있는 것'에서부터 “파견 내지 방사되어 나온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만일 이때 ‘나타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알리기만 하는 것'이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나타나는 것'은 이제 #칸트에서의 “#물_자체"와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파견 내지 방사
된 것으로서 그것['어떤 것']의 본질적 존재를 형성하고 있지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나타남”을 “ #순전한_나타남”이라 부른다. ‘순전한 나타남'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알려 주고 있는 것 자체를 끊임없이 감추고 있다. 이러한 "감춤"은 사실상 "내보이지 않음”이다. '순전한 나타남’의 “내보이지 않음”은 “자신을 ...처럼 내보임”으로서의 가상이 아니다. 그러나 ‘순전한 나타남' 자체 속에 "자신을 내보임" 이라는 현상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한, 그리고 현상 개념이 "자신을 ...처럼 내보임"이라는 가상 개념으로 변형될 수 있는 한, 나타남은 또한 순전한 가상이 될 수 있다.
#나타남”은 ‘존재하는 것' 자체 안에 있는 지시 내지 알림의 연관을 의미하며, 반면 “#현상”은 우리가 어떤 것을 그것이 자기를 그 자신에 있어 내보여 주는 방식으로 만난다는 탁월한 만남의 양식을 말한다. 지시하거나 알려 주는 것은, 그것이 그 자신에서 자신을 내보여 줄 수 있을 때에만, 즉 '현상'일 때에만,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그 자체에서 내보여 줌"이라는 현상 개념에는 "무엇"이 현상인지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 개념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다. 우리는 '자신을 내보이는 모든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현상"이라 부른다.
우선 현상일 수 있는 것은, 칸트적 의미로, 경험적 직관을 통해 접근가능한 그런 존재자이다. 우리는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존재자인 경우에 이해되는 현상”을 “ #통속적_현상”이라 부른다. 칸트의 문제들 내에서 이러한 통속적 현상에는 그때마다 이미 선행적으로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_현상"이다.
현상학적 현상 개념은 “현상학"의 개념이 제대로 해명될 때에만 결정될 수 있다. “#현상학"은 현상, 즉 "#자신를_내보이는_것"을 그것이 자신을 내보이고 있듯이 그렇게 그것 자체에서부터 “보이게 해 줌”을 뜻한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보이게 해주어야 할 것은 우선 대개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것, 우선 대개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선 대개 '자신을 내보이는 것’, 즉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고, 그 존재하는 것'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은폐되어 있거나, 은닉 속으로 다시 되떨어지거나, 망각되어 버리거나, 가상의 형태로 잘못 놓여 있거나 하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 인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의미의 현상은 존재자의 존재와 그 의미 그리고 그 #변양태들 과 #결여태들 등이다.
현상학의 예비개념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15 / 칸트의"Erscheinung"은 하이데거의 "Phänomen"과 다르다. 양자 모두 "현상"의 뜻이지만 전자는 후자에 의존해서만 나타난다! - 예도TV
*칸트의 현상[現象,Erscheinung ]은 이기상 교수는 '나타남'으로 번역하며 표상과 비슷한 용어이다. 아래 참조
현상[現象,Erscheinung ]
칸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현상은 기본적으로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대상, 또는 영역을 의미한다. 현상의 배후에서 그 원인으로 상정되는 불가지의 '사물 자체(Ding an sich)', 또는 현상과 동일한 '표상(Vorstellung)'에서도 개개의 개별적 주관의 상태에 구속되는 '가상(Schein)', 이러한 사물 자체와 가상은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최종적으로는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며, 현상은 말하자면 그것들의 좁은 사이에 위치한다는것, 이렇게 인식된 현상만이 객관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와 같은 현상 개념
은 『순수이성비판』의 성립에 선행하는 이른바 <침묵의 10년>의 사색에서 확립되며, 철학의 역사를 구획하는 인식론의 성립 기초가 되었다.
(1) 현상 개념의 확립 과정.
1770년의 취직 논문 『감성계와 예지계의 형식과 원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었다. 현상(페노메논)은 감성의 수용성에 대응하며, 예지체(누메논)는 감관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지성의 능동성에 대응한다. 감성은 "현상하는 대로의 대상"을 인식하고, 지성은 "존재하는 대로의 대상"을 인식한다. 인식은 감성의 법칙에 복종하는 한에서 감성적 인식이며, 지성의 법칙에 복종하는 한에서 지성적 인식이다. 이와 같이 1770년의 단계에서는 감성ㅑ적 인식은 "주관의 특수한 소질에 의존"하며,"그 변양은 주관의 다름에 따라 다르다"와 같은 인식에 불과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주관적 조건을 벗어나 대상을 존재하는 대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적 인식이다.
이 시점에서 지성(오성)은 말하자면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했다(지성의 실재적 사용).칸트의 사색은 한편으로 지성의 실재적 사용을 단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감성의 개별적 주관성을 넘어서는 방도를 모색한다. 비판기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전자의 대상은 '사물 자체'이며, 후자의 대상은 '가상'인 것이 된다.
그런데 감성만이 독립적으로 인식을 행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더라도 '주관적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70년대에 칸트가 생각한 것은 감성과 지성이 공동으로 해서야 비로소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는 관점이다.
1775년경의 초고로 추정되는 Duisburg'scher상의 인식은 "지성에 의해서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지성에 의해서 현상은 그것이 "주어질 때의 개별성에는 의존하지 않으며", "단순한 감각에서 구별되어 대상의 개념과 관계"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만 마음의 내적인 변양이 있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감성과 지성의 "양자가 합일하는 것에 의해서만 인식은 성립한다" [B 75] 되어 있다. 감성과 지성은 70년 논문에서처럼 인식의 종류의
구별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요소의 구별'로 된 것이다.
(2) 현상의 성립.
시간 • 공간이라는 '순수 직관'은 현상 성립에 불가결하다. 왜냐하면 "감성의 순수 형식을 매개로 해서만 대상은 현상으로서 나타나는바,요컨대 대상은 경험적 직관의 객관이 될 수 있는"[B 121f.] 것이고, 순수 직관은 "현상으로서의 대상들의 가능성의 선험적인 조건"을 포함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상의 성립에는 범주의 활동도 불가결하다. 현상은 "그것이 범주의 통일에 의해서 대상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현상이라고 불리는"[A 248f.] 것이기 때문이다.
(3) 현상과 가상
확실히 현상은 칸트에서 "단적인 표상(Vorstellung)에 불과" [A 250]하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상은 단순한 가상(Schein)과는 다르다. 현상에는 언제나 "현실에 주어진 것으로서의 대상"이 대응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상은 "감관과의 관계에서 대상 자신에 관해" 객관적으로 사태를 언표한다. 이에 반해 가상의 경우에는 "대상 자체에 관한 사태를 결코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언제나 개개의 주관과의 관계에 구속된 상태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다[B69 Anm. f.를 참조].(4) 현상과 사물 자체. 칸트는 현상과 사물 자체의 관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예를 들어 인식(erkennen)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유(denken)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BX X VI f.]는 것은 유보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현상은 "현상하는 어떤 것 없이 존재한다는 불합리" [같은 곳]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현상에 한정된다. 우리가 인식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로서의 어떠한 대상에 관해서가 아니라 사물이 감성적 직관의 대상인 한에서만, 다시 말하면 현상으로서의 대상에 관해서만 이다"[같은 곳]라는 것을 『순수이성비판』의 분석
론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 구로사키 마사오(黑崎政男
첫댓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면서 근대철학을 열었고 칸트는 그 생각의 형식 속으로 시간과 공간을 집어넣어 구성적 인식론을 전개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루었으나 "지금""여기" 발딛고 있는 삶의 생생한 철학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그러므로 머리속에 들어간 시간과 공간을 머리 밖으로 꺼집어내어 너와 내가 만나는 물성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현상이고 존재론이다
「현상- 자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것-은 무언가 어떤 사물과의 탁월한 만남을 의미한다(존재와 시간의 현상 개념 중)」
우리는 만난다/하재연
그 안에 네가 있었다.
라이트가 쨍, 하고 깨지는 순간
너의 팔이 부서지고
흰 공이 너의 밖으로 아득하게 날아갔다.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렸고
라이트에 눈이 멀었다
그 안에 네가 있었고
주위는 조용했는데,
어디선가 비가 내리듯
바깥이 젖는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푸른 잔디가 돋아났고
붉은 흙투성이 신발을 하고
너는 뛰고 있었다.
존재'는 시간적 존재임과 동시에 공간적 존재이다. 즉,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란, 칸트의 '물자체'처럼 내 머리 속의 표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바깥에서 실재로 '공간'을 점유하며 '시간'성을 가지는 '존재'를 말한다. '존재'는 결코 생각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위치하는 '세계' 역시 이미 '공간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 하나의 '존재자'는 이 세계 속의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맺으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