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의 언어, 상처의 언어
-이재무론
오민석 평론가·단국대 교수)
I.
메를로 퐁티M. Ponty에게 있어서 주체는 “몸-주
체body-subject”이다. 그의 말대로 주체는 몸
앞에 있지 않고, 몸 안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는 몸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각이란 오로지
“감각 덩어리mass of the sensible”인 몸을 통
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지각을 이야기하는 사
람은 이미 몸을 사유하고 있다. 지각이란 몸이 몸
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 안엔 감각 덩어리
의 적들인 이성, 관념, 그리고 개념이 들어와 있
다. 개념과 관념이 감각 덩어리를 억압할 때, 몸-
주체는 몸을 잃는다. 시는 개념과 관념 아래서 신
음하며 그것에 저항하는 몸의 언어이다. 시는 지
식이 아닌 지각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시 안의
몸-언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시는 몸의 옷을 입고 개념에 대하여 말하며, 어떤
시는 몸의 언어로 몸에 말을 건다. 이런 점에서,
이재무의 언어는 후자에 가깝다. 한국 서정시의
전통 속에서 이재무처럼 몸에서 나온, 혹은 그 자
체 몸인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도 드물다. 이재무
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그를 몸으로 해석하는 것
이다.
숫돌에 벼린 낫을 들고 나가
시뻘겋게 독 오른 해의 모가지를
댕강댕강 잘라 들판에 던져 두고
흐르는 피는 모아 두었다가
강물에 쏟아 버렸다
물컹물컹 풀이 치솟고
부글부글 물은 끓기 시작하였다
밤이 오면 누군가 우물 속
달을 퍼 올려 온 산야에 뿌려대었다
숲속에서는 살찐 적막이 구렁이처럼
줄기와 가지를 칭칭 감아올리고
반성을 모르는 풍경은 날마다 번성하였다
「풍경」 전문
서정시의 주체가 대체로 사물에 스며 들어가 그
것을 주관성의 색채로 물들인다면, 그리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의 평화로운 공감대에 도달한다
면, 이재무는 마치 들짐승처럼 대상에 달려든다.
그는 사물을 낫으로 자르고, 그것의 속내를 끄집
어낸다. 그러면 대상은 치솟고, 번성하며, 끓어오
른다. 대상에 대한 이 거침없는 돌격 자세는 이재
무의 야생성에서 비롯된다. 그가 이렇게 대상을
절단할 때. 대상의 속살이 우렁우렁 흘러나온다.
이재무의 시에서 주체와 대상은 늘 활발한 운동
성의 상태에 있다. 그것들은 들끓는 생성의 기운
속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활발한 세포 증식 운동을 사물
속에서 재발견하는 것이다. “적막이 구렁이처럼”
살찌는 모습을 보라. 모든 줄어는 주어 안에 이미
내재해 있다는 들뢰즈G. Deleuze의 말은 다음
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재무 시의 모든 주어엔
이미 운동성이 내재해 있다. 이재무의 줄어는 형
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얼핏 김수영의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절망」)을 연
상시키는, 이재무의 “반성을 모르는 풍경”이란
무엇인가. 김수영에게 있어서 풍경은 "반성하지
않으므로 “절망”의 대상이다. 이재무에게 있어서
반성을 모르는 풍경”은 모든 형태의 억압과 코
드와 훈육과 규율을 거부하는 ‘몸’이다. 그것은
권력의 반대편에 있는 욕망이고, 규범을 거부하
는 자유이며, 멈춤을 조롱하는 운동이고, 끊임없
이 “번성”하는 생명의 힘이다.
몸의 굴 속 웅크린 짐승
눈뜨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수성, 몸 밖의, 죄어오는 무형의
오랏줄에 답답한 듯
발버둥 치네 그때마다 가까스로
뿌리내린 가계의 나무 휘청거리네
오랜 굶주림 휑한 두 눈의
형형한 살기에 그대가 다치네
두툼한 봉급으로 쓰다듬어도
식솔의 안전으로 얼러보아도
도박, 여자, 술로 달래보아도
오오, 마음의 짐승
세운 갈기 숙이지 않네
「마음의 짐승」 전문
이 작품은 이재무의 시를 끌고 가는 동력이 무엇
인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몸의 굴
속 웅크린 짐승”이다. 그것의 출처는 몸이며, 그
것은 몸의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출생과 동시에 몸의 어떤 부위에서
생성된 채, 규범과 통념의 검열을 피해 숨어있는
어떤 것이다. 이재무는 그것을 “수성”獸性이라
부른다. 그것은 몸의 원리에 충실하며 규범, 권
력, 문명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시스템은 생존에
필요한 각종 '뇌물’로 그것을 어르기도 하고 협박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인 의미에서)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 “형형한 살
기”는 오로지 주체가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할 때
사라질 뿐이다. 그것은 온갖 회유와 공갈 앞에서
도 웅크릴 뿐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배부르다.
||,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이미 짐작하겠지만, 이재무
시의 지평은 결국 이 몸의 언어와 시스템의 언어,
욕망과 규범, 자유와 코드(권력) 사이에 펼쳐져
있다. 그의 시는 이 대립항들의 길항이 내는 소리
이며, 그의 영혼은 늘 그 틈에 끼어 끙끙 앓는다.
사실 이런 갈등은 보편적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
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가 몸, 욕망, 자유의 주체
를 적극적으로 전경화하며 시스템, 규범, 권력에
대해 강력한 싸움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1)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
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내 일상의 종교」 부분
2)
후생은 마도로스로 살아가리라
가정 같은 건 꾸리지 않으리라
각 나라 항구마다 안개처럼 나타나서
염문을 뿌리고 고양이처럼 사라지리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떠돌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리라
「후생後生」 부분
1)에서도 이재무는 자기 안의 “발광하는 짐승”을
주목한다. 그것은 “타락을 꿈꾸는 정신”이다. 그
러나 엄밀히 말해 타락을 꿈꾸는 짐승은 정신이
아니라 몸이다. 그는 그것을 “순치시키기 위해”
걷는다. 산책은 그가 자기 안의 짐승을 다스리는
한 방법이다. 그것은 영혼의 높은 곳에서 육체의
낮은 것을 아우르고 달래는 “일상의 종교”이다.
그는 자기 안의 짐승을 훈육하며 시스템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한다. 짐승의 상태는 늘 위험하므
로 그는 몸의 명령에 따라 체제의 국외자가 될 때
마다 산책의 조용한 채찍으로 자신을 돌려놓는
다. 그에게 산책은 혼망忘을 깨우는 죽비竹笑
이다.
그러나 규범의 문법 안으로 복귀할 때마다 그는
다시 일탈을 꿈꾼다. 2)는 그런 욕망의 ‘낭만적
인’ 표현이다. “가정 같은 건 꾸리지 않으리라”는
진술은 그의 내면에 항상 넘친다. 그는 야생의 기
후를 언제든 노출할 수 있는 위험한 짐승이다. 그
는 초자아의 빈틈을 안개처럼 빠져나가고, 통념
을 비웃는 풍문을 퍼뜨리며, “고양이처럼" 사라
지는 “후생을 꿈꾼다. 후생은 현생을 거부하는
자리에서 그려진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떠돌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꿈은 모
든 형태의 정주定住를 거부하는 사람의 지도地
圖이다. 아나키스트에게 가정 같은 공간은 없다.
아나키스트는 모든 형태의 시스템을 끝까지 거부
한다는 점에서 욕망-주체이고 몸-주체이다. 몸-
욕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으므로 정서적 유목민들
은 늘 허기에 시달린다.
5.59%
늦은 밤 취해 걷다가 가로수와 부딪쳤습니다. 나
무가 엄청 화를 냈습니다. 넌 하는 일이 뭐냐? 불
만 토로밖에 더 있냐? 왜 내 잠자리까지 방해하느
냐? 난 미안하다, 할 말 없다, 하면서 때마침 참을
수 없는 요기를 느껴 오줌을 갈겼습니다.
「만취」 전문
만취 상태에서 자아와 초자아의 검열은 매우 느슨해진다. 전복의 기회만을 노리던 리비도는 드
디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다. 그러나 이 욕망의
범람 상태에서도 화자는 여전히 자기 검열을 한
다. 이것은 두 가지를 암시한다. 첫째, 규범의 사
회학은 얼마나 막강한가. 둘째, 주체들은 그 아래
에서 얼마나 혹독한 매를 맞는가. 두들겨 맞은 길
은 욕망의 해방 공간에서도 습관처럼 자기를 검
열한다. 그런데도 이재무는 관습적인 검열의 순
간에도 배설의 파괴본능을 억제하지 않는다. 오
춤을 '갈기는' 행위는 규범의 문법을 파괴하는 몸
의 힘에서 나온다. 그는 규범과 욕망의 길항 속에
존재하지만, 늘 욕망의 궤도로 돌아가길 원한다.
'억압된 것의 회귀'야말로 몸의 언어, 야생의 언
어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불만 토로”는 만족을
모르는 주체의 특권이다.
가스 불 위에 놓은 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리고 있
다. 비등점에 오른 주전자 속 물방울들, 저 들끓
는 분노의 수증기가 주전자 뚜껑을 확 열어젖힌
적은 없다. 절정의 한순간 정점을 찍은 물의 알갱
이들은 뚜껑 안에서 시나브로 휘발되거나 바닥을
태웠을 뿐이다. 불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나는 우
리가 막 통과해 온 근현대사를 읽고 있다.
「근현대사」 전문
자고로 완성된 역사란 없다. 역사는 유토피아 욕
망이 실현되는 과정이지만, 유토피아는 끝내 오
지 않는다. 완성된 유토피아는 없다. 유토피아 욕
망은 최선의 상태에서 더 나은 것을 꿈꾸기 때문
이다. 유토피아는 현실이 되는 순간, 도래할, 오
지 않은 미래로 바뀐다. 그러므로 “역사는 늘 우
리를 해친다!History hurts!” (프레드릭 제임슨
F. Jameson) 몸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답게
이재무는 역사의 이런 발전 법칙도 욕망의 방정
식으로 풀어낸다. “들끓는 분노의 수증기”는 인
민의 넘치는 리비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점에
이르러서도 끝장을 보지 못한다. 시스템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통념의 규율을 파괴하고 훈육의
이데올로기를 조롱하며 저항의 에너지가 폭발할
때도, 시스템은 그것의 김을 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시나브로 휘발되거나 바
닥을 태웠을 뿐”인 것 같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항
상 다시 시작된다. 역사는 인민을 해치고, 상처받
은 인민은 거절당한 무의식처럼 전복의 기회를
다시 노린다.
너와 더불어 이 밤 내
서둘러 가야 할 곳 있는 양
몸 안에 짐승이 들어와서
발바닥 뜨거워지고 팔뚝에 피 솟는다
눈발이여, 님은 어제의 냇물 되어
저만큼 흘러갔는데
몸에 피는 꽃
이 더운 숨을 어이할거나
「눈」 부분
|||
몸의 언어는 모든 현재를 과거로 만든다. 그것은
도래한 현재를 지우며 도래할 미래를 욕망하므로
항상 결핍의 상태에 있다. 그것은 “님”을 순식간
에 “어제의 냇물”로 만들고, 안 보이는, 오지 않
은 미래를 꿈꾸며 “더운 숨”을 내쉰다. 그것은
“서둘러 가야 할 곳”에 도착하는 순간 거기에서
떠난다. 몸의 언어는 완성의 순간에 다시 “발바닥
뜨거워지고 팔뚝에 피 솟는” 언어이다. 그것은 채
워지지 않는 본능의 언어, 짐승의 언어이므로 동
시에 유토피아의 언어이다.
이재무를 읽을 때마다 나는 상처받은 짐승의 모
습을 떠올린다. 저항이 클수록, 욕망이 비대할수
록 주체는 더욱 많은 상처의 가능성에 노출된다.
싸우지 않고, 불만을 품지 않으며, 현실에 안주하
는 자는 상처 받을 일이 없다. 시스템은 가장 온
순한 자에게 가장 관대하다. 가장 강력한 욕망이
가장 강력한 좌절을 부른다. 그의 언어가 몸의 언
어이고 욕망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언어의 이면
은 더욱 많은 상처로 얼룩져 있다. 그 상처는 개
체의 일상적 경험, 가족사, 공동의 근현대사에 걸
쳐 폭넓게 각인되어 있다.
명사에는 진실이 없다
진실은 동사로 이루어진다
신이나 진리를 명사로 가두지 마라
「눈」 부분
움직이지 않는 자는 다치지 않는다. 이재무는 명
사가 아닌 동사의 시를 쓴다. 그는 움직이고, 생
성하고, 번성하며, 넘쳐흘러 세계와 부딪힌다. 저
항하지 않는 자에게 검열이란 없다. 시스템은 움
직이지 않는 자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통념은
보호색의 명사 안에 갇혀 있다. 통념은 상처받지
않는다. 오직 짐승의 언어만이 정상성normality
을 비웃으며 상처를 자처한다.
나는 오늘도 한 인간을 죽였다
사는 동안 얼마나 더 인간을 죽여야 할까?
매번 이것이 마지막이라 다짐하지만
59%
결의를 무위로 돌리는 인간이 나타나
철옹성 같은 각오와 인내를 굴복시킨다
사람이 아닌 인간을 죽인 피 묻힌 손으로
시를 쓰고 밥을 먹고 술잔을 잡고 기도를 올린다
…(중략)…
인간을 죽인 날은 죽은 자들보다
내가 더 아프고 괴로웠다
…(중략)…
죽음을 저지를 때마다 죽음은 나를 훈육한다
- <악몽> 부분
이재무의 상처는 세계와의 불화에서 비롯된다.
불화는 퇴행을 용납하지 않는 정신에서 발생한
다. “사람” 종이 “인간” 종으로 바뀔 때, 그는 세
계와 불화한다. “인간”이 다시 “사람”으로 격상
되기를 소망하지 않는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
는 “사람”이기를 포기한 “인간”과 싸우며 상처받
는다. 그에게 상처는 고통스러운 “훈육”이다.
그러나 수상한 세월은 내 꿈을 앗아갔다.
나는 내 뜻과 상관없이 살아왔다.
이러구러 시간은 살같이 흘러
어느새 하산의 생을 살고 있는 나는,
분노를 학습시킨 서울시 주민이 되어
조석으로 한강 변을 걷고 있다.
어릴 적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운명에게 멱살을 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운명」 부분
앞의 시에선 “훈육”이, 이 작품에서는 “학습”이
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의 “몸의 굴 속 웅크린 짐
승”은 그와 세계의 관계가 훈육/전복의 관계라는
것을 안다. 코드는 개체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으
개체를 그것의 문법에 가장 잘 맞는 것으로 만
든다. 일탈은 코드에 대한 도전이므로, 코드 안의
모든 개체는 코드의 관습에 의해 철저하게 “훈
육”되고 “학습”된다. 나이 들어 “하산의 생을 살
고 있는” 화자는 자신의 “분노”가 철저하게 “학
습” 당했으며, “멱살 잡힌 채 끌려온 것이라는
자각을 한다. 그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를 때,
우리는 규범과 통념과 코드의 무섭고도 막강한
힘을 본다.
아버지로부터 도망 나와
아버지를 지우며 살아왔지만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
몸 깊숙이 뿌리 내린,
캐내지 못한 아버지
여태도 나를 입고 사신다
아버지로부터의 도피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나는 평생을 꿈꾸며 살아왔으나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식민지
불쑥, 아버지 튀어나와
오늘도 생활을 뒤엎고 있다
아버지」 부분
|||
무릇 시의 ‘다의성’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
의 아버지를 단지 생물학적 아버지로만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아버지이면서 동
시에 초자아이고 통념이며 시스템의 문법이다.
그것은 상징계를 지배하는 ‘대문자 아버지의 법
칙Father's Law‘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렇게
읽을 때, 이 시의 의미 폭은 훨씬 더 넓어진다. 몸
의 언어는 오이디푸스의 언어이다. 그것은 아버
지의 언어, 독재, 독점, 권력, 권위, 폭력, 가부장
의 언어에 저항한다. 몸의 언어는 아버지의 학습
과 훈육을 거부하며,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
리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처절한 자기반성을 보여준다. 화자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으나 현
재의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의 식민지”임을 발견
하고 경악한다. 그것은 마치 혁명을 외치다가 자
아와 초자아의 검열 몽둥이에 고분고분해진 무의
식처럼 처참하다. 이 대목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
람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
심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
다.”는 니체의 전언은 유용하다. 시스템은 무의
식의 전복 운동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욕망이 통
념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 통념도 욕망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법칙과 싸우는
일은 절대 녹록하지 않다. 시스템은 전복의 욕망,
해방의 무의식을 뒤엎고" 있는 청동 지붕이다.
이재무의 몸-주체와 몸-언어는 불통의 청동 지붕
에 끊임없이 머리를 부딪친다. 그 아픈 울림, 패
배의 메아리, 조종弔鐘 속 생명의 소리가 이재무
의 시다
https://naver.me/GUDoqsAV
중요시인 자세히 읽기-이재무(오민석)
막간 / 이재무
양철지붕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요란하던
매미 울음이 뚝, 그쳤다
얼마 후 불쑥 생각난 듯
매미들은 또, 울음통을
열어젖혀 한껏 소리의
폭우를 솓아 내리라
울음과 울음 사이
그, 막간을
고요의 물결이 들어와 채운다
출렁이는 고요
고요의 심해, 아득하다
저녁 예찬 / 이재무
하오, 풀잎의 그늘 속에서 예감하는 저녁은 꽃송이처럼 밤을 연다.
농가에는 들에 나가 있던 가축들이 돌아오고, 항구에는 바다를 낚던
선박들이 돌아온다. 밤의 지붕 아래 상점들이 하나둘 불을 켜기 시작
하면 비로소 도시는 비 젖은 야생초처럼 활기를 띤다. 크고 작은 빌
딩에서 튀어나온 물방울들 물결 되어 흘러가는 인환의 거리. 저녁은
갓 캐온 식물처럼 푸르고 저 흥성스러운 골목 속으로 나는 야생이 되
어 컹컹, 짖으며 걷는다. 저녁은 생의 자궁. 나는 날마다 저녁에 태어
나 아침에 죽는다.
나무도마 / 이재무
아침 잠결에 아내의 도마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마 소리의 일정한
가락이 귀의 골목으로 걸어와 몸의 각 기관 속으로 스며듭니다. 저
소리가 잦아들면 온갖 냄새의 향연이 열릴 것입니다. 먼 옛날 어머니
의 부엌에서 들려오던 도마 소리가 문득 그리워지는 아침입니다. 도
마 소리는 칼이 도마에 부딪쳐 내는 소리입니다. 도마가 우는 소리인
것이지요. 도마에는 무수한 칼의 자국들이 있고 거기에는 맵고 시고
짜고 쓴, 색색의 냄새들이 배어 있습니다. 도마는 먼먼 옛적부터 오
늘까지 어머니, 아내들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어머니 아내
들이 내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는 셈입니다.
돌아간다는 말 / 이재무
나는 돌아가는 중
어제도 그제도 돌아가는데 열중했다
태어나서 내가 한 일은 돌아가는 일
왔으니 돌아가는 것
돌아가는 길목에 벗과 의인
강도와 도둑 그리고 천사를 만났지만
나그네는 길에서 쉴 수가 없다
돌아가서 나는 말하리라
괴롭고 슬픈 일이 있었지만
약 같은 위로와 뜻밖의 사랑과
기쁨으로 걷는 수고를 덜 수 있었노라
나는 돌아가는 중
시간의 가파른 계곡을 타고
푸른 별, 숨 탄 곳
돌아가 나는 마침내 나를 벗으리라
흘러넘치다 / 이재무
어릴 적 시골집에는
흘러넘치는 것들 천지였습니다.
뒤꼍에는 고요가 고여
흘러넘치고 앞마당엔 햇살이 쌓여
흘러넘치고 뜰팡 어머니가 벗어놓은
고무신엔 밤새 뒷산에서
울던 새소리 한가득 차서 흘러넘치고
마루에는 달빛이
윤슬처럼 반짝반짝 흐르고
부엌엔 한낮에도 졸졸졸
어둠의 물이 새고
우리마다에 가축들 울음이 질펀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 엄니 구시렁대는 잔소리가
귀에 따갑고
살구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밑 둘레엔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에서
흘러내린 그늘이 넘실거렸죠,
이렇듯 알뜰, 살뜰하게
흘러넘치던 시골집은
이제 내 마음에 들어앉아
떠올리고 호명할 때마다
그리운 것들을 내게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절실한 주관성
그리고 야생의 사유
-이재무론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교수
Ⅰ.
무릇 시가 권태와의 싸움이고 클리셰clich'e와의 지속적인 작별이라면,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서정시는 고대로부터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내부의 다양성을 인정할지라도, 유구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문법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리라lyra라는 현악기에 맞추어 읊어졌던, '노래-시'라는 서정시lyric의 원래의 개념은 지금까지도(서정시의)음악성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이어진다. 운율rhyme과 율격meter의 중요성은 지금도 이야기 시narrative poetry보다는 짧은 서정시에서 훨씬 더 강조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시학의 근본개념》에서 '서정성'을 "내부화Erinnerung, interiorization"fk 정의한다(참고로 국내에서 슈타이거의 이 용어는 거의 '회감 回感'혹은 '회상'이라 옮겨지는데, 이 글은 이 책의 영역자들의 번역인 '내부화'가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따른다). 슈타이거는 위 책에서 "서정적 상호침투Ineinader, interpeneration를 위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로 내부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밝히고, 이어서 "시에서는 현재, 과거, 심지어 미래조차도 내부화되고 기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볼프캉 카이저Wolfang Kayser같은 이론가도 서정시의 본질을 "대상성의 내면화"로 규정하였는데, 대체로 이런 동의의 과정을 거쳐 오랜 세월 동안, 서정시는 주체가 자신의 정념으로 대상을 내면화하고, 동일시하는 시들로 정의되어왔다.
모더니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들이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왔던 것을 염두에 두면, 서정시만큼 고루하고 낡은, 그러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시의 장르도 없다. 따라서 지금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이 수천 년 된 문법을 계속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정시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워낙 많이 써졌고, 그래서 어찌 보면 새로움의 가능성이 가장 적은 장르이다. 그리하여 서정시에서 미래의 고갈을 느낀 많은 시인이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나라로 건너갔다. 그곳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이 건설할 시의 잠재성이 넘치는 곳이었다. 새로움이야말로 예술적 글쓰기의 기본이라 할 때, 이런 점에서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은 가장 새롭기 힘든 공간에서 그것을 구현하겠다는 돈키호테이거나 대단한 야심의 소유자들이다.
이 글을 서정시에 관한 긴 사설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재무야말로 가장 진부하고 지루한 문법이 재발하는 곳에서 시적 생존의 운명을 걸어온 뚝심의 시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동안 그가 낸 열 권 이상의 시집들을 모두 읽으면서 내가 계속 던졌던 질문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는 이 진부한 문법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어떻게 그것을 더 유구한 문법으로 강화했을까.
독감에 걸린 아들
등짝에 달고
소아과병원 가는 길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날의 새 울음소리
크게 들렸네
울타리 산수유나무 가지마다에
새끼 잃은 원한의
피울음 널어놓다가
외려 돌팔매질에 혼났던,
돌아보면 그저 유년의
사소한 놀잇감이었을 뿐인
새 울음소리
25년 멀고 먼 거리
순간으로 달려와서는
못 갚은 죄의 가슴
콕, 콕 찍어왔네
-<때까치> 전문
내부화를 통해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서정시의 본질이라면, 이와 같은 동일시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정서적 '논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 논리가 부족할 때, 대상을 순전히 자기감정으로 읽는 것은 존러스킨John Ruskin이 지적한 바 '감상적 오류parchetic fallacy'dp 빠질 수 있다. 감상적 오류는 실패한 서정시의 전형적인 예이며, 주체/ 대상의 동일시에 정서적 논리가 빈약할 때 생겨난다. 주체/대상의 동일시는 주관성으로 객관성을 완전히 덮는 행위이므로 많은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이런 위험 속에서 작동된다. 서정시는, 주체에 의한 대상의 전유를 압도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절실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패한다. 이재무 시인이 서정시의 오래된 관성을 견뎌내고, 그 안에서 승부를 거는 한 가지 방식은 바로 이 '절실함'이다. 위 시에서 독감에 걸린 '아들 : 때까치 새끼', 그리고 '화자: 어미 때까치'는 엄밀히 말해 각기 별개의 존재이다. 양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그러나 시인은 논리를 무시하고 때까치 '새끼 :어미'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내부화)'자신 : 자신의 아들'과 동일시한다. 이 동일시는, 논리상으로는 비약이고 인식론상으로는 과도하게 주관적이지만, '정서적 논리'가 받쳐줄 때 '시적 진리'가 된다. 서정시는 이렇게 '정서적 절실함'으로 객관적 논리를 뛰어넘어 시적 진리에 도달한다.
서정과현실, 2021 하반기호/ 중요시인 자세히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