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조상 제사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박해. 신해사옥(辛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박해로 윤지충(尹持忠,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0~1791〉이 순교하였고. 그 여과가 서울과 경기도와 충청도에까지 미쳐 많은 신자들이 문초를 받고 배교하거나 순교하였다.
신해 박해는 여러 박해 가운데 비록 그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 천주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령과 그 파문〕조선의 근기남인(近畿南人)실학사들은 신교사등의 선교도 없이 예수회 회원들이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서 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런데 예수회 회원들은 동양의 전통 세례인 유교식 조상 제사와 공자(孔子) 공경 의례가 자녀나 제자가 죽은 부모나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상징적 표현이요 단지 국민적, 사회적 의례로 보아 허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저술한 한역 서학서에서는 조상 제사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예수회 회원들이 저술한 한역 서학서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조선교회의 신자들은 당연히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뒤늦게 중국 선교에 뛰어든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은 이 제례가 선조와 공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는 종교 행위로서 미신 내지 우상 숭배라고 판단하고 금지하였다.
이 문제에 있어 교황청은 금지, 허용, 금지라는 약 100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교황 베네딕도 14세 (Bcncdictus XIV, 1740-1758) 1742년(영조18)에 칙서〈엑스 궈 싱굴 라리〉(ExquoSingulaii)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 제사 금령이 조선교회에 전달된 때는 1790년(정조14)으로. 조상 제사를 허용하는 예수회 회원들의 한역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가 이미 널리 전파된 뒤였다. 즉 1790년에 사신(使臣)행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이 구베아(A.deGouvea, 1751〜1808) 주교로부터 조상 세사를 금지하는 사목 서한을 받아와 조선교회에 전달하였다.
당시 조선교회는 양반 신사들이 지도층을 형성하여 이끌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은 조선교회에 큰 충격이었다. 이에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안타까움과 함께 대책을 호소하였으나. 이 금지령은 교황 외에 그 누구도 변경 또는 완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교는 다른 묘책을 줄 수가 없었다.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에 대한 조선 신자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는데,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상 제사를 받들었다. 1794년(정조 18)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가 천주 신앙과 조상 숭배의 병행이 불가함을 명백히 밝히기 전까지만 해도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에 의거하여 조상 제사를 폐지한 신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진산 사건의 전개 과정] 진산에 살던 선비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은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령을 충실히 지킨 몇몇 신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이 전해지자 주저하지 않고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또 1791년 5원에 윤지충의 어머니 권(權》씨가 사망하자 그들은 정성으로 장례는 치렀지만. 혼백이나 신주는 세우지 않고 제사도 느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효(孝)를 중시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이념인 성리학(性理學)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의 윤리 강령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패륜적인 것으로서 절대로 용납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그들의 행동은 곧바로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 珍山事件)을 세일 먼저 정치적인 문제로 여론화한 사람은 홍낙안(洪樂安, 1752나)이었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그는 먼저 진산 군수에게 글을 보내 그들을 신속하고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았다고 힐난한 뒤, 좌상(左相) 채제공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임금에게 상달하여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벌주기를 청하면서. 총명하고 재주 있는 선비가 많이 천주교에 물들어 앞으로 황건과 백련의 난리가 있을 것이므로 사건을 확대하여 그들을 섬멸할 것을 요구하였다.
홍낙안은 이 사건을 단순히 패륜이라는 인륜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정치적 차원에서 역적 행위로 규정하였으며. 나아가 천주교 신자들을 사회 변란을 획책하는 불온 세력으로 간주하고 발본색원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홍낙안의 편지에 대해 채제공은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사 홍낙안은 진산 사건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만들어 사대부와 선비들에게 돌렸고. 진사 성영우(成永愚)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사대부와 선비등에게 돌려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로써 진산 사건은 중대한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은 이 사건을 엄하게 꾸짖어 벌주어야 할 비인간적인 패륜 행위로 보면서도 문제가 정치적으로 비화되고 획대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즉 이 사건에서 진상이 탄로된 사람은 극률(極徉)로 다스려야 하지만, 단서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까지 연루시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와 같이 신중한 입장을 취한것은 천주교를 비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소 아끼던 자파自派)의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鎌), 이승훈(李承薰) 등이 연루되어 있어 처벌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채제공 역시 천주교 교리를 불교와 유사한 사설(邪說〉로 규정하고. 평소 척사(斥邪)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사건의 과장이 커짐에 따라 윤지충과 권상연 온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고. 세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윤지충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유는 한마디로 천주교에서 그것들을 금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에서 명하는 바는 곤 대부 대군(大君大父)이신 천주의 명령이므로 천주교를 믿는 이상 천주교에서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그가 내세웠던 제사를 폐지하는 윤리 역시 당시 천주교에서 주장하던 논리였는데, 첫째 잠자
는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없듯이 영면(永眠)한 사람 역시 제물을 흠양(歆饗)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음식은 육신의 양식일 뿐 영혼의 양식은 될 수 없으므로 조상 제사는 허례라는 것이었고, 둘째 신주는 생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뭇조각에 불과하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느 물건에 깃들어 있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채제공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패륜 행위에 대해 반역죄를 적용하지는 않았으나 부조(父祖)의 시신을 훼상시킨 행위로 간주하여, 《대명률》(大明律)의〈발총조〉(發塚條)를 적용하여 참수할 것을 왕에게 주청(奏請)하였다.
정조(正祖)는 채제공과 같은 입장에서 이 사건을 사회 정치적 위기로 보기보다는 이단(異端)의 패륜 행위로 보고 정치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정학(正學)을 밝히면 사학(邪學)은 자연히 소멸된다는 평소의 이단을 막는 기본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그러나 엄벌을 요구하는 유생(儒生)들과 상하 백관(上下百官)의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오자, 정조는 채제공의 주청에 따라 이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중요성과 사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5일간 효수(臬首)하도록 했으며, 흉악한 죄인을 낳은 진산군을 5년 동안 현(縣)으로 강등시켰고. 군수 신사원은 신속하고 엄정하게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削奪官職)시켜 유배에 처하였다.
나아가 이단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서적을 금절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서학서(西學書)의 소지를 금하는 동시에 모든 서학서를 관에 바쳐 불태우게 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 소장의 서학서까지도 모두 소각시켜 버렸다.
[진산 사건의 파장〕 신해 박해는 진산 사건을 일으킨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벌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공서파(攻西派)의 홍낙안 등이 진산 사건을 정치 문제로 확대시키면서 그 여파가 다른 지역에까지도 미치게 되었는데, 우선 권일신(權日 身)과 이승훈이 홍낙안 등의 고발에 따라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였다. 그 결과 이승훈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석방되었으며, 권일신은 제주도로 정배 되었다가 정조의 권유로 옥중에서 배교하는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바치고 감형받아 예산으로 귀양 가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또 이때 서울의 중인(中人) 출신 신자들에게도 박해의 여파가 미쳤다. 즉 최필공(崔必恭), 최필제(崔必悌), 최인철(崔仁喆), 최인길(崔仁吉), 최인성(崔仁成), 정의혁 (鄭儀赫) , 정인혁 (鄭麟赫), 손경윤(孫景允), 현계온(玄啓溫), 허속(許涑), 김계환(金啓煥), 김덕유(金德愈), 백상옥( 白尙玉), 조지화(趙之和), 양윤덕 (梁潤德), 최돈행(崔敦朽1) , 이재겸(李載謙) 등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문초를 받은 뒤 배교하고 풀려 났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 고을에서도 최창주(崔昌周)와 많은 그의 동료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충청도 당진에서는 배(褻) 프란치스코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배교하였고, 예산에서는 이존창(李存昌)이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서 풀려났으며, 면천에서는 김진후(金震厚), 박취득(朴取得) 등을 비롯하여 매우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문초를 받은 뒤 석방되었다. 아울러 홍주에서는 성화 집안과 원(元) 시장(베드로)이 체포되었는데, 성화 집안은 배교하고 풀려났고, 원 시장은 신앙을 증거하다가 끝내 순교하였다.
〔신해박해의 영향〕 신해박해는 다른 박해와 비교하여 비록 그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첫째, 신해 박해를 계기로 한국 교회가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참 천주 신앙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는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통해 비로소 천주교와 유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 서한에 따라 일부 신자들이 천주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다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고난과 시련을 겪고 난 뒤 한국 교회는 보유론적인 천주 신앙에서 탈피하여 참 천주 신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둘째, 신해 박해를 겪으면서 교회에서 중인 이하의 신자들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양반 신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고. 지도적인 역할도 거의 다 그들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신해 박해 이후에는 교회 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양반의 자격을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거나 중인 이하의 신분층에 속하는 인물들로 대치되어 나아갔고. 입교한 인물들도 일반 민중이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셋째. 신해 박해를 계기로 신앙 태도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해 박해 이전에는 현실 사회의 개혁에 관심이 많은 양반들이 천주교를 신앙 하였고. 또 천주교 신앙은 그들이 현실 사회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하였다. 그러나 신해 박해를 겪으면서 천주교와 유교가 다르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남에 따라 이제 더 이상 천주 신앙을 유지하면서 현실 사회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앙의 형태도 자연히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넷째, 신해 박해를 통해서 공서파는 천주교를 박해할 마땅한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상 숭배를 국교(國敎)와도 같이 받들어 오던 전통 유교 사회에서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폐한 진산 사건은 부조(父祖)의 시신을 훼상하고 유기한 금수(禽獸)만도 못한 비인륜적 패륜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들은 어버이도 안중에 없이 막된 행동을 하는 불효자, 인륜을 저버린 금수의 무리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공서파는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더욱 날카롭게 하게 되었고, 박해의 주요한 구실을 조상 제사의 거부라는 데서 명목을 찾게 되었다. 이 논리는 이후 100여 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이유로 십분 활용되었다.
다섯째, 신유박해 결과 서양의 발달된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서양의 종교와 과학 기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로 인식한 성리학자들은 진산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를 어버이도 임금도 안중에 없이 막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종교로 배척하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 기술도 아울러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과학 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근대화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자료: 가톨릭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