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정경희
걷기 운동 열풍이 불고 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힘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주변의 학교나 작은 공터에는 뻣뻣한 자세로 앞을 주시한 채 힘차게 팔 흔드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건강에 좋다니 매일 하겠지만 가끔은 멀리 나가서 자연을 벗 삼아 걷고 싶다는 생각 하였다. 아직은 두 발이 잘 버텨주고 있을 때 낮선 지역에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먼저 퇴직한 동료가 해파랑길 종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 따라 걷는 여행길이다. 총 50개 코스로 무려 750킬로미터나 된다.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 해와 바다를 벗 삼아 걷다’라는 안내 문구는 삭막해진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과연 그 먼 길을 내가 걸을 수 있을까 싶어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시간 출발하는 버스나 기차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도착해 걷기 시작하였다는 말에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더욱이 일주일에 5일을 걷기만 하였다니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컨디션에 맞게 두 발로 걷기만 하는 것이라 누구나 할 수 있고, 꾸준히 걷다보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격려해 주었다.
한겨울 추위가 물러갈 즈음 혼자 해파랑길 걷기 여행을 시작하였다. 단기간에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할 일 없고, 누군가 불러주는 이 없는 날에는 퇴직의 무료함을 달래며 한두 코스씩 걸었다. 자가용을 출발지점에 주차해 두고 그날의 목표지점에 도착하면 버스나 택시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바다 구경을 처음 하였다. 삶의 쉼표 찍은 지금 온종일 바닷바람 맞으며 검푸른 바다를 보는 것은 행복이다. 깊이 들이쉬는 바닷바람은 가슴 속 찌든 때를 씻어내고 있다. 작은 체구와 약한 두 발로 사람구실 하며 살아온 나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가끔씩 그늘 찾아 쉴 때는 신발과 양말 벗고 두 다리를 쭉 폈다. 비스듬히 기대앉아 두 발을 보고 있노라니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른다. 겨울이면 내 발은 동상을 달고 살았다. 인근 연못 얼음판에서 놀다보면 흔히 양말이 젖는다. 젖은 양말 신은 채 끝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오니 동상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는 발이 가려워 잠을 설쳤고 할머니를 못살게 굴었다.
할아버지는 말린 고추 대와 가지 대 푹 삶은 물에 내 발을 담그게 하였다. 물이 뜨거워 몇 차례 발을 넣었다 뺐다 호들갑 떨다보면 적당히 따뜻한 상태가 된다. 그때부터는 느긋하게 발을 담그고 시선은 마당의 할아버지 따라 움직인다. 저녁에는 메주콩을 자루에 담아 한쪽 발에 묶었다. 가족들이 내 모습을 보고 웃었지만 발은 가렵지 않았다.
해파랑길이라고 모두 바닷길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어촌 마을 지나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매연 풀풀 날리는 아스팔트 차도를 지날 때도 있다. 어느 날 차도 따라 가는 코스를 걸었다. 때 이른 더위에 조심하라는 예보에도 아랑곳 않고 앞만 보며 나아갔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이 정도는 참아야지.' 사람들은 왜 그리 야단일까?
집에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은근히 밀려오는 두통과 몸살로 전전긍긍하였다. 더위를 타면 이런 것인가 싶지만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다. 무리하게 혼자 다닌다고 타박하는 남편에게 말한들 싫은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다. 피로에 지친 두 발 어루만지며 힘이 솟아나기를 기다렸다.
어떤 날은 남편이 동행해 주었다. 누군가 있다는 것이 든든하고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되니 좋다. 특히 산으로 난 길을 걸을 때 혼자는 위험하다. 멧돼지 등 위험 요인도 있지만 이제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으니 위급상황에 대처해 줄 동행이 필요한 것이다. 가끔씩 마주치는 일행들이 혼자 왔느냐며 신기해할 일 없으니 더 좋다.
내가 믿고 싶어 하는 이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묵묵히 걷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다. 갯바위 때리는 파도소리 들으며, 반쯤 찌푸린 눈으로 햇살 바라보며 걷노라면 별다른 대화 없이도 마음이 고요해진다. 갑자기 남편은 발이 아프다고 한다. 발가락 사이에 생긴 티눈이 말썽이다. 걷기 싫을 때만 탈나는 티눈 같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동차로 돌아가 먼저 한 코스 끝 지점에서 나를 기다린다. 평소 같으면 별의별 잔소리 다 했을 텐데 그냥 웃는다.
익숙한 경북지역의 바닷길을 지나 강원도에 접어들었다. 강원도에는 낭떠러지 아래로 멀리 펼쳐진 바다를 자주 볼 수 있다. 어쩌면 저 깊은 물속에 진짜 용궁이 있지는 않을까? 용왕은 인간의 두 발 대신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궁궐 안을 다닐 거라 상상해 본다. 더 넓은 우주에서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너무 악착같이 살았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집에서 강원도 바다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3박 4일의 일정으로 남편과 함께 마지막 코스까지 걸었다. 걷기에 관심 갖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동행 권하면 모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바다가 보이는 창 넓은 찻집에서 여유 즐기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하루 20킬로미터 이상 걷는다는 소리에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였다.
마지막 지점에 이르니 동료 선배가 보내준 사진 속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드디어 다 왔다. 이삭 줍듯 띄엄띄엄 코스별로 걷느라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나의 작은 두 발이 용케도 견디어 주었다. 통일 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금강산이 보이고 무슨, 무슨 고지라고 불리는 산들이 앞쪽으로 펼쳐진다. 바다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턱’ 막힌다. 아직 더 걸을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더 이상 갈 수 없다.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해파랑길을 완주하였다. 걷기 운동 열풍 따라 가는 곳마다 둘레 길을 잘 만들어 둔 덕분에 멋진 경험을 한 것이라 여긴다. 나 자신과 대화도 많이 하였다.
우리나라 지도를 펼치며 호랑이 등뼈 같은 동해안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본다. 시선이 멈추는 곳마다 아름다운 장면들이 떠오른다. 자동차로 휙 지나가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추억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먼 길에 흔적 남긴 내 작고 약한 발이 기특해 오늘도 해파랑길 여정을 자랑하고 다닌다. 역시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20240924)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