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요골 공소(순례지/성지)
주소: 충남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195번지.
공주에서 예산방향으로 30분정도 가면 유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아산방향으로 6km정도 가면 명곡리가 나온다. 명곡리에서 3km 정도 더 가면 요골공소가 있다.
이곳 요골 공소에 천주교가 전례 또는 시작된 것은 1884년 이전으로 생각된다. 두세 신부가 아산 공세리 성당에서 공주성당(현 중동 성당) 주임 신부로 발령 받아 가기 전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렀다한다. 그러므로 공주성당의 전신인 요골공소에 첫 사제로 오신 것이다.
이곳에 교우촌을 이룬 것은, 이화진 베드로 회장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고양군 출신인데 군난을 피해 이곳 저곳 교우촌으로 숨어 다니다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이화진 회장은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순방하게 되자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삼아 선교사들을 맞이했고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우들을 찾아내어 요골에서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때 이 회장은 전교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였다고 한다.
군란당시 이곳에는 신자들이 숨어서 화전을 일구어 생활하면서 살았는데 그 사정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처음의 공소는 배실 쪽 이회장님 댁이었다고 하며 그 후 1913년 김덕기 막시모 회장님 때 요골로 공소를 옮겨왔다고 한다. 자신의 집 골방을 공소로 3년간 사용하다가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다.
구자응씨가 어렸을 때는 공소 판공미사를 3대에서 4대를 드릴 정도로 신자들이 많았고 모두 열심 하였기에 성직자와 수도자 성소가 많이 나온 것 같다. 1883년 프랑스인 두세 신부에 의해 이곳이 공소로 설정 된 이후 모든 성직자들이 이곳 신자들의 열심을 교구장에게 보고할 정도였다 한다. 또 1884년에 42명이었던 신자수가 양촌(구합덕) 본당의 퀴틀리에 신부 때인 1890년에 이르러서는 100명이 넘어서고 공주본당의 파스키에 신부 때인 1901년에는 145명, 1915년에는 158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난다.
초기공소에는 이씨, 김씨, 성씨, 복씨, 구씨 등이 살았고 이들이 차례로 회장을 맡아보면서 공소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들 집안에서는 구전회신부, 김윤상신부, 김병상신부, 구자오신부, 구자윤신부, 김영관신부, 구본만신부,구본홍신부, 구본국신부가 나왔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여러 집안에서 수사, 수녀, 동정녀들이 나왔다.
이처럼 유서 깊던 이곳 공소도 이제 점차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13세대 가량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신자들은 매주 주일이면 함께 모여 공소예절을 행하고 있으며, 매월 4째 주일이면 유구 본당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러 오셨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주일이면 본당으로 미사참예를 가게 되어 공소에서 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었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