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가족 간 감염, 세계적 호흡기 전염병의 서막 ● AI 바이러스는 5000만 희생된 1918년 스페인독감 바이러스 ● OECD 국가들, 인구 20% 치료제 확보…한국은 2% ● 국내 피해 예상 ‘환자 884만, 입원 24만, 사망 5만5000’ ● 하버드대 연구팀, 팬데믹 사망자 5000만~8000만 추산 ● “도시집중, 교류증가로 스페인독감보다 피해 클 것” ● 스페인독감으로 조선 인구 38% 감염, 14만 사망
3월8일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충남 천안시 동면 오리농장에서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전북 익산에서 발생한 이후 이번 겨울 들어 일곱 번째, 천안시에서는 두 번째였다. 이 오리농장에서 전남 지역 오리농장 수십 곳으로 새끼 오리 1만4000마리가 분양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AI 대감염 사태’가 우려됐으나 AI 감염 이전에 분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같은 날, 지난 2월10일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서 AI 살처분에 참가했던 공무원이 병원에 입원하자 언론매체들이 이를 ‘유사 AI 환자 발생’으로 보도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병원에선 “AI가 아니라 뇌수막염 같다”고 했으나 정부가 기침, 고열, 두통 증상을 보인 이 공무원이 AI 환자가 아님을 확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한국에서 AI가 처음 발생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2003년 말 AI가 집중 발생하자 질병관리본부는 미국에서 확진 기술을 어렵사리 배워왔지만 아직 확진에 필요한 검사기간을 크게 단축시키지 못하고 있다. 2003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고병원성 AI 바이러스인 H5N1에 감염된 사람은 272명이고 그중 166명이 사망했다. 사망률이 60%에 육박한다.
한국에선 아직 ‘증상이 있는’ 감염환자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만일 실제로 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AI의 유일한 치료제로 알려진 항바이러스 제제 ‘타미플루’가 AI 발생 이틀 안에 먹어야 그 효과가 최대화되는 점을 고려할 때 확진 기간 나흘은 너무 길다. 또 많은 유사환자가 동시에 발생할 경우 안 그래도 부족한 항바이러스 제제를 헛되이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난해 2월 저병원성 AI의 무증상 감염자(감염 후 면역이 형성된 사람)로 확진된 4명의 방역요원은 2003년 말 AI 살처분에 참여했다 감염됐지만, 감염 사실을 아는 데 2년 이상이 걸렸다. 이들이 현재 국내에서 검출되고 있는 고병원성 AI에 감염됐다면 벌써 이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팬데믹’이 온다!
방역당국의 ‘철통 방역’으로 국내에서 가금류 직접접촉에 의한 AI 감염자는 발생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 더 큰 걱정거리는 방역으로도 어쩔 수 없는 ‘대륙 간 전염병의 범유행(팬데믹, Pandemic)’이다. 팬데믹은 AI 바이러스가 인체 내에서 ‘대변이’를 일으켜 전세계적으로 호흡기 전염병을 유행시키는 현상을 뜻한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pan(모두)+demic(사람)’에서 알 수 있듯, 한번 발생하면 전세계로 전파되고, 걸린 사람 모두가 사망한다는 의미.
‘조류 인플루엔자’라고 할 때의 인플루엔자는 ‘신종 바이러스의 변이에 의한 급성 감염증’을 가리키며, 보통은 매년 겨울 주기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독감을 의미한다. 이런 인플루엔자의 유행 정도는 인체 내에서 신종 바이러스의 유전자 형질이 변하는 정도에 따라 다른데, 작게 변할 때(소변이)는 인구의 10~20%를 감염시키고 면역성이 높은 사람은 약을 먹지 않아도 대부분 이겨낸다. 흔히 우리가 홍콩 A형 독감이니 B형 독감이니 하고 부르는 게 그것이다. 신종 바이러스의 소변이는 대개 수년 간격으로 오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형, B형이 있다. 우리가 해마다 접종하는 독감백신도 이들 바이러스의 농도를 묽게 해 우리 몸이 면역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다.
2005년 미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스페인독감 바이러스.
그러나 이 바이러스에 대변이가 일어나면 인체가 보유하고 있던 방어면역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바이러스가 되는데, 만일 이런 신종 바이러스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능력을 갖게 되면 전체 인구의 20~50% 이상이 감염되고 사망률은 예측 불가능하게 수직상승한다. 바로 이런 바이러스 대변이가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양상을 팬데믹이라고 부른다. 이런 대변이는 바이러스 A형에서만 일어나며, 대략 10~40년 간격으로 세계적인 대유행을 일으키는 특성이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의 대변이는 바이러스가 자연숙주인 조류로부터 직접 인체로 침입해 적응한 후 변이를 일으키거나 돼지와 같은 제3의 숙주를 통해 유전자 재배열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국내외 감염 전문가들이 2008~2010년을 팬데믹 도래 시기로 내다보는 첫째 근거도 팬데믹의 10~40년 주기설이다. 역사적으로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15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900년까지 28회의 대유행 기록이 남아 있다. 1900년 이후 현재까지는 1918년 스페인독감(2000만~8000만명 사망), 1957년 아시아독감(100만~200만명 사망), 그리고 1968년 홍콩독감(100만명 사망) 등 최소한 3번의 팬데믹이 있었다. 따라서 1918년으로부터 40년 후인 1957년과 1968년까지의 중간기 10년을 거쳐 2008년이 정확하게 40년이 되는 해다.
두 번째 근거로 1997년 홍콩에서 발생한 AI가 사람에게 전염된 후 2003년 말 이런 현상이 동남아시아와 중동, 유럽, 아프리카로 유행지역이 확대되고 환자와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데다 지난해에는 베트남과 태국, 인도네시아에서 가족 간에 인체 대 인체 감염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는 비록 AI가 폭발인적 전파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유전자형이 인간 전염병으로 이전했음을 증명한다. 고려대 의대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이를 ‘프리 팬데믹’이라 하는데, 가족 간의 전염은 곧 대변이(팬데믹)가 멀지 않았음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세 번째 근거는 현재 프리 팬데믹 상태까지 변이한 AI 바이러스(H5N1)가 1918년 전세계에서 50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며 대재앙을 일으킨 스페인독감 때의 바이러스(H1N1)와 형태는 다르지만 그 특성이 똑같다는 점이다. 우선 돼지와 같은 중간 감염체(숙주) 없이 조류를 죽이는 점과 인간에게도 감염을 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가족간 감염이 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지금껏 중간 숙주 없이 조류가 인간에게 직접 감염시킨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스페인독감 바이러스와 AI 바이러스가 유일하다. 스페인독감의 경우 발생 전에 조류가 집단 폐사하고 가금류를 접촉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을 겪었다.
미국의 발 빠른 대응
마지막으로 가장 우려스러운 증거는 미국의 발 빠른 대응이다. 미국은 군사정보력뿐만 아니라 전염병에 있어서도 ‘생물 제국주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정확하고 빠른 정보력과 분석력을 보유하고 있다. 거의 90년간 땅에 묻혀 있던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찾아내 그 정체를 밝힌 나라도 미국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산하 미군병리학연구소의 연구원인 제프리 토벤버거 박사는 1998년 지난 60년간 스페인독감을 연구한 요한 V 훌틴 박사로부터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구하게 된다. 훌틴 박사는 알래스카 동토(凍土)에 묻혀 있던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꽈리에서 조직을 떼어내 그에게 전달했고, 토벤버거 박사는 얼어 있던 바이러스에서 스페인독감 바이러스의 8개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미국 국무부는 이 소식을 듣고 ‘바이러스 연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뉴욕 마운트시나이 대학 의대 피터 팔레스 박사팀과 CDC의 연구진을 총동원해 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히는 데 매달렸다.
2005년 10월에야 밝혀진 실험 결과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 스페인독감 바이러스가 닭도 죽이고 인간도 죽이는 인수(人獸)공통 전염 바이러스이며, AI 바이러스와 모든 특성이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87년 동안 동토에 묻혀 있다 살아난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는 4일 만에 3만9000배로 늘어나 실험쥐들을 몰살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백악관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국민의 30%가 먹을 수 있는 양의 항바이러스 제제 ‘타미플루’ 구입과 AI 바이러스의 사전 백신(프리 팬데믹 백신) 개발, 고도의 격리시설 설치 등을 위해 5억달러를 2006년 예산에 포함시켜달라고 의회에 신청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보다 팬데믹을 대비하는 게 대통령의 의무로서 더 중요하고, 우리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현실적인 테러는 팬데믹”이라고 말했다. 미 행정부는 의회와의 승강이 끝에 1억1000만달러를 삭감당한 3억9000만달러를 확보했지만 전국민의 25%(7500만명분)가 타미플루를 먹을 수 있게 됐고, 다국적 제약사에 투자한 결과, 프리 팬데믹 백신 개발도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
1918년 스페인독감 대유행 당시의 광경. 지나 콜라타의 ‘독감’ 중에서. (사이언스북스 제공)
미국은 이미 지난 1월 유럽연합(EU)에 프리 팬데믹 백신 개발 허가를 신청한 다국적 제약사 GSK에 개발비 명목으로 6330만달러를 지원했고, 타미플루 외에 또 다른 팬데믹 치료제로 인정된 ‘리렌자’ 구입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미국 보건부는 자체 프리 팬데믹 백신 개발을 위해 H5N1형 바이러스 희석액 4000만달러어치를 GSK에 주문한 상태다.
미국은 비상시 군 동원 계획까지 세웠다. 부시 대통령은 특정지역에 팬데믹이 발생하면 지방정부가 이를 통제할 수 없다며 자신에게 군 소집권을 부여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군대를 동원한 강제 검역과 발병지역에 대한 전면 봉쇄를 예상케 하는 초강경책이다.
“최소 5000만 사망할 수도”
미국의 이런 행보는 팬데믹의 도래를 확신하고 또 그것이 오래지 않아 닥칠 재앙이라 결론짓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의 이런 대응은 각국의 지표가 되고 있다. 영국(30%), 프랑스(23%), 뉴질랜드(21%), 일본(20.6%), 호주(28%), 캐나다(16.7%), 홍콩(26%), 싱가포르(25%) 등 여러 나라가 자국 인구의 20% 이상이 먹을 수 있도록 항바이러스 제제 대량 비축에 나섰다. 이들 중 홍콩을 제외하곤 모두 AI로 인한 감염자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은 난징의 심세레 제약그룹이 인플루엔자 치료제 제조 및 판매권한에 대한 계약을 GSK와 체결했고, 인도네시아·태국·베트남 등은 판매권 계약을 맺었다. 계약국에 한국은 들어 있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3년부터 팬데믹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해 2005년 10월에는 팬데믹의 도래를 기정사실화하기에 이른다. WHO의 조류독감 방역담당관인 나바로 박사는 2003년 9월28일 “AI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경우 조류독감이 전세계적인 역병으로 번져 적게는 500만명, 많게는 1억5000만명이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문제가 커지자 WHO는 공식적으로 인명피해 예상치를 ‘200만명에서 740만명 수준’으로 수정했지만, 예상 사망자 수치는 2005년과 2006년을 거치면서 5000만명 규모로 늘어났다. WHO대변인은 “WHO가 공식적인 인명 피해 예상치를 제시한 것은 각국이 백신과 치료제를 비축하고 비상방역 대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WHO 사무총장이던 고(故) 이종욱 박사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팬데믹은 반드시 온다. 시기가 문제일 따름이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2006년 들어 WHO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WHO에서 ‘세계 인플루엔자 프로그램’을 이끄는 후쿠다 게이지 박사는 “1918년 스페인독감 때보다 작은 규모의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해도 이로 인해 전세계가 받는 충격은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각국에 자국의 대비계획을 제출해달라고 요구했다. 팬데믹은 어느 한 나라만 제대로 준비한다고 막을 수 있는 전염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WHO에 팬데믹 대비계획을 제출했다.
지난해 12월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독감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유행할 경우 최소 5001만명에서 최대 8100만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예측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의학전문학술지 ‘랜싯(Lancet)’에 게재될 예정인 이 연구논문에 따르면 “이전 연구에서 5000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내다본 것이 과장돼 있다는 판단에 따라 연구를 진행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틀렸음을 보여줬다”는 것. 하버드대 크리스 머레이 교수팀은 스페인독감이 유행한 1914~23년 미국 24개 주와 인도 9개 주 등 전세계 27개 국가에서 독감 바이러스 사망률을 계산해 2004년 인구 규모에 대입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팬데믹 홍보는 양계업자 죽이기?
국내 전문가들의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질병관리본부가 지난해 7월 국내 감역역학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팬데믹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답한 사람이 50%였고, 그중 65%의 전문가가 팬데믹이 5년 안에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항바이러스제 비축 필요성에 대해서는 95%가 공감했으며, 80%의 전문가가 적어도 인구의 10% 이상이 복용할 분량의 항바이러스 제제를 비축해야 한다고 봤다. 이 가운데 30%의 전문가가 인구 20% 이상이 복용할 양을 비축해야 한다고 답했다. 현재 한국의 항바이러스제제 비축량은 인구 대비 2% 수준이다.
2005년 4월 열린 ‘신종 인플루엔자’ 대비 모의 훈련.
정부는 최근 들어 각종 심포지엄과 세미나를 통해 팬데믹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다. WHO에 보고한 대비계획에서도 “(국내에도 연일 발생하고 있는) AI바이러스가 사람 간 전파능력을 획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즉 팬데믹은 반드시 오되 언제 올지 알 수 없을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팬데믹이 정말 오느냐’는 공식적인 질문이나 그에 대한 대비, 즉 항바이러스 제제의 비축과 백신 개발, 격리병실 확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돈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자문위원회의 위원인 한 전문가는 “질병관리본부가 팬데믹의 도래를 확신하고, 또 그 시기가 1~2년 앞으로 임박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최종 정책 결정권자와 고위 관료, 국회의원들의 눈치를 보며 관련 예산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때문에 현재 확보했거나 곧 확보할 예정인 대비책 수준에 맞춰 팬데믹의 도래를 홍보하면서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팬데믹이 AI 바이러스가 변이한 것인 만큼 팬데믹의 위험을 홍보하면 양계업과 관련 산업이 즉각적인 피해를 보게 되는 것도 문제다. 양계업계는 정부에서 팬데믹 관련 논의가 나올 때마다 “확실하지도 않은 설을 과장해 양계업자만 죽인다”고 볼멘소리를 해온 것이 사실. 여기에는 농림부와 그 과학기술보좌역인 수의과학검역원 전문가들도 일조한다.
모 국회의원이 주최한 팬데믹 관련 공청회에 참가한 농림부 측 전문가는 “방역과 의학기술이 크게 발달한 현재와 인플루엔자의 존재조차 모른 90년 전 스페인독감의 피해 정도를 엇비슷하게 추정하는 것은 무리다. 팬데믹의 피해를 과장하는 것은 국민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관련산업의 위축만 초래한다. 인체 간 감염이 가능한 변종 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발견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팬데믹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그에 대비를 하려면 조용하게, 소문 안 나게 하라는 얘기다.
한 감염내과 전문의는 “예산을 만지는 부서의 관료들은 이런 주장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전염병에 대한 지식은 일천하고 당장 코앞의 살림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정책 관료들로서는 이 이야기에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정부는 2004년 타미플루 100만명분 확보를 위해 예산 125억원을 요청했다가 기획예산처로부터 65억원을 삭감당한 후 매년 예산을 조금씩 얻어 올해 들어서야 전 국민의 2%에 해당하는 100만명분의 타미플루를 비축하게 됐다.
질병관리본부 팬데믹 자문위원인 고려대 의대 김우주 교수는 “AI가 창궐해도 닭고기를 익혀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점을 국민에게 홍보하는 한편으로 팬데믹을 대비해야 한다. 팬데믹은 사람 사이에 옮는 질환이기 때문에 닭고기와는 별 관계도 없다. AI는 닭고기를 취급하는 사람만 조심하면 되지만, 팬데믹은 호흡기 전염병이라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스페인독감, 식민지 조선을 휩쓸다
팬데믹의 피해를 과소평가하는 측의 논리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1918년과 같은 대참사는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이에 대한 반박은 질병관리본부가 WHO에 전달한 팬데믹 대비계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자의 급증으로 의료자원은 여전히 부족하며, 대유행 이전까지 예방백신의 개발이 어렵고 항바이러스제의 비축과 사용에 제한이 있다. 여기에 도시화로 인한 인구밀집, 노인인구의 증가, 교통 및 국제 교류 증가로 인한 전파 가속, 만성질환을 가진 인구비율의 증가로 인해 이전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기되는 논리는 지금껏 한국에서는 그런 대재앙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와 AI가 세계적으로 확산될 때에도 한국에는 감염 환자가 없었다는 주장도 일조한다. 그러나 1918년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에는 당시 국내 759만 인구의 약 38%인 288만4000명이 스페인독감(서반아감기) 환자가 됐고 이 중 14만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체 인구의 0.8%, 100명 중 1명꼴로 죽은 셈이다. 당시 기록을 보자.
“9월에 이미 서울에 환자가 나타났고 10월에 전국적인 유행이 절정에 달해 공사립학교와 사숙은 휴학, 각 관청과 단체에서는 시무를 보지 못했다. 11월 들어서는 개성군의 경우 다른 때의 7배의 사망률을 보였고, 충남 서산지역은 8만명의 인구 중 6만40000명이 질병에 걸렸으며 매일 100명 이상 150명씩 사망하여 사망자를 처리할 사람이 없었다. 일반 농가에서는 사람이 없어 추수를 못한 논이 절반 이상이다.”(총독부 연감)
팬데믹에 따른 희생규모는 결국 백신개발과 항바이러스 제제 비축량에 달렸다.
“유행 감기로 인하야 창궐되는 악성 감기는 아직도 감퇴되는 모양이 없어서 인천 같은 데는 요사이 날마다 20명의 사망자가 생기어 날마다 발인 없는 날이 없고, 각 절에는 불시에 대번망(大繁忙)을 이루는데 이 감기에 대한 예방칙은 전혀 없고 다만 감기에 걸리지 않기만 바라는 바이다.”(매일신보, 1918년 11월3일)
“감기가 의주, 신의주, 용암포, 철산, 정주, 박천, 희천, 진남포, 성천군, 중화군, 강동군, 개천군, 통강군, 강서군 등 평안도 각 군에 전염되어 많은 사망자를 냈다. 포병공장에서도 7000명이 결근하였고, 철도원에서도 7500명이 결근하여 운송에 차질이 생겼다. 공주에서도 1만1800명이 감기에 감염됐고, 목포의 경우는 총인구 4531명 중 580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원산에서는 1만명이 걸렸다.”(매일신보, 1918년 11월9일자)
매일신보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매일같이 전하고 있다.
독감에 전멸된 우체국
11월11일 : “독감이 들거든 이렇게 조섭하라. 앓는 이를 딴 방에 거처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곁에 가지 아니하도록 주의를 할 것이요, 환자가 쓰던 침구와 자리 옷 같은 것은 볕을 쏘여 소독하고. 방도 자주 쓸어 정하게 하고, 가끔 공기를 갈고, 볕을 쏘이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유행 감기로 인하여 개성은 사망자가 평시의 7배나 되었다.”
11월12일 : “경기도 경무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성에서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이 268명인데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119명이며 나머지는 일본인이다.”
11월13일 : “지방에서는 유행감기가 아직 여전하다. 진주에서는 도장관 이하 감기투성이며, 평양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감기로 고생한다. …평북에도 근 2만명의 환자를 내었고…출정군인이 독감에 고생…진남포 지방에서는 이 감기의 원인은 독일에 있던 감기로 독일이 일종 독와사(毒瓦斯, 독가스)를 발명하여 퍼뜨렸는데, 전쟁지에서 그 감기에 걸린 자가 만주로부터 조선을 거쳐 들어와서 그 사람이 병독을 전파하였다.”
11월14일 : “악성 감기의 창궐로 인하여…지방 우체국 중 국원이 전멸되어 다른 곳에서 응원자를 파견케 하는 곳은 평남 개천군 우리, 충암 아산 우편국, 인천 전화계, 김천우편국으로 거의 전멸이 된 곳은 풍산, 갑산, 박천, 용암포, 공주, 삼수의 각 우편국이다.”
11월16일 : “충청남도 지방은 독감으로 인하여 수확이 극난(極難)한 지경이다. 삼중현(三重縣) 조우정(鳥羽町) 시직약점(矢織藥店)에서는 악성감기가 창궐하여 약이 평일보다 썩 잘 팔리는 기회를 타서 정가 20전의 감기약을 35전에 파는데 이 까닭으로… 직공 약 500여 명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그 근처에 있는 상점을 음습하였다.”
11월28일 : “충북 각 군과 충남 서산 지방의 유행성 감기는 오히려 맹렬하여 자꾸 창궐되는 바 지금껏 추수도 못하였다.”
12월3일 : “서산 1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감기가 처음 발생한 때로부터 2000명이나 된다.”
12월4일 : “뉴욕에서 전하기를 남아프리카주에서는 돌림감기로 죽은 사람이 5만명에 달하였다.”
12월27일 : “런던 로이터 특전을 거한 즉 타임스 신문기자가 말하기를 유행성 감기로 3개월간의 사망자 600만인이고, 5년간의 대전쟁에는 2000만인이 사망했으므로 이번 감기가 전쟁보다 다섯 곱절이나 맹렬하다고 했다. 이에 감기에 전염되는 분수로 사년 석 달을 치면 1억800만 명의 사망자를 낼 것이다고 분석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을 맹타한 스페인독감은 1919년까지 이어져 매일신보 2월4일자는 “돌림감기는 요사이 다시 동경지방에 창궐하여 상류가정까지 침로(侵路)하여 원총리 대신, 내전외무대신, 고교대장대신 등도 병에 걸리어 치료하는 중이며 이번에는 증세가 더욱 험악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