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노벨 : 그의 인생과 발견 그리고 상에 얽힌 이야기
이 책에서 설명한 세렌디피티적인 발견자 중에는 대부분이 노벨상으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이 상을 설립한 노벨 자신도 세렌디피티덕을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발명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나마이트의 발명은 노벨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 결과 노벨의 특별한 성격과 어울려서 상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매년 노벨상의 뉴스는 전세계를 휩쓸고, 그 수상자들은 매우 유명해짐에도 불구하고 정작 노벨이라는 인물과 그의 인생과 발명 그리 고 그의 사상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선구자적인 발명가로, 그리고 공업계의 거물로서도 줌더 잘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노벨은 생전에 이미 막대한 부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질병, 비극, 고독, 우울증의 각인이 찍혀져 있었다. 일찍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명이나 재산을 파괴하는 폭발물을 개발 한 그가 그 유산으로 후세를 위해서 과학, 의학, 문학, 평화 등의 분야에 인류의 귀중한 문 화적 진가의 옹호자가 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은 1833년 스톡홀름에서 출생했으며, 그해 부친인 임마뉴엘 노벨은 파산을 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부터 허약했다.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모친이 특별히 소중하게 길렀던 은혜 덕분이 었다. 네 명의 형제 중에서 알프레드는 모친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으므로 그 역시 특별 한 사랑으로 모친에게 보답하였다. 그의 부친은 독학한 발명가이자 기술자였으나 자신의 권 익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일도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사업에 실패했을 때 채무자로서 투옥될 것을 두려워한 부친은 아내와 세 아들을 두고 핀란드에서 러시아의 페테르브르크로 도망쳐 그곳에서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몇 년 후 러시아 정부의 군용 폭발물로 성공하여 공장의 공동소유자가 된 임마뉴엘은 가족 을 페테르브르크로 불러들였다. 알프레드는 스톡홀름에서 정식 학교교육을 2년 정도 밖에 받지 않았으나 그래도 학급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었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부친의 경제력 덕분에 알프레드와 그의 형들은 가정교사까지 둘 수 있었으나 이와 같은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56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정부는 해군의 수뢰를 제조하고 있었던 임마뉴엘 노벨의 공장에서 손을 Ep, 임마뉴엘은 두 번째 파산을 했다. 이때 그는 알프레드 와 두 형 로베르트와 루드비히를 러시아에 남기고 처와 막내아들 에밀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알프레드는 이미 러시아인 교수와 화학을 연구하였고, 실용적인 기계와 공학 짓ㄱ 에 관해서는 이미 부친의 공장에서 배웠었다. 알프레드는 페테르브르크의 공장을 구하기 위 한 자금조달을 위해 파리로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1861년에 알프레드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몇 년 전에 이태리 화학자 아스타니오 소브레로에 의해서 처음 합성된 새로운 액체 폭발물 니트로 글리세린을 제조하는 부친의 일을 도왔다. 파리의 두 번째 여행에서는 스웨덴에서 소규모의 제품 생산을 다시 시작할 만한 자금을 얻 을 수 있었다. 그 2년 후 알프레드가 30세 때, 그의 중요한 발명 중에 하나인 니트로 글리세 린 폭약 기폭용으로 뇌산수은의 뇌관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었다. 그 발명은 우연이 아니었 다. 기록에 따르면 스툭홀름 교외의 헬레네보그에 있는 부친의 낡아빠진 실험실과 공장에서 실시된 50회 이상이나 되는 피땀어린 실험의 성과였다. 비극은 1864년 9월에 일어났다. 폭발 로 작은 공장이 망가지고 알프레드의 아우 에밀 노벨을 포함하여 5명이 숨졌다. 이 비극이 계기가 되었는지 부친 임마뉴엘 노벨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신 체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이 또 알프레드에게 니트로 글리세린을 안전하게 제조하고 수송 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력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가업의 모든 책임은 그의 양 어깨에 얹어져 있었다. 그는 철도망을 넓히기 위해 산에 터널 을 뚫을 때에 폭약에는 흑색 화약보다도 니트로 글리세린 쪽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스웨 덴의 국철에 납득시킬 수가 있었다. 공장을 폭발 사고의 위험 때문에 니트로 글리세린 공장이 가깝게 오는 것을 모두 싫어하여, 실제로 스톡홀름시는 시내에 공장 만드는 것을 허가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굴 하지 않고 호수에 정박한 거룻배 위에 공장을 만들었다. 얼마 후, 스톡홀름의 부유한 상인 J.W. 스미트의 원조로 스톡홀름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공장을 세워 그 곳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을 50년 이상이나 제조하였다. 두 번째의 공장은 독일의 함부르크 근처에 있는 크륨멜에 세워졌다. 이것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이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시에라 네바다 산지를 횡단하는 중태 평양 철도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사고가 발생했으나 광산과 터널공사에 소비되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절약되었다. 그 때눈에 매우 강력한 이 액체는 한동안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이 성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에 대한 사람들의 지 식이 부족하였거나 설명을 무시하였기 때문이가도 하지만, 무엇보다 니트로 글리세린이 본 래 가지고 있는 불안정성 때문에 전세계에서 비참한 폭발사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 했기 때문이었다. 폭발의 민감도 때문에 니트로 글리세린을 흔히 '변덕쟁이'라고도 했다. 깃털로 살짝 건들기만 해도 폭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함부로 굴리거나 부적당하게 사 용해도 아무렇지도 않기도 했다. 그래서 가죽구두에 발라서 광을 낸다거나 마차의 굴대에 윤활유로 사용했다는 보고도 있다. 마지막 재난은 1866년의 폭발사고로, 이 사고로 말미암 아 크륨멜 공장이 파괴되었다. 그 때문에 노벨은 더욱 열심히 니트로 글리세린을 안정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에 성공함과 동시에 다이나마 이트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노벨이 이 '변덕쟁이' 니트로 글리세린을 얌전하게 길들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한 사실에는 다른 설은 없다. 그는 니트로그리세린에 메탄올을 발라 두었다가 폭약으로 사용하 기 전에 물로 씻어서 메탄올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용적 이지 못했다. 노벨은 다음 방법으로 톱밥이나 목탄, 종이, 심지어는 벽돌가루 등 분말상이나 섬유상의 물질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뿐이었다. 가연성 물질은 니트로 글리세린과 섞어두면 발화되기 쉬웠고 벽돌가루와 같은 불연물은 폭 발력이 떨어졌다. 어떤 설에 의한면 니트로 글리세린의 금속성 용기에 구멍이 뚫려 그 속 에 있던 액체가 새어나와 금속용기 주위의 패킹에 배어 있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이 패킹의 재료는 규조토로서 독일 북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값이 싸고 가벼운 다공 성 광물이었다. 노벨은 용기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이 새어나와 규조토와 밀가루 반죽처럼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가 실험삼아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을 압축하면 액체 의 폭발력을 유지한 채 작은 덩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더구나 뇌관으로 기폭시킬 때까지 안전하여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노벨은 열심히 추 구하던 문제의 해답을 알아낸 셈이 되고 이것은 유사 세렌디피티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 다. 그러나 다이나마이트가 우연히 탄생했다는 이 설에 대해 납득할 만한 반증이 있다. 노벨 자 신이 소리 높여 부정하고 있으며, 신중한 과학적 실험 결과 이상적인 흡착제로서 규조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된다. 욕심 많고 비양심적인 장사꾼을 상대로 많은 거래를 해 왔으나 노벨 자신은 누가 보더라도 완고할 정도로 정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벨은 다이나마이트 발명 후 수년간 또 새로운 발 명을 했으며, 그의 폭약 젤라틴의 발명은 계획적이자 또 어느 정도는 우연이기도 했다. 폭약 젤라틴을 발명한 1875년에 있었던 사건을 노벨 자신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어느 날 나는 실험실에서 유리조각에 손을 벴다. 당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친 손가락에 콜로디온을 발랐 다. 콜로디온이란 니트로 셀롤로오스를 에테르와 알콜의 혼합용액에 녹인 끈적끈적한 액체 이다. 이 용액은 용매가 증발한 후 상처를 일시적으로 덮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매우 인화성이 강하여 실제로 셀롤로오스의 니트로화의 정도를 더 높이면 강력한 폭약이 되는데, 이것을 면화약이라고 한다. 그날 밤, 손가락의 통증으로 잠이 오지 않자 예전에 생각해 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현안 즉, 니트로 셀롤로오스와 니트로 글리셀린을 결합시켜 무엇보다 강력하고, 안전한 폭약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면화약을 실험해 보았으나 니 트로 글리세린과 잘 섞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친 손가락의 콜로디온에서처럼 니트로화의 정도를 낮추면 니트로 글리세린과 잘 섞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새벽 4 시에 급히 실험실로 가서 여러 비율의 콜로디온과 니트로 글리세린을 섞어서 실험을 시작했 다. 조수가 실험실에 나타났을 때 노벨은 당시 알려졌던 매우 강력한 두 종류의 폭약으로 만든 투명한 젤리와 같은 혼합물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실험해 보았더니 실제로 이 결합물은 어느쪽 단일 성분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했던 실험을 주의 깊게 되 풀이하여 강력하고 안전한 최적의 처방법을 결정한 노벨은 폭약 젤라틴의 특허를 1875년에 는 영국에서, 또 다음해에는 미국에서 취득했다. 노벨 자신이 우연히 손가락을 다쳐 콜로디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문제에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폭약 젤라틴의 발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세렌디피티의 또 다른 일면으로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아이디어에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고 깨달으면 노벨처럼 즉각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이나마이트나 폭약 젤라틴처럼 니트로 글리세린의 안전한 형을 발전시키고 더욱 개량을 거듭해서 특허를 취득하게 됨으로 써 노벨의 폭약사업은 군사적 및 비군사적 이용의 양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스위스의 알프스와 고탈, 심프론, 알베르크 등을 관통하는 터널은 새로운 젤라틴 다이나마이트류의 강 력한 폭발력 없이는 도저히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해설) 알프레드 노벨은 엄청난 대부호가 된 후에도 내내 고독했으며 괴팍한 성질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기로는 그가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그것이 내년 각 분야에 서 뛰어난 업적을 올린 사람들을 표창하는 상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독 자 여러분은 왜 그 많은 재산이 그의 자손에게 넘겨지지 않고 이와같은 목적으로 쓰이게 되 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노벨은 일생동안 병약했다. 때로는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1896년에 사망할 때까지 모친 외에 친숙한 여성이 있었 는지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그는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어TEk. 50년 이상 지난 후에야 그의 인생에 중요한 여성이 모친 외에 세 사람 있었다는 사실이 밝 혀졌다. 특히 그 중의 한 여성에 관한 정보는 관계자가 사망한 후인 1950년까지 노벨 재단 의 문서철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초의 여성은 노벨이 18세 때 파리에서 만난 소녀인 것 같다. 노벨은 젊었을 때 시를 쓰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그의 연인이 되어 그때까지 사막과 같이 황량했던 그의 인생에 크나큰 행복이 깃들었고 '둘이서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소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마도 그에게 최초의 고통스러운 절망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이 슬픈 사랑이 다정다감한 청년 노벨의 인생을 결정지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벨은 43세 때 또다시 파리로 갔으나 비서 겸 가정부가 필요했다. 그의 광고에 베르타 킨 스키라는 현명하고 매력 넘치는 젊은 여자 백작이 응모해 왔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 난하지만 고귀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가 파리에 와서 노벨한테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그 녀가 아더 폰 수트너라는 빈의 젊은 귀족과 연애 중이었는데 그의 가족이 그들의 결혼을 강 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인인데다가 총명했고 음악과 어학의 재능이 뛰어났 으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 알프레드 노벨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노벨이 그녀를 비서로 고용했을 당시에는 연애 감정이 없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금새 그녀의 포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녀에 게 "있다"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 의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생애를 통한 우정이 싹텄다. 베르타는 파리에 잠시 동안만 있다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가족의 동의를 얻은 폰 수트너와 결혼했다. 그 후 베르타 폰 수트너는 열렬한 국제 평화운동의 제창자가 되었다. 노벨도 이에 관심을 같이 했으나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의견을 달리했다. 노벨은 그 후에도 베르타와 서신교환을 계속하였으며, 평화상을 제정하는 데 있어 그가 남긴 유언에 반영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녀가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 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르타 폰 수트너는 1905년 이 노벨평화상의 다섯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베르타가 파리를 떠난 잠시 후에는 세 번째의 여성이 노벨 앞에 등장했다. 그녀는 아마도 노벨이 가장 정렬을 쏟았던 여성이었으며, 반면에 또 가장 실망을 안겨주었던 여성이기도 하다. 1876년 가을, 노벨이 43세 때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에 체재중인 그를 도와주고 있는, 사업상 알고 지내는 사람의 부인에게 줄 꽃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소 피 헤스라고 하는 유태인 노동자의 딸인 20세의 아담한 미인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오 간 많은 편지나 서류는 1950년에 밝혀졌는데, 그것에 의해 친밀한 교재를 통해 가정에서의 평안과 휴식을 얻으려고 하는, 교양과 자제심과 부를 고루 갖춘 총명한 남성과 매력적이지 만 인생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교양없고 자제심도 없는 젊은 미인과의 정상적이지 못한 사 랑 이야기가 폭로되었다. 노벨은 그녀를 처음에는 파리의 훌륭한 아파트에 살게 하다가, 나 중에는 빈 가까이에 있는 이슐의 별장에서 하인을 두고 살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사업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은 혼자 내버려 두었다. 행복한 시기가 얼마만큼은 계속되었으나 운명이 정해져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관 계는 18년 후에 예상했던 대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피 노벨 부인(공식적인 결혼은 안했으나 알프레드에게 온 수백 통의 편지 겉봉에는 그와 같이 쓰여져 있다)은 유럽 주변의 좋은 휴양지에서 젊은 추종자들과 지내게 되었다. 노벨은 방자하고 놀러만 다니는 말괄량이 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성이 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그것마저 실패로 끝났다. 소피 는 드디어 젊은 헝가리 장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에게 고백했다. 노벨은 결국 소피의 교 육을 체념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충분한 연금을 지불하였 다. 소피는 그 헝가리인 장교와 결혼을 하기는 했으나 함께 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노벨 이 18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로부터 돈을 빼앗아 갔다. 그 후에도 그녀는 유서에 정해졌던 금액보다도 더 많은 돈을 갈취하였고, 만일 그것이 안되면 노벨이 그녀에게 보낸 216통의 편지의 출판권을 매각한다고 협박했다. 오랜 교섭 후 소피는 편지를 모두 돌려주는 대신에 노벨 생전에 그에게 받아 왔던 연금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이탈리아의 산레모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1896년 사망했다. 노벨은 생의 후반기에 몇 번인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협심증으로 괴로워했다. 죽음 직전에 쓴 그의 편지 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을 내복하라는 지시를 받다니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약제사나 대중 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트리니트린(Trinitrin)이라고 부르고 있지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벨 은 사망하기 전 2년 동안은 우울증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인 보장을 한다는 조건으로 소피와의 관계를 청산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산레모의 별장 이 마음에 들었으며, 스웨덴의 보폴스 공장을 사들였을 때 인접한 장원 영주관에 임시 숙소 를 마련하고 실험을 위한 연구실을 만든 일도 있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젊은 조수 라그 너 숄만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는 후에 노벨의 유언 집행인이 되었다. 1895년 가을, 노벨은 2개월간을 파리에서 보내고 노벨재단과 노벨상의 기초가 되는 유언을 세밀하게 작성했다. 그는 이것을 변호사의 도움없이 혼자서 스웨덴어로 썼다. 이 유언과 재 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곧 화제의 선풍을 일으켰으며, 그의 유언이 실현되기 까 지는 수년이 걸렸다. 그가 사망했을 때는 처도 자식도 없었으며 그의 모친과 형제도 모두 사망하고 아무도 없었다. 조카나 그의 가족에게는 타당한 금액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유서에 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재산은 유언집행인에 의하여 안전하게 투자되어, 그 이자는 매년 그 전 해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최대의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수상하기로 한다. 또한 이자는 5등분 하여 아래와 같 이 분배할 것, 즉 일부는 물리학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한 사람에게, 또 일부는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 또는 개량을 한 사람에게, 일부는 생리학 또는 의학 영역 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그리고 일부는 국가간 우애의 촉진이나 상비군의 폐 지나 삭감 및 각종 평화회의의 개최나 진전에 가장 많은, 또는 가장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 에게 수여할 것. 노벨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인 국가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유서가 공개되자마자 비난을 받았다. 스웨덴의 언론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국제적 활동 쪽을 존중한다는 것은 애국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노벨이 평화상의 전형을 노르웨이 의회에 맡긴 것 은 당시의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긴장된 관계 때문에 더욱 불쾌하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유 언집행인과 가족과의 격심한 의논이 있은 후 상의 운영은 스웨덴 정부의 관리하에 두기로 하되 수상자의 지명과 전형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뜻에 따른 형태로 노벨재단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수상은 1901년에 있었다. 노벨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사후 기증에 의해서 그가 자기 인생에서 할 수 없었던 것, 즉 '인류의 복지에 최대 의 공헌'을 할 것과 특히 '국가간의 평화와 우애를 조장'할 것을 희망했다. 가장 강력한 군 사용 폭발물을 발명하여 팔면서도 그는 그것들이 전쟁을 방지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1892년에 베르타 폰 수트너가 노벨에게 스위스에서의 평화회의에 참가하도록 요청했을 때 노벨은 이를 거절하면서 "나의 공장이 오히려 당신들의 회의보다도 빨리 전쟁을 종결시킬지 도 모릅니다. 두 패의 군대가 서로가 서로를 한순간에 파괴시킬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문명 국은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어 군대를 해산시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 한 것은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 노벨의 다이나마이트나 폭약 젠라틴의 강력성을 비교해 볼 때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원자폭탄이 발명되었으며, 그 후 개발계획에 관여한 사람들 로 구성된 원자과학자협회는 미국과학자협회(FSA)로 발전했다. 그 주된 목적은 국제 군비 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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