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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장 墜落(추락) 조양보(朝陽堡). 강북무림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명문정파였다. 그러나 보주 냉무독을 위시한 이천의 식솔들이 능각표에게 떼 몰살을 당하고 조양보는 점령당했다. 창 틈으로 보이는 화원의 청송은 푸르렀다. 언제나 꿋꿋하게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소나무. 능각표는 소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목표는 목전에 다다랐다. 능각표는 전신에 퍼지는 감동을 음미하고 있었다. 답답하던 변방에서의 시간은 이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후으읍!" 능각표는 폐부 가득히 신선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천주, 속하 비령(飛靈)입니다." 창 밖을 향해 있던 능각표가 신형을 돌려세웠다. "무슨 일이냐?" "마야라는 자가 사자를 보내 왔습니다?" 능각표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가 사자를? 어디 있느냐?" "대회의청에서 천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능각표의 외눈이 깊게 침잠되었다. 비령이 물러가고 난 뒤 능각표는 마야라는 인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아는 정보로는 마야가 혈궁의 궁주라는 것과 현 중원을 움켜쥐려는 패웅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놈이 이미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만큼 부담이 된다는 뜻이지." 능각표의 입술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천천히 대회의청으로 향했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회의인 하나가 대회의청의 의자에 앉아서 능각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능각표가 들어섰는데도 회의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능각표는 회의인을 힐끗 쳐다본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네가 마야라는 자의 사자인가?" 죽립인의 고개가 약간 까닥거렸다. 그의 건방진 태도에 능각표의 외눈이 살기를 발했다. "개도 주인을 닮아 간다더니… 그래 용건이 뭔가?" 회의인은 소매 속에 감추었던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좌도방문의 무학을 익힌 자로군!' 능각표는 서찰을 집어들고 내용을 훑어보았다. ---첫인사네. 조심하게! "건방진 놈!" 와락-! 능각표는 서찰을 콱 움켜쥐었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파아앗-! 움켜쥔 서찰에서 한 순간 푸른 섬광이 일며 불길이 확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능각표가 놀랄 사이도 없이 폭발로 이어졌다. 콰쾅-! 그러나 이미 불길이 이는 순간 능각표의 신형은 뒤쪽으로 튕겨져 날고 있었다. 폭발은 간발의 차이로 허공 중에서 일어난 것이다. 능각표의 몸이 퉁겨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죽립인의 신형도 의자를 박차고 날았다. 콰다당-! 탁자가 부서져 나갔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죽립인의 손에는 날이 잘 벼려진 도(刀)가 쥐어져 있었다. 죽립인은 능각표의 미심혈을 향해 일도양단세(一刀兩斷勢)로 도를 휘둘렀다. 일순 도기가 대회의청을 가득 메웠다. 실로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무서운 손속이었다. "겨우 이 정도 암습에 당하려고 옥문관을 넘지는 않았다." 능각표의 우수가 죽립인의 도를 그대로 낚아챘다. 까가강-! "알고나 죽어라. 이것이 마라혈강기를 운용한 혈강수(血 手)라는 무공이다." 핏빛 혈수(血手)가 수수깡 부러뜨리듯 죽립인의 도를 부수며 그대로 가슴팍을 관통했다. 섬뜩한 파육음이 일었다. 혈수가 죽립인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한 것이다. "가랏!" 능각표가 쑤셔 박힌 혈수를 뽑아내며 죽립인을 허공으로 들어 던졌다. 허공 가득 피보라가 번지며 죽립인의 신형이 회의청 벽에 처박혀 버렸다. 이 일련의 동작들은 모두 찰나지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수하들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전격적으로 치르어진 능각표의 솜씨였다. "신비각을 치려던 계획을 수정한다. 우리의 일차 적은 혈궁이다." * * * 꽈악! 푸스스스! 사왕수 태무독의 손에 쥐어진 서찰이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이 사왕수 태무독을 이토록 분노케 하는 것일까? 서찰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천하의 사왕수 태무독이 이토록 분노한 것일까? "건방진 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파아앗!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사라졌다. 초겨울의 일출(日出)! 단궁비는 이름 모를 산정에 서서 동녘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동천(冬天)의 찬 빛깔이 단궁비의 두 눈에서 착잡한 기운으로 앙금이 되어 내려앉았다. 두 눈 깊숙한 곳, 앙금을 헤치며 어떤 격동의 감회가 튀어 올랐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는 술에 젖어 살았다. 문득 우령화가 떠오르고, 적원이 떠올랐다.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곁에 없었다. 사랑은 그렇게 주는 것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단궁비는 고개를 저었다. '사왕수 태무독! 이제 너만 남았다.' 단궁비의 전신에서 살기가 뭉클 솟구쳐 올랐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났다. 그리고 아버지 단청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님! 마지막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됐습니다. 편안히 눈을 감으소서.' 그는 마음 속으로 아버지 단청운을 그려보았다. 단궁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한 사람이 빛살 같은 속도로 산을 타오르고 있었다. 한 번에 무려 이십 장을 가르는 번개같은 신법으로! 수백 장의 거리를 두고 있지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단궁비의 동공에 꽂혔다. "네놈이 단궁비냐?"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대갈일성(大喝一聲)! 음성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단궁비의 전면에 내려서는 태무독!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을 격하고 맹렬하게 얽혔다. 실로 무서운 눈빛들이다.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로 인해 산정에 서 있는 노송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당신이 사왕수 태무독?" 단궁비가 조용한 음색으로 물었다. 태무독이 흠칫했다. 단궁비의 음성은 예상 외로 침착했던 것이다. 그제야 태무독은 단궁비를 유심히 살폈다. 만만치 않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무한 듯 서있는 자세는 한 올의 틈도 없는 것이다. "인정할 만하군! 내가 태무독이다." 그 순간 단궁비의 눈빛이 시뻘건 빛을 토했다. 실제로 그 눈빛은 깊숙이 침잠되어 있거늘, 태무독이 그렇게 느낀 것이다. "시작하지!" 사방 백 장의 공간이 침묵으로 잠겨들었다. 동천에 떠오르던 태양이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단궁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태산처럼 조용히 서서 태무독을 바라볼 뿐이었다. 신비각의 충격으로 인해 그의 육체는 타락에 젖었지만, 그의 영혼과 기도는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전에 그는 밝음으로 사람들을 유쾌하게 했다면 지금은 바위같은 무거운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 기운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력을 담고 있었다. 태무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타앗!" 우렁찬 외침, 사왕수의 십지(十指)가 단궁비의 전신요혈(全身要穴)을 향해 쇠갈고리처럼 날아들었다. 살을 에이는 매서운 경기는 뼛속까지 저밀 듯하다. 묵묵히 상대의 공격을 바라보던 단궁비는 태무독의 공격이 코 앞에 다가들어서야 슬쩍 고개를 틀었다. 슈애액! 태무독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귓전을 스쳐 지났다. 찰나간에 다섯 군데의 허점이 드러났지만 단궁비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태무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실망이군! 당신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퇴보한 것 같소이다." 단궁비의 말은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마야에게 패한 후 태무독은 거의 무공수련을 포기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산을 대했을 때의 그 절망감으로. 그러나 단궁비를 보자 문득 웅심이 치밀어 올랐다. "놈! 건방 떨지 말라." 쇄애액! 열 가닥 지풍이 번개처럼 쏘아 왔다. 태무독의 이대 절기 중 하나인 것이다. "십지뇌혼조! 그러나 안돼!" 단궁비의 신형이 슬쩍 움직였다. 사왕수의 십지뇌혼조가 보기 좋게 허공을 찍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실패한 태무독은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다. 사삭! 그의 몸이 빙글 돌았다. 눈부신 변초! 조법을 권법으로 변환,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좋군!" 단궁비가 비로소 탄성을 발했다. 그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꼿꼿이 서서 사왕수의 공세를 맞받았다.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보이는 권법, 바로 음마신의 절기인 음마파천수였다. 쾅! 폭음이 울렸다. 사왕수 태무독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의 안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일초지적도 안될 줄이야. 지금이라도 도주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무독은 등을 보이기 싫었다. 단궁비를 대하면서 솟구친 웅심을 다시는 놓치기 싫었다. "이노옴!" 폭갈을 내지른 태무독이 양손을 활짝 폈다. 그의 양 손바닥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에 따라 눈동자도 흰색으로 바뀌었다. 극랄무비한 마공(魔功)인 백옥수를 펼치려는 것이다. 순간 단궁비의 눈빛이 백렬되었다. "백옥수! 그 수법이군!" 아버지의 육신에 남았던 백색 장인! "크크크,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 아비가 있는 염왕 앞으로 보내 주마!" 백색의 장영이 단궁비를 향해 섬광처럼 날아왔다. 단궁비의 눈빛이 아수라의 그것처럼 흉흉한 살기를 뿜었다. "네놈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리겠다. 독마공멸기!" 단궁비의 쌍수가 앞으로 쭉 뻗치며 백옥수를 향했다. 독마신의 독마공멸기, 무엇이건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리는 가공지독공(可恐之毒功). 그것이 펼쳐진 것이다. 꽈꽈꽝-! 사왕수 태무독이 피화살을 뿜었다. 십여 장 가량을 뒤로 날아간 사왕수는 이미 산 자의 몰골이 아니었다. 가슴은 뻥 뚫린 채 내장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미 그 내장들은 빠른 속도로 녹고 있었다. "크흐윽! 이건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중원을 누빈 지 어언 수십 년! 그 화려한 생의 종지부를 약관의 청년에게 찍은 것이 원통한 듯 태무독은 눈을 감지 못했다. 단궁비는 천천히 돌아섰다. 산을 내려가는 그의 입에서 나직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아버님!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마지막 남은 원수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단궁비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차가운 동천 위에 단청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아, 너는 천하를 위해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하느니라. 의와 정을 멀리하지 말며…… 아울러 쌍봉쌍령을 모두 거두어 천하 안녕을 위해 힘쓰도록 하거라. 아버지의 음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궁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을 콱 누르는 앙금은 쉽사리 풀어지질 않는다. '용서하십시오!' * * * 담자무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여인은 그를 위해 차를 끓이고 있었다. 밖에는 어느덧 겨울임을 알리는 포근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설(瑞雪)이다. 그리고 함박눈이다. 모닥불을 피우고 찻잔에 물을 끓이는 주약란의 모습은 함박눈에 덮여 성결해 보인다. 담자무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미색 능라의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향긋한 차향이 실내에 퍼졌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고혹한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앉아도 될까요?" "수하에게 의중을 묻는 군주도 있소이까?" 담자무의 말에 주약란은 미미하게 웃었다. 담자무의 앞에 앉은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을 내린 것인가요?" "제갈공명도 삼고초려에 머리를 숙였는데, 이 미천한 인물이 어찌 고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주약란의 옥용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담대협!" 담자무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간 그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날아든 눈송이가 정갈하게 묶은 머리에 내려앉았다. 폐부 깊숙이 찬바람을 들이킨 담자무가 천천히 돌아섰다. "세 가지 선결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첫째, 무자천서의 회수를 위해 단궁비를 한 번 만나십시오. 제가 마야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있을 터, 우리는 좀더 강해져야 합니다." 담자무의 말을 듣는 주약란의 눈빛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단궁비, 어린 왕자 같던 그! 그녀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아련한 아픔을 주고 이제는 멀어진 그! ---첫눈의 숭고함을 잊지 말기를…! 어린 왕자를 받아들이면서 속으로 그에게 그런 당부를 했었지. "수락하겠어요!" "둘째, 신비각의 문호를 대폭 개방해야 합니다. 현재 천하는 혈궁과 사율, 신비각, 이렇게 정족지세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의 힘이 가장 약합니다. 문호를 열어 천하의 기인이사들을 적극 끌어들이되 일단 정사를 불문해야 합니다. 전 중원무림의 대동단결을 보여야 합니다." "수락하겠어요!" "셋째, 신비각의 체제를 대폭 개편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신비각은 일종의 족벌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물론 그 체제에 장점도 있지만 활력이 없습니다. 새로 편입된 인사들에게 출세의 기회를 주어 성취욕과 경쟁심을 유발시켜 신비각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약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락하겠어요!" 아마 신비각의 장로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큰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신비각은 새롭게 탈바꿈하는 것이기에. 바로 담자무를 통해서! 담자무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주약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 담자무, 문주께 인사드립니다." 주약란은 밝게 웃었다. 그를 얻었다. 어린 왕자를 버리고 거호 담자무를 얻었다. 담자무가 일어섰다. 돌아갈 것이다. 몇 번 그를 보았지만 그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찬바람이 다시 몰아쳐 들었다. 문을 나서는 담자무의 등을 보던 주약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세 가지 조건을 들었을 때 군사가 나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담자무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불충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이 담자무 신비각에 몸을 담은 이상 철저한 공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요구하면 난 거절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주약란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방 안에는 그녀의 고아한 향기만이 떠돌고 있었다. 담자무 역시 멀어졌다. * * * <천하에 고함. 중원무림의 모든 문파는 돌아오는 십이월(十二月) 십이일(十二日)까지 만승산에 위치한 본궁의 개파대전에 참가하여 영부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라. 위의 명을 어기면 어느 문파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을 엄중 경고하노라! 혈궁궁주 마야.> 드디어 혈궁이 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림의 방방곡곡에 그들의 포고령이 나붙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귀왕곡의 신비각에서도 천하 각파를 향해 비밀리에 전서구를 날렸다. 담자무가 군사로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서신과 창해일룡 단궁비를 총령직에서 해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울러 변방무림의 패주 사율과 연합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설이 천지일색으로 색칠하던 날 중원에 충격적인 소문이 나돌았다. 신비각주 주약란과 담자무가 혼례를 올린다는 소문이었다. 강호는 팽팽하게 바람이 찬 고무풍선처럼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바늘 끝, 이 팽팽한 긴장감을 깰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 * * 취천하(醉天下)! 몽롱한 눈에 흰 백설이 보인다. 느는 것은 술이요, 깊어 가는 것은 외로움! 고독의 치명적인 아픔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욱 깊은 고독 뿐! 눈 속에서 하룻밤! 고묘(古墓)에서 하룻밤! 내일 아침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잠을 청하지만 다시 눈을 뜨며 보이는 황량한 풍경들! 사랑이 이런 것일 줄 몰랐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득한 꿈만 같다. 그 쾌활, 그 기쁨, 그 정열! 모든 것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열 아홉의 겨울은 몸서리쳐지도록 치열한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반드시 겪어야 하는 홍역이지만 삶의 의미가 없었다. 목적의식을 잃은 삶! 가문의 원수를 모두 갚았다고 스스로 단정을 내려 버린 빈껍데기 뿐인 삶! 자귀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령화에게 돌아가 그녀의 푸근한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단궁비는 그녀에게조차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성결한 그녀에게 오욕 뿐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 뒤는 자포자기의 나태였다. 가끔 불패괴옹의 소문을 들었다. 오척 단구의 몸으로 자신을 찾기 위해 천하를 떠돈다는 그 외팔이 노인의 소문을! 잊고 싶었다. 과거로부터 단절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를 일어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주약란이 사율 능각표와 연합하기 위해 옥문관으로 향했다. 단궁비는 일어났다. 걸음을 동쪽으로 옮겼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주약란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사율과의 연합은 무덤을 파는 것이었다. 정사는 불양립(不兩立)이다. 혈궁과 사율 모두 극악한 마두들! 신비각은 철저히 이용당하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을 것이다. 아직은 힘을 기를 때다. 주천(酒泉)! 옥문관에서 멀지 않은 변방의 도시! 그 설원에 몰아치는 추위는 살인적이었다. 휘리리링! 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오고 있었다. 설원에 쌓인 눈이 부옇게 날아올랐다. 푸아---! 불꽃이 맹렬히 일었다. 단궁비는 열심히 불을 지폈다. 발갛게 일어나는 불꽃을 보며 그는 문득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허공으로 솟구치는 잔재를 보면 가슴이 싸늘히 식었다. 단궁비는 가끔 시선을 돌려 지평선 저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바람과 눈 뿐이다. 단궁비는 다시 열심히 불을 지폈다. 그리고 한 잔의 술! 술잔을 들던 단궁비의 손 끝이 돌연 파르르 떨렸다. "궁비!" 그녀의 음성! 단궁비는 푹 고개를 숙였다. "약란, 사율과의 연합은 불가하다. 돌아가라!"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홱 고개를 든 단궁비가 본 것은 드넓게 펼쳐진 평원 뿐이다. "큭큭!" 단궁비가 기묘하게 웃었다. 환청을 다 듣다니! 단숨에 술을 목젖으로 넘긴 단궁비는 벌렁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궁비!" 단궁비는 눈을 감았다. 이 지독한 환청을 잊기 위해. 그런데, 툭 얼굴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 단궁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수백 명의 호위를 받으며.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순수를 버리고 화려함을 취한 장미처럼! 그런 그녀의 눈가에 주륵 눈물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이 단궁비의 뺨에 떨어진 것이다. 단궁비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약란, 왜 멍청한 선택을 한 거냐?" 주약란은 고개를 저었다. "궁비, 내가 당신을 찾은 것은 조언을 얻기 위함이 아니에요. 내가 필요한 것은 무자천서입니다." 단궁비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이 어색하게 꼬리를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웃었다. "무언들 못 주겠느냐! 그러나 이 길만은 안 된다. 파멸의 길이다. 돌아가서 다시 한 번 회의를 한 후 결정하라!" 단궁비의 단호한 말에 주약란은 고개를 저었다. "신비각 장로들의 회의를 거쳐 결정된 사항입니다. 아울러 당신은 이미 총령에서 제명되어 신비각의 행사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단궁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단궁비는 품 안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던 무자천서를 꺼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그의 물건이 아닌 추냉아의 물건이다. "사본을 만들던가, 외워." 무자천서를 받아드는 주약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무자천서를 받아드는 손길에 주저함은 없었다. 무자천서를 펼친 주약란의 눈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無招無式(무초무식)! 단 네 글자 뿐이었다. "당신… 나를 조롱하다니!" 주약란이 홱 돌아섰다. 활짝 펼쳐진 무자천서가 단궁비의 얼굴에 떨어졌다. 순간 단궁비는 보았다. 무초무식 그 네 글자를! 그녀는 그렇게 멀어졌다. 냉정하고 싸늘하게. 단궁비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극심한 모멸감에 그의 혼은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단궁비. 일어나서 웃어라. 예전보다 몇 배 더 밝고 쾌활하게 사는 거다. 예전보다 몇 배 더 강해지는 거다. 그래서 오늘 당한 모욕을 갚아 주는 거다. 내가 강하다는 것을 온 천하에 알려주는 거다. 말아쥔 주먹에서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하하핫!" 단궁비의 웃음소리가 주천의 들판에 울려 퍼졌다. * * * 장락봉. 혈궁의 본전 마야의 침소! 염후는 고혹스런 자태로 서 있었다. 침상에는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마야였다. "축하드려요. 모든 것이 궁주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염후가 교태로운 음성으로 침상 위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실핏줄까지 들여다보이는 새하얀 손가락이 마야의 가슴에 난 체모(體毛)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야는 이런 애무를 좋아했다. 그는 요즈음 들어 염후의 육체에 극히 무관심했다. 오늘 염후는 정말 오랜만에 기술을 발휘해 멀어져 간 그의 관심을 그녀에게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점점 아래로 향하더니 한 지점에서 뚝 멈추었다. 손가락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고목에도 꽃을 피울 정도로 섬세하고 자극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야는 무반응이었다. 염후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녀의 눈에 반짝 이채가 번뜩였다. 갑자기 그녀의 손놀림이 교묘해졌다. 사내의 회음혈을 자극하며, 귀두 아랫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자 비로소 사내의 거대한 양물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염후는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의 허리가 서서히 숙여졌다. 거봉처럼 우뚝 발기한 그의 그것을 본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붉은 입술 속으로 거봉의 일부가 사라졌다. 솜사탕을 녹이듯 감미롭게, 어린 아이의 여린 피부에 난 상처를 치료하듯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남편의 바람기에 화가 난 여인처럼 포악스럽게! 불끈! 거대한 그놈의 몸체에 시퍼런 핏줄이 드러나며 요동을 쳤다. 그 우람한 물체를 보며 염후는 진저리쳤다. 저건 얼마 전까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그녀의 그것을 가로채려 하고 있었다. 염후의 애무는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고 치열했다. 마야의 건장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쾌락! 천하최고의 우물, 염후로 인해 빚어지는 쾌락에는 천하의 마야도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의 손이 거칠게 염후의 긴 머리채를 휘감았다. "깊게!" 단호한 명령! 염후의 고개짓이 빨라졌다. 마야의 몸이 한순간 경직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눈은 염후의 동공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망막을 채운 것은 한 여인이었다. 눈처럼 순결하며, 선녀처럼 고결한 여인! 그런데 그 정결한 대지를 선점한 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그 여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여인도 일체 품지 않았다. 최고의 자리에 당도해 그녀를 먼저 차지한 놈을 죽여 버린 후 그녀를 품을 생각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그는 급격히 흥분되었고 이내 정점에 도달했다. "막세기의 동태는?" "호호! 막세기가 궁금한 게 아니라 청미의 상태가 궁금한 게 아닌가요? 궁주를 지상 최강의 무인으로 만들어줄 순음지체를 지닌 청미의 상태가?" "청미에게 명을 내려 막세기를 정리하라고 해!" * * * 막세기의 처소! 미친 듯한 정사다. 특이한 점은, 여인의 눈동자가 초점이 없다는 점이다. 약물, 혹은 어떤 심적인 금제를 당한 듯한 눈빛이다. 여하튼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죽일 듯이 탐하고 있었다. 여인의 눈동자는 허옇게 흰자위만 남긴 채 희번득거렸고, 사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강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사내의 공격에 극점에 달한 듯 여인이 만월같이 탐스런 엉덩이를 번쩍 치켜들었다. 완벽한 밀착이다. 사내의 양물과 그녀의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쾌락에 겨운 듯 여인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지고 급격히 휘몰아치던 사내의 몸놀림이 뚝 멈추었다. 사내의 몸이 쇳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으으으!" 찡그린 막세기의 얼굴에 흐르는 만족감! 그런 그의 안색이 갑자기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사정과 동시에 정기(精氣)가 여인의 몸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헉! 이건…!" 당황한 막세기는 급히 여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상체만이 일어날 뿐 하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인의 엉덩이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극도의 쾌감이 다시 밀려들었다. 이미 사정한 그의 양물이 다시 힘을 찾은 듯 빳빳하게 곤두섰다. "안돼…!" 자연적인 발기가 아니었다. 몸 안의 정혈이 빠져나가는 통로가 되어 빳빳해진 것이다. 그 정도로 막세기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정혈의 양은 엄청났고 속도는 빨랐다. "이 요녀!" 막세기는 사력을 다해 여인의 심장을 노리고 일격을 날렸다. 그런데, 빡 소리와 함께 부서진 것은 오히려 그의 주먹이었다. "호호호!" 여인의 요사한 웃음소리가 방을 울렸다. 정기가 고갈된 막세기의 몸은 할머니 뱃가죽처럼 쭈글쭈글 해지고 그는 이내 명줄을 놓고 말았다. 오로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배신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막세기. 그는 이렇듯 여인의 배 위에서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여인은 청미였다. * * * 단궁비는 객점에 들어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추레하고 지저분했다. 늘 술에 절어 눈빛은 몽롱했으며 걸음은 갈지자를 그리곤 했다. 주약란을 만난 후 그는 의식적으로 다시 과거처럼 행동한다고 수없이 자기최면을 걸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런 그가 이곳 만승산의 근처에 오게 된 것은 혈궁의 개파대전에 대한 포고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몽롱한 정신상태에서도 그는 그 개파대전에 참가하고 싶었다. '마야! 그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 신비각에 갈수록 위기가 더해간다. 그런데 난 그곳으로 돌아가기가 두렵다.' 이때 주위가 왁자지껄해지며 일단의 무사들이 객점으로 들이닥쳤다. 네 사람! 삼십 후반의 나이에 두툼한 솜옷을 입고 허리에는 기다란 기형도(奇形刀)를 패용(佩用)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로 옆의 빈 자리에 앉자마자 떠벌이기 시작했다. "윤칠, 자네! 얘기 들었는가?" "들었네. 제기랄! 혈궁인지 뭔지가 개파대전을 여는 판국에 변방무림의 오랑캐들이 무림을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오고 있으니! 더욱이 우리가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신비각이 오랑캐들과 연합을 맺었다니 갈수록 밥맛이 떨어져!" 윤칠이란 자가 대책이 안 선다는 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 사람 오랑캐가 뭔가? 대마천(大魔天), 그들은 스스로 거대한 마의 하늘이라며 스스로를 대마천이라 칭했네!" "대마천이든 뭐든 문제는 중원의 대소문파 수십 개가 그들에게 굴복했다며?" "나도 그 얘기는 들었네. 중원무림의 명문 구파일방인 청성파(靑城派), 아미파(峨嵋派)를 비롯한 강북 무림 이백 사십 개 문파가 그들의 손에 초토화 되었다더군. 그래서 우리 철모방(鐵矛 )도 초비상이 걸린 것 아닌가?" 또 다른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더구나 신비각과 연합한 후 대마천은 예전보다 더욱 잔인해져 요구에 불복하는 문파는 아예 몰살을 시킨다며?" "크크! 우습지 뭔가? 신비각은 그저 자신들의 목숨줄을 연명하기 위해 대마천과 협의를 맺은 것을 우리는 천하를 구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믿고 있었으니!" "문제야. 혈궁과 대마천! 그 틈새에 끼어 있으니 이거야 어디 마음이 뒤숭숭해서 살겠나." "만약에 그 두 세력이 싸운다면 자네들은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은가?" 최초의 덥석부리 사내가 일행들을 바라보며 흥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사람아! 나는 중원인일세. 아무리 그래도 오랑캐의 편을 들 수야 없지." "맞아, 그럴 수야 없지." "중원은 지금까지 어떤 외세의 힘에도 점령된 적이 없네. 그러니 대마천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중원혼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쫓겨나고 말 걸세." 나머지 사내들도 공감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궁비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극심한 충격에 빠졌다. 청성파와 아미파가 멸망했다니? 대마천의 힘이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그럼 신비각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말이 있었다. "자네들 불패괴옹의 소문을 들었나?" "칠십 년 동안 불패신화를 이어 온 신비각의 전대 총령을 말하는가?" "그래. 그 분이 신비각이 영입한 군사를 비방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구먼. 뭐, 담자무가 신비각을 멸망시키기 위해 잠입한 인물이라고 그런 말을 했다네." "그런 소문을 들었지. 하여간 대마천 때문에 여러 사람 죽어나. 언제나 대마천이 멸망할는지!" 그때였다. "크흐흐흐! 애송이놈들! 대마천이 뭐가 어째?" 싸늘한 괴소가 객잔에 울려 퍼졌다. 그 음성은 고막을 파열시킬 듯 사내들의 뇌리를 강타했다. 엄청난 고통에 사내들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객잔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차림이 기괴했다. 키는 사 척 단구요, 머리는 빤질빤질한 민대머리에, 얼굴은 모두 똑같이 닮은꼴이 아닌가! 동사불, 바로 그들이었다. 아수라원을 접수한 대마천주 사율 능각표의 측근인 동사불이 중원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사람들은 감히 비웃질 못했다. 난쟁이 똥자루만 해도 그들은 엄연한 고수의 풍모를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흐흐흐, 대마천이 패한다고? 이런 건방진 놈들. 단숨에 숨통을 끊어주마." 동사불은 사기를 뿜어내며 이들 장한들을 향해 다가갔다. 마치 뒹굴 듯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윤칠의 동료가 비웃음을 날렸다. "다 크지도 못한 것들이 목소리 하난 우렁차군! 내가 그랬다, 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삭!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그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의아해 바라볼 때 돌연 그의 목에서 핏줄이 주륵 흘러내리더니 갑자기 머리가 툭 굴러 떨어졌다. "으헉! 살인이다." 놀란 사람들은 급히 객잔 밖으로 튀었다. 하지만 윤칠과 그 일행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우리와는 일면식도 없거늘, 왜 우리를 죽이겠다는 것이요?" 윤칠이 쭈뼛거리며 동사불을 향해 물었다. 그는 사척단구의 난쟁이들이 자신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임을 한 수에 간파한 것이다. "크흐흐, 이놈들! 우리가 바로 네놈들이 말하는 대마천의 어른들이시다. 그러니 이제 왜 죽어야 하는지 알겠느냐?" 세 사내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들이 열심히 씹어대던 대마천의 고수가 이렇게 근접거리에 있을 줄이야! 단궁비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술잔을 내려놓고 동사불을 주목했다. 그들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사 척의 작달막한 체구. 그러나 눈에서 뿜어지는 극악한 사기는 일견키에도 이들이 초극고수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동사불을 바라보던 단궁비는 문득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아주 멀리서 무언가가 급속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단궁비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주약란을 만날 때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 그때와 똑 같다. 처음 주약란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흐흐흐, 이놈들, 억울하다 생각 말고 지옥에 가더라도 이후에는 입 조심들 하거라." 동사불 중 삼불(三佛)이 일수를 날렸다. 대수롭지 않게 날린 일수지만 무형의 강기가 세 사내의 사혈을 노렸다. 그러나 윤칠을 비롯한 사내들은 피할 생각도 못한 채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어.' 당연한 일이다. 동사불이 무형의 강막( 膜)을 뿜어 이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크아아! 사술이야. 누가 우리를 좀 구해 주시오!" 윤칠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할 수 없군. 내가 나서는 수밖에.' 단궁비가 손을 씀과 동시에 묘하게도 여인의 앙칼진 외침이 울렸다. "흥! 죽지 못해 안달하는 늙은 노물들! 중원은 오랑캐가 날뛸 대지가 아니다." 얼음굴을 통과한 듯 싸늘한 외침! 그 음성이 끝났을 때 단궁비가 발출한 암경은 동사불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파아앙-! 충돌의 여파로 객잔이 지붕째 흔들거렸다. "아이고!" "으악!" 윤칠과 그 동료들은 모두 뒤쪽으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다. "살았다." "도망가자!" 윤칠과 동료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도주하는 것을 동사불은 그대로 방치했다. '젊은 년이 대단한 공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보다 약하지 않다.' 그들은 옆자리의 단궁비가 손을 쓴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여인의 음성이 워낙 절묘한 시간에 울렸기 때문이다. 동사불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 쌍둥이의 마음이 서로 통했다. 기껏 강해 봐야 여자 아닌가? "얼굴을 보여라!" 삼불은 호통을 내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호통이 객잔 전체를 울렸는데도 상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흐흐흐! 알고봤더니 숨어서 남을 암산하는 용기 없는 년이군!" 삼불의 이죽거림이다. 반면 동사불 중 대불(大佛)은 청각과 시각을 최대한 발휘하여 암중여인(暗中女人)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보이지 않고 앙칼진 외침이 재차 들려왔다. "흥! 중원에선 오랑캐를 때려잡는 데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단궁비는 가슴이 쿵 울렸다. 너무도 느낌이 강렬했던 것이다. 그때 다시 여인의 싸늘한 음성이 울렸다.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긴 싫다. 본녀를 보고 싶다면 밖으로 나와라!" 마지막 여인의 음성은 작게 들렸다. "흐흐흐! 건방진 년! 네년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이 동사불 네 어르신이 말이다." 파아앗- 동사불의 신형이 일제히 객잔 밖으로 날아갔다. 사 척 단구지만 그들의 경공술은 매우 빨랐다. 단궁비도 그들을 따라 몸을 날렸다. 동사불은 객잔을 나서자마자 동편(東使)을 향해 날아가는 홍의소녀를 발견하고는 어흥 고함소리를 날리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 뒤를 단궁비가 은밀히 따르고 있었다.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동사불은 그렇다 치고 여인의 경공술 역시 동사불에 비해 조금도 쳐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지금 여인은 육지비행술이라는 초절정의 경공술을 펼쳐 날 듯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육지비행술을 펼치려면 최소한 이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 젊은 여자가 그런 내공을 지닌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약란 정도가 그 정도 내공을 지녔을까! "모처럼 재미있는 광경을 보겠군!" 단궁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