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21 사람들은 지붕 밑에 여자 둘이 있으면 집안이 편할 날이 없다고들 말한다. 왕룽의 집에 렌화와 뚜챈이 들어오고 나서도 아무 불평이나 불화가 없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그런 것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오란의 불평스런 기색이나 뚜챈의 독기 서린 모습으로 어쩐지 무언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으나, 렌화에 대한 애욕에 빠져 있는 그에게 그런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낮이 밤이 되고 밤이 아침으로 바뀌어도, 왕룽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그의 곁에 렌화가 누워 있는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느꼈다. 하늘에 뜬 달이 그 주기에 따라 차고 기울듯이 렌화는 언제나 옆에 가까이 있으므로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언제나 렌화를 껴안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갈증이 약간 채워지자 그는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사실들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오란과 뚜챈 사이에 곧 말다툼이 생긴 것이다. 이 일은 왕룽이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다. 남편이 둘째 여자를 들이면 아내는 대들보에 목매어 죽거나 그런 짓을 한 남편을 따지고 들어 맥도 못추게 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왕룽도 오란이 렌화를 미워할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다행히도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그 화살이 뚜챈에게 날아갈 줄을 미처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왕룽이 뚜챈을 처음 집에 두기로 작정했을 때는 렌화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때 렌화는 "뚜챈을 내 몸종으로 두게 해 줘요.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에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에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고, 큰아버지는 내가 예쁘장하니까 이렇게 팔아먹었어요. 그래서 조금도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어요."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왕룽에게 애걸했던 것이다. 그녀의 그 아름다운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본 왕룽은 두말 없이 그것을 승낙했다. 렌화에게는 몸종이 한 사람도 없었고, 그녀가 이 집에서 외톨박이란 것도 사실이었다. 오란이 첩의 시중을 들 리 없었다. 그녀가 렌화에게 말을 걸지 않을 뿐 아니라 렌화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집안에 있는 렌화는 고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렌화의 곁에 가는 사람은 숙모 뿐이었지만 그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까지 깊이 파고 들며 잡담할 것을 생각하니 불쾌한 일이었다. 종으로 어떤 여자가 적당한지 분별이 없는 왕룽은 뚜챈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란은 뚜챈을 대하자 이제껏 왕룽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화를 냈다. 뚜챈을 전날 당당한 황 영감의 몸종이었고 오란은 부엌일이나 하는 종이었지만, 이제는 왕룽네 집에 고용살이하는 만큼 오란과 다정하게 지내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오란을 처음 만났을 때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어머, 반가와요.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됐군요. 그렇지만 이번엔 당신이 대부인이고 내 주인이고...... 참 세상이란 이상하게 변하는군요." 그러나 오란은 뚜챈을 바라보다가, 그 뚜챈이 렌화의 몸종으로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들고 있던 물동이를 땅에 놓고 가운뎃방으로 들어가서 애욕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왕룽에게 말했다. "저 종년은 무엇하러 집에 두었어요?" 왕룽은 갑자기 날카롭게 묻는 말에 당황했다. 그는 주인답게 떳떳이 말하고 싶었다. '내가 이 집 주인인데 어떤 여자를 두건 무슨 참견이야.' 하고 면박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애처로운 얼굴을 바라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그가 한 처사는 돈을 가진 부자들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미안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왕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우물쭈물 주위를 살피면서 담뱃대를 찾는 척하고 허리춤을 이리저리 뒤적여 볼 뿐이었다. 오란은 꿈쩍도 않고 그 큰 발로 버티고 서서 남편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묵묵부답이자 오란은 다시 같은 말로 똑똑히 물었다. "저 종년은 무엇하러 집에 두었어요?" 왕룽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대답을 해야겠기에 맥풀린 어조로 대답했다. "왜, 그 사람이 자네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황 영감댁에 있을 적에 얼마나 저년에게 구박을 받았다구요. 하루에 스무 번도 더 부엌에 달려와선 영감님 찻물이니, 영감님 진지니 하고 정신을 못 차리게 들볶고 언제나 음식이 너무 뜨겁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그러고도 나를 못난이라느니, 이러니저러니 몰아 대고......" 그러나 왕룽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란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대답을 하지 않자 좀처럼 흘리지 않던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푸른 앞치마 자락으로 아무리 눈물을 닦아도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녀는 앞치마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겨우 말했다. "내 집에서 이런 일을 하다니 너무해요. 이 집을 나갈래도 찾아갈 친정도 없고......" 그래도 왕룽은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란은 호소하는 듯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란은 말 못하는 짐승처럼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단념한 듯 눈물이 앞을 가려 분별 못하는 손을 더듬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오란이 사라지자 왕룽은 살아난 듯했으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또 이런 자신의 생각이 부끄럽고 분하기도 하여 마치 누구와 싸움이나 하고 난 것처럼 큰 소리를 내어 혼자 중얼거렸다. "다른 남자들은 마찬가지 아닌가. 나로선 안사람에게 섭섭하게 안했어...... 나보다 더 한 놈도 있는데......" 그러니까 오란은 그 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란은 그걸로 끝장내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자기 방식대로 해 나갔다. 여느때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차를 끓여 시아버지에게 봉양했고 왕룽이 렌화에게 가지 않고 있으면 그에게도 차를 주었다. 그러나 뚜챈이 렌화에게 찻물을 주려고 부엌에 가면 솥에 물이라곤 한 방울도 없었다. 뚜챈이 아무리 큰 소리로 불평을 해도 오란은 결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렌화를 위해서 필요한 물은 자기 손으로 직접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벌써 아침 밥을 짓기 위해서 솥을 쓰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뚜챈이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오란은 일언반구 대꾸 없이 제 할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작은 마님이 목이 말라 물을 기다리시는데......" 오란은 뚜챈의 말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솥에 불만 지피면서 한 가닥의 나뭇가지라도 가난하던 옛시절을 생각해 가며 아껴서 조금씩 낭비되지 않도록 차근차근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래서 뚜챈은 찢어질 듯한 소리로 왕룽에게 호소했다. 왕룽은 그가 사랑하는 렌화가 이런 일로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그만 화가 치밀어서 부엌으로 쫓아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아침에 물을 끓일 때 좀더 끓일 수 없소?" 그러나 오란은 더욱 심각하게 증오가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난 종년의 종질은 못하겠어요." 왕룽은 화를 참지 못해서 그만 오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잔말 말아. 누가 종년을 위해서래? 제 주인을 위해서지." 오란은 아무튼 꾹 참고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 계집에게 내 진주를 두 개 다 주었죠?" 그러자 왕룽은 손을 어깨에서 떨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노여움도 잊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곳을 떠나 뚜챈에게 가서 말했다. "부엌을 따로 내고 솥도 따로 걸어야겠어. 저 미련한 것은 렌화가 좋아하는 음식도 마련하지 못할 게고 하니, 새로 부엌을 내서 자네 좋을 대로 장만하는 게 낫겠어." 왕룽은 곧 일꾼들을 불러 부엌을 새로 만들게 하고 솥도 새로 사왔다. 뚜챈은 왕룽이 '자네 좋을 대로 음식을 장만하는 게 낫겠어.' 라고 하는 말을 듣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왕룽은 겨우 집안이 잠잠해지고 여자들의 말이 없어졌으니 이젠 자기의 사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렌화에 대해서는 어떤 싫증도 느낄 줄 몰랐다. 렌화가 그 샛별 같은 눈의 백합 꽃잎 같은 새까만 긴 눈썹을 깜박거리며 애교를 부리거나 그를 바라보는 눈에 웃음의 빛이 흐를 때면 왕룽은 그만 전신이 움찔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새 부엌은 뜻밖에도 왕룽에게 괴로움을 가져왔다. 그것은 뚜챈이 매일 성안에 가서 남방에서 온 값비싼 식료품을 사오기 때문이었다. 왕룽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야자 열매 끝에 담근 대추과자, 과실, 그 밖에도 온갖 해물 등 진기하고 값비싼 것 뿐이었다. 더욱이 뚜챈은 그런 물건 값의 얼마를 잡아 떼어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모양이었다. 만약 뚜챈에게 '넌 내 살을 갉아 먹는 것 아니냐?' 고 반박한다면 뚜챈은 골을 낼 것이고 따라서 렌화도 불쾌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리춤에서 은전을 꺼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은 매일같이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그런 딱한 사정을 말할 수도 없어 날이 갈수록 그는 냉가슴만 앓았다. 그러는 동안 렌화에 대한 왕릉의 애정도 차츰 식어 갔다. 뿐만 아니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그것은 그의 숙모가 식사 때마다 안채로 드나드는 것이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숙모는 은근히 렌화에게 추파를 던졌다. 날이 갈수록 숙모가 렌화와 친밀해지는 것이 왕룽은 몹시 싫었다. 여자 셋이 그렇게 값비싼 음식을 벌여 놓고 마음껏 먹어 대며 지껄이고 웃고 흥청거리는 모습은 왕룽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또한 렌화도 숙모를 정답게 대하는 것을 보니 왕룽은 더욱 불쾌했다. 그러나 왕룽은 참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때로는 렌화에게 은근한 말로 타이르기도 했다. "렌화, 자네는 왜 늙은 뚱보를 좋아해? 그렇게 해봤자 소용 없어. 나에게나 더 다정하게 해 줘. 그 숙모는 거짓말쟁이라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자네 곁에 그런 노인네가 붙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냐." 이 말을 들은 렌화는 발끈 성을 내며 토라졌다. "나는 이 집에선 당신밖에 같이 놀 사람이 없어요. 나는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는 집에서 자랐는데 이 집의 사람이라곤 날 미워만 하는 당신 부인과 귀찮게 구는 아이들밖에 없지 않아요. 아무도 친구가 없잖아요?" 렌화는 이렇게 심통을 부렸다. 그날 밤에는 왕룽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트집을 잡았다. "내 행복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왕룽은 마침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해. 좋을 대로 해." 렌화는 여왕처럼 그를 용서했다. 왕룽은 렌화가 하는 일이라면 결코 탓하지 않고 좋다고만 했다. 그 후로부터 렌화는 왕룽이 렌화의 방문 앞까지 가까이 가도 숙모와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으면서 전혀 아는 척하지 않고 그를 오래도록 기다리게 했다. 왕룽은 렌화의 이러한 태도에 화가 났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왕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렌화에 대한 애정이 더욱 식어 갔다. 더욱 못 견디게 화가 나는 것은 렌화를 위해 산 비싼 음식을 먹은 숙모가 전보다 더 살찌고 기름기가 도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리한 숙모는 왕룽에게 더욱 다정한 태도를 취했고 비위도 잘 맞추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면 곧 일어서곤 하였기 때문에 그는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렌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전처럼 갈망에 빠진 몰아의 경지는 아니었다. 조그만 분노들을 속으로 삭히면서 꾹 참아야 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 집안에서 자꾸 일어났다. 오란에게 그런 속사정을 털어 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에게는 더욱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또 그 뿐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극도로 노쇠해서 정신이 몽롱한 그의 아버지가 아무 것도 모르고 보통때나 다름없이 담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만 있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아들이 생일 선물로 사다 준 용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들고 안뜰로 통하는 사이에 휘장을 쳐 놓은 곳까지 뒤뚱뒤뚱 걸어갔다. 지금껏 늙은이는 집안이 어떻게 됐는지, 새 집을 지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늙은이는 귀가 멀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듣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왕룽도 첩을 들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은 이 늙은이가 생각 없이 이 휘장을 걷어 젖히니 그의 아들이 웬 여자와 나란히 못가에 서서 금붕어를 바라보고 놀고 있었다. 왕룽은 금붕어보다 렌화에게 한껏 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늙은이는 아들이 가는 몸매의 예쁘게 단장을 한 여인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자 놀란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집에 갈보가 있구나!" 왕룽은 렌화가 성을 내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연약한 그녀지만 한번 성을 내기만 하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왕룽은 황급히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서 침착하게 달랬으나 늙은이는 잔소리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왕룽은 다시 늙은이를 이끌고 바깥 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구구이 설명을 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저 애는 갈보가 아니라 제 소실이에요." 그러나 늙은이는 조용히 하지 않았다. 아들의 말이 귀에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큰 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 "이 집에 갈보가 있구나!" 라고 소리소리쳤다. 그는 겨우 왕룽이 곁에 있는 것을 보자 별안간 말했다. "난 평생 한 여편네밖엔 안 가졌었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 우리는 대대로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냐." 하고 조금 있다가 또 "저건 갈보야." 하고 고함을 쳤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늙은이는 때때로 렌화에 대해 화가 치밀어오르는지 졸다 깨어나면 뜰 앞까지 걸어가서 큰 소리로 렌화에게 욕을 퍼부어 댔다. "이 갈보야." 하고 침을 뱉기도 하고 돌을 집어 떨리는 손으로 못에 던져 금붕어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마치 심술궂은 아이처럼 유치한 방법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늙은 아버지의 이런 행동도 왕룽에게는 괴로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편 렌화가 성내는 것도 여간 질겁할 일이 아니었다. 렌화가 걸핏하면 발끈 신경질을 내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왕룽으로선 귀여우면서도 못 견딜 만큼 지긋지긋했다. 아버지의 속을 풀게 하고 렌화의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이 여간 힘에 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애정은 이 일로 해서 또 한 가지 무거운 짐을 덧붙였다. 또 하루는 뒤채에서 별안간 찢어지는 듯한 렌화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왕룽이 부리나케 가 보니 쌍둥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천치 누이를 가운데 놓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렌화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위의 큰아이 둘은 그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조용히 속삭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밑의 작은 아이들은 방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향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식사 후에 뚜챈이 날라내는 음식 쟁반에 손을 넣는 것쯤으로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렌화는 몇 번이고 아이들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왕룽에게 부탁했지만 왕룽은 그럴 때마다 농담조로 얼버무렸다. "그래, 아이들도 나처럼 고운 얼굴이 보고 싶은 게지." 그리고 그는 아이들에게 그저 간단히 안뜰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타일렀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왕룽이 볼 때는 가까이 가지 않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슬그머니 드나드는 것이었다. 천치 계집애는 아무 분별 없이 바깥 양지쪽에서 헝겊 조각이나 가지고 자기 혼자 벙글벙글 웃으면서 놀 뿐이었다. 이 날은 큰애들이 서당에 가고 난 뒤 쌍둥이가 이 천치에게도 안채에 있는 여자를 구경시킬 생각으로 끌고 안뜰로 왔던 것이다. 이 천치 계집애가 오자 렌화는 처음 보는 아이라서 앉은 채 계집애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계집애는 렌화가 입고 있는 찬란한 옷이라든가 반짝이는 옥귀고리를 보고 이상하게 느꼈는지 손을 뻗쳐 보려고 하며 야릇하게 웃어댔다. 뜻도 모를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놀란 렌화가 고함을 지른 것이다. 왕룽이 가까이 가 보니 렌화는 분해서 전신을 바르르 떨며 전족한 작은 발을 구르고 웃고 있는 천치 아이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것이 내 곁에 온다면 난 당장에 나가겠어요. 이런 징그러운 천치가 있는 줄 알았으면 누가 와요? 더러운 새끼들만......" 렌화는 그 천치의 손을 잡고 멍하니 서 있는 사내애를 떠밀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왕룽은 이 모습을 보자 갑자기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이...... 이...... 내 아이에게 그런 욕을 하면 용서 못해. 아무도 내 애들에겐 욕하지 못해. 이 천치에게도 그럴 수는 없어. 애를 가져 보지도 못한 네까짓 주제에 무슨 야단이야."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자, 너희들은 저리로 가 있거라.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여자는 너희들을 싫어한다. 너희들을 싫어한다는 건 너희 아비인 나도 싫다는 거야." 천치 아이에겐 더욱 자상하게 말했다. "자, 넌 양지쪽으로 가야지." 왕룽은 여전히 공허하게 웃는 딸 아이의 손목을 잡고 바깥 뜰로 나갔다. 왕룽은 이 천치 아이의 욕을 하고 더럽다고 한 렌화가 더욱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새삼스럽게 천치 아이에 대해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솟구쳐 올랐다. 그는 며칠 동안 렌화의 방엘 가지 않고 아이들만 데리고 놀았다. 성안에 가서 과자를 사다가 천치 아이에게 주고 그 좋아하는 양을 바라보곤 얼마간 마음을 놓기도 했다. 그 후 왕룽은 다시 렌화의 방엘 갔으나 그들은 지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렌화의 태도는 이상하게 변했다. 왕룽의 마음을 사려고 특별히 애쓰는 것이 완연했다. 그가 돌아오자 숙모의 차를 마시던 렌화는 반색을 하며, "주인이 오셨네. 내 할 일이란 주인을 모시는 일인데......" 라고 말하면서 숙모를 돌려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왕룽을 다정스레 맞으며 손을 잡아 제 뺨에다 비비는 등 갖은 아양을 떨었다. 그는 렌화의 하는 양이 귀엽긴 했으나 그래도 예전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맑고 서늘한 가을날 아침, 하늘은 맑게 개이고 바다처럼 끝없이 푸르렀다. 상쾌한 바람이 제법 힘차게 논밭 위를 불어가자 왕룽은 긴 잠에서 깬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앞으로 나가 그의 논밭을 바라보았다. 물은 이미 빠지고 논밭은 햇볕에 말라서 바람결에 빛깔조차 빛났다. 그의 깊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리가 있었다. 애욕보다 더 깊은 농토에 대한 심각한 외침 소리, 그것은 그의 생활의 어떤 부분보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그는,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버리고 우단 신과 버선 따위도 벗어 던지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기운차게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괭이는 어디 있나. 쟁기는?...... 보리씨를 뿌려야지. 여보게, 칭 서방! 여보게 모두들 불러 주게. 들로 가세!"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