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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2권 제10장 탐욕(貪慾)의 결과는 죽음뿐 ① 서안(西安). 강남북을 잇는 교각(橋脚)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서안을 유명하 게 만드는 이유가 있었다. 낭인 시장. 타인에게 예속되기 싫어 한잔의 술로 시름을 달래며, 두 잔 술로 친구를 사귀고, 석 잔의 술을 마신 뒤에는 자신의 무예와 함께 생 명을 파는 낭인무사(浪人武士)들이 이곳 서안에 몰려 있었다. 만접열화루(萬接熱火樓). 만 명의 기녀와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다는 만접열화루는 서안뿐 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경영 방법과 그 호화로움으로 제법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주루였다. 한데 달포 전, 떠돌이 상인 차림을 한 사람들이 하룻밤 방 하나를 쓰는 대가가 은자 열 냥이나 하는 후원을 통째로 빌린 후부터 만 접열화루주인 피(皮)노인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 다. "나요, 팽후. 당분간 후원을 좀 써야겠시다. 그리고 이건 선불이 외다. 우리가 떠날 때 남는 돈은 거슬러 주시오." 하면서 은자도 아닌 엽전 한 닢을 딸랑 쥐어주던 고, 고, 때려 죽 여도 시원찮을 놈을 위해 오늘밤도 피노인은 정한수를 떠다 놓고 빌고 있는 중이었다. 귀신은 뭐하노? 저런 놈을 잡아가지 않고 하면서. 해가 중천(中天)을 향해 바삐 움직일 무렵, 어젯밤에 피노인이 드 린 기도에 힘입어서인지 부스스한 얼굴을 한 팽후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휴우! 나오느니 한숨이오,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피휴우! 팽후가 한 번 한숨을 쉬면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길고 큰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한숨도 제대로 못 쉬겠어!' 성질 같으면 한마디가 아니라 아예 저 주둥이를 묵사발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기분도, 힘도 없다. '호삼이, 어찌 된 건가?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죽었으면, 죽었다고 연락이라도 해주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귀가 간지럽지. 어느 놈이 내 말을 하나? 왼쪽 귀가 가려운 걸 보니 욕을 하는 건 아닌 듯한데…….' 그가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파고 있을 때였다.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열린 문에 긴 그림 자를 만들며 나타났다. 허리에 두른 무식하게 큰 대감도(大鑑刀) 대신 쪽박을 차면 영락없이 개방인으로 오인 받아도 좋아 보이는 이 청년은 바로 후원 문을 지키는 녹산영웅문의 무사 중 한 명이 었다. '자식, 옷이나 좀 빨아 입지. 꼭 저런 꼴을 내게 보여야겠어? 가 슴 아프게스리…….' 수중에 있던 모든 금화를 탈탈 털어 힘없는 사람들, 즉 녹산영웅 문의 아녀자와 어린아이들, 그리고 노인과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 람들에게 이주비(移住費)로 주었기에 지금 만접열화루에 있는 사 람들은 녹산영웅문이 아니라, 녹산걸인문으로 변해 있었다. '안되겠어. 오늘 피노인에게 미리 거스름돈을 받아 옷을 좀 사 입 혀야겠어.' 그가 참으로 기특한 생각을 할 때, 오늘의 풍운방파(風雲 派)로 강호의 시선을 받는 녹산영웅문도답게 늠름하게 걸어 온 청년은 허리를 꺾으며 입을 열었다. "문주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누가……." 무심결에, 아무 생각 없이 물으려던 팽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비밀인데, 누가 찾아왔단 말이냐? 네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 "틀림없이 문주님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름까지 말했다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뜻하지 않은 방문객에 팽후의 이마에 깊은 골이 생겼다. 그 동안 은밀하게 움직여 왔고, 만접열화루에 와서는 어느 누구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물론 피노인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 것 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이름까지 대면서 찾아왔다는 사실은 비밀이 이 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뜻! 팽후는 긴장된 눈빛으로 청년을 보며 물었다. "그 자는 누구더냐?" 그 말에 돌연 청년은 고개를 숙여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저… 그게……." 팽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청년의 언행에서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고함을 쳤다. "묻지도 않았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물어보았습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발딱 치켜든 청년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물어도 그냥 병신같이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주님 의 사부님이시라고." "뭐야? 사부라고? 어떤 시러베 잡놈이 감히!! 내, 이놈을 당장에 ……." 기억에도 가물한 시절에 이미 돌아가신 사부가 유령이 되어 나타 났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복날에 개 패듯이 때려죽이려 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팽후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멈추 어 섰다. '혹,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맞아! 분명 그럴 거야. 그렇다면 내가 열 받을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잘 된 일이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팽후는 도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손을 휘 휘 내저었다. "가서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주루로 가서 찾아보라고 전 해. 공손하게… 알았지." 순간 청년의 얼굴이 휴지처럼 팍 구겨졌다. '이를 어쩌나? 벌써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때다. 이런 걱정을 완전히 해소시켜주는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비켜!" "안됩니다! 아무리 문주님의 사부님이라시더라도… 윽!" 비명과 토닥거리는 소리에 이어 칼칼한 음성이 우렁차게 들렸다. "팽후야! 출세했다고 사부를 깔보면 죄 받는다. 어서 냉큼 나오너 라!" '영호초다!'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나던 팽후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도 로 자리에 앉아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려오너라." ② 낙일검객 영호초. 팽후와 함께 낭인 세계에서 무적고수로 통하던, 그러나 기라성(綺 羅星) 같은 고수가 많은 강호무림에서는 턱걸이를 해야만 겨우 일 류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는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호탕 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이놈! 팽후야, 어서 사부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뭘 멀뚱 히 쳐다보고만 있냐?" 과거 한잔 술에 취해 낙일검법의 전단식을 팔아먹은 것이 제정신 이 들고 난 뒤에 못내 가슴 아팠던 모양이었다. 팔걸이에 올린 왼 손바닥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쳐다보던 팽후의 얼굴이 갑자기 구십 먹은 늙은이 얼굴로 변했다. '수하도 있는데… 완전히 개망신이군. 빌어먹을 놈! 분위기 파악 을 하면 어디 덧나?' 그러면서 슬쩍 주위를 살펴보니 아닌게 아니라, 쌍부무적 서황을 비롯해 실내에 있는 녹산영웅문의 네 당주들의 눈이 진실여부를 가리느라고 두 사람 사이로 분주히 오가고 있음을 발견한 그는 정 신이 번쩍 들어 부지간 소리쳤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말도 못 들었냐? 어째서 네가 내 사부냐? 이 썩을 놈아!" 영호초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어쭈구리. 얼마 동안 못 봤다고 오리발을 내밀어." '저 자식이 기어코 내 염장을 지르는구먼! 안되겠어.' 그대로 두었다가는 무슨 꼴을 더 당할 줄 모를 일이다. 체면 유지 를 위해 한소리 하려 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 정말 듣고 있으려니 귓구멍이 가려워 더 들을 수가 없구만그 래." 탁자를 짚고 쓱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호다!' 바로 입이 걸쭉하기로 소문난 파두자 이호를 보는 순간, 내심 쾌 재를 부른 그는 부모에게 고자질하듯 일러바쳤다. "이당주, 저 자식이 바로 영호초라네." "엥!?" 이호의 눈이 둥그래졌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름이다. "어디서 듣기는 들었는데?" '저런 멍청한…….' 이호가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려나 하고 기대했던 팽후는 어이가 없다 못해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그때다. 심상치 않게 생긴(?) 사내가 눈알을 굴리자 영호초가 팽후에게 물 었다. "여보게, 이분은 누구신가?" 말씨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뒤가 켕기는 모양이었다. 그 말에 이호가 어깨를 쭉 펴고 대답했다. "본인은 녹산영웅문에서 질풍당주를 맡고 있는 파두자 이호요! 들 어보았겠지요?" '듣기는. 금시초문이다, 이놈아!' 사람 이름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잘 외는, 스스로 인명사전이라 불 러도 좋으리라고 자부하는 영호초는 마음과는 달리 짐짓 눈을 크 게 뜨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 바로 그 유명한 파두자 이대협이었군요. 이거 몰라봐서 미안 합니다." 뭣도 모르고 이호의 코가 한치는 더 높아졌다. 그는 귀밑까지 쭉 찢어진 입을 나불거렸다. "뭘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당신이 정말 문주님의 사부가 맞긴 맞는 거요?" "사부는 무슨… 얼어죽을! 이당주 왜 거 있잖아? 술 한잔에 낙일 검법을 팔았다던……." 팽후의 불퉁한 말에 이호의 머릿속이 훤해졌다. '아, 그 미친놈!' 하고 탄성을 지른 그는 눈알을 부라렸다.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다. "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허튼소리를 하는 거요! 천하의 영웅호걸이 다 모인 녹산영웅문의 문주님의 이름을 어디 감히… 뉘집 똥개 부르듯 부르는 거야!" 영웅호걸이 다 죽었나? '자식이 비유를 해도…….' 팽후는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제 살 뜯어 먹는 꼴을 외인에게 보일 수 없으니까. 그는 짐짓 두려운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당주, 성질 좀 죽이게. 그러다 또 사고 칠라." 그러면서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 성깔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의 대갈통이 박살났는지, 원. 그 피하며 꿈틀거리던 뇌를 생각하면… 어이구, 살 떨려!" 순간 영호초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인간이 어떻게 죽으면 제일 처참하오?' 하고 묻 는다면 그는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머리가 반쯤 부서져서 죽는 것이라고. 언젠가 그렇게 죽은 시체를 보고 사흘 동안 비위가 상해 그 좋은 술도 마시지 못한 그였다. 그러고 보니 이호의 험상궂은 얼굴이며, 탁자 위에 놓인 철퇴는 머리를 부수기에 딱 알맞게 보였다. ③ 그가 은근히 간을 졸일 때 이호도 놀라고 있었다. '내가? 그것도 고수를? 그건 희망사항일 뿐인데. 저 양반이 단호 법 때문에 맛이 살짝 갔나?' 다른 건 몰라도 어디까지나 솔직함 하나로 살아가는 이호가 막 입 을 열기 전, "문주님, 문도(門徒) 중에 밖에 나간 사람이 있습니까?" 영호초가 나타나고부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환금도 두진이 었다. 역시 사람은 일단 큰물에서 놀고 볼일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묻는지 익히 짐작한 팽후는 흐릿하게 웃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없네." 두진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혹시 우리 몰래 누가 나가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허나 팽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네. 다른 건 몰라도 본 문도들은 명령 하나만큼 은 기가 막히게 잘 듣지 않나?" "속하도 그리 생각합니다만……." 고개를 주억거린 두진은 눈을 빛내며 영호초에게로 고개를 돌렸 다. "그렇다면 저분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맞아! 왜 그것을 생각 못했지." 팽후는 짐짓 무릎팍을 탁 쳤다. 두진의 기분을 돋구어주기 위해서 였다. "역시 두당주뿐이야." '좀 배워라, 배워.' 하는 눈빛으로 흘깃 서황을 비롯한 천가진, 마광수, 이호를 째려 본 팽후는, "우리 두당주의 말에 어떻게 생각하나, 영호초?" 영호초는 입맛이 썼다. 팽후에게 인사 받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 면 목이 달아날 판국이었다. "그러지, 뭐."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 영호초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실 나도 사해표국(四海 局)의 표사로 팔려갔다가, 자네, 사해 표국 알지?" 사해표국은 이곳 중경에서 제일 큰 표국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안다고 표현한 팽후는 재촉했다. "계속하게." 냉정한 말에 맥이 탁 풀렸지만 영호초는 이내 흥분된 표정으로 떠 벌리기 시작했다. "이번 표행은 정말 대단했네. 표물이 뭔지는 모르지만 사해표국의 국주(局主)인 건곤수(乾坤手) 전상현(全想賢)은 물론이요, 쟁자 수(爭子手)와 표사들이 전부 나섰다네. 어디 그뿐인가. 낭인들도 삼십 명이나 차출되었으니 말 끝난 것 아니겠나?" 그 정도 규모라면 영호초 말마따나 굉장할 정도가 아니었다. 팽후 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표물이었나?" '그럼 그렇지. 제가 안 놀라고 배겨. 표물이 어디간 줄 알면 더 놀랄걸.' 영호초는 허리를 쭉 폈다. "놀라지 말게." "……." "바로 운남(雲南)의 오행마궁(五行魔宮)일세!" "뭣이! 오행마궁!" 예상대로였다.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팽후는 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영호초는 짐짓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비싼 밥 먹고 할 일 없다고 거짓말하겠나." ④ 오행마궁(五行魔宮)! 이역(異域)인 운남에서 신(神)처럼 군림하는 오행마궁의 무서움은 중원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원의 문파와는 달리 오행(五行), 즉 수목금토화(水木金土火)의 다섯 궁주가 있었다. 이들은 일란성 다섯 쌍둥이며, 이들이 펼치 는 합벽술인 오행마라진(五行魔羅陣)은 가히 천하무적이라는 소문 이었다. 허나 그들은 운남에서 중원으로 단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아 그 소문은 미지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오행마궁에 표물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놀라운 일이 었다. 게다가 지금 강호의 정세로 보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표국의 관행상 송출인(送出人)이 원하지 않으면 신분을 밝히지 않 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팽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보냈는지 아는가?" "글쎄." 고개를 갸웃거린 영호초는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확신할 수 없지만 마륭방에서 보냈지 않나 싶네." 뜻밖의 대답에 팽후는 놀라 물었다. "마륭방이! 그들이 왜?" 영호초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듯 서슴지 않고 설명했다. "무림맹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자 마륭방은 강북의 모든 마 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네. 그 시점에 사해표국이 표물을 맡았 고 남만에 도착해서야 표물이 오행마궁으로 가는 것이라고 전국주 가 귀뜸을 해주더군. 그래서 짐작했지. 아마 마륭방이 무림맹에 대항하기 위해 오행마궁을 포섭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고 오 는 도중에 녹림칠십이채가 멸망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야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네." "뭐여… 녹림칠십이채가! 그게 언젯적 일인가?" 팽후가 놀라 소리치듯 묻자, 영호초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이… 새삼스럽게 왜 그리 놀라?" 은근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팽후는 손을 저었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처음 듣는 이야기네." 순간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 영호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 여기에 줄곧 처박혀 있었다고 했지."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알았으면 됐네. 녹림칠십이채는 언제 멸망했나?" "그게 그러니까……." 이어 영호초는 상세히 설명했다. 녹림칠십이채가 멸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열흘 전이며, 그 소 문이 나돌자 정도무인들은 남(南)으로 가고, 사도무인들은 북(北) 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심심찮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고. "이틀 전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와서 보니 여기도 개판이더군. 정 (正) 아니면 사(邪)이고 보니, 하루도 싸움이 끊이지 않았네. 그 리고 낭인무사들 태반이 이미 마륭방에 가입하였다는 소문도 있고 ……." "!" 영호초의 말 대로라면 당금 강호는 혼란의 도가니나 다름없었다. 흑 아니면 백! 너무 분명한 선이 그어진 것이다. 이것은 적이 아니면 아군이라는 뜻이다. 팽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낭패로군. 단호법도 없는 지금 이런 일들이 벌어지다니.' 그때 서황이 불쑥 끼여들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소만……." 다른 것에는 관심 없고 오직 그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묻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괜히 왔다 싶은 영호초는 짜증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고 시큰둥하 게 대답했다. "간단하오. 만접열화루의 후원을 이렇게 오래 차지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말이 돌았고, 나는 호기심이 생겨 노이(盧二)에게 물어봤 을 뿐이오." "노이가 누구요?" 팽후가 대신 대답했다. "여기 점소이네." 이어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영호초에게 물었다. "그놈이 뭐라 하던가? 분명 본 문주라고 했나?" "아닐세. 장사치라 하더군. 하지만 인상 착의를 듣고 자네인 줄 알았지." "그랬었군." 팽후는 다소 안심되었다. "고문했나?" 말뜻을 알아차린 영호초는 처음으로 웃었다. "하하하, 그럴 필요도 없지. 내가 이래봬도 여기서 꽤나 유명인사 아닌가?" "호랑이 없는 산에는 뭐가 왕 노릇 한다더니. 자네가 꼭 그짝일세 그려." 팽후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다가, "그놈 입이 가벼워서 못 쓰겠구먼." 그 말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서황이 쌍심지를 켰다. "가서 잡아올까요, 문주님?" 팽후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물었다. "점소이가 한둘이 아닌데……. 얼굴을 아나?" 서황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나 잡아 물어보면……." "됐네, 이 사람아! 차라리 밖에 나가서 우리 여기 있소 하고 떠들 지 그러나?" "은밀히……." "됐다잖아! 이 일은 본 문주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부문주는 신경 끊게!" '씨! 말도 못하게 해.' 주둥이가 나발처럼 튀어나온 서황은 불퉁하게 외쳤다. "알았소! 혼자 다 해 처먹으시오!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 면 되지, 뭐." "뭐야!!" 팽후의 눈썹이 불끈 솟구쳤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래도 외인 앞이니까. "하핫! 본문은 격의 없이 지내는 처지라… 이해하게나?" "이해하네." 그러면서도 영호초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는 팽후가 문득 불쌍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처럼 자유롭게 살지 뭐하러 문파는 만들어 가지고……. 만들려면 좀 똑똑한 놈들을 수하로 거두든지. 그러다 불현듯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느 분이 단호삼, 단대협이신지……?" 그 말은 실내 분위기를 단번에 초상집으로 만들기에 족했다. "단호법은 여기 없네." 팽후는 한숨을 푹 쉬며 손을 저었다. "사정은 묻지 말게. 괴로우니까." ⑤ 식사를 가지고 객실을 찾았다가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노이는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올라 앞이 안 보였다. 단 한주먹에 그렇게 된 것이다. "더 맞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낭인무사인 혈수검(血手劍) 맹호연(孟豪延)은 주먹을 흔들며 으름 장을 놓았다. 으름장으로 그치면 좋겠지만 평소의 성격으로 보나, 뭐로 보나 그 정도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노이는 잔 뜩 겁먹은 얼굴로 더듬거렸다. "나, 나으리.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 모릅니다요." 맹호연의 눈이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한번 버텨 보시겠다 이 말이지? 좋아, 좋은 생각이야. 그렇잖아 도 손이 근질거렸는데." 그는 주먹에 침을 탁 뱉었다. "슬슬 타작을 시작해 보실까. 노이, 최대한 버티기를!" 순간 노이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자, 잠깐! 말씀 올리겠습니다요!!" "이거 실망인걸. 갑자기 생각이라도 났나?" 노이는 목뼈가 부러져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요!"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시작해. 하나도 빼먹지 말고!" "예, 예.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영호대협이 찾아와서 후원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보길래 소인은 모른다고 했습죠. 사 실 나는 오는 첫날 보고는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영호대협께서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씀 드 렸죠. 그랬더니 영호대협께서 웃으시면서 '팽가 놈이 왔군.' 하시 더라구요." 맹호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영호초가 아는 사람이라면 상인이 아 니라는 증거였다. '흐흐, 역시 영호초 뒤를 밟기를 잘했어. 놈들이 누군지 알아내서 마륭방에 가면… 흐흐, 한자리 주겠지.' 내심 주판알을 열심히 퉁기면서 그는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 었다. "팽가가 누군지 아느냐?" "그게 저……." 노이가 망설이자, 맹호연은 대뜸 손을 쳐들었다. "또 생각이 안 나는가 보지?" "납니다요, 나요!"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이 당장 급했다. 재빨리 한걸음 물러서며 손을 저어 보인 노이는 빠른 어조로 말했 다. "팽후, 팽대협이었습니다요." 뜻밖의 이름에 맹호연은 흠칫 놀라 물었다. "독심검 팽후 말이냐?" "예. 바로 그입니다." "그래?"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눈치였다가 불현 듯 물었다. "그런데 좀 전에는 영호초에게 한 번밖에 보지 못해 누군지 모른 다고 말했다며?" "아! 그거요." 노이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처음 볼 때 장사치 복장이라 어째 안면은 좀 있는데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러다 영호대협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하고 감이 오더라니까요." "그렇다면 확실하겠군." 노이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이놈 목을 걸고 장담합니다요!" "목까지 걸 필요는 없고……." 말을 흐린 맹호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 이 사실을 누가 또 알고 있나?"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영호대협도 소인 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할 겁니다. 소인의 귀가 밝지 않았 다면… 헤헤헤……." "다행이군." 만족한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린 그는 불쑥 주먹을 뻗었다. 빠각! 가슴뼈를 부수고 깊숙이 박힌 맹호연의 주먹을 본 노이의 눈이 튀 어나올 듯 커졌다. "크윽!" 맹호연은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히죽 웃었다. "주먹에 묻은 침은 닦아야지." ⑥ 밤이 찾아왔다. 식사와 함께 반주(飯酒) 몇 잔을 걸치고 침실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던 팽후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뭐야! 노이가 죽었다고?" 팽후 대신 노이를 데리러 갔던 영호초는 무거운 신색으로 대답했 다. "가슴이 함몰된 채 객실 침상 밑에 숨겨져 있었네." "누가 그런 짓을……." 영호초는 빠르게 말했다. "맹호연이네."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혈수검 말인가?" 영호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놈이 객실로 들어가는 것을 점소이 하나가 보았는데 나 오지를 않았다더군. 혹시나 해서 만접열화루 전부를 뒤졌지만 놈 은 없었네. 아마 자네에 대해 알아내고 몰래 빠져 나간 모양이 야." 팽후는 은근히 떨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물었다. "한데 그 정도로 놈이 노이를 죽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 않은 가?" "옳은 말이야. 하지만 내가 그놈 짓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 "놈도 이번에 나하고 같이 운남으로 갔네. 그런데 오는 도중 녹림 칠십이채가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자 마륭방에 가입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괜찮은 정보라도 하나 들고 가면 좋 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더군."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 며 말했다. "그런데 노이는 자네를 모르고 있었는데… 뭘 알아내고 노이를 죽 였지?" 그 말을 들은 팽후는 내심 다행이다 싶은 정도가 아니라 놀란 것 조차 아까웠다. 맹호연이 왜 죽였는지 몰라도 점소이 하나 죽은 것 가지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자네가 말해주지 않았나?" 영호초는 펄쩍 뛰었다. "내가 미쳤나! 그런 말을 하게!!" 완전히 마음이 놓인 팽후는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 사람아, 농담이네. 농담! 자, 자. 그만 진정하고 이리 와 앉 게. 간만에 만났는데 회포라도 풀어야지 않겠나?" "싫다!!" 버럭 고함치며 몸을 돌린 영호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 다. '설마?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건 아니겠지.' 천면사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야? 놈의 시체가 없다고?" 열흘 동안 수하들을 풀어 인근의 밧줄이란 밧줄은 모두 구했다. 그렇게 모은 밧줄을 다섯 군데로 나눠 한천애에 늘어뜨리고 수하 들을 내려보냈다. 한천애의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 했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모두 이 모양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 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환사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동굴 하나를 발견했는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습니 다. 그것도 속하가 들어가기 전까지 사람이 있은 듯했습니다만… …." "그 말은 가보니까 없더라는 말이야?" 환사의 머리가 깊이 수그러졌다. "그렇습니다." "샅샅이 찾아보았느냐?" "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밧줄을 타고 겨우 내려갈 정도의 천장단애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 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금방 있었던 흔적이 있었는데도 없다는 것 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잘못 본 게 아니냐?" 환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속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몇 번 더……."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알았다. 본좌가 직접 내려가 보지." 환사의 말을 막은 그는 짤막하게 명령을 내렸다. "밧줄을 옮겨가면서 놈의 시체를 찾도록 해라!" 위이잉! 밑으로 내려갈수록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밧줄이 미친 듯이 요동 을 치는 바람에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암벽을 잡지 않고는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을 정도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환 사가 잘못 보았다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마침내 천면사신은 동굴에 내려설 수가 있었다. 동굴 입구는 머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우우우웅! 마치 호곡성(號哭聲) 같은 음향이 들려왔다. 바람이 들어갔다가 되나오며 내는 음향이었다. "막힌 동굴이군." 나직이 중얼거린 천면사신은 천리화통(千里火筒)에 불을 붙였다. 천리화통은 일반 화섭자보다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있고, 빛도 훨 씬 밝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바람과 비에도 꺼지지 않아 무림인이 라면 필수품으로 갖고 다녔다. 만일을 대비해 그는 금황신수를 운공해 오른손으로 가슴을 보호하 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몇 발짝 가지 않아 동굴은 허리를 펴 고도 남을 만큼 높아졌다. 입구만 낮은 모양이었다. 퐁퐁…….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주위를 유심히 살피던 천면사신의 눈이 돌연 빛났다. 바닥에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체들. 그것은 놀랍게도 작은 물 고기의 가시였다. 그때다. "쯔쯧! 지나친 물욕(物慾)은 왕왕 죽음을 부른다는 극히 평범한 말도 모르는 인간이군." <☞ 2권 끝> |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