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의 여름
김금자
태양이 살을 태우듯 내리쬐던 7월 말, 삼복더위 한가운데서 우리의 여름은 시작되었다. 1984년 스물여섯의 여름 그 시절 스물여섯 여성은 이미 혼기가 꽉 찬 나이이었다. 그 나이는 어른이 되었다고 믿기에는 아직 서툴렀고, 우리 모두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만만하였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이에 여고 동창 일곱 명이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하는 일부터 쉽지가 않았다. “이번엔 꼭 안 가본 데로 가보자!” 하는 말에 저마다의 기억과 바람이 부딪히고 의견은 자꾸 엇갈리어 결정은 미뤄졌다. “산이 좋겠다.” “아니 바다는 어때?” 의견은 갈팡질팡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88올림픽고속도로가 생겼잖아 전라도 한번 가보자.” 그 한마디가 길이 되었다. 목적지는 영암 월출산이었다. 이 도로는 1984년 6월 27일 담양~옥포 구간이 개통된 영호남 연결 고속도로이다. 지금은 2015년 전 구간 4차선 확장과 함께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광주까지 가는 네 시간 동안 우리는 배낭보다 더 큰 기대를 메고 있었다. 배낭 안에는 먹거리는 당연히 챙기었고, 카메라와 라디오는 그 시절 여행자의 자존심이었고 필수품이었다. 코펠과 버너는 자유의 상징처럼 느껴지었다. 부푼 설렘을 가슴 가득 안고 도착한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영암행 버스로 타고 월출산 아래 도갑사에 도착하였다.
문제는 그때부터이었다. 월출산은 우리에게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등산로를 찾지 못한 채 바위투성이 길에서 헤매다 보니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 졌다.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배낭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었다. 이쪽이 맞다, 아니 저쪽이 더 나을 것 같다는 말이 서로 엇갈리며 마음도 함께 어지러워졌다. 여기서도 갈팡질팡 이었다.
급기야 한 친구가 배낭을 밀어 바위 아래로 굴려버렸다. “얘들아, 봤지? 우리도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자!” 나는 겁이 많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금자야, 일단 내 뒤에 앉아, 그리고 허리를 꽉 잡고 그냥 미끄러지면 돼.” 그렇게 우리는 바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고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으나 라디오는 완전히 고장 나버렸다. 그 침묵은 마치 그날 하루를 예고하는 듯했다. 겨우 도갑사 입구 쪽 허름한 민박집을 구하였다.
피곤함도 잠시 먹는 즐거움 앞에서는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솜씨 좋은 친구는 재바르게 양파, 감자, 당근, 돼지고기를 넣어 알록달록한 카레 라이스를 후다닥 끓여 내었다. “그래도 술이 빠지면 재미없지.” 누군가 꺼낸 청하에 우리는 한 잔씩 나눴다. 라디오가 고장 난 덕분에 풍악은 생음악이었다. 낮의 힘든 시간은 잠시 잊고 몇 곡으로 신나게 분위기 띄웠다. 갑자기 동네 건달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반말로 같이 놀자며 다가왔다. 우리는 잔뜩 겁에 질려 정중히 거절하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날 밤은 교대로 불침번 서가며 잠을 설쳤다. 민박집 주인을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으나 낯선 곳에서 밤은 그 자체로 불안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정상 등정은 포기하였다. 대신 무사히 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광주 방향에서 뙤약볕 아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성 가전제품 광고를 붙인 미니버스가 우리 앞에 멈추었다. “ 아가씨들, 어디 가세요?” “광주요.” 광주는 반대 방향이라 하자 기사와 동승 한 남자는 밑에 가서 기름 넣고 다시 광주로 올라간다면서 타라고 하였다. 또다시, 갈팡질팡 타도될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이미 한두 명이 차에 올랐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차 안은 시원했고, 의자는 푹신했다. 천국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차는 계속 남쪽으로만 달렸다. 항의를 시작하자 남자는 적반하장이다.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이, 아가씨들 이 차는 완도로 간당께~” 순간 등골이 오싹하였다. 우리는 일곱이라는 숫자에 의지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항의도 하고 사정도 해 보았으나 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해남이었다. 완도행 배를 타려면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다는 말에 우리는 선착장의 사람들 속에서 서로 손 꽉 잡고 횡대로 띠를 둘러섰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해남 버스터미널 가는 길에, 대형 관광버스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한 중년 남성이 나를 보고 자기 여동생과 똑같이 닮았다고 대구 사는 동생이 여기 어쩐 일인가? 싶어 내렸다 한다. 우리는 대구라는 말에 있었던 얘기를 전하였다. 전라도 사람들 왜 이러냐면서 그분한테 엉뚱한 화풀이 비슷하게 하였다. 그분들은 조선대학교 교직원들이었다. 완도로 야유회 다녀오는 길이라 하였다. 우리 사연을 들은 그는 미안하다며 대신 사과와 함께, 우리 일곱 명을 광주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였다. 또 한 번 갈팡질팡하였다. 그 선택은 우리를 살렸다. 버스에 오르니 매우 시원했다. 맛있는 떡과 시원한 수박도 챙겨주고 의자는 안락하여 바로 잠이 쏟아진다.
그날 밤 호남선 야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다시 경부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새벽에 대전역 도착하니 또 의견이 엇갈리었다. 여관은 무섭고, 길바닥은 더 무서웠다. 흔한 말로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에 의지하자는 의견에 모두 찬성하여 파출소를 찾았다. 새벽 두 시, 대전역 파출소의 나무 의자는 그 어떤 침대보다 안전하였다. 다음 날,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각자의 근무지로 출근하였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훗날 뉴스로 알았다. 그 무렵 같은 방식으로 여성들을 섬으로 끌고 가 인신매매하던 범죄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할수록 끔찍하였다. 우리의 여름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해 여름휴가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좌충우돌의 연속으로 끝났다. 나는 그 여름을 통하여, 세상은 분명 무섭지만, 그보다 더 많은 착한 선의가 조용히 숨 쉬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해 조선대학교 교직원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지금도 그 여름을 떠 올릴 때마다 나는 이 말을 되새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갈팡질팡하던 순간에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기에, 하늘은 우리를 집으로 돌려 보내주었고, 스물여섯의 여름은 그렇게 내 삶의 방향이 되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