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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륜공자 제3권
검궁인 저
20장 항산(恒山)의 정해(情海)
①
휘이... 위잉.......
모진 바람과 함께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폭설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건곤일색(乾坤一色).
천지 어느 곳을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은 눈뿐이었다. 대륙으로부터 몰아쳐온 풍설에 중원은 온통 설국으로 화해갔다.
항산(恒山).
중원오악 중의 하나인 항산은 북악이라고도 불리웠다. 그 이름에 걸맞게 항산은 산세가 수려했다. 뿐만 아니라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옛날부터 중원인들은 이곳에서 옥황대제(玉皇大帝)와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모셔왔다.
항산의 산세는 험하기 그지없었다. 더우기 겨울에는 폭설로 인해 사람이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오직 짐승들의 울음만이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 사이로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런 항산의 한 기슭에 한 채의 모옥이 있었다. 몇 칸의 띠집으로 이루어진 모옥은 속세를 완전히 떠난 듯한 탈속한 느낌을 풍겼다.
모옥에 살고 있는 사람. 그는 뜻밖에도 세상에서 가장 괴팍한 사람이라고 불리워지는 사람이었다.
독심절의(毒心絶醫) 구불리(仇不利).
그는 중원 이대신의(二大神醫) 중 한 명이었다.
중원에는 이름난 신의가 둘 있었다. 활사묘인(活死妙人) 사마방(司馬方)과 독심절의 구불리가 바로 그들이었다.
중원칠기 중의 일인인 사마방의 의술은 화타나 편작을 능가했다. 그는 죽은 나무와 꽃을 살리듯 목숨만 붙어 있으면 그 어떤 증상과 병도 고쳤다.
그러나 독심절의 구불리는 달랐다. 그는 살리는(生) 의술이라기보다는 죽이는(死) 의술에 능했던 것이다.
독심절의 구불리.
그는 독심절의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을 쓰는데 천하제일이었다. 구불리는 천하의 모든 독을 다룰 줄 알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독을 연구하는데 미친 사람이었다. 구불리는 항산 기슭에 자리를 정한 이래 단 한 차례도 모옥을 떠나지 않았다. 오직 그곳에서 독만을 끊임없이 연구했던 것이다.
독심절의가 왜, 어떤 이유로 독의 연구에만 몰두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는 제자조차도 없었다. 다만 그가 세상 전체와도 바꾸지 않으려는 손녀 하나가 그의 시중을 들며 모옥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옥잠(玉簪).
그것이 독심절의가 천금같이 여기는 손녀의 이름이었다. 구불리는 그녀에게 자신의 성을 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단지 옥잠이라고만 불렀다.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눈같이 깨끗하게 자란 손녀였다. 구불리는 세상에서 오직 옥잠만을 사랑했다.
그런데 삼 개월 전의 어느날이었다. 만추의 불길로 불타오르던 항산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옥잠은 독초를 캐러 나갔다가 한 청년을 발견했다. 청년은 의식을 잃고 낙엽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옥잠은 정신을 잃은 청년을 집에까지 업고 올 수 있었다.
진우명(陣宇明).
그것이 청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몰락한 문가(文家)의 유생이었다. 진우명은 과거에 여덟 번이나 낙방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처지라 진우명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갈 곳도 없이 떠돌다가 항산 부근에서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것이다.
옥잠은 진우명을 정성껏 간호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옥잠은 기어이 그를 살렸고, 급기야는 그와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 구불리는 진우명의 출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생각이 변했다.
진우명의 자질이 뜻밖으로 비범했던 것이다. 특히 가까이 생활하면서 지켜본 결과 그는 인품을 비롯하여 모든 면이 범속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애지중지하는 손녀 옥잠이 그를 사랑한다는 데에야 무슨 반대를 하겠는가.
마침내 청년 진우명은 구불리의 제자가 되었다. 구불리는 자신의 독술(毒術)을 그에게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더불어 구불리는 진우명을 옥잠의 배후자로 생각했다.
"호호호... 가가. 소매를 잡아봐요. 호호호!"
옥같이 투명한 웃음이 설백일색(雪白一色)인 항산 기슭에 울려 퍼졌다.
아침이었다. 눈은 그쳤고 바람은 잠잠했다.
십팔 세 가량의 소녀였다. 그녀는 일신에 소박한 마의를 입고 약초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녀는 투명한 웃음을 흘리며 하얀 눈 위를 내달아 산비탈을 내려갔다.
"하하... 옥잠! 네가 가면 어디까지 간다고 그래?"
뒤이어 한 청년의 음성이 들렸다. 그의 음성도 맑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청년이 옥잠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었다. 그 또한 마의를 입고 있었다. 유생냄새가 물씬 풍기는 청년은 이십팔 세 가량 되어 보였다.
청년은 약간 허약해 보였다. 그것이 한 가지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매력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호호호... 가가 어서... 잡아봐요!"
옥잠은 깔깔거리며 눈길을 뛰어갔다. 내리뛰는 그녀의 발걸음은 산비탈을 치달려오르는 토끼처럼 날랬다.
"헉헉......!"
청년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를 쓰고 그녀를 뒤쫓았다. 하지만 거리는 좀체로 좁혀지지 않았다.
옥잠은 경신술을 써서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옥잠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어멋!"
옥잠이 비명을 내지르며 눈 위를 나뒹굴었다.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돌에 걸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뒤쫓아온 청년이 신형을 날리며 옥잠을 덮쳤다.
"어멋!"
두 사람은 포개지듯 쓰러졌다.
옥잠은 뒤이어 즐거운 비명을 내질르며 청년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청년은 청순하기가 그지없는 옥잠을 끌어안고 눈 위를 뒹굴었다. 옥잠과 함께 눈 위를 나뒹구는 청년.
그는 바로 진우명이었다.
"하하하!"
"호호호!"
두 남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설산을 메아리쳐갔다. 걱정근심이라곤 한 점도 없는 웃음소리였다. 뒤이어 그들은 눈 위를 마구 뒹굴었다.
"아앗!"
그러다 그들은 똑같이 비명을 지르며 멈추었다. 한 그루 설목(雪木)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푸르르르륵.......
설목에 쌓여 있던 눈꽃이 화사하게 낙화하며 그들을 덮어 씌웠다.
"어머!"
옥잠은 차가운 눈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자 비명을 질렀다.
진우명의 머리와 어깨 위로도 차가운 눈꽃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그는 옥잠의 몸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옥잠, 내가 털어 주마."
그는 부드럽게 말하고 손가락으로 옥잠의 얼굴에 떨어진 눈을 쓸었다.
그린 듯 선연한 아미가 드러났다. 그녀의 이마는 눈보다도 더 희고 깨끗했다. 이어 오똑한 코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그의 손가락이 문질렀다.
"으음!"
옥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그 순간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옥같은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너무도 청순한 모습이었다.
"......!"
진우명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깨를 떨었다.
"옥잠!"
한순간 진우명의 입술이 옥잠의 앵두빛 입술을 덮었다.
"음......."
옥잠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②
그들은 포개진 채 설목 아래서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어쩌면 그 순간은 우주조차도 운행을 중지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 항산에 사는 산신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부러워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다른 시각보다 배나 빨리 흘러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였다.
따각... 따각.......
산기슭 아래로부터 은은히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진우명은 분명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진우명은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입술을 떼었다.
"아!"
옥잠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얼굴은 봄눈 속에 핀 동백꽃처럼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안아줘요, 가가!"
그녀는 다시 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더이상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일어서려는 진우명의 목에 매달렸다. 진우명은 그녀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옥잠, 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시겠다. 어서 가야 해."
그는 나긋나긋한 옥잠의 허리를 끌어 안고 일어섰다.
"가가!"
옥잠은 부끄러움에 어쩔줄 모르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이때였다.
"두 분, 실례지만 말 좀 묻겠소이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
진우명과 옥잠은 흠칫하여 떨어졌다.
언제 다가왔던 것일까?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한 필의 백마를 탄 백삼청년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삼청년은 다소 가냘픈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몹시 영준한 미청년이었다.
그는 마치 여장을 하면 미녀로 착각할 정도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옥잠은 미청년을 훔쳐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행여 그가 조금 전의 광경을 보았을까 해서 였다.
진우명은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물어 보십시오. 대체 무엇을......?"
"......."
미청년은 진우명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말 위에 올라탄 채 호수같이 깊은 눈으로 진우명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
문득 미청년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드러났다. 그는 곧 말에서 내리더니 깍듯이 포권지례를 치루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독심절의 노선배님을 찾으러 왔소이다. 혹시 그 분의 거처를 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
진우명과 옥잠은 다같이 흠칫했다.
지금까지 독심절의를 찾아 이곳까지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미청년은 두 사람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급히 깨달았다.
그는 급히 말했다.
"소생은 석장청이란 사람이오. 급한 볼일이 있어 노선배를 찾고 있습니다."
미청년은 겸손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때서야 진우명은 정중히 읍하며 말했다.
"그 분은 저의 사부님이십니다."
"아! 그렇다면 제가 쉽게 찾았군요!"
석장청은 반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진우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외인을 만나시지 않으신 지 오래입니다. 석공자께서 가셔도 헛걸음만 할 뿐입니다."
진우명의 말에 석장청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하오나 이것을 보시면 필시 소생을 접견하리라 믿습니다."
석장청은 진우명을 향해 손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그것은 은색의 깃이었다.
"......?"
진우명은 의아한 빛을 띄우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모옥 앞에 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식경 후였다. 그들은 바로 옥잠을 비롯하여 진우명과 석장청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석형."
"알겠소이다. "
진우명의 말에 석장청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미소치고는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진우명과 옥잠은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사부님!"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그들은 모옥 안으로 들어서며 구불리를 불렀다.
"무슨 일들이냐?"
약실(藥室)에서 구불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우명은 급히 약실로 향했다.
독심절의 구불리는 바로 약실에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하반신을 흰 천으로 덮고 있었다. 구불리의 눈빛은 암록색(暗綠色)을 띄고 있었다. 피부는 백지장같이 창백하였다. 머리칼은 완전히 백발이 되어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독심절의 구불리.
그가 태어난 곳은 천축과 묘족의 접경을 이룬 운남성(雲南省) 서남쪽이었다. 그는 원래 포랑족(布朗族)의 족장 아들이었다. 그런 구불리가 항산에 은거해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가히 강호괴인다운 모습이었다.
"학익우(鶴翼羽)!"
그는 진우명에게서 받아든 흰 깃(白羽)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뒤이어 그의 눈에서 녹광이 번쩍였다.
"들라 해라."
그는 차갑게 말했다.
"예, 사부님."
진우명은 절을 한 뒤 물러났다.
잠시 후 진우명은 석장청을 데리고 들어왔다. 석장청은 들어오자마자 장읍했다.
"말학후진 석장청,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구불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래 학익우를 보낸 이유는?"
그는 대뜸 물었다. 몹시 차갑고 무뚝뚝한 어조였다. 석장청은 그러나 조금도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그 말에 구불리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석붕(石崩)이 이십 년 전부터 노부에게 여러 가지 약초들을 보내주어 노부는 연구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 언제고 그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 알았지. 천문선생(天文先生)인 그는 절대 손해볼 일은 하지 않지. 훗훗... 결국 그는 학익우를 보내 약초값을 받으려 하는군."
천문선생 석붕.
그는 바로 석대세가(石大世家)의 가주였다.
이십여 년 전 천문선생 석붕은 독심절의 구불리가 항산에 은거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자진해서 온갖 희귀약초를 보내 주었다.
석붕은 매우 교우가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천하 곳곳에 교분을 맺고 있었다. 또한 많은 은혜도 베풀었다. 하지만 그는 거저 배풀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물(信物)인 학익우를 보내 언제고 한 가지 부탁을 그가 도와준 인물에게 하곤 했다. 그 일은 무림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상 독심절의 구불리는 그와 아무런 교분도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면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구불리는 학익우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래, 무엇인가?"
그가 묻자 석장청은 어두운 안색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었다.
"이 일은 비밀입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③
석가장(石家莊).
무림구대세가의 하나인 석대세가는 구대세가 중 무공기반이 가장 약했다. 그러나 석가장은 무림제일가가 되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인 지사(智士)의 배출로 인해서 였다.
더우기 석가장주인 천문선생 석붕은 인품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선망이 대단했다. 그래서였는지 석가장은 무림의 그 어떤 기인이나 문파와도 교분이 깊었다.
그러므로 석가장의 영향력은 오히려 나머지 팔대세가보다도 막대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사풍객(死風客)으로 인해 팔대세가가 멸망한 후, 마지막까지 남은 석대세가는 무림의 촛점이 되고 말았다.
사풍객도 석대세가를 가장 난적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석대세가를 가장 마지막 공격목표로 정한 사풍객의 의도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고 사풍객의 살수가 석대세가에 뻗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무림의 이목은 석대세가로 집중되었다.
물론 일룡구공자도 마찬가지였다.
신주제일룡 사유성. 그는 섬혼검 악진원과 무공을 상실한 화신 사마고웅 등을 제외한 칠공자와 함께 석가장에서 승리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들은 석가장에서 최후의 승부를 위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필코 승리해야만 했다.
그것은 땅에 떨어진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일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정의를, 정도 무림맹의 정의가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전 중원에 알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석가장에 천라지망을 쳤을 뿐 아니라 완벽할 정도의 계략과 함정을 파두었다.
사풍객이 그 어떤 수법으로 침투해 들어오더라도 잡을 수 있는 무려 팔십이 가지의 대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그들은 사풍객이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급기야는 사풍객도 겁을 집어 먹은 것일까?
한 달, 두 달.......
남궁세가가 무너진 지 석 달이 되어도 사풍객은 석가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그것은 바로 독(毒)이었다. 어느 틈엔가 석가장의 삼백여 명에 달하는 식솔들이 한결같이 독에 중독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실이 밝혀진 것은 불과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극히 미세한 작용을 하는 만성독약에 중독된 것이었다. 원래 석가장은 독에 대해서도 엄밀한 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에 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다.
다행히도 일룡칠공자를 비롯 주요인물들은 사전에 특별히 준비한 음식과 물만을 먹었기에 중독현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삼백여 식솔은 만성독약에 중독되어 내공(內功)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졸지에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침내 천문선생은 한 가지 단안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은밀히 독의 대가를 초청해서 해독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인 석장청에게 자신의 신물인 학익우를 주고 항산으로 급파했다.
하늘 아래 독의 제일인자라는 독심절의 구불리를 청하기 위해서 였다.
"......!"
석장청의 긴 얘기가 마침내 끝났다.
구불리는 무표정했다. 진우명도 안색이 약간 변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장청은 그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선배님!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삼백여 식솔뿐만 아니라 본장의 생사와... 구대세가를 비롯한 정도의 운명이 달린 일이옵니다. 노선배님께서 가셔서......."
그의 말은 중도에서 끊겼다. 차디찬 구불리의 대답 때문이었다.
"노부는 갈 수 없네!"
"왜 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석장청은 아연하여 물었다. 구불리는 냉담하게 말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 때문이지."
"......?"
"이것이 노부의 실상(實相)이다."
휙!
구불리는 무릎에 덮여 있던 흰 천을 걷었다. 순간 석장청은 안색이 급변했다.
"앗... 저... 저럴 수가!"
다물지 못한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구불리의 두 다리는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단지 두 개의 앙상한 백골만이 다리를 대신하여 허벅지 아래 달랑거리며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은 석장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구불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노부가 왜 항산을 떠나지 않는지 알겠지?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노부가 연구하는 것은 이 백골에 살을 돋게하는 영약이라면 믿겠는가?"
"배... 백골에 살을 돋게 하다니!"
석장청은 정녕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후... 노부는 사랑하는 아들부부마저도 독으로 잃었다. 독을 연구하다 죽었지. 그래서 그때 이후 노부는 천하의 어떤 독도 해독할 수 있는 영독(靈毒)을 만들어 내리라 결심했지."
"영... 영독?"
"노부는 석가장으로 갈 수 없네. 물론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면야 마차(馬車)로 갈 수는 있겠지. 그러나 현재 중요한 고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네. 지금 자리를 뜨면 노부의 평생 연구가 물거품이 되거든."
"......!"
석장청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로서는 꼭 구불리를 데려가야 했다. 이번 일은 석가장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약 구불리가 갈 수 없다면 석가장은 하루아침에 전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였다.
잠자코 있던 진우명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자가 가겠습니다."
"네가?"
구불리의 안색이 변했다. 진우명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비록 제자의 경지 아직 미숙하나... 말을 듣건데 석가장의 독은 필시 무형독(無形毒)의 종류로써 그 가지 수는 모두 십삼종에 불과합니다. 제자가 그 성분을 검토하면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그 말에 석장청은 반색했다. 그는 진우명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 그렇게 해주겠소? 진형!"
"......."
구불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는 푸른 빛이 감도는 눈을 들어 허공을 주시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학익우를 보낸 이상 빚을 갚아야 하는 법이다. 네가 간다면 노부는 안심이다."
구불리는 마침내 승낙했다.
"고... 고맙습니다. 노선배님!"
석장청은 기뻐하며 급히 장읍했다. 구불리는 의자를 움직여 등을 돌렸다.
"곧 떠나라. 노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니까."
구불리는 곧 약초 따위가 수북이 쌓여 있는 시렁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제가 다녀 오겠습니다."
진우명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 광경에 석장청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괴인(怪人) 스승에 비해 너무도 대조적인 제자다.'
석장청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스쳤다.
한 칸의 정실.
그것은 바로 옥잠의 처소였다. 주인의 정갈한 성품을 나타내듯 정실은 아늑하고 깨끗한 분위기가 흘렀다.
옥잠은 두 눈에 염려와 불안을 가득히 담은 채 진우명의 행랑을 꾸리고 있었다. 그녀는 십팔 년 동안 고이 가꾸어 온 방심을 몽땅 그에게 바친 것이었다.
진우명은 묵묵히 일신에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옥잠, 너무 서운해 할 것 없다. 곧 돌아올 테니까."
진우명이 말을 끝냈다. 행랑을 꾸리던 옥잠은 몸을 홱 돌리더니 진우명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것은 새가 둥지로 날아오르는 듯한 행동이었다.
"가가... 웬지... 웬지 불안해요. 다시는 가가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크고 둥그런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바보같은 소리."
진우명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나는 사부님의 명예를 위해 가는 거야. 그리고 일을 마친 후 바로 돌아올 건데 뭘 그래?"
"하지만......."
옥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우명은 품 속에 파고 드는 옥잠을 살며시 떼어냈다. 이어 그는 옥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옥잠, 왜 어린애같이 굴지?"
"흐흑... 가가가 오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가가없이는 하루도 못 살겠어요!"
"쯧쯧!"
진우명은 혀를 찼다. 그는 소중한 물건을 만지듯이 옥잠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
옥잠의 눈에 그의 영준한 얼굴이 들어 있었다.
"너의 눈에 내가 들어 있듯이... 내 가슴에도 너의 모습을 담고 있는 한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항상 한몸이야, 알겠지?"
"가가!"
옥잠의 뺨으로 구슬같은 눈물이 흘렀다.
"바보!"
진우명은 짧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는 소중한 듯이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았다.
"음!"
곧이어 진우명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④
휘이잉... 휘잉.......
누가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겠는가?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흐르는 것이다. 아무리 골이 깊은 골짜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끝은 있는 법.
계절은 바야흐로 겨울의 막바지였다.
하지만 풍설은 오는 봄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로 말미암아 천지는 온통 눈의 장막으로 휘감기는 듯했다.
따가닥... 따각.......
풍설을 뚫고 바람처럼 달리는 한 필의 백마가 있었다. 마상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바로 석장청과 진우명이었다.
"꼭 붙드시오. 진형!"
석장청은 말잔등에 착 달라붙어서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
진우명은 뒤에서 석장청의 허리를 붙들었다.
석장청은 체구도 작았을 뿐만 아니라 허리가 마치 여인처럼 가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몸의 촉감은 뭉클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부드러운 여인의 그것처럼.
'.......'
진우명은 석장청의 허리춤을 잡고 눈을 감았다. 마구 달리는 바람이 두려워서는 결코 아닌 듯했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오지(奧地)의 객점은 보잘 것 없었다.
객방이라고는 낡은 침상이 놓여 있는 토방 하나밖에 없었다. 몇 개의 토방이 더 있긴 했다. 그러나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허물어져 도저히 하룻밤을 지낼 수가 없었다.
객점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형식상의 이름일 뿐이었다. 일 개월에 한두 명의 손님이 들까 말까였다.
석장청과 진우명은 어쩔 수 없이 객점에 들게 되었다. 날이 저물었고 눈이 너무 내려 더이상 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장청은 하나뿐인 객방에 들어가면서 몹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방이 하나밖에 없단 말이오?"
그는 게을러 보이는 주인을 나무랐다.
"헤헤... 보시다시피 손님이 없는 곳이라서... 헤헤... 두 분 공자님이 반 년만의 처음 손님입니다요."
관솔에 불을 붙인 주인은 눈을 비비며 그렇게 말했다.
"알겠소. 간단한 음식과 술 한 병 부탁하오."
"예예!"
주인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방 안에는 그래도 낡은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우선 탁자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시커먼 그을음을 토해내는 관솔불을 마주 하고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진우명을 바라보던 석장청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벌써 사흘째... 거의 쉬지 않고 달려 왔는데도 이 자는 지친 기색이 없다. 분명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석장청은 생각이 깊고 치밀했다. 그는 매사에 단 한 가지도 허술히 넘기는 것이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석장청은 진우명과의 여행에서 어느덧 놓치기 쉬운 사소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의혹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
석장청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바로 그때였다.
"엣헴!"
헛기침과 함께 객점주인이 음식과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헤헤... 산골이라 변변치 않지만 드십시오."
객점 주인이 가져온 음식은 소금에 절였다가 구워낸 박쥐 고기 한 접시와 한 병의 독한 백주(白酒)가 전부였다.
"하하... 진형, 그 동안 피로할텐데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제의 잔을 받으시오."
주인이 물러갔다. 석장청은 그때를 기다려 호탕하게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고맙소."
진우명은 담담히 말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자!"
석장청은 팔을 기울이며 진우명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 척하며 진기를 흘렸다. 그때였다.
"앗!"
쨍그랑!
진우명은 비명을 지르며 술잔을 놓쳤다. 탁자 위로 떨어진 토기잔은 박살이 나 버렸다.
"아니... 이게......?"
진우명은 너무나 놀랐다. 그는 눈을 크게 떠고 석장청을 바라보았다. 석장청은 급히 변명했다.
"아! 이런 실수를... 그만 소제가 본의 아니게 힘을 좀 썼소이다. 미안하오이다."
"......!"
진우명은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석장청은 급히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그 잔을 진우명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잔 하나로 번갈아 마시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이다. 그런데... 왜 진형은 무공을 익히지 않으셨소?"
진우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생은 본시 몰락한 문가의 출신이었소. 본래부터 무에는 뜻이 없었소이다. 게다가......."
"게다가?"
"사부님의 의술을 완벽히 익히기 위해서는 다른 방면에 한눈을 팔 수가 없기 때문이오."
"그... 그런 이유가 있었구료."
석장청은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석장청이 건네주는 술잔을 비워내며 내심 중얼거렸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졌나 보군.'
술을 한 잔 마신 진우명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 잔을 비운 석장청은 다시 잔을 진우명에게 건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석장청의 검미가 미세하게나마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바로 진우명이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진우명은 영준하지만 허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장청은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진우명의 얼굴에 어려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눈... 이 자의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롭다. 들여다 보면 한없이 끌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석장청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진우명이 건네주는 술잔을 다시 받았다.
연거푸 마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석장청의 유난히 아름다우며 하얀 얼굴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석장천의 얼굴이 흔들리는 관솔불의 빛을 받으며 요염한 기운을 풍겼다.
"......."
진우명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석형... 형은 정말 잘 생겼소. 마치 여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오."
"......!"
석장청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하하하... 농담 마시오. 소제가 여인같다니! 오히려 진형이야말로 미남이오."
"별 말씀을 다하시오."
"그런데... 진형, 진형은 옥잠 아가씨를 사랑하시오?"
석장청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진우명은 한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옥잠은 어떤 남자도 사랑을 느낄 그런 낭자요."
"하하... 진형은 행운아요. 만약... 진형만 아니라면 소제도 한 번 옥잠 아가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오."
석장청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의 표정에서는 아쉬움이 엿보였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밤이 깊었다. 두 사람은 구운 박쥐고기 한 접시와 한 병의 술을 말끔히 비웠다. 자리를 치운 진우명은 장삼을 벗으며 말했다.
"석형, 이제 자야겠소이다."
석장청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진형께서 침상에 이르시오. 소제는 의자에서 자겠소이다."
"어찌 그럴 수가... 침상은 넓으니 함께 잡시다. "
"아... 아니오! 나는 앉아서도 잘 수 있소이다."
석장청은 황급히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는 것이었다. 마치 의자를 빼앗기기라도 할까봐 서두르는 행동이었다.
"......."
진우명은 그런 석장청을 바라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낡은 침상에 올라 누웠다.
"......."
일각이 지나지 않아서 침상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진우명은 여독에 지친 탓인지 쉽게 잠에 빠져든 것이다. 그가 잠들자 석장청은 한숨을 쉬더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도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방 안은 곧 정적에 휩싸였다.
휘르르릉.......
창 밖에서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바람소리가 윙윙거렸다.
바람 탓이었을까? 석장청은 귀밑머리가 살며시 흔들리더니 들쳐졌다.
"으음......."
진우명은 신음을 발하며 돌아 누웠다. 그는 몹시 피로한 모양이었다.
첫댓글 굿,,,,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