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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승철 시인, 양성우 시인. 두 시인은 지난 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⑨ 이승철이 묻고 양성우가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다섯번째 주자로 양성우(오른쪽) 시인과 이승철(왼쪽) 시인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직후 1975년 ‘겨울공화국’ 시낭송 사건과 77년 장시 ‘노예수첩’ 필화 사건 등을 중심으로 유신독재 시절의 수난과 저항의 문단사를 두 차례에 걸쳐 회고한다. 사진은 두 시인이 지난 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양성우는
양성우는 1943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70년 전남대 국문과 4학년 때 조태일 시인이 주재하던 문예지 <시인>을 통해 등단했다.
75년 2월12일,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열린 시국기도회에서 자작시 ‘겨울공화국’을 낭송해 교사에서 파면되었다. 이어 77년 6월 일본 시사잡지 <세카이>(세계)에 발표된 장시 ‘노예수첩’ 필화 사건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문학 작품 때문에 파면과 투옥을 겪어야 했고 이는 한국작가회의가 표현의 자유 쟁취에 헌신한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
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86년 민통련 중앙위원 겸 서울민통련 부의장, 88년 제13대 국회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했으며, 200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72년 첫 시집 <발상법>(1972)을 비롯해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5월제>,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첫마음>, <아침 꽃잎>,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등과 산문집으로 <양성우의 인간탐구-삶>, <역사 앞에서> 등이 있다.
▶▶이승철은
이승철은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82년 박선욱, 조진태 시인 등과 함께 광주에서 ‘젊은벗들’을 결성하여 시낭송 운동을 펼쳤고, 83년 시 전문무크 <민의> 2집을 통해 등단했다.
84년부터 나남, 인동, 산하출판사 편집장과 황토출판사 대표, 화남출판사 편집주간 등으로 일하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편집간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맡아 문인운동에 동참했다.
양성우 시인과는 함평 학다리고 선후배 사이로 등단 이후 지금까지 각별한 교분을 맺어왔다.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작가출판사 편집기획실장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당산철교 위에서>, <5월> 등과 산문집으로 <우리 시대의 화두-58개띠들의 이야기>(공저) 등을 펴냈다. 최근 계간 <문학들>에 광주·전남 지역의 근현대 문학사의 발자취를 다룬 ‘광주의 문학정신과 그 뿌리를 찾아서’를 5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1975년 들어 유신 반대운동 일자
박정희가 대통령 신임 투표 부쳤죠
그때 열린 구국금식기도회 참석해
‘겨울공화국’ 시를 낭송했는데
행사 끝나니 교사직 그만두래요
책상도 치우고 수업 배정도 않더니
파면 통보하고 절에 가두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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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6월 유신체제를 비판한 장시 ‘노예수첩’이 일본 잡지에 실린 뒤 ‘국가모독죄’란 혐의로 구속된 양성우 시인은 79년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다. 그길로 고은 시인의 서울 화곡동 자택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들과 친구 등과 만나 밤새 석방 환영의 회포를 나눈 뒤 이튿날 아침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문지를 붙여 ‘민족시인! 양성우 해방 만세!’라고 내건 펼침막은 고은 시인의 솜씨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만철(장선우 감독) 성종대 양관수 이명준 이시영 고은 박태순 백낙청 양성우 염무웅 임채정 송기원 이진행. 사진 작가회의 제공 |
이승철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출범 당시부터 얘기를 해주시죠.
양성우 74년의 상황은 어찌 보면 자실이 태동을 안 하면 안 되는 그런 시대적 당위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 고은 선생이 서울 화곡동에서 혼자 사실 때였는데, 자실 태동을 앞두고 그곳은 군벌체제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아지트였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문예사조 운동이 싹텄습니다. 우리 또래 문인들 조태일, 이문구, 박태순, 황석영, 염무웅과 이시영, 송기원 등 후배들은 틈만 나면 선생 댁에서 먹고 자고, 술 마시며 뜻을 모으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그해 11월 이전부터 자주 광주에서 서울로 왔습니다. 그해 11월17일에도 자실 창립의 주역들이 고은 선생의 집에서 회동했습니다.
이 고은 선생의 화곡동 자택이 자실 출범의 산실이었군요. 당시 광주 중앙여고 교사 신분이었는데 자실 선언에 동참 뒤 어떤 불이익이나 정보당국의 감시가 없었나요?
양 자실이 출범한 사실이 광주 사회에 즉각 알려졌죠. 그때 광주지역 문인들 중에서 문병란, 김준태, 김남주 시인과 송기숙, 한승원, 문순태 소설가 등이 이 선언에 동참했고, 신문에도 크게 보도가 되었기에 문인들과 지식인 사회가 알고 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을 전후로 이미 나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서 정보과 형사가 중앙여고 수위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동태를 감시하곤 했습니다.
이 돌이켜 보면, 한 편의 시(詩)가 칠흑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횃불로 존재한 시대가 있었으니, 그때가 바로 70년대였습니다. 그리고 70년대의 저항문학을 이야기할 때 김지하와 함께 양성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표적 필화 사건을 살펴보면, 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 시인이 담시 ‘오적’을 발표하여 온 사회가 한동안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당시의 파문에 비해 김 시인은 투옥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됩니다. 반면 선생님은 75년 2월, ‘겨울공화국’ 낭송 사건으로 학교에서 파면당하고, 이어 77년 6월에는 장시 ‘노예수첩’ 필화 사건으로 장장 25개월 동안 투옥되는 등 순수한 문학 작품, 즉 시 때문에 겪은 필화 사건으로 두 번에 걸쳐 수난당한 유일한 사례입니다. 한국작가회의가 70년대에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해 헌신한 상징적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겨울공화국’이란 시를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소심당에서 발표하게 된 배경을 말씀해주시죠.
양 그때 ‘광주와이’에서 청소년 지도교사로도 활동 중이었고, 조아라 이사장과 김경천 간사 그리고 훗날 시인으로 등단하는 열렬한 문학여성 고정희 간사와도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75년 2월12일, 광주와이가 주최한 ‘구국 금식 기도회’ 모임에서 요청을 받고, 한두 달 전에 이미 써놓은 ‘겨울공화국’이라는 시를 낭송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재야와 야당을 중심으로 유신헌법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1월22일,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찬부를 묻고, 이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 불신임으로 간주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공무원들에게 유신헌법 찬성운동을 펼치게 하고, 영세민 취로사업이란 명목으로 엄청난 금품을 살포하는 등 국민투표를 찬성으로 통과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에 신민당과 야당, 종교계는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여 정부가 국민투표일로 결정한 2월12일을 ‘국민투표 거부의 날’로 선언했고,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나 ‘구국 금식 기도회’를 전국 각지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광주와이의 구국 금식 기도회 모임에서 이 시를 낭송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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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사 소식을 듣고 가족과 지인들이 7월17일 새벽 서울 영등포교도소 앞에서 양 시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만나지 못했다. 석방 환영 사진이 언론에 나갈 것을 우려한 당국이 그를 다른 출구로 빼돌렸기 때문이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
이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시작되는 ‘겨울공화국’은 80행이 넘는 비교적 긴 시로 당시의 시국 상황과 맞물려 대단한 호소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압제와 착취가 있는 곳에 저항이 있게 마련인데, 암울한 유신 치하에서 낭송된 이 저항시로 한국 문단에 ‘양성우’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행사가 끝나자 학교 당국이 선생님께 사표를 종용한 걸로 아는데,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양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찬성으로 귀결되자, 박 정권은 유화책으로 14일에 긴급조치 1, 4호를 해제합니다. 그 때문에 즉시 나에게 위해가 가해진 것은 아니었죠. 긴급조치로는 체포할 수가 없으니까 중앙정보부는 날 교단에서 몰아내고자 학교 재단 쪽과 교장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어요. 시낭송을 하고 나서 10일 후쯤 중앙여고 최태근 교장이 날 부르더니, “재야집회에서 불온한 시를 낭독하여, 정부와 상부기관의 압력으로 더 이상 재직시킬 수 없으니, 어서 사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사표 문제는 전혀 예상밖의 일이어서 “시 작품을 읽었을 뿐인데 어떻게 사표를 냅니까? 문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라고 사직권고에 불응했습니다. 이후 해직 문제를 둘러싸고 학교 당국과의 싸움은 두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동아일보>기자들이 ‘자유언론 투쟁’을 벌였고,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가 일어날 때여서 내 문제가 동아일보 사회면에 계속 보도되었습니다. 고은, 조태일, 이문구 등 서울의 자실 집행부 문인들이 광주로 와서 최 교장을 만나 ‘사표 종용을 철회하라’며 항의했고, 국제펜클럽 한국지부도 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해 3월 초 학교로 출근했지만 교무실의 내 책상이 철거되었고, 수업 배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출근투쟁을 계속했고, 내가 가르치던 2학년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뛰쳐나와 항의집회를 여는 등 학교는 온통 긴장상태였습니다. 나는 교실 복도에서 서성거리거나 수위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야 했습니다.
6개월 뒤 구례서 고은 선생과 만나
완행열차 타고 무작정 서울 왔지요
그땐 고은 선생의 화곡동 집이
저항 문인들의 아지트였어요
‘자실’ 출범 전날에도 여기 모였어요
2년 뒤 ‘노예수첩’ 필화까지 겹쳐
2차례 수난당한 유일한 사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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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주최한 구국 금식 기도회에서 자작시 ‘겨울공화국’을 낭송했다는 이유로 4월 재직 중이던 고교에서 파면당한 양성우 시인은 그날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이끌려 구례 천은사에서 6개월간 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
이 마침내 중앙여고에서 3월28일 제3차 징계위를 열어 파면을 결정했고, 시낭송을 한 지 2개월 만인 4월12일, 학교인사위원회(죽호재단 이사회)는 징계위에 회부하여 파면을 결정했다고 선생님께 통보하잖아요.
양 파면되기 전부터 이미 정보부 요원과 경찰, 형사들이 학교에서 동태를 살피면서 거의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12일 오전 교장이 날 불러 파면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이때 교장은 눈물을 흘렸는데, 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정보부가 파면하라고 시킨 게 분명합니다. 파면 통보 직후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정보부 직원들이 날 연행하더니 화정동에 있는 정보부 광주분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날 오후까지 몇 시간 동안 조사를 하더니, 저녁에 차에 태워 어디론가 향했습니다. 정보부 직원이 차 안에서 말하기를, “광주가 너 때문에 아주 시끄럽다. 광주를 떠나라. 당신이 있으면 이웃 학교(광주일고)가 가만히 있겠느냐. 시민이 널 추방하라고 한다. 이제 광주에 오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실제로 광주공원에서 관제 데모로 ‘양성우 교사 추방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정보부 직원들이 차에 태워 끌고 간 곳은 구례의 ‘천은사’라는 절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그 절에 도착했는데, 정보부 직원은 “당신은 이제 일주문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고서 떠났습니다. 그날 밤부터 주거가 천은사 절 안으로 한정된 거죠. 정보부 요원들이 떠나자 경찰이 일주문을 지키면서 출입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탓에 천은사 뒷방에서 감옥에 갇힌 듯 스님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9월께 고은 선생이 광주에서 구례로 오신다는 전화 연락을 했고, 구례 읍내에서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여기 있어 무얼 하겠느냐. 어찌 되었든 서울로 올라가서 견뎌 보도록 하자”고 말씀했습니다. 천은사에서의 유폐 생활이 6개월째 접어들었고, 경찰의 감시도 느슨해진 때였습니다. 천은사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사람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일단 가자’고 마음먹고서 그날 밤 고 선생과 함께 완행열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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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 시인이 ‘노예수첩’ 필화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1977년 8월 화다출판사에서 나온 시집 <겨울공화국> 초판(오른쪽)과 78년 7월 일본 고세이사에서 펴낸 일어판의 표지(왼쪽). 이 시집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고은·조태일 시인이 구속된데다 금서로 압수된 까닭에 초판은 희귀본이 됐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
이 선생님은 고집스럽게 끝까지 버티다가 파면을 받았기에 퇴직금도 못 받고 상경하여 무척 고생하셨는데, 왜 그리 결정하신 건가요?
양 학교의 자진사퇴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기에 결국 파면이 된 거죠. 파면이 되면 다시는 교직에 취직할 수가 없게 되고, 퇴직금도 못 받기에 가장 혹독한 처벌입니다. 하지만 유신정권과 싸우겠다고 마음먹었고, ‘사직’이란 내 뜻을 꺾는 것이기에 그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땐 결혼도 안 했고, 돌볼 가족도 없고 해서 훌훌 털고 유신정권과 정면으로 싸우게 된 거죠. 서울로 와서 고은 선생의 화곡동 집에서 열흘인가 머물다가 나왔죠. 그때 ‘서라벌예대 3총사’로 불리던 이시영·송기원·이진행 세 사람이 정말 눈물겹게 날 도와줬습니다. 그 후배 시인들 덕택에 흑석동에다 비록 굴속 같은 방 한 칸이라도 구해서 생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흑석동 방은 다방과 맞붙어 있었는데, 송창식의 히트곡 ‘고래사냥’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질 때 그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부르며 울분을 달랬던 기억이 납니다.
이 그렇게 무작정 상경한 뒤 리영희 교수의 배려로 1976년 초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에서 논문 편집 일을 돕다가 문익환 목사의 주선으로 취직을 하게 되는 거죠?
양 그해 4월께 문익환 목사의 추천에 힘입어 대한성서공회에 취직했습니다. 문 목사님은 그때 신구교가 공동 번역하는 성서 간행의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날 ‘문장위원’으로 추천해준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 일은 이미 다 끝나서, 이현주 목사와 내가 문장위원으로 번역된 원고를 윤문하거나 다듬는 일을 맡게 된 겁니다. 이 일은 1년에서 1년 반 동안 할 예정이었습니다. 파면 이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게 된 거죠.
<다음회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