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학원이 세긴 센 모양" 로비, 실제 있었나 없었나
학원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 나오는 경우 많아… 대통령 지적받은 교과부 뒤늦게 억지 단속 시늉
"오후 5시쯤 퇴근 시간을 앞두고 교과부(교육과학기술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가능하면 오늘 밤에 학원 심야교습 단속에 나가라는 지시였죠, 공문(公文)이 아니라 전화 통보였습니다." (서울 교육청 관계자)이명박 대통령이 23일 국무회의에서 '사(私)교육 대책'의 지지부진을 지적하며 "학원 로비의 힘이 세긴 센 모양"이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자 24일 교과부는 부리나케 학원 심야교습 단속에 나서라는 구두(口頭) 지시를 16개 시도 교육청에 시달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발언으로 심야 단속 논란이 벌어진 지 두 달여 만에, 교과부가 기존 지자체 조례로도 강력 단속이 가능하다고 큰소리치며 사교육 종합대책을 내놓은 지 20여일 만에 이뤄진 첫 단속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말 한마디에 시작된 억지 단속이니 시늉하는 수준에 그쳤다.
대치동 등을 담당하는 서울 강남교육청은 이날 2인 1조로 총 6명이 출동했다. 이들이 밤 10시 이후 자정 무렵까지 방문한 학원 수가 30여 개로, 단속 대상 1600여개 학원 중 2%에 불과했다.
이날 교과부 관료들과 학원연합회는 "(대통령의 학원로비 발언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교육계에서는 "틀린 지적은 아닐 것"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구조적으로 학원들의 로비 개연성은 아주 높다. 특정 교육정책을 실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연간 21조원(2008년 통계청 자료)에 달하는 사(私)교육 시장의 판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국어고 입시에서 영어 듣기 시험 비중을 몇 %로 할지, 구술면접 시험에 교과내용을 포함할지 말지에 따라 특정 학원의 존폐가 결정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4월 말, 곽승준 위원장이 '학원 심야수업 규제' 입법화를 주장했을 때 학원들은 잔뜩 긴장했다고 복수의 학원 관계자들이 전했다. 서울의 한 대입학원 관계자는 "밤 10시 이후 학원 단속이 현실화되면 수도권 지역 동네 보습학원과 특목고 대비 학원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이들이 정책의 현실화를 막기 위해 움직였을 수 있다"고 말했다.
- ▲ 전날 국무회의에서 미흡한 교육개혁을 질책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도 교육감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안병만 교과부 장관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도 서민 부담을 덜어주는 교육개혁을 강하게 주문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공(公)교육을 살려야 하는 교육당국과 사교육은 '긴장과 경쟁'의 관계라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10여 년 전 교육부(당시) 학원 담당 관료로 재임했던 K씨가 퇴임 후 학원들 연합단체인 전국학원연합회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일이 있다. K씨가 교육부에서 맡았던 일은 학원의 단속업무였다. 전국 학원들이 수강료를 규정대로 받는지, 수업시간을 법대로 지키는지 감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육부를 그만둔 후, 그는 학원 입장을 대변하는 대(對)정부 창구 역할을 했다.
두 달 전 '학원시간 규제'가 논의될 즈음, 교과부 관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건 잘 되지 않을 것" "우리는 시·도별로 조례대로 가자는 입장"이라며 입법화에 반대한 것이다. 결국 지난 3일 발표된 교과부의 사교육비 대책엔 학원 심야교습 규제가 빠졌고, 사교육 업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사교육 문제를 다루는 다른 정부 부처 관계자는 "학원들 로비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학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나오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반면 학원연합회 관계자는 "우리는 1년 예산이 10억원에 불과하다. 무슨 돈으로 로비한다는 말이냐"며 펄쩍 뛰었다.
◆되는 것 없는 사교육 대책
학원들 로비는 지난 2007년 외고 입시에서 문제가 됐었다. 당시 로비대상은 특목고 교사였다. 그해 11월 김포외고 입시문제가 서울의 한 특목고 학원에 의해 유출됐고, 입수된 문제를 시험 당일 풀고 간 학생들이 집단 불합격 처리를 당한 것이다. 그동안 말만 무성했던 학원과 학교 간 '검은 커넥션'이 확인된 사건이었다. 지난해 수능에서는 고교 교사가 수능성적을 특정 학원에 미리 알려줘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학교·학원뿐 아니라 교육당국까지 커넥션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목고 입시정책 등 교육정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학원이 학교 교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교사가 교육당국에 영향을 미쳐 결국 '학원이 만드는 교육정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과부는 이달 초 사교육 대책을 발표하면서 "학원 교습시간 규제의 입법 추진은 안 하지만, 각 지자체의 조례에서 규정한 교습시간이 지켜질 수 있도록 강력하게 단속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3일까지 단속실적은 단 한 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