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오늘 파리의 날씨는 ?
- 파리에 머무는 친구, 인터넷으로 동시간 대 호흡
- 지척에 있는 북한의 시공은 언제나 열리려나 ?
내 친구가 파리에서 한국에 있는 나의 고교동창 카페에 파리여행기를 올렸다 많은 친구들이 꼬리말로 화답한다. 시집간 딸이 음악공부하러 손자까지 데리고 파리에 가는 길을 부부가 수행차 가족여행을 왔다고 한다. 오랜만에 하는 자유여행인지라 좀 낯설고 공항에서 짐의 중량을 초과하지 않으려고 재포장 하다가 여권하나를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 도착지에서 한참을 애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40년 전, 내가 해외유학시험에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 유학을 떠나지 못하고 직장에 취직해 버렸던 것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 때는 유학을 갈 때 200 달러의 외화밖에 소지할 수가 없어서 장학금을 받아야 가는 것이고 자비로 간다는 것은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면 암시장에서 달러를 사서 밀반출하던가 ....
그러니 내 친구의 경우는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며 그간 세상은 정말로 살기 좋아진 것을 실감하겠다. 그리고 내 친구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생각했다. 은퇴했지만 가족을 인솔하고 외국에 와서 딸의 파리생활 정착을 도와주다니 그 딸이나 한국에 있는 사위가 얼마나 든든하게 생각했을까 ? 그 딸이 유학목적을 달성하고 금의환향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내 친구도 모처럼의 파리생활을 즐기고 오기를 바란다
나도 나의 셋째 딸이 대학재학 시에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한 적이 있는데 옛날에 내가 못 간 것을 한풀이하듯이 딸의 유학 중에 수 차례의 미국 국내여행과 귀국 시에 구라파로 석 달 반 동안 배낭여행을 하도록 기쁘게 도와준 적이 있다
특히 그 때 미국에서 사업하는 내 친구 강 사장이 수 차례나 내 딸에게 전화를 걸어 학창시절 내 이야기를 해주며 미국생활 잘 하라고 금일봉을 보내 주었다 그 친구는 나와 함께 유학공부를 했는데 그 때 미국유학을 결행했던 친구다.
내 딸은 아빠 친구가 무척 든든하고 친근하게 느껴져 힘이 되더라는 것이며 내가 유학 꿈을 접었던데 대한 보상심리로 자기의 유학을 더 기뻐해 준 것을 이해하며 고맙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선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유학 길에 오르는 꿈을 꾸곤 한다. 돈이 없으니 선편으로 가면 싸게 미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40년 전에 꾸던 꿈을 요즈음도 가끔 꾼다니 내 잠재의식 속에 그렇게 깊이 각인 되었기 때문일까 ? 꿈에서 배의 갑판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하늘은 강렬한 총천연색으로 실제보다 언제나 더 아름다웠다.
나는 외국을 체험하는 것은 은퇴 후에 실버관광으로 가는 것 보다 고생하면서라도 젊어서 다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해외에서 넓힌 견문은 그가 사는 평생 활용될 것이며 여행은 인격수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딸들이 중2, 초등6년 방학 때 둘만이 일본을 다녀오게 한 적이 있다, 이모부가 종합상사의 오사카 지점장을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방학을 지내고 오게 한 것이다 이때 나는 영문과 한자로 출입국카드를 직접 작성하는 훈련을 시켰고 출국로비에서부터 일본입국까지 안내판을 영문과 한자로 모두 외우게 훈련하고 일본 동전으로 전화거는 요령도 배워 주었다 일본에서 혹시 혼자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서다
교육이란 놀라워서 우리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안내판을 따라 짐을 찾고 거침없이 일본에 나타나 공항에 마중 나온 이모를 놀라게 했다 그 때 아이들은 이모에게 "모두가 아빠 말 대로던걸..." 하드란다
해외여행을 자주 하다보면 요령이 생긴다 짐이 많을 때는 부치는 짐은 꼭 달아보므로 제한 중량 (economy class는 20 kg, business class는 30 kg)을 넘지 않게 꾸리고 남은 것은 hand carry 해야 한다. 핸드캐리 하는 가방은 겉모양이 가변적인 것이 좋다 두 개라도 좋으며 무게보다는 비행기 선반에 들어가는 크기를 제한하기 때문에 보기에 크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일행이 여럿일 경우 여권과 비행기표는 모두 각자가 소지하는 일을 원칙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분실 아닌 분실이 될 수가 있다. 요즈음의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세계가 울타리 없이 자유 왕래되고 있다 가족들의 일부가 외국에 나가 있는 일은 이제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먼 곳이 지척지간에 있다 그 곳에는 반쪽 동포가 사는데 편지도 안되고 맘대로 갈 수도 없고, 심지어 인터넷도 안 된다. 우리에게 적성국가였던 중국이나 러시아에도 우리의 유학생들이 몰려가고 마음만 먹으면 이웃집 드나들듯 하는데 우리의 반쪽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다
내 친구가 파리에 앉아서 고교동창카페에 글을 올리고 내가 올린 글에 꼬리말을 달고 국내에 있는 것과 다름없이 세계가 등거리, 동일시간대로 사는데 말이다
세계가 이렇게 변해가니까 북한도 이런 폐쇄상태에서 오래 갈 수는 없겠지 하는 생각에 희망을 걸어본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파리보다는 당연히 더 가까워야 하는 것 아닌가 ?
이호영
베네모어통상 대표/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물류신문】 2004년 11월 22일자 『이호영의 千字칼럼』 (160) 에 게재
첫댓글 강태용 친구가 파리에서 37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 유학 하니 생각나는 점이 있어서 써 본 글이다 파리조차도 동일시간대로 사는데 이북에 있는 우리집 사람의 아버지와 두 오빠는 생전에 만날 수나 있을까 ? 하는 것이 생각의 종착역이 되고 말았다
사모님께 그런 아픈 사연이 있는줄 몰랐군 ,지척이 천리란 말이 생각이 나는군.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과연 어떻게 하여야할지 막막한일이니. 1950년대 중학교시절엔 해외에 나갔다 온사실만 가지고도 이력서에 올릴정도 이었으니까 지구촌이란 실감과 함께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구려.
항만청장의 글을 대할 때마다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느낌을 받고는하지...그 사랑의 공동체(37포함)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앵두엄마께 그런 이산의 아픔이 있는것 나도 처음 알았구나.
박천규, 강태용, 유광열, 박금환, 윤영상, 격려해주고 집사람의 이산문제를 위로해주어 고맙네 적십자사에 생사확인을 신청해 놓은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정식으로 회신은 없네 남편으로 도움이 되어주고 싶지만.... 선심성 이벤트로 몇 명 씩 찔끔 찔금 만나게 해줘서야 내 아내 차례가 되려면 금세기 중에나 이루어질까 ?
요즈음 어쩐지 마음이 좀.... 12월이라서 그런가? 생각했지요 뜻밖에 이런 따듯한 위로의 마음을 읽고 마음이 밝아졌어요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좋은 대고가족이 된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