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6개부문 수상작인 뮤지컬 영화 [시카고]의 뿌리는 깊다. 1926년 [시카고 트리뷴]지의 법정 담당기자 모린 달라스 왓킨스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쿡 카운티 공판에서 영감을 얻어, 신분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 여주인공들과 그 주변의 위선적인 변호사, 센세이셜널리즘만 추구하는 언론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는 [작고 용감함 아가씨]라는 제목의 초고를 쓴다. 이것을 바탕으로 1927년 무성영화 [시카고] 그리고 1942년 극중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록시 하트]가 진저 로져스 주연으로 제작되면서 빅히트를 기록한다.
그러나 [시카고]가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1975년 제작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때문이다. 뮤지컬의 신이라고 불리던 봅 포셔는, 범죄의 도시인 1920년대 시카고의 어두운 뒷골목을 배경으로 관능적 유혹과 살인이라는 대중적 테마를 결합해서 삶의 어두운 한 단면을 풍자하는데 성공한다. 2002년 롭 마셜 감독은,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가혹한 현실의 도시 시카고와 여주인공 록시 하트의 상상 속의 시카고로 이원화하여 확대시킴으로서 뮤지컬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뮤지컬이 등장한 것은 1927년의 [쇼 보트]가 처음이다. 또 그해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록되는 [재즈싱어]가 만들어지는데 이 영화도 뮤지컬이었다. 미국의 연극 무대와 상업 영화에서 동시에 발전한 이 독특한 장르는 1930년대 수많은 관습적 코드를 만들어내면서 가장 성공적인 장르로 정착한다. 그러나 뮤지컬은 우리 관객에게는 상당한 기간동안 낯선 장르였다.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를 유심히 새겨듣지 않으면 기본적인 극적 전개가 이해불가능하고, 사건의 핵심부분이 춤과 노래와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전개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독특한 형식으로 비장미를 담아내는 판소리나 한국적 뮤지컬이라고 할만한 창극같은 장르가 있지만, 그것들의 레파토리는 대부분 낯익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특별히 배우들의 노래를 집중하여 들어야할 필요는 없으며 몸짓도 우리에게는 익숙한 율동이지만, 뮤지컬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이 상업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후반이다. 정통연극들은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아가씨와 건달들][캬바레][지하철 1호선][넌센스] 등 뮤지컬이 흥행 성공하면서 [42번가][캣츠] 등 대형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오리지널 팀들이 초청 공연되었고 특히 88서울올림픽 이후 높아진 관객들의 문화적 눈높이를 만족시켜주는 거의 유일한 문화상품이 되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이 춤과 노래를 배워 뮤지컬 무대에 섰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남경주 최정원으로 대표되는 뮤지컬 전문배우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관객들도, 연기력은 있지만 춤과 노래가 떨어지는 기존 배우들보다는 뮤지컬 전문배우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또 상업적으로는 TV나 영화의 성공을 통해 대중들과 낯익은 스타들을 영입해서 구축된 스타시스템으로 상업적 안전판을 마련해 놓고 기획되는 공연들이 늘어나 지나친 스타시스템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금은 브로드웨이를 비롯해서 런던이나 파리의 대형무대에서 성공한 뮤지컬들은 거의 시간차 없이 곧바로 국내 수입되는 상황이다. 때로는 연출가나 전문 스텝을 초빙하여 국내 배우와의 협동작업으로 작품을 생산해서 시장에 내놓고 있다. LG아트센타에서 7개월이상 롱런한 [오페라의 유령]은 100억원의 초대형 제작비가 들어가는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의 우려를 깨고 흥행 성공한 것이 증명해주는 것처럼, 이제 국내 무대공연도 뮤지컬을 중심으로 새롭게 판이 짜여지고 있다.
대학로에서 흥행되는 것은 뒷골목 연극이거나 뮤지컬뿐이라는 이야기는, 정통연극의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지고 있다는 뜻도 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화려한 춤과 노래 등 종합적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관객들의 경향을 보여준다. 노래와 춤이 스토리의 갈등과 직접 통합되는 뮤지컬 형식은 그동안의 문화적 충격을 벗어나 우리 관객들에게 낯익은 형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수입 뮤지컬뿐만 아니라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명성황후]를 비롯해서 [몽유도원도], 최근 24개국 순회공연까지 마친 [장보고], 준비중인 [팔만대장경] 등 한국 창작 뮤지컬의 수준도 향상되고 있다. 뮤지컬은 음악, 춤, 연기 등이 종합되고 화려한 무대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무대예술을 산업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장르다.
유부녀였지만 스타가 되기 위한 관능적 유혹을 멈추지 않던 록시 하트. 자신을 속인 정부를 살해한 뒤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감옥의 여죄수에서, 유능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순진무구한 캐릭터로 변신하여 배심원단의 무죄평결을 끌어내고, 그런 스캔들을 바탕으로 시카고 최고의 뮤지컬 스타가 된다. 록시가 감옥에서 만나는 또 다른 죄수 벨마는, 여동생과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그들을 살해한 죄로 수감된, 당대 최고의 뮤지컬 스타다. 벨마는 이미 정상에 오른 스타이고, 록시는 정상에 오르려는 스타 지망생이다. 록시는 벨마와의 동일화를 꿈꾸지만 결국 그녀를 넘어선다. 대중 연예산업에서는 항상 새로운 스타를 원하기 때문이다. 결말 부분에서 또 다시 록시를 능가하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언론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것은 거기에 대한 극렬한 풍자이다. 결국 또 다른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변형이다.
이런 자극적 내러티브가, 화려한 춤과 노래가 함께 결합된 뮤지컬 스타일로 표현된다면 대중성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뮤지컬을 어떻게 영상으로 옮기는가 하는 것이다. 제4의 벽이 설치된 무대에서는 익숙한 화법이지만, 관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배우들끼리 서로 노래로 대사를 전개하는 뮤지컬 방식은 여전히 낯설기 때문이다.
롭 마셜 감독은 뮤지컬의 기본 속성인 환타지를 강조하면서도 배우들끼리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전형적 양식을 탈피하고, 관객과 마주하며 노래 부르는 무대 양식을 영화 속에서 시도했다. 그러기 위해서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갇혀 있는 여주인공 록시 하트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 인물은 현실공간에 있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춤과 노래는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문은 서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다.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면서도 드라마를 강조할 수 있는 대중적 화법을 모색한 것이다.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처드 기어 등 스타 시스템을 동원해서 제작된 뮤지컬 영화 [시카고]는, 기본 뼈대가 1930년대 뮤지컬의 상투적 내러티브였던 무대 뒤의 이야기, 성공을 꿈꾸는 백 스테이지 무명배우들의 갈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뮤지컬의 기본 속성인 환타지가 강조되고 있지만, 롭 마셜 감독은 배우들끼리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전형적 뮤지컬 양식을 탈피하고 관객과 마주하며 노래 부르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럼으로써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면서 드라마를 강조할 수 있는 대중적 화법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 자신의 정부를 살해하고 감옥 속에 갇혀서 뮤지컬 스타로 성공하는 여주인공 록시 하트의 환상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캐서린 제타 존스의 춤과 노래는 완벽하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 앞에, 뮤지컬에 처음 도전하는 르네 젤위거는 그녀만의 장점인 백치미를 최대한 활용하여 도전장을 내민다. 욕망의 실현을 위해 섹시함과 무모함으로 얼룩진 록시 하트의 내면을 르네 젤위거는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한다. 변호사 역의 리차드 기어는 특유의 버터맛 넘치는 연기 속에 탭댄스까지 선보이면서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드러낸다.
뮤지컬만이 갖고 있는 춤과 노래, 연기의 화려한 종합선물셋트로서의 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영화가 [시카고]다. 그동안 배우들끼리 노래를 하며 대사를 전개시켜서 국내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던 [에비타]나 [물랭루즈]를 뛰어넘는 확실한 흥행작이 될 것이다.
개인의 즐거움과 공동체의 통합을 강조하는 뮤지컬의 결말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만, 비판적 사회의식이나 인간의 다양한 경험 속에 녹아 있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취약하다. 뮤지컬의 환타지는, 현실 비판보다는 현실의 통합에 더 비중을 두고 있고, 상처의 드러냄보다는 상처의 극복을 통한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