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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연재 마지막 무관생도들 200자 158매/140203
이 원 규
3 요코하마의 맹세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
1909년 9월 6일 월요일 오후 4시를 앞둔 시각,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을 태운 두 대의 자동차는 도쿄의 신바시역(新橋驛)을 출발한지 20분 만에 우시코메구(牛込區) 이치가야다이(市谷臺)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앞을 지나 육군중앙유년학교의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이 학교는 프랑스의 제도를 본받아 만들었으며 생도들을 국제적 감각을 갖춘 교양 있는 장교로 키우기 위해 영어 · 독일어 · 프랑스어와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나 기본이념은 일본정신의 근본이라는 무사도(武士道)였다.
수업연한은 5년이었으며 전체 생도 수는 700명가량이었다. 전국 5개 도시에 입학 정원 50명의 지방유년학교가 더 있었지만 거기서는 예과 3년만 가르치고 본과 2년은 여기서 모두 받아 가르쳤다.
지석규는 기차역에서부터 자동차를 타고 달려오는 동안 조선의 한성보다 수십 년을 앞선 거리 풍경에 기가 죽었는데 학교 내부가 넓은 것에 다시 기가 죽었다. 언덕 아래 연병장도 삼청동 무관학교보다 세 배는 컸다. 교정의 편백나무와 향나무 들은 잘 전지되어 있었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꼭 있을 자리에 있는 듯이 정리되어 있었다.
막 오후 일과가 끝난 시각이어서 흰색 체육복을 입은 생도들이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연병장으로부터 생도대 건물들이 있는 언덕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300명쯤 되는 생도들은 조선에서 온 그들보다 어려 보였다. 그러나 우렁찬 목소리로 완벽하게 일치된 합창을 하고 흔드는 팔과 내딛는 다리들이 완전한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라의 명예는 이몸의 명예
죽어서 흩날려 값어치 있는 대장부의
남은 향기는
쿠단자카(九段坂)의 사쿠라꽃으로 피어나리.
죽어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의 사쿠라꽃으로 태어나는 것을 갈망하는 노래, 전사(戰死)를 미화하는 군가였다.
지석규는 문득 자신이 저 일사불란한 행진처럼, 비장한 군가의 가사처럼 일본에 길들여져서 일본을 위해 죽는 사쿠라꽃이 되기를 갈망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 왔다.
트럭들이 학교 본부 건물 앞에 멈추고 조선인 생도들은 하차하여 3열 횡대로 정렬했다. 대좌(大佐) 계급장을 붙인 중년 장교가 참모들을 거느리고 현관에서 나왔다. 생도대표인 염창섭이 차렷 경례 구령을 내렸다. 대좌는 엄숙하게 답례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학교장 구노오(久能司) 대좌다. 충심으로 입교를 환영한다. 부디 심신을 연마하고 전술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장교의 자질을 갖추기 바란다.”
학교장의 훈시는 길지 않게 이어졌다. 교육을 위탁받은 터이지만 열성을 다해 가르칠 것이라는 다짐도 있었다. 예과 3학년과 2학년 정규과정에 넣을 것이며 동학년 일본인 생도들과 수준이 같아지게 일정기간 예비교육을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조선인 편입생들의 공식 명칭은 ‘대한제국학생반’이지만 줄여서 ‘한국학생반’이라 정한다는 설명, 조선 땅에서 그들을 인솔해온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가 ‘한국학생반 담당관’이라는 직책을 갖는다는 설명도 했다.
이어서 생도감(生徒監)인 가토(加藤) 소좌가 짧은 인사와 함께 학교 체계를 설명했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부, 훈육을 담당하는 생도대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생도대는 생도감의 책임 아래 중대장, 구대장 등 장교들이 지휘하지만 생도들이 그 역할을 실습한다는 내용이었다. 고국 무관학교와 다른 점은 생도대장을 생도감이라 하고, 50명 내외 생도단위인 소대를 구대(區隊)라 하는 것이었다.
소좌는 설명을 끝내고 구대장을 맡게 될 아나미 코레치카 중위를 소개했다.
아나미 중위는 몸이 호리호리하고 얼굴에 여드름이 난 새파랗게 젊은 장교였다. 생도들은 알지 못했지만 겨우 스물한 살로 조선인 생도들 중에 동갑짜리도 서너 명 있었다. 조선 청년들은 그 나이에 유년학교 예과로 왔는데 그는 이미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 3년차 장교가 되어 있었다.
염창섭이 대표경례를 하자 중위는 빠른 동작으로 답례했다.
“여러분을 환영한다.”
교장과 생도감, 그리고 오구라 대위는 뒷일을 아나미 중위에게 맡기고 학교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중위는 생도들을 체육관 건물로 이끌고 들어갔다. 장방형 테이블들이 이어져 있고 그 위에 생도용 피복 지급품이 쌓여 있었다. 테이블마다 ‘모범생도’ 완장을 찬 일본인 생도들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첫 번째 테이블에서 번호표가 붙은 큰 대나무 바구니를 받아들었고 지급품을 하나하나 받아 거기 넣었다. 동정복 2벌, 하정복 2벌, 속옷에서 군모와 군화, 교과서와 연필, 만년필, 수첩까지 수십 가지였다. 질서정연하고 빈틈없이 진행되는지라 규격이 틀리는 것을 받거나 빼먹을 염려는 없었다. 옷과 군화는 일본 생도들이 작아선지 작은 치수가 많았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듯 발과 키가 큰 이응섭에게도 딱 맞는 것이 있었다.
그 다음에 교실 하나 크기만 한 목욕실로 갔다. 커다란 욕조의 물은 깨끗했으며 따뜻했다. 한 번도 공동으로 목욕한 일이 없는지라 생도들은 어색한 기분인 채로 옷을 벗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욕조로 들어갔다.
지석규는 목욕을 끝내고 새 제복을 입으면서 금장부터 확인했다. 일본인 생도들은 진홍색인데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분홍색이었다. 유년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신분이 대한제국 소속이라는 의미였다.
소총과 군도를 포함한 무기 수령, 숙소 배치 등 일과가 진행되고, 저녁식사 후에는 유년학교 생활을 위한 용어의 숙지, 상관과 상급생에 대한 예절, 일기 쓰기의 원칙, 자습실 책상 위 책꽂이에 꽂는 책의 순서, 취침시 눕는 자세까지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석점호가 끝나고 취침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이 꺼졌다. 지석규는 유년학교에 도착하고 여섯 시간 동안 군국주의 일본의 완벽한 군대 조직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았다. 문득 모친과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님, 그리고 만삭의 몸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을 아내여, 나는 이렇게 도착 첫 밤을 지냅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다음날 아침, 기상나팔 소리에 잠을 깬 생도들을 기다리는 것은 시계 부속이 돌아가듯 치밀한 생도대 일과였다. 침구를 두부처럼 네모가 나게 개놓고 6시 10분에 일조점호를 받고, 상반신을 벗고 세수와 함께 냉수마찰을 했다. 일본인 생도들이 궁성요배와 군익칙유를 낭독할 때 연병장을 구보했다. 6시 55분에 손을 다시 씻고 아침식사를 했다. 일본인 생도들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일본인 생도들은 전원 큰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한국학생반은 별도로 마련된 식당으로 갔다.
“우리를 차별하는군.” 안영범 생도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여 한 마디 했다.
첫 번째 취체생도가 된 염창섭이 상관인 오구라 대위에게 대표경례를 한 뒤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후에는 복장검사와 학습준비 검사를 했다. 취체생도 염창섭은 절차를 틀려서, 그리고 몇몇 생도가 준비물을 빼먹어 아나미 중위로부터 두 뼘 쯤 되는 군악대용 드럼스틱으로 손바닥을 얻어맞았다.
오전 네 시간은 학과수업이었다. 세 시간이 일본어, 한 시간이 일반교과였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듣는데도 교관의 일본어가 요해(了解)되지 않았다. 오후 세 시간 술과(術科)는 할만 했다. 삼청동 무관학교에서 오구라 대위로부터 일본식 군대 술과를 조금 공부했고 몸으로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에 이동할 때 일본 생도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강(韓)코로 강코로.”하고 키들거렸다. 조선인을 업신여기는 욕이었다.
“어린놈들이 까불고 있군. 한 놈 걸리기만 해 봐라.”
유승렬 생도가 분개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오전 오후 수업을 받는 동안 지석규는 단 한 마디도 홍사익 · 이응준과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오구라 대위와 아나미 중위가 쫓아다니며 보행자세가 나쁘거나 허리가 꼿꼿하지 않은 생도들 이름을 수첩에 적기 때문이었다.
일과가 끝난 오후 4시 이후 수의시간에 아나미 중위가 수첩에 적힌 생도들을 찍어냈다. 웃통을 벗기고 등 한복판에 세로로 주름이 잡히도록 가슴을 내밀게 한 뒤 등 주름에 연필을 세워 끼웠다.
“가슴은 내밀고 턱과 배를 당기고 시선은 앞을 봐라. 무릎을 붙여라. 차렷 자세에서 두 다리가 붙지 않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중위는 군악대용 드럼스틱으로 자세 나쁜 생도들을 찌르고 때렸다. 청소상태와 관물정리도 트집 잡아 기합을 주었다. 한국학생반 숙소는 중위가 큰 소리로 지적하고 자신의 잘못을 조선인 생도들이 복창하는 소리,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며 붙이는 구령소리로 가득 찼다. 목소리가 작으면 호령조성을 시켰다.
그런 일이 매일 지속되었다. 지적이 많은 날은 오구라 대위가 연병장을 다섯 바퀴 뛰게 하는 벌칙을 내렸다.
신기하고 좋은 일도 있었다. 목요일 오후 수의시간에 명찰이 붙은 흰색 천으로 만든 자루를 하나씩 나줘 주고 거기 세탁물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장교는 명예로운 신분인데 생도들이 빨래를 해서야 되겠느냐?”
구대장 아나미 중위가 말했다.
생도들은 빨래자루를 복도에 내놓았고, 나이가 아버지뻘 되는 민간인 잡역부들이 세탁소로 옮겨 갔다.
다음날인 금요일, 상급반인 예과 3학년 생도들은 피아노 연주 수업을 처음으로 받았다. 피아노 교실에는 피아노 10대가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생김새가 희한하고, 거문고와 가야금 소리만 알던 생도들에게 악기 소리는 낯설었다.
“저 악기를 직접 다루는 시험을 본다니…. 구라파의 교양 있는 신사들은 악공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하는 모양이지?”
생도들은 대부분 한숨을 쉬었다. 장차 정규과정에 들어가면 피아노 점수를 딸 일이 난감하여 앞이 캄캄하기 때문이었다.
김광서 생도의 방문
편입학 두 주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오후 1시 이후는 완전한 자유와 휴무였다. 그러나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자습실에서 책과 씨름했다. 오구라 대위의 엄포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어림도 없다. 잘하는 사람 몇 사람만 정규과정 올라가고 나머지는 또다시 한 학기를 예비과정으로 가거나 아래 학년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럼 조선 놈들은 나이만 처먹고 돌대가리라고 할 게 아니냐?”
생도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어서 빨리 일본 생도들을 따라잡자.’ 모두 그렇게 다짐했다.
아나미 중위는 매와 벌칙이 매섭기는 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는 그렇지 않았다. 삼청동 무관학교 파견 교관 시절보다 더 심해진 것이 있었다. 걸핏하면 귀족가문인 자기 집안을 자랑하고 조선인들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인들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것을 무슨 인생의 큰 낙으로 삼 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흡사 추하고 더럽고 게으른 것은 모두 한국인의 화신 (化身)인 양 누가 나쁜 짓을 했으면 그건 틀림없이 한국학생이 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강 꼬로, 강꼬로” 하면서 우릴 바라보고 눈을 흘기곤 했으니 참으로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 다.
늦은 오후, 취체생도 이응준은 생도대에 있는 한국학생반 행정실을 나왔다. 그는 미남형의 용모에 워낙 붙임성이 좋아 일본에 와서도 구대장 아나미 중위와 교관, 하사관 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었다. 이날 중위가 기분이 좋은 걸 알고 건의해서 한국학생반 생도들끼리 축구경기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얻어냈던 것이다. 축구라면 고국 무관학교에서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습실에 가서 선언했다.
“축구시합 허락을 받았다. 체육복을 갈아입자.”
생도들은 박수를 치며 일어나 숙소로 달려갔다.
이응준은 체육복 팔에 취체생도 완장을 찬 채 동기생들,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연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노염(老炎)이 물러가지 않아 날씨는 무더웠고 연병장 가에 줄지어 선 키큰 삼(杉)나무 가지에서는 갈매미들이 야단스럽게 울었다.
동기생과 후배 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이응준에게 맡겼다. 넉살이 좋아 일본인 교관이나 조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일본인 생도들하고도 잘 사귄다는 것이었다. 그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응준은 생도들과 함께 연병장 가운데로 걸어가면서 모두에게 말했다.
“언제고 일본 애들하고 축구시합을 하게 될 거다. 그때는 본때를 보여주자. 오늘 머리 식히며 노는 것도 좋지만 악착같이 연습해 둬야 해. 오늘은 일단 선배군과 후배군으로 나눠 뛰자.”
모두가 찬성했다.
심판을 맡은 지석규가 선수들을 연병장 중앙에 모이게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며 경기 시작 호루라기를 불었다.
축구경기가 후반전에 접어들 무렵, 육사 입학예비생 신분 표시가 그려진 금장을 붙인 제복을 입은 청년이 육군중앙유년학교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난해에 죽은 대한제국 군기창감(軍器廠監) 김정우의 아들 김광서였다. 이 학교의 5년 과정을 마친 육사 입학예비생으로서 도쿄 아카사카(赤坂) 지역에 있는 제1기병연대에서 대부근무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육사 23기로 기병과에 입학할 예정이었으며 만 21세, 1888년생으로 지석규와 동갑이었다.
군기창 기수(技手)였던 그의 아버지 김정우는 39세 나이에 일본으로 관비유학을 떠났다. 15세이던 장남 성은을 데리고 갔는데 부자가 함께 게이오의숙에 다녔다. 졸업 후 도쿄고등공업학교 기계과를 나오고 실습기간을 거쳐 총탄 무기 전문가가 되어 귀국해 출셋길을 달렸다. 장남 성은은 일본 육사를 나와 초고속 승진을 했다. 부자가 모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했으나 애국충정이 강했다. 그래서 김광서는 저절로 아버지와 형처럼 애국심과 극일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
그가 17세가 되던 1904년, 황실유학생 50명을 뽑아 일본으로 보낸다는 칙령이 내려졌다. 양반, 관리의 자제 4,500명이 지원했다. 그는 불합격했다. 아버지와 형은 사비생(私費生)으로 기어이 포함시켰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 유정(柳貞)이라는 소녀와 약혼했다.
일본에 도착한 김광서는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와 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육군중앙유년학교로 편입했다. 유년학교와 육사를 통틀어 유일한 조선인 생도였다.
유년학교 재학 중 고국에서는 군대가 해산되고, 형과 아버지가 몇 달 간격을 두고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성 사직동에 있는 600평이나 되는 아버지의 저택에는 어머니와 어린 누이동생만 남아 있었다.
유년학교는 프랑스식 귀족학교라 하는데도 생도대 생활이 엄격했다. 한겨울에도 불을 피우는 일이 없었으며 옷도 얇고 먹는 것도 풍족하지 않았다. 곤하게 잠든 깊은 밤에 비상출동 명령이 내리면 신속히 완전군장을 꾸려 5분 안에 200미터 떨어진 연병장에 집결하는 훈련 등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일본인 생도들은 좋은 성적을 기록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목표는 최고 엘리트 장교들이 모이는 도쿄 주둔 부대였다. 일본의 사관 양성은 연대급 단위부대들과 유년학교, 사관학교의 합작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유년학교를 졸업하면 성적에 따라 육군성(陸軍省)이 대부근무 부대를 지정하고, 대부근무가 끝나면 연대장이 근무성적 내신과 함께 추천서명을 하여 사관학교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일반 중학 출신도 육사에 갈 수 있었으나 경쟁이 더 치열하고 대부근무 기간이 두 배로 길었다. 육사에 입학하고 1년 반 뒤에 졸업하면 다시 대부근무를 했던 부대로 돌아가 견습사관이 되고, 반년 후 거기서 소위로 임관하게 되어 있었다.
김광서가 조선인 생도 40여 명이 중앙유년학교에 편입한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주였다. 그 후 대대 기동훈련이 있었기에, 행동이 자유로워진 토요일에 조선인 후배들을 만나려고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문 경비소에 방문자 기록을 남기고 교정으로 들어왔다. 걸으면서 모교 교정을 한번 휘 돌아 보았다. 연병장에서 축구를 하는 생도들이 보였으나 그들이 조선인 생도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우선 한국학생반 담당관인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와 구대장인 아나미 코래치카 중위를 만나 인사했다. 오구라 대위는 초면이었고 아나미 중위는 비록 가르치고 배우는 인연은 없었지만 그가 재학할 때도 근무했던 장교였다.
그가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자 중위가 말했다.
“한국학생반은 오구라 대위님의 지도에 따라 잘 적응하고 있다. 지금 축구를 하고 있지.”
김광서는 30대 초반의 대위 앞으로 한 발 다가갔다.
대위는 오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 조선놈들과 조선을 매우 잘 안다. 조선에서 여러 해 근무했고 무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가 44명의 생도들을 인솔해 데려왔다. 지금은 일단 예비과정에 들어 있다. 무난히 적응하도록 가끔 와서 도와주기 바란다.”
김광서는 꼿꼿하게 서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선에서 와서 육사에 입학하니 좋은 가문이겠군. 부친이 누군가?”
“아버님은 육군 군기창감을 하다가 돌아가신 김정우 부령, 형은 공병대장을 하다가 돌아가신 김성은 부령입니다.”
“아, 김성은의 아우로구나. 나하고 육사 동기였다. 참 안 됐다. 아버지와 형을 몇 달 사이에 잃다니.”
오구라 대위는 잠시 연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배들한테 가서 말해 줘라. 살아남으려면 철저히 적응해야 한다고.”
“감사합니다, 대위님.”
김광서는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연병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축구경기가 끝나고 있었다. 집합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가 다가가자 생도들은 민첩하게 달려와 대열을 맞춰 섰다. 생도들을 대표해 취체생도 이응준이 차렷 구령을 내렸다.
김광서는 모국어로 말했다.
“나는 한성 출신 김광서 생도이다. 일본 온지 5년 됐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아카사카 기병연대에서 대부근무 중이다. 고국에서 후배들이 왔다고 해서 찾아왔다.”
생도들은 그의 존재를 다 아는 듯했다. 깊은 감정을 담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선배님께 경례!”
취체생도 이응준 역시 모국어로 구령했으며, 군인들의 경례와 예전을 정한 내무요무령(內務要務令)대로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차렷 자세를 시켜놓고 대표 경례를 하며 되는데 전체 경례를 시켰다.
김광서는 조선인 후배들을 교내의 편백나무 숲으로 이동시켰다. 한적한 곳이어서 얼마든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였다. 모두가 편한 자세로 둘러앉았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배님은 저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이응준이 모두를 대표하여 말했다.
“그대들 때문에 나도 위안을 갖네. 그동안 유년학교와 육사에 조선인은 나 하나였으니까.”
김광서가 말했다.
이응준이 보기에 김광서는 무수히 많은 고뇌와 고독을 이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깊은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얼굴 바탕은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 김정우 군기창감을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긴 시간을 어떻게 이겨 내셨습니까?”하고 홍사익이 물었다.
“시간에다 나를 맡겼어. 바람이 불면 바람에 나를 맡기고, 비가 내리면 비에 맡겼지. 가끔은 채찍으로 나를 때렸지. 채찍을 좋아해서 기병 병과를 택했는지도 몰라.”
그의 유머에 생도들은 와르르 웃어 친밀감을 표현했다.
김광서는 바지 주머니에서 만년필 크기 손잡이에 가죽 끈이 서너 개 달려 있는 말채찍을 꺼냈다.
“너희도 차차 알게 되겠지만 육사와 유년학교를 지배하는 정신은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이다. ‘충성은 가장 고귀한 것이다. 충성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며 비굴하게 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요 불명예이다.’ 생도들은 이런 정신에 저절로 길들여진다. 나는 거기 동화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채찍으로 나를 때렸다. 몸도 때리고 정신도 때렸다.”
김광서는 짝짝 소리가 나게 허공을 때렸다. 생도들은 진지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태영 생도가 오구라 대위와 아나미 중위의 기합과 체벌에 대해, 안영범은 일본 애들이 욕하는 것에 대해, 김준원은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고 차별받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해하지 마라. 일본인 생도들은 신입생 때 상급생들이 기본을 가르치며 혼쭐이 나게 기강을 잡는다. 그거보단 아나미 중위에게 당하는 게 낫지. 아무튼 이 학교에 왔으니 여기 질서에 맞춰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광서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점점 더 심해질 거다. 5분 내 비상집합이란 게 있는데 한두 달 후 그걸 시킬 거다. 곤하게 자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군장을 꾸려 연병장까지 죽어라 하고 달려가 집합하는 거다. 5분이 인간 능력의 한계다. 단합과 정신 집중의 절정이 아니면 이를 수 없다. 그거 하나로 모든 걸 평가할 수 있다. 미리 철저히 연습해서 언제고 비상이 걸리면 5분 안에 해치워 유년학교를 깜짝 놀라게 해 줘라.”
그는 3인 1개조로 나눠 그것에 대비하는 요령인 분업 훈련을 설명했다. 그리고 생도생활에 겪게 마련인 여러 가지 일에 대처하는 요령을 일러주고 주의할 점을 말해 주었다.
“일본은 너희들을 가르쳐 장차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생각이므로 전원 정규과정에 넣어 제대로 교육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기준에 미달하면 잘라버린다는 걸 명심해라. 하루라도 빨리 정규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라. 어떻게든지 끝까지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야 뒷날 뭘 하든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김광서는 길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 일요하숙이 필요하다. 일본에는 에도 막부 시대부터 지방 영주인 번주(藩主)가 자기 지역 출신 사관생도들을 위해 주말 숙소를 제공하는 전통이 있다. 생도들은 주말 외출을 나와 거기서 실컷 낮잠을 자고 교관 흉을 보고 호떡을 사다 먹는다. 일본인 생도들 속에서 긴장하면서 지내야 했던 나는 그보다 부러운 게 없었다. 너희들 일요하숙은 고국 정부가 만들어 줘야지. 하지만 기대하기 어렵고 내가 장소를 찾아보마. 찾는다 해도 오구라 대위가 표면에 나서야 할 것이야.”
유승렬 생도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재일유학생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가입할 수 있는지요?”
“당장은 외출허가가 안 나와 어렵겠지만 장차 그래야지. 유학생 모임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금년 초 대한흥학회로 대략 통합됐다. 회장은 나하고 5년 전에 황실유학생으로 온 최린(崔麟) 선배이다. 최 선배한테 말하겠다, 너희들에게 입회원서를 보내라고.”
김광서는 질문에 답하고는 하나하나 이름과 출신지를 물으며 후배 생도들을 다독거렸다.
마지막으로 이응준 차례가 되었다.
“평안도 안주 출신 이응준입니다. 저는 선배님 댁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응준의 말에 김광서는 놀란 눈을 했다.
“저는 이갑 참령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분 댁에 머물렀는데 재작년 정초에 참령님을 따라 사직동 댁으로 세배 간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다면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이야. 나보다 아버님을 가까운 날에 뵈었군. 나는 장례에도 가지 못했어.”
김광서는 슬픈 눈을 하고 한숨을 쉬었고 이응준은 그걸 알고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광서 생도는 일어서면서 명령했다.
“모두 일어나 나를 중심으로 모여라. 두 팔을 벌리고 한 덩어리가 되자.”
김광서와 가깝게 앉아 있던 응준은 그의 가슴 앞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동기생들과 후배들이 밀려왔다. 45명이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 김광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서로 아끼고 뭉쳐라. 한 순간도 조국을 잊지 말아라.”
응준은 감격에 젖어 두 팔로 옆 사람을 끌어안았다.
아, 안중근 의사
편입학 한 달이 지나 10월로 접어들었다. 오구라 대위와 아나미 중위의 지적과 벌칙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서로 격려하고 질타하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 무렵 대한흥학회 입회원서를 받아 작성해 보냈다. 50전 혹은 1원씩 회비도 보냈다. 고통 속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지석규는 아들을 낳았다는 아내의 편지를 받았다.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모처럼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홍사익을 비롯하여 기혼자가 여럿 있었지만 일본에 온 뒤 아이를 낳은 것은 처음이었다.
지석규는 멋쩍게 웃었다.
“명색이 애아범인데 어릴 ‘유(幼)’자를 쓰는 유년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내 참.”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한밤중 비상집합 훈련에 대비해 김광서 선배가 일러 준 대로 치밀한 자체연습을 주말 노는 시간에 벌였다. 3인 1개조로, 한 사람은 배낭 내용물을 집어넣은 뒤 덮개를 조이고, 한 사람은 담요와 우의를 둘둘 말아 놓고 야전삽과 반합을 꺼내 정렬하고, 한 사람은 그걸 배낭 외부에 결합했다. 처음엔 11분이 걸렸으나 손가락 끝이 벗겨지도록 수천 번 연습을 하자 요령이 생겼다. 담요말이 담당들은 담요를 휙 펼침과 동시에 양쪽이 안으로 접혀들어오게 한 뒤 그대로 둘둘 말아 버리는 일을 눈을 감고도 3초 안에 할 수 있었다. 소요시간은 기적같이 27초로 줄어들었다. 옷을 재빨리 입고 허리에 군도를 차고 소총 들고 철모를 쓰고 숙소 문을 달려 나가는 것도 30초 안에 할 수 있었다.
10월 중순 어느 날 새벽, 사이렌이 울리고 완전군장 집결 명령이 떨어졌다. 한국학생반 구대는 4분 36초에 집결을 끝내고 당직사령에게 인원보고를 했다. 전체 36개 구대 중 2위였다. 당직사령은 한국학생반 구대를 극찬하며 모두 본받으라고 전체생도들에게 훈시했다. 그 날따라 외박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에 들어온 아나미 중위는 머리를 홰홰 저었다.
“…무서운 놈들! 미리 연습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 몰랐다.”
중위가 그 자리를 떠나자 김준원 생도가 소리쳤다.
“우리들은 참 대단하다, 5분 안에 해내다니.”
“그래.”하고 모두가 합창했다.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니 대부분 야위고 입술은 부르터 터져 있었다. 두 눈은 번뜩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이 정점이었다. 그때부터 아나미 중위의 지적과 벌칙이 줄어들었다.
지석규는 그렇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라고 생각했다. 우선 김광서 선배가 똘똘 뭉쳐 이겨내라고 다짐하고 요령을 일러준 것이 컸다. 또 하나는 모두가 엄청난 경쟁을 뚫고 모국 무관학교에 입학했던 수재들이었으며 일본에 비해 부실하다고는 하나 유년학교보다 상급과정인 무관학교를 다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동급생들보다 서너 살씩 위여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성숙했다.
학과공부도 서서히 제 자리를 잡아 갔다. 가장 두드러진 건 홍사익과 염창섭이었다. 홍사익은 염창섭보다 더 베풀 줄 알았다. 동기생이나 후배가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오면 자기 책을 던지고 선선히 설명해 주었다. 모든 과목에 쩔쩔매는 생도들이 열 명 안팎 있었다. 그의 요약 노트는 그들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이응준은 술과와 일반생활에서 돋보였다. 타고난 용모와 체력, 천성적으로 갖고 있는 친화력으로 교관들과 일본인 생도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급생 중에서는 윤상필(尹相弼)이 학과에서, 김석원이 술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며 동기생들을 이끌고 나갔다.
조선인 생도들이 한 단계 올라서자 오구라 대위와 아나미 중위는 일본인 예과 생도 구대와의 축구경기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당하기 어려운 큰일이 터졌다. 10월 26일, 예과 3학년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11시 정각부터 시작되는 제4교시 지리 수업을 받기 위해 교실에 앉아 있었다. 교관이 들어왔다. 취체생도인 조철호가 “차렷”하고 짧게 명령했다. 생도들은 꼿꼿이 어깨를 폈고 경례 구령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웬일인지 교관은 답례를 안 하고 안색이 비장했다.
“나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다. 너희가 조선놈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께서 만주 하얼빈(合爾濱)에서 조선놈이 쏜 흉탄을 맞고 절명하셨다.”
생도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분은 동아시아의 공동번영을 위해 진력하신 일본의 영웅, 동아시아의 영웅이셨다. 그분을 저격한 조선놈은 자칭 독립투사라는데 제 정신이 아닌 미친놈이다. 너희는 조선놈임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생각해 봐라, 조선이 어떻게 독립한단 말이냐!”
교관은 목소리가 떨리고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생도들은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진 채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 만에 교관은 자신을 진정시키고 수업을 시작했지만 생도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4교시 수업이 끝나자 여느 날과 다르게 아나미 중위가 달려왔다. 바로 옆 교실에서 한국학생반 하급반이 동양사를 공부하고 나왔는데 그들도 저절로 상급생들과 합류했다.
여기저기 일본인 생도들이 이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중위가 말했다.
“너희들이 해야 할 건 속죄의 반성과 침묵이다. 조용히 식당으로 행군하라.”
조선인 생도들은 중위의 인솔을 받으며 식당으로 걸었다. 일본인 생도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강코로!” 하며 주먹을 흔들었다. 아나미 중위가 직접 인솔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달려들어 집단폭행이라도 할 듯 험악한 분위기였다.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이 날만큼은 벙어리들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의 우두머리를 격살한 동포 투사의 의거에 대한 감격, 그것은 등골이 찌릿해오는 감격으로 그들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한국학생반이 체육수업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생도대로 행진할 때였다. 일본인 생도들이 앞을 가로막고 삿대질을 하며 악마구리들처럼 욕을 했다.
“더러운 조선놈들!”
“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대열을 지휘하던 취체생도 조철호는 침착하게 ‘제자리 섯’ 구령을 내리고 일본인생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자숙하는 중이다. 병력이 행진하는데 방해되니 비켜라. 안 비키면 그냥 밀어붙인다.”
일본인 생도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주먹을 휘두르며 조철호에게 돌진했다. 조철호는 그놈을 끌어안았다. 턱을 한 번 얻어맞고 발길에 채이게 되자 벽력같이 소리쳤다.
“이러지 말고 연병장 가운데서 일 대 일로 한판 붙자.”
그는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목소리가 컸다. 일본인 생도 하나가 더 달라붙자 “에잇!”하며 황소처럼 밀어냈다. 일본인 생도들은 예과 3학년이었는데 나이도 어린데다가 얼굴이 희고 몸이 가는 편이어서 저만치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아나미 중위가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다. 혹시나 하여 행정실에서 바깥을 내다보다가 목격한 것이었다. 그는 조철호에게 덤빈 일본인 생도들의 뺨을 때렸다.
“바보 같은 자식들, 조선인 생도들을 가르치는 게 일본에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 모르는 놈!”
조선인 생도들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조철호가 모국어로 말했다.
“너희들 들었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조국을 위해 여기 와 있다.”
아나미 중위가 고개를 돌려 조철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구라 대위라면 여러 해 동안 조선 땅에서 근무했던 터라 알아들었을 것이었지만 중위는 조선어를 몰랐던 것이다.
조철호와 고국 유년학교 동기인 홍사익과 신태영이 중위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사과시키십시오. 그래야 저희들 물러갑니다.”
중위는 머리를 끄덕였다. 행군하는 병력을 가로막고 지휘자를 때렸으니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인 생도들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오후 내내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계속되었다.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동포 투사의 이토 저격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여전히 알지 못한 채 다시 하루를 보냈다. 그것을 알아낸 것은 뜻밖에도 워낙 얌전한 성격인데다 일본에 온 뒤 잔뜩 위축돼 있던 하급반의 이종혁 생도였다.
이 날 일석점호가 끝나고 소등나팔이 울려 모두 침상에 누웠을 때였다. 초번 불침번인 이종혁이 가운데 통로에 서더니 흥분을 억누른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 피격, 내가 다 알아요. 아까 수의시간에 혼자 도서관 갔는데 생물학 교관이 두꺼운 책 여러 권을 들고 나왔어요. 책을 옮겨 드리겠다고 받아 안고 교관실로 갔어요. 교관은 문 열어주고 변소 갔는데 책상에 신문이 있었어요. 이토 피격 기사가 있어서 재빨리 읽어 이 머리에 담았어요.”
흐릿한 취침등 아래서 모든 생도가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종혁은 길게 한 번 숨을 쉬었다. 충청도 당진 출신이라선지 말이 느린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빠르게 속삭이는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안응칠 본명 안중근, 서른 살, 황해도 해주 출신, 천주교도. 러시아 연해주와 간도에서 의병투쟁, 신문기자 경력, 이토가 러시아 장상(藏相)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온다는 신문보도 보고 동지들과 모의,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하얼빈역, 러시아 의장대원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이토를 향해 10보 거리에서 브라우닝 권총 3발 발사 명중시키고 나머지 탄환도 발사. 이토 현장 사망, 카와가미(川上) 하얼빈 총영사 등 고위관리 4명 중상. 권총 던지고 체포되면서 러시아어로 ‘우라 코레아’, 이 말은 우리말로 ‘대한 만세’. ‘우라 코레아’ 라고 세 번 외침. 사건의 배후로 안창호 선생, 이갑 참령님, 신민회 회원과 민족 지도자들 체포 중. 이상이에요.”
마침 순찰을 위해 출입문으로 다가오는 당직사관의 발소리가 들렸다. 생도들은 소리 없이 몸을 눕혔다. 이종혁는 천연스럽게 ‘이상 없음’ 보고를 했고 당직사관은 그의 경례에 답례하며 막사 문을 나갔다.
지석규는 감격과 흥분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일본을 이긴다고 늘 다짐하지만 일본으로 건너온 뒤 일본의 강한 힘을 실감하며 가슴 한 구석에 열패감이 쌓이고 있었다. 안중근이라는 사람의 의열투쟁은 그것을 단번에 씻어주고 있었다.
또 하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것은 동기생 조철호와 후배 이종혁의 행동이었다. 조철호는 서두르는 성격이고 이종혁은 소극적인 편이었는데 둘 다 냉철하고 당당하게 나섰던 것이다.
그는 소등 후 절대침묵이라는 규칙을 깨며 누운 채로 큰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조철호 생도와 이종혁 생도.”
그러자 여기저기서 같은 말들을 했다.
이응준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싸 받치고 있었다.
‘참령님이 다시 구속되시다니….’
일개 가출 소년인 자신을 집에 데려다 가르치고 무관학교에 넣었으며 일본으로 보내준 이갑 참령, 그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문득 남대문역에서의 환송식 때 참령이 한 말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잘못되면 집사람과 정희를 부탁한다.”
응준은 다음날 부인과 정희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도쿄에 오고 이 참령에게 두 차례 편지를 썼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참령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이 참령은 두 번 모두 답장을 보내 격려했다. 이번에는 수신인을 정희로 정해서 썼다. 오구라 대위가 검열할 것이므로 그냥 모두들 안녕하신가 안부를 물었다. 간곡한 마음을 완곡한 표현으로 썼다.
안중근 의거 이후 조선인 생도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자고 약속한 것이 아닌데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해진 것이다.
오구라 대위와 아나미 중위는 대립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본인 예과 생도들과의 친선 축구경기를 마련했다. 한국학생반이 3:1로 크게 이겼다. 이응준이 한 골, 김석원이 두 골을 넣었다. 모두 체력과 정신력에서 앞섰다. 그리고 고국 무관학교 시절 남산 봉수대를 왕복하는 달리기에서 2등 그룹에 200미터 이상 앞서며 독주했던 이응준, 소학교 시절 한성 시내 연합운동회 달리기 경기에서 1등을 했던 김석원, 두 사람을 서너 살 아래 일본인 생도들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더 당당해졌다.
인간의 능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훈련이 뒤따랐다. 20킬로그램 배낭을 지고 들판 길 10킬로미터를 달리는 야전구보, 유난히 추운 날 저수지 물속에 한 시간 몸 담그고 앉아 있기, 여름옷을 입고 가을 밤 천막도 없이 산속에서 아침까지 견디는 훈련 등이었는데 한국학생반은 서로 격려하고 질타하며 넘어섰다.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그렇게 첫 번째 고비를 넘기고 예상보다 빠른 11월 초 정규과정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11월 하순, 교토(京都)와 나라(奈良)의 유적답사와 함께 온천지대를 들르는 수학여행을 떠났다.
이응준은 출발 직전에 도착한 정희의 답장을 읽으며 기차에 올랐다.
그리운 응준 오빠
아버지는 지금 용산헌병대에 갇혀 계십니다. 아버지가 몸을 상하실까 봐 걱정하던 차에 오빠 편지를 받았습니다. 세 해 전 아버지가 감옥에 가셨을 때 오빠가 저와 어머니와 집 을 든든히 지켜주셨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빠 편지를 또 읽고 또 읽고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정희는 오빠가 멀리 계셔서 외롭고 슬프지만 편지를 곁에 놓으면 오빠가 곁에 있는 듯 느껴집니다. 어제는 예수 믿는 친구를 따라서 예배당에 갔었습니다. 아버지 무사하시기를 빌고 오빠도 무사하시기를 빌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편지 고맙다고 하시며 아버지는 곧 석방되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무사하 기를 빈다고 하셨습니다.
오빠를 다시 만날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며 줄입니다.
정희의 편지는 까불고 떼를 쓰던 철부지 소녀답지 않게 의젓했다. 응준은 이 참령을 걱정하며 편지를 차곡차곡 접어 수첩 속에 넣었다.
생도들은 12월 초 학교로 돌아왔고 이때 김광서는 대부근무를 끝내고 수업연한이 1년 6개월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일요하숙
1910년 경술년 새해가 되었다. 오구라 대위와 아나미 중위는 생도들이 예상보다 잘 적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생도들의 외출 허가 결정을 내렸다.
더 반가운 것도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 10분쯤 걸리는 곳에 일요하숙을 만든 것이다. 건물 주인은 아래층에서 자신의 성(姓)을 붙인 ‘고토(後藤) 운송점’을 경영하는데 창고로 쓰던 2층 15평을 다다미를 깔아 무상으로 제공한 것이었다. 건물주인 고토도 통이 크지만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그 부인이 전적으로 찬동했다고 했다. 그 집을 찾아낸 것은 김광서였고 오구라 대위가 고토를 만나 보증을 선 것이었다. 김광서의 공은 또 있었다. 도쿄의 고국 공사관에 건의해 20원의 지원금이 나오게 됐던 것이다.
한국학생반 생도들은 한꺼번에 외박을 나가 일요하숙으로 몰려갔다. 김광서 선배도 왔다.
“선배님,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백골난망할 일입니다.”
이응준의 말에 김광서는 싱글벙글 웃었다.
“은혜를 베풀어준 건 고토 씨이니 그분에게 감사해야지.”
잠시 후 부부가 올라왔다. 생도들은 착한 일본인 부부에게 정중히 경례했다.
일요하숙은 40여 명이 머물기에는 비좁았고 난방이 되지 않아 조금 추웠다. 그러나 아무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넉 달 동안 생도대 생활에 얽매여 지낸 터였는데 긴장 풀고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육사 생도 김광서와 유년학교 생도들은 빵을 사다가 저녁을 때우고 몸을 붙인 채 칼잠을 잤다.
이응준의 자리가 김광서 생도의 옆이었다.
“선배님이 일요하숙을 만들어 주신 건 긴장을 풀고 쉬게 하려는 뜻도 있지만 저희를 조국애라는 일념으로 뭉치게 하려는 뜻이 더 크지요?”
이응준이 말하자 김광서가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물론이지. 일본에 길들여지지 말고 우리 정신을 지켜야 한다. 나를 봐라. 나는 순치당하지 않았다.”
김광서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는데 여기저기서 알아듣고 한 마디씩 했다.
“저희도 그럴 겁니다.”
“결코 순치당하지 않을 겁니다.”
일본 땅 한복판에서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유년학교에 다니며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 모국 땅에서는 침몰하는 거함처럼 가라앉고 있는 조국의 운명을 붙잡아 일으키기 위해 많은 애국자들이 분투하고 있었다.
1910년 봄이 되자 위기감과 긴장은 더 커졌다. 국내의 의병투쟁은 더 강렬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범윤(李範允)과 홍범도(洪範圖)는 연해주 연합의병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을 감행했다.
이응준 생도의 후견인인 이갑 참령은 지난해 말 감옥에서 풀려나 있었다. 3월에 그는 동지들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경성 시내를 돌며 친지들을 방문했다. 작별인사였는데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며칠 뒤 흰 광목으로 변장하고 백설이 덮인 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응준은 그 소식을 오구라 대위를 통해서 알았다. 어느 날 이 참령과 몇몇 우국지사들이 국외로 탈출했다는 기사가 실린 일본 신문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갑 참령이 참 어리석은 결정을 했구나.”
신문을 읽고 행정실을 나오는 이응준은 안도감과 걱정이 교차했다. 이 참령이 망명길에 올랐으니 다시 감옥에 갈 일이 없다는 것은 안심이지만 부인과 어린 정희가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되었다.
그는 참령 부인과 정희에게 편지를 썼다. 정희에게 꿋꿋이 견디며 공부 잘 하라는 당부를, 부인에게는 곁에서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썼다. 열흘 뒤에 정희에게서 답장이 왔고 편지 내용은 더 의젓해져 있었다.
유년학교 생활에 적응하여 매달리는 동안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6월이 되어 예과 3학년과 2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유영(遊泳)훈련을 떠날 즈음 한 가지 고비가 생겼다. 학과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생도들이 자진퇴교 절차를 밟거나 유급처분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퇴교 결정이 난 상급반 4명, 하급반 4명은 눈물을 흘리며 짐을 꾸렸다.
살아남은 생도들은 일주일 간 유영훈련에 참가한 뒤 다시 일주일 단체답사 여행을 하고 열흘 간 방학에 들어갔다. 아무도 고국에 가지 않았다. 귀향하지 못하는 한국학생반 생도들을 위해 숙소와 도서관이 문을 열고 있었고 까다로운 내무생활 통제도 없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생도대에 남아 축구를 하거나 일요하숙에 가서 빈둥거렸다. 따분하면 인접한 육군사관학교에 구경 가고 도쿄 시내를 돌아다녔다.
조국이여 조국이여
1910년 9월 1일 수요일, 고국을 떠나온 지 어느 새 1년이 지나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상급반은 본과 1학년, 하급반은 예과 3학년이었다.
점심시간에 하사관이 식당 외벽에 굵은 붓글씨로 쓴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일본인 생도들이 박수를 쳤다. 다가가 바라보니 ‘경축 우리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합병하였다’였다.
이응준은 무거운 몽둥이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동기생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넋 나간 표정들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눈물을 쏟고 있었다.
모두가 경황이 없이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오구라 대위가 한국학생반을 집합시켰다.
“너희들 오후 일과는 취소되었다. 교장님 훈시가 있어 중강당으로 이동한다.”
중강당으로 가자 교장이 말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제군도 일시동인(一視同仁), 같은 일본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누리게 되었으며 위탁교육생 신분에서 일본 국민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 내지(內地. 일본 본토) 출신 생도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육사에 진학할 것이며 임관 후 내지 출신 병사들을 지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전술을 연마하라.”
교장은 짧은 훈시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한국학생반 담당관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가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학생반은 꼭 1년 만에 소멸되었다. 너희들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분홍색 금장을 떼고 내지 출신과 같은 진홍색 금장을 붙이게 될 것이고, 오늘 저녁 다섯 시, 내지 출신 생도들의 구대에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씩 분산 배치될 것이다.”
강화진위대 출신 의병들과의 전투에서 패한 경력 때문에 소좌 진급이 늦어지고 있던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는 자신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종료되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멈추고 마치 얼굴들을 잊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았다.
“아쉽지만 이별이구나. 나는 조선 땅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긴 시간 너희를 이끌어 온 책임자로서 몇 마디 덧붙이겠다. 현실은 엄정하고 냉혹하다. 너희가 지금은 합병을 슬퍼하지만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유년학교나 육사는 일백 대 일의 경쟁을 거쳐 입학한다는 걸 알 것이다. 너희는 육사를 졸업하면 내지 출신 병사들을 지휘하는 첫 조선인 장교들이 될 것이다. 그게 너희들 운명이다. 그러니 딴 생각 말고 갑자기 닥쳐온 행운을 붙잡기 바란다. 이제 일본 생도들과 똑같아졌으니 똑같은 기준이 적용될 것이며 아침에 궁성요배와 칙유낭독도 할 것이다. 모두들 유년학교의 남은 기간 발버둥쳐서 살아남고 육사에 가서도 꿋꿋하게 견뎌 임관하기 바란다.”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는 그렇게 감정적인 이별사를 했다.
그때 생도 몇이 벌떡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나는 궁성요배 못해요! 내 나라로 돌아갈 거요!”
“나도 떠납니다. 나라가 있은 후 군인이지 나라 없는 군인이 무엇에 쓴단 말입니까!”
이응준도 그렇게 소리치며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래도 끝까지 해야지’하는 생각이 그를 주저앉게 했다. 거의 모든 생도들 마음이 그랬다. 순간적인 결심으로 일생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의 기로였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고 일에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에 토론하고 정리할 겨를이 없었다. 떠나고 안 떠나고는 바늘 끝 만한 차이였다.
한국학생반의 해체작업은 아나미 코레츠카 중위에 의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숙소에서 짐을 꾸리며, 떠나는 생도들을 뜨겁게 포옹했을 뿐 바쁜 일정에 쫓겼다.
오후 5시, 진홍색 금장으로 바꿔 붙인 잔류생도들은 자신의 관물과 사물을 커다란 자루에 담은 채 생도대 앞마당에 정렬해 아나미 중위의 호명을 기다렸다. 하나씩 이름을 부르면 소속 구대 대표로 마중 나온 일본인 모범생도를 따라 그곳을 떠났다.
단지맹세
한국학생반 시절에는 같은 조선인 동기생들 앞이니 기합이나 체벌은 받아도 크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일부러 그러는지 생도대 구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교관들은 조선인 생도가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주었다.
아침 점호 직후에 갖는 궁성요배나 천황의 군인칙유 낭독은 잠깐 딴 생각을 하며 참을 수 있었으나 그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분산되어 헤어진 동기생과 후배들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각 구대마다 수업시간표가 다르고, 목욕과 식사도 단체 이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닷새가 지난 일요일, 일요하숙에 김광서 생도와 유년학교의 조선인 생도들이 전원 모였다. 김광서 생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지난날 리더 그룹이었던 상급학년 몇 사람이 연락한 것도 아니었다.
김광서 생도가 늘 당당했던 모습과 달리 힘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 오고 싶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 듣고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까이 앉은 생도들에게 한국학생반이 해체된 뒤의 사정을 이것저것 물었다. 거부하며 떠난 생도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었다. 몇 사람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실컷 울어라! 나라 없는 망국노(亡國奴)들이 아니냐! 학교를 떠났다는 후배들처럼 나도 그러고 싶었으나 참았다.”
김광서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 말에 일요하숙은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지석규는 두 손을 머리를 감싸고 흑흑 흐느꼈다. 언뜻 고개를 들다가 창 아래 지상에 눈길이 갔다. 마을 사람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합방 발표 며칠 뒤 조선인 생도들이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광서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턱끝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김광서는 길게 숨을 골라 가슴을 진정하고 소리쳤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 흩어졌다가 하나씩 자연스럽게 아오야마 묘지로 모여라. 박유굉(朴裕宏) 선배 묘를 참배하는 걸로 하자.”
일요하숙을 나와 뿔뿔이 헤어졌던 그들은 한 시간 뒤 아오야마 묘지 뒤편의 삼나무 그늘에 모였다.
김광서 생도는 조국이 있는 서쪽을 향해 서며 조용히 명령했다.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묵념하자. 일동 묵념!”
묵념이 끝난 뒤 생도들은 땅에 수북이 깔린 삼나무의 마른 낙엽 위에 앉았다.
김광서의 지시에 따라 앉은 순서대로 한 사람씩 의견을 말했다. 자퇴하자는 의견이 절반, 싸우다 죽자는 의견이 절반이었다.
홍사익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기본 군사지식이 있고 김 선배님은 넉넉히 지휘하실 수 있지요. 무기고를 탈취해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하나하나 쓰러져 죽는 겁니다.”
신태영이 말했다.
“찬성입니다. 유격전 전술에 의하면 40명을 잡기 위해 수만 명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응준 차례가 되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조국 땅으로 돌아가서 봉기하면 좋지만 일본이 우리를 보내주지 않겠지요. 그러면 일본 땅을 발칵 뒤집어놓으며 싸우다 죽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이름은 청사에 기록될 겁니다.”
다음은 조철호 차례였다.
“황궁 앞에서 자폭합시다. 사꾸라꽃 떨어지듯 나라를 위해 목숨 던지며 할복하는 게 일본인들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동포에게 고하는 장엄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합시다. 그래도 청사에 기록될 겁니다.”
몇 사람을 거쳐 지석규 차례가 되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언젠가 조국이 우리를 부를 때가 올 겁니다. 어떤 계기로 민족 전체가 들고 일어나고 항일전선을 결성했을 때 누가 지휘합니까? 일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배워 임관해야 합니다. 소대장, 중대장, 참모를 거치며 지휘력과 경험을 쌓아 두었다가 그때 써 먹는 겁니다.”
모두의 발언이 끝났을 때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의견은 지석규의 제안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김광서는 선언했다.
“결론은 내려졌다. 악착같이 전술을 배우며 때를 기다리자. 그때까지 모든 고통을 인내하라. 해산하라.”
해산한 뒤 일부 생도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었다.
지석규는 터벅터벅 흙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앞서가던 김광서 생도가 걸음을 늦추고 기다렸다.
“끝까지 신념을 지속시키며 뭉치려면 구심점이 필요하다. 바로 너와 홍사익과 이응준이다. 다음주 토요일 셋이 조용히 외박을 나와 요코하마(橫浜)로 가라. 기차역 근처에 중국인들의 거리 주카가이(中華街)가 있고 수십 개 음식점 중 류텐가쿠(龍天閣)가 있다. 거기서 오후 다섯 시에 만나자. 이토를 거꾸러뜨린 안중근 의사께서는 동지들과 단지(斷指)맹세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도 그걸 하자.”
“넷, 알았습니다.” 지석규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김광서가 세 사람의 후배들에게 집합명령을 내린 요코하마는 도쿄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토요일에 외박을 나온 홍사익은 지석규 ·이응준과 함께 곧장 기차역으로 가서, 오후 2시에 떠나는 요코하마 행 기차표를 끊었다. 항구와 해변 풍광이 아름답다는 요코하마에 일찌감치 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합의한 것이었다.
기차 떠날 시간이 많이 남아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김광서 선배가 나타났다.
김광서는 세 사람의 경례를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같은 기차를 타게 생겼군.”
기차가 달리는 동안 김광서가 한 사람씩 붙잡고 고향과 가족에 대해 물었다. 후배들 셋이 이야기를 끝내자 자기 가족 이야기와 자신이 걸어온 이야기를 했다. 일본 육사를 나와 27세 젊은 나이에 대한제국 군대의 공병대장 자리에 앉았다가 요절한 형 이야기를 하던 중 품속에서 고국 황제의 군인칙유 카드를 꺼냈다.
“이건 죽은 형이 품고 계셨던 거다. 을사보호조약을 맺던 해 8월 형님은 일본에 출장 오셨다. 나는 그때 이갑 참령님도 뵈었다.”
응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광서는 계속했다.
“형님은 유년학교 편입을 허락하고 자기 것을 주셨어. 조국을 지키는 칼이 돼야 한다는 아버님의 뜻을 전하면서 주셨지. 그때 전한 아버님 말씀이 유언이 되고 형의 주신 칙유가 유품이 되었다.”
기차가 항구에 붙어 있는 요코하마역에 도착했다. 김광서 생도가 마차점에서 지붕이 없는 쌍두마차를 빌렸다. 병과가 기병이라선지 능숙하게 마차를 몰았다.
“너희들은 잔말 말고 따라 오면 돼.”
“알고 있어요.”하고 세 사람은 합창으로 대답했다.
마차는 졸참나무 숲을 에워 돌아 약간의 경사를 이룬 길을 타고 시내 쪽으로 나아갔다. 숲이 끝나자 중국식 건물들이 나타났다. 주카가이였다.
“우리가 오늘 밤 잘 곳은 여기야. 우선 시내 구경 좀 하고 다시 오자.”
김광서가 말했다. 마차는 그 거리를 통과해 외국인 거류지역을 스치고 일본 서민들의 저자거리를 지나갔다. 다시 항구 쪽으로 와서 정박한 기선들을 구경했다. 다시 기차역으로 가서 마차를 돌려주고 주카가이의 류텐가쿠를 향해 걸었다.
“류텐가쿠는 유학시절 아버님이 단골로 삼으셨던 음식점이야. 형도 거길 이용했지. 말하자면 우기 가족의 일요하숙이었던 셈이지. 나도 열 번도 더 여기 왔어.”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지고 서서 중국인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왕대인, 잘 지내셨지요?”
김광서의 말에 중국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반가워. 형님을 점점 닮아가는군.”
“오늘은 친구들과 같이 왔습니다. 실컷 먹고 마시고 자고 갈 테니까 골방을 주십시오. 헌병이나 경찰이 와도 우리는 여기 없는 겁니다.”
왕대인이라고 불린 주인은 눈을 크게 뜨고 웃었다.
“걱정 말고 이 왕가(王哥)를 믿어.”
홍사익은 김광서 선배를 따라 골방으로 들어갔다. 김광서 선배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앉았다. 홍사익과 두 유년학교 생도도 엄숙해져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김광서는 주머니에서 예리한 칼을 꺼냈다.
“우리는 아오야마 묘지에서 조국이 부르는 날 일본군 군복을 벗어던지고 독립전쟁에 나서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평생 불변을 다짐한 우정의 약속이나 목숨 걸고 맺은 사랑의 약속이 깨어지듯 묘지에서의 맹세도 약화되기 쉽다. 우리는 장차 일본군에 길들여져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단지맹세를 하자.”
홍사익은 감격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고량주와 음식접시가 들어왔다. 김광서 생도는 조국 황제의 군인칙유 카드를 상 위에 펴고 그 위에 작은 고량주 잔을 놓았다. 먼저 손가락을 칼끝으로 찔러 술잔에 4분의 1이 고이게 피를 흘렸다. 그 다음은 나이순으로 지석규, 홍사익, 이응준이 그렇게 했다. 김광서는 피의 잔에 고량주를 붓고 다시 네 잔으로 나누었다.
김광서가 무릎을 꿇은 채 피 섞은 잔을 군인칙유로 싸서 높이 들어올렸다.
“나 김광서는 조국이 부르는 날 독립전쟁에 앞장서 신명을 바칠 것을 세 동지들과 함께 맹세합니다.”
세 후배도 한 사람씩 그대로 했다. 그런 다음 피의 술을 마셨다.
마치 제의(祭儀)와도 같은 맹세가 끝나자 김광서는 다리를 뻗고 앉으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후배들에게 연거푸 술잔을 안겼고 후배들은 덥석덥석 받아 마시고 답배(答盃)를 주었다. 술을 한 모금만 마셔도 중벌이 내려지는 사관학교와 유년학교의 교칙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위반하는 행위였다.
거의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은 마신 네 사람은 뒤엉켜서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찬물에 세수하고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피로써 맹세했다. 씩씩하게 사관학교로 돌아가자. 동지들을 이끌며 일본놈들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자.”
김광서가 장엄한 목소리로 말했고 홍사익은 두 친구와 함께 합창으로 화답했다.
“선배님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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