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듯 저도 어떤 영화를 보려 할 때는 정보를 구합니다. 그것이 영화사에서 내놓은 광고든 혹은 영화평이든 볼만 한 것이라는 평이 나올때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프리다(Frida Kahlo 1907-1954)를 본 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결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졌지요. 게다가 작년 내내 지하도를 그야말로 도배한 대형광고판, 그래서 프리다는 사뭇 큰 기대를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많은 기대를 갖고 본 영화 프리다는 유감스럽게도 내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삶을 피상적으로 거쳐 가면서 대략적으로 그려냈을 뿐 그녀의 성격이나 내면을 흐르고 있는 고통은 전혀 그려내지 못했다는 것이 내 느낌이었지요. 영화를 보고나서 다들 말하는 것처럼 감명을 받지 못한 나는 대체 왜 그런지를 한참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녀의 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지요.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전혀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던 저는 일단 그녀의 그림을 찾아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그림뿐 아니라 다른 그림도 찾아보기로 한 것이지요. 인터넷의 위대한 힘 덕분에 그녀의 그림들은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실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그림들은 대단히 강렬했지요. 그녀는 많은 그림들에서 자신과 자신의 일생과 관련된 사건들을 그리고 있기에 이미 영화를 봤던 지라 이해가 퍽 쉬웠습니다.
그녀가 그린 그림들 중 많은 작품이 자신의 모습을 다루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녀가 그려낸 자화상은 한결같이 짙은 일자 눈썹과 그리고 콧수염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더군요. 진짜 그녀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저는 그렇게 짙은 일자눈썹 거의 양쪽 눈썹이 맞닿을 정도의 여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콧수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인들도 물론 콧수염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않기에 자화상에 드러난 모습은 그녀가 강조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했지요. 화가들뿐 아니라 의식을 다루는 모든 이들은 작품에 자신을 담습니다. 의식을 다루는 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산물을 내놓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마땅한 호칭이겠지요. 화가, 작가, 그리고 음악가 들은 작품에 무의식적이던 의식적이던 자신의 생과 모습을 담습니다. 따라서 화가들이 그려내는 것이 그 사람자신의 내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녀가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성정이 격렬하다는 뜻인지를 잠시 헤아렸습니다. 아마도 정열적이면서 무언가를 절실하게 희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여겼지요.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망. 남성이 되고 싶은 소망. 그것은 바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면서 힘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싶었지요. 육체라는 틀에 갇힌 그녀는 무한히 자유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안에 갇힌 정열을,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고통을 잊을 수 잇는 수단을 찾았던 것이고 그 정열이 그 희망이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특히나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그리고 나름대로의 굴레를 갖고 있는 나는 그런 소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의 굴레를 갖고 있고 있지 않은지요.
무척 궁금해진 나머지 이번에는 그녀의 일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던 강렬함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일생을 읽어 내리면서 왜 영화가 그처럼 겉돌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영화는 여인 그리고 화가인 프리다가 살아간 일생이 아닌 디에고를 향한 그녀의 사랑에 중점을 맞추고 있었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디에고와 관련되어 있는 영화.. 물론 여인의 인생에서 남편의 존재는 대단히 귀중합니다. 남성의 일생에서 아내가 소중한 것처럼... 그러나 그녀의 생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녀의 작품과 삶이 어떻게 일치하고 있는 지였는데 왜 그녀의 그림들이 그토록 우리에게 인상적인지 그 관련성을 찾아야 했는데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제가 보는 프리다는 고통으로 점철 되어 있는 삶을 살면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생이 주는 모든 것에 몰두한 여인입니다. 더듬어보니 그녀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쳤더군요. 사고로 인한 불임.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몸. 일생을 통해 결코 그치지 않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 혹은 내일 아니 지금이라도 꺼질지 모르는 자신의 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처럼 생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녀는 삶에서 느끼는 쾌락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술에도 익숙합니다. 온갖 쾌락에 몰두하지요. 양성애자로 여인과 로맨스를 나누었고 남편인 디에고는 물론 뭇 남성들과도 염문을 뿌렸습니다. 당시 그녀는 가장 매력적인 여인중의 한명으로 꼽혔다고 합니다. 유명한 배우였던 돌로레스 델 리오(Dolores Del Rio), 폴레트 고다(Paulette Gaddard), 에미 루 페카(Emi Lou Pekar) 그리고 너무도 유명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그리고 남성으로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비롯하여, 사진가인 니콜라스 머레이(Nikolas Murray),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등등 숱하게 많은 이들과 사랑을 나누었지요. 그런 면으로 보아 두 사람은 좋은 동지였다고 해도 보아집니다. 그 사상으로 보거나 행실로 보거나.. 완전한 평등일까요. 못 말리는 바람둥이 디에고도 아내를 배반했지만 그 점에서는 프리다 또한 만만치 않더군요. 영화에서 나오는 트로츠키와의 로맨스가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었는지 그녀의 일생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트로츠키였기에 아마도 상당히 깊은 관계가 아니었나 싶군요. 영화가 묘사한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감안해서 그려낸 것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리다를 보면서 또 다른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988)’이 생각났습니다.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했던 영화에서 본 조각가‘까미유 끌로델(1864-1934)’의 모습은 물론 프리다와는 다릅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스승이면서 연인이었던 로댕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했던 까미유의 불행은 아마도 시대 탓일까요. 그러나 영화 '까미유 끌로델'은 그녀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로댕이란 인물은 극히 제한되게 다루어질 뿐입니다. 결국은 요양원에서 삶을 끝낼 정도로 그녀의 일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영화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상 깊었지요.
까미유와 프리다가 다른 점은 시대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성격이 아닐까요. 물론 동반자가 다르기도 합니다. 사회 평판에 대단히 신경을 썼던 로댕이 까미유를 버렸듯이 디에고 또한 숱한 여인들과 정사를 벌이지요. 로댕이 까미유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듯이 디에고 또한 프리다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까미유는 자신 안으로만 파고들어 끝내 자신을 망친 반면 프리다는 거리낌 없이 스스로를 표출했습니다. 까미유가 로댕의 언저리에 머물면서 그에게 매달린 반면 프리다는 디에고와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꾸려나갑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선 자였지요. 디에고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차리고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가 없었더라도 프리다는 충분히 홀로 설 수 있었을 겁니다. 그와 그녀의 예술세계는 다르니까요. 디에고가 다룬 것들이 사회주의, 인민, 민중의 세계였다면 프리다는 자신의 영혼을 다루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조각씩 겪는 고통을 다루었지요. 사상이 아닌 인간이 지닌 영원한 숙제, 삶의 의미라는 테마를 형상화시켰습니다. 사상은 인간이 도구화하기에 그 사상이 지배하는 시대를 지나면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살아야 할 의미를 주지 못하지요. 어느 누구라도 다른 이에게 삶을 살아야 할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지요. 그럴만한 의미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은 바로 내 삶이 아닐까요. 내가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한 지표가 아닐까요. 프리다의 삶은 프리다의 고통은 바로 그런 뜻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삶이라는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살아야 할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그 과정을 화면에 나타냄으로써 그녀는 쉬르 레알리즘 (Sur-realism)의 한 작가로 우뚝 선 것이지요. 우리는 그녀의 작품에서 그녀의 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들을 겪으면서도 생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정열로 온갖 역경을 헤쳐 나온 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명 받는 이유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의 끈을 놓지 않을 뿐더러 삶의 정열을 불태운 한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래도 삶은 살만하며 그래도 생은 근사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그녀의 생에서 얻는 것이지요. 영화는 그런 점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못한 것일 테지요.
그러나 영화 시작과 끝 장면, 그리고 디에고를 처음 만나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공작과 원숭이가 선인장이 있는 정원을 배회하고 그녀가 즐겨 사용했던 색채가 화면에 흐르지요. 감독이 무척 고심했을 듯한 시작과 끝이지요. 그녀의 그림이 그런 것처럼 영화 또한 다분히 초현실적인 요소를 간간히 끼워넣고 있습니다. 감독의 세심함과 공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장면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곱게 그리고 의존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프리다를 잘 드러내주지 못합니다. 실상은 더 어둡고 더 격렬하고 더 강렬했지요. 그녀의 일생이, 고통으로 점철한 그녀의 생이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평화롭게 끝났을까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첫댓글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읽었습니다. 팅클님은 참 열정적으로, 그리고 재밌게 사는 분 같아요.^^ 덕분에 프리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았네요. 내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거라는 내 생각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는데 다시 그걸 확인하게 해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팅클님 글이 왜 안올라오나 기대하고 있었어요. "프리다"는 김천에 상륙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어요..팅클님 글에서 다시 프리다란 인간이 생생히 다가 오는 듯하네요. 일생을 고통과 싸우면서 매순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살아낸 한 인간의 위대한 이야기, 글 고맙습니다.
프리다! 마침표를 찍기보다 느낌표를 찍어야 할것 같군요 내 생이, 우리의 생이 프리다나 디에고처럼 될수 없다는 게 어쩜 문화의 관습 차이가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면서 보지 못한 연속극처럼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군요 그래야만 강렬한 이미지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첫댓글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읽었습니다. 팅클님은 참 열정적으로, 그리고 재밌게 사는 분 같아요.^^ 덕분에 프리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았네요. 내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거라는 내 생각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는데 다시 그걸 확인하게 해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팅클님 글이 왜 안올라오나 기대하고 있었어요. "프리다"는 김천에 상륙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어요..팅클님 글에서 다시 프리다란 인간이 생생히 다가 오는 듯하네요. 일생을 고통과 싸우면서 매순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살아낸 한 인간의 위대한 이야기, 글 고맙습니다.
아아아아아~~ 지금 설에 앵콜상영하는뎅..뎅..
프리다! 마침표를 찍기보다 느낌표를 찍어야 할것 같군요 내 생이, 우리의 생이 프리다나 디에고처럼 될수 없다는 게 어쩜 문화의 관습 차이가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면서 보지 못한 연속극처럼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군요 그래야만 강렬한 이미지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화가로서의 삶과 인간 아니 여자로서의 삶의 느낌을 받고 싶군요 영화 이야기 감사합니다 한때 연극 한편을 보기 위해 혼자서 서울 동숭동 거리를 헤맨적도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