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함열의 옛가옥
◈조선 최초의 음식칼럼니스트 허균(許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지은 조선시대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
허균이 요리 칼럼 썼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 책이 익산의 함열이란 고장서 조선 최초로 집필됐다는 사실에도 주목합니다.
유배지에서 자신이 전국을 돌며 맛보았던 음식이 그리워 기록해 놓은 각종 요리와 식재료 130여 종이 담긴 '도문대작' 속 진귀한
음식을 맛보았습니다.
허균(許筠)은 29세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황해도 도지사가 되지만 한양 기생을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파직됩니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길에 진출하지만 번번이 파직당한 후 산천 유람하며 기생 계생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고, 시인 유희경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인간관계의 폭을 넓힙니다.
그러다 1609년 첨지중추부사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지만 이번에는 과거시험서 조카사위 부적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전라도로
유배가게 됩니다.
'광해군일기'에는 허균이 죄를 자백하여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해군 3년(1611년 1월)이었고 그의 나이 43세입니다.
당시 함열 현감이던 한회일(인조비 인열왕후 오빠)이 그와 밀접한 관계였기에 함열 객사에서 생활했을 것으로 기록됩니다.
현재 함라 어린이집 일대를 옛관아터로, 함라파출소 자리는 옛 감옥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함열현'에서 1613년까지 머물면서 '도문대작'이란 음식 관련 책을 썼습니다.
◈도문대작(屠門大嚼) -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
허균은 함열에서 1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옛 글을 정리한 '성소부부고' 64권을 저술했으나 지금은 26권만이 전해집니다.
'성소부부고'는 '장독을 덮을 정도의 하찮은 책'이라는 겸손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詩)·사(辭)·부(賦)·문(文)외에 조선 최초의 요리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이 실려 있습니다.
도문대작은 이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습니다.
'도문대작'은 고기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입니다.
귀양을 온 허균이 귀양지에서 그간 자신이 먹어본 팔도 음식들을 지역별로 기록한 책으로, 조리서가 거의 없던 조선 중기 팔도
음식을 기록한 것이라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서문입니다.
'조선시대 남성 학자들이 식생활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며 경계의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팔도뿐 아니라 해역에 따른 수산물의 특색과 이를 이용한 젓갈, 포까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책 도문대작
"내가 풍악에 구경 가 표훈(表訓)사(寺)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절의 주지가 저녁상 차려 왔다. 상에 떡 한 그릇 있었는데 이것은
귀리를 빻아 체로 여러 번 쳐서 곱게 한 뒤에 꿀물을 넣어 석용(石茸: 석이버섯)과 반죽하여 놋쇠가루에 찐 것인데, 맛이 매우
좋아 찹쌀떡이나 감떡보다도 훨씬 낫다"
허균은 대단한 미식가였습니다.
'도문대작'엔 병이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과 계절에 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을 부기하였습니다.
도문대작에서 소개하고 있는 맛있는 요리를 알아봅니다.
'방풍죽은 강릉, 석이병은 표훈사, 백산자는 전주, 다식은 안동, 밤다식은 밀약, 차수(叉手:칼국수)는 여주, 엿은 개성, 웅지정과
(熊脂正果)는 회양, 콩죽은 북청의 것이 명물이다.'
경상우도의 상인이 전복을 말려서 꽃모양으로 오리거나 얇게 저미는 화복(花鰒)을 만드는 기술에 능하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조수육류에서는 웅장(熊掌·곰 발바닥), 표태(豹胎·표범의 태), 녹설(鹿舌·사슴의 혀), 녹미(鹿)尾·사슴의 꼬리). 방풍나물로 끓인
방풍죽. 한 번 먹으면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서 사흘 간다는 방풍은 평양의 냉면, 진주의 비빔밥 등과 함께 팔도의 대표 음식으로
꼽힙니다.
허균은 책에서 강릉의 해안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방풍으로 끓인 것이 아니면 그 맛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도문대작'에는 각종 음식과 함께 그 음식의 명산지가 나와 있습니다.
'병이류에서 소개한 대만두는 보만두라고도 불리며 자잘한 만두들을 거대한 만두피에 한데 넣고 다시 한번 복주머니처럼 묶은
음식으로 평안도 의주 지방 사람이 중국 사람들만큼 대만두 잘 만든다. 백산자(박산. 쌀로만든 백당을 고물에 묻혀 먹는 한과)는
전주, 석이병은 금강산, 다식은 안동, 엿은 개성, 약밥은 경주 등이 잘한다.'
여러 품목에 관하여 식품의 소재뿐 아니라 그 식품에 관한 음식관습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점을 지적하면서 먹는 것은 우리 몸과 생명에 연관된
아주 중요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음식 속에 진리를 찾다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생명에 관계된다. 선현들은 먹을 것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비난한 것이지, 어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한 것이겠는가."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음식 타령만 한 것이 아닙니다.
먹을 걸 절약하지 않는 자들에게 부귀영화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하였습니다.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라며 소박한 식사를 추구했던 정약용 같은 이가 있었던 반면, 자신을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자백하는 허균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 공자는 '논어(論語)' '리인'(里仁) 편에서 "선비로서 도에 뜻을 두고도 낡은 옷과 거친 밥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더불어 도를
논의할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허균은 "선현께서 음식 위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이익 탐하고 주창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어찌 음식을 폐하고 말라지도 말라는 것이겠는가?"라고 해석했습니다.
허균의 '도문대작'에는 짧게나마 음식에 얽힌 그의 개인적인 추억부터 당시 풍습까지 기록되어 있어 더욱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음식에 관한 책이 거의 전무했던 조선시대 중기, 당시 상류계층의 식생활과 향토의 명물을 일별할 수 있습니다.
17세기의 우리나라 별미음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