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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200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행사가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서 개최되었다. 나치 독일은 1940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어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유대인과 폴란드 공산주의자 약 130만 명을 구금, 이 중 110만여 명을 살해했다. 하루에 3,000명씩 독가스로 죽여 화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우슈비츠엔 집시·소련군 포로·동성애자·정치범 등도 수용되었지만, 희생자의 90%는 유대인이었다.
소련군 진주 시 7톤의 머리털이 한 창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나치는 그걸로 담요를 만들었다고 한다. 수용소 의사였던 요제프 멩겔레는 어린이 수감자를 영하 20도 이하의 추위 속에 맨발로 내몰아 동상에 걸리게 한다든가 남녀 성기를 절단해 보는 등 각종 생체실험을 했다.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 학살 이외에도, 히틀러 치하에서 이루어진 인명 살해 통계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 이래 적어도 1,000만 명의 슬라브인들이 죽었다. 소련 포로의 60% 이상(적어도 200만 명)이 죽었는데, 대부분 굶어 죽었다. 적어도 50만 명의 집시들이 살해되었으며, 6,000명의 어린이들이 안락사 처리되었고, 7만 명의 장애인 및 노인들이 살해되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가리켜 홀로코스트(Holocaust)라 한다. 구약성서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특수한 제사라는 의미가 있는 홀로코스트란 말은 한동안 주로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섬멸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단어나 대량학살의 일반 명칭으로 사용됐지만, 오늘날엔 유대인 학살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2005년 2월 23일 11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섯 번째 저서가 홀로코스트와 낙태를 비교해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교황은 “유대인 학살은 나치 정권이 무너지면서 끝났다. 그러나 생겨났지만 태어나지 못한 인간 존재의 합법적인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독일 유대인협회의 회장 파울 슈피겔은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허용해선 안 되는 비교를 했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홀로코스트는 신성하다. 미국엔 7개의 대형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으며, 미국의 홀로코스트 단체들은 100여 개에 이른다. 총 50개국에서 홀로코스트 기념식을 후원한다. 2005년 4월 독일 공영 ZDF 방송과 일간 『디벨트』가 독일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지식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80%, 24세 이하 청소년의 51.4%가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디벨트』는 “그동안 독일 사회와 학교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어두운 과거사를 열성적으로 가르쳐 왔다는 자부심에 허점이 드러났다”면서 “교육 당국은 청소년들의 역사의식 부재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런데 미국의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이 2000년 6월에 출간한 『홀로코스트 산업: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는 홀로코스트의 그런 신성화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부모로 둔 핀켈슈타인은 이 책으로 인해 유대인 사회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그만큼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를 이용하여 돈과 ‘윤리적 자본’을 얻고 있는 유대인 엘리트 중심의 여러 단체와 기관들을 고발했다.
홀로코스트 이론가인 엘리 위셀은 홀로코스트를 다른 고통과 비교하는 것은 “유대인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배신행위”라고 주장했지만,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의 불합리성은 자신의 유일성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역사적 사건들도 절대적으로 유일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핀켈슈타인은 1945년 전후의 미국 유대인 엘리트들은 홀로코스트 문제를 거론하기는커녕 피해 갔다고 지적한다. 미국 정부의 세계 전략에 순응하는 동시에 나치 홀로코스트의 상기는 곧 공산주의자의 주장이라는 매카시즘 공세를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래서 주류 유대인 단체들은 과거 나치주의자들의 미국 여행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운동에 협력하는 것도 거부했다.
유대인 엘리트들의 홀로코스트 외면엔 시온주의자들의 책임 문제도 있었다. 시온운동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2,000년 만에 그들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자 일으킨 운동으로, 그 결과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에 가서 이스라엘 건국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비(非)민족주의자들이나 팔레스타인에 와 봐야 도움이 안 되는 노년층 등을 전혀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방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비서를 지낸 랄프 쇤만이 쓴 『잔인한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자들이 방관을 넘어서 나치와 협력하는 등 유대인 학살에 공모했다고 주장한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을 압도하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유대인 구출에 적극 반대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100% 미국인 되기’와 미국의 주류 사회 편입에만 급급했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사건 때도 그랬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이었는데,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독일을 떠나 도망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약 15년간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 조직에 체포돼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는데, 이때에 유대인 소유의 『워싱턴포스트』는 아이히만 납치에 대해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나섰다. 에리히 프롬은 “아이히만의 납치는 나치스 범죄와 동일한 유형의 불법행위”라고 주장했다.
1967년 6월 5일에서 10일까지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6일 전쟁’ 이후 미국 정부가 친(親)아랍 정책에서 친(親)이스라엘 정책으로 선회하면서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간 유대인들의 주류 진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데다 이젠 마음 놓고 이스라엘을 지지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유대계 미국인들의 종교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을 ‘영원한 피해자들의 안식처’로 그리면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모든 행위를 옹호하게 된 것이다. 그와 더불어 홀로코스트의 신성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힘의 논리에 따른 이중잣대는 여전했다. 79년 흑인 목사 제시 잭슨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얘기를 듣는 것이 진절머리가 난다”고 말하자 유대인 단체들은 두고두고 잭슨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85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독일 방문 시 나치 병사들이 묻힌 비트버그 공동묘지를 방문해 그곳에 묻힌 병사들이 “강제수용소 희생자들 못지않은 나치의 희생자들”이라고 주장했을 때, 유대인 단체들은 반발하지 않았으며 88년엔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지’의 공로로 레이건에게 ‘올해의 인도주의자’ 상을 주기까지 했다.
핀켈슈타인은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대략 10만 명인데도 불구하고 이젠 나치의 박해를 교묘히 피한 사람들까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불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살아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거의 1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핀켈슈타인은 그런 부풀리기가 60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독일의 배상금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핀켈슈타인은 유대인 단체들이 탁월한 여론전쟁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독일 정부가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99년 영국의 『타임스』도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 미국에서 전개된 ‘홀로캐시(Holocash: 홀로코스트와 현금을 뜻하는 단어를 결합시킨 합성어)’ 캠페인 덕분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의 배상금뿐만 아니라 과거 유대인들이 맡겼던 스위스 은행 예금과 동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의 재산도 유대인 단체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핀켈슈타인은 “최근 들어 홀로코스트 산업은 노골적인 갈취자로 나서고 있다. 생존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유대인 세계를 대표한다는 취지로 홀로코스트 산업은 홀로코스트 시대의 유럽 전역의 유대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게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주 요인이 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갈취’한 돈은 진짜 피해자들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부유한 유대인 단체들의 금고 속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핀켈슈타인은 위셀과 쌍벽을 이루는 홀로코스트 이론가 다니엘 요나 골드하겐이 96년에 출간한 『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인들』을 전형적인 홀로코스트 이론으로 평가했다. 이 책은 독일인의 병리 현상인 ‘제거주의적’ 반(反)유대주의에서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찾았다. 즉, 모든 독일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특성을 잘 읽은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핀켈스타인은 전체주의적 지배가 독일인들을 타락시킨 것이지 독일인들이 원래 그런 건 아니라는 반격을 가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들의 무관심은 전쟁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병사들에게도 책임을 묻긴 어려우며 모든 책임은 나치의 관료 체제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대량학살 사례를 열거함으로써 유대인 학살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주장까지 폈지만, 이는 인류 역사 이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종류의 대량학살은 없었다는 다른 학자들의 반격에 부딪혔다.
이즈음 독일에서도 ‘홀로코스트 신성화’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98년 10월 독일서적출판협회가 주는 평화상의 수상자인 독일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스스로 좌익을 표방했던 마르틴 발저의 수상 연설은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도덕적 몽둥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좌익 지식인들’과 ‘유대인 학살의 참상을 너무 자주 화면에 등장시켜 시청자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대중매체’를 비판하면서, 이런 지나친 여론화는 개인적 반성의 공간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끔찍한 사진과 영상들을 도대체 얼마나 자주 보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발저는 “아우슈비츠가 부당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고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예를 들면 독일이 통일되기 전 내가 존경하는 독일 지식인들은 아우슈비츠를 만든 우리나라가 분단된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해도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들은 두 가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아우슈비츠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아우슈비츠는 상대방을 침묵시키기 위한 논쟁거리로 이용되는 일이 많다.”
발저의 이런 항변에 대해 독일 유대인 사회 지도자 이그나츠 부비스는 발저를 “극우세력을 지원하는 ‘지적 방화범’”이라고 비난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핀켈슈타인의 주장에 뜨거운 논란이 뒤따르고 있긴 하나, 재미 유대인 엘리트들의 막강한 재력과 권력, 그리고 그 후원을 받은 탁월한 여론관리술에 의해 홀로코스트 신성화의 탄생과 주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다만 600만 명이라는 가공할 대량학살 앞에서 홀로코스트 신성화를 비판하는 핀켈슈타인의 ‘순결주의’가 좀 불편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즉,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억압을 받으며 터득한 생존술의 연장선상에서 홀로코스트를 대한 결과로 비굴·기회주의·탐욕 등이 나타났다면, 그것들에 대한 비판은 ‘분노’보다는 ‘비애’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