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제대 후까지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가던 술집은 단연 시장통 상주식당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상주식당의 감자탕이 천하일품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소짜 7,000원짜리 감자탕을 시키고 1,500원짜리 소주 2병을 마시면
돈 만 원에 누구하고도 친해질 수 있었지요.
주로 백수생활을 하거나 학생들이 제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모두들 세상에 불만이 많은 족속들이었습니다.
경재 형과도 한두 번 앉았지만 밥만 먹었던 것 같고, 붕규 형은 술사달라고 졸라대는 저를 따라 몇 번 들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만고만한 선후배들. 아마 훈범이 가장 많이 내 앞에 마른 몸을 앉혀놓고 있었을 겁니다.
그 측은했던 몸매여!
지금 훈범이완 완전 다르죠.
당시 훈범은 저랑 목욕탕 가는 걸 제일 싫어했지요. 자기가 손해라고.
제대 후엔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술값이 떨어지면 불러내는 몇몇 동지가 생겼는데, 어느날 그녀와 훈범이 자주 사라졌고, 지금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는데, 변한 건 별로 없어 보이더군요. 참 무섭게 지겨운 커플이지요. 아, 그리고 임자의 친구였던 현정. 그리고 지금은 비구니가 된 언니도 자주 술값을 내놓고 갔습니다.
남원에서 학교를 다니다 그리워서 그집을 다시 찾았는데, 그새 전라도 음식에 입이 익었는지, 세상에 그렇게 느끼하고 싱거울 수 없었던 그 집의 감자탕.
아무래도 그 집 감자탕이 맛있었던 이유는 앞자리의 사람들 때문인 듯.... 암튼 제가 유일하게 외상을 할 수 있었던 술집.
간혹 붕규 형의 호출을 받으면 그 앞에 있는 식육식당에 안착하기도 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불판에 올려놓고 숨 몇 번 쉴 때마다 새 소주잔이 날아오는 장소였지요.
술집에서 붕규 형이 가장 잘 하는 말은,
"묵어라."
"와 안 묵노."
"쫙 한잔 해봐."
"쥑이네."
대구식육식당에만 가면 붕규 형 친구들 또는 선후배들이 꼭 나타났고, 항상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게중엔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난 듯 인사를 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집 사장님이었지요.
이건, 경재 형님과 혜란 형수님께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한동안 다살림을 지킬 땐,
전통찻집 다살림이 11시에 문을 닫으면, 민속주점으로 바뀌었지요.
물론 거기에도 지독한 부부의 처녀 총각적 풍경이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다살림 민속주점의 단골 술꾼은 성현주였습니다.
한없이 슬픈 얼굴로 다가와서
"형님, 0000해서 괴로워요."
하면서 토해놓던 내용물들.... 생각해보면 제 비위가 상당했지요. 아니, 아마 술이 취해서 그것들을 다 치울 수 있었을 겁니다.
"000해서"는 여기가 열린 공간인 관계로 밝힐 수가 없네요. 곧 장가도 갈 것 같은데...
더러 강신훈도 애용했고, 지금은 낯선 바닥을 헤매일 수많은 후배들과 사랑이 그곳을 거쳐간 곳.
그 즈음 생활패턴이 조금 바뀌었는데, 훈범과 나였던 단촐한 우리 또래에게 아낌없이 배풀었던 훈범의 그녀가 물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겁니다. 때로는 그녀의 친구(현정)까지 와서 물주 역활을 도왔으니.
그래서 더러는 호프집도 가고,
12시면 강변이나, 추우면 여관을 잡아놓고 술을 마시기도 했어요.
여관? 참 궁금한 장소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술집이 12시에 문을 닫았거든요.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왜 훈범과 그녀가 나를 옷장에 들어가서 자라고 했는지를.....
우리들의 강변!
맥주 두 병 사들고 강둑에 앉아 건너편 가로등 불빛이 강물을 타고, 마치 비늘처럼 흘러내리던 것을 바라봤던 곳.
우리가 강변에서 쏟아놨던 이야기들은 지금쯤 흘러 바다로 갔거나 구름이 되었겠지요.
그런 주요 거점 외에도 어지간한 술집들은 다 섭렵했던 것 같습니다.
거창교회 위쪽에 있는 무슨 호프집.
붕규 형과 효우 형이 88고속도로 나가는 방향에 새로 생겼다던, 정원이 이쁜 술집으로 불러내기도 했고,
서경병원 가는 방향의 어떤 선배가 한다던 밥집(우리에겐 술집),
옛 다살림 뒤쪽, 작은 횟집이었던가, 효우 형과 대선에 대해 밤새 이야기하던 집.
농협거창지부 아래쪽 골목 들머리에 있는 실내포장 같은, 조개구이가 나왔던가, 암튼 그집.
최근엔 임숙네 집앞에 있는 호프집까지....
그러나 딱 한 번 가서 진하게 취했던 용추폭포를 빼놓을 수가 없죠.
밤새 떨어지는 폭포소리.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들앉은 내게 경재 형이랑 학도 형이랑 요주의 인물들이 찾아왔죠.
"짜쓱, 와 여 와 있노"
하던 학도 형은 텐트 안에서 김추자부터 김민기까지 아련한 노래를 불렀고,
붕규 형은 나무에 부딪치고는 나한테 역정을 냈죠,
가끔, 머리 위에 손을 갖다대고
"그때 별이 한 무디기 여게 와 있는기라마."하고 이야기하는 형.
소주 대병을 통째로 마시고 폭포수에 마음을 내줬던 때......... 그 가을 용추폭포.
가만히 누워 있으면, 생각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술잔을 받고 마음만 흥건하게 취하곤 합니다. 그 술집, 술자리들 생각....
첫댓글 밭 .....그때는 참좋은 시기였다 .. 한편으로는 추억은 아름답고 그립고 또 눈물 날정도로 다시 그자리로 돌리고 싶을때가 있다 우리처럼 좋은 추억이라면 말이다 너도 나이가 좀 먹었나보다 예생각을하니 말이다 . 비가오니 메기매운탕에 반 얼어있는 소주 한잔 쫙 하면 얼마나 좋울까 ........
여관을 잡아 밤새 술마시던 그때쯤.....승진이와 또 누군가와 술을 마시다 12시가 넘어 여관을 잡은 적이 있었다.....여관비가 모자라서 나으 친구 복자(가명)를 불렀더니 ......돈을 들고와서는 "너한테 실망했어" 그러면서 무쟈기 화를 내는 것이었다.
나는 복자가 그렇게 화를 내야하는 이유를 그때는 잘 몰랐다......난 단지 술을 좀더 마시고 싶었을 뿐이었는데....^^;;......지금은 복자도 그때 일을 이야기하면 함께 웃는다...그때의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으므로..
그때 오산과 내나이가 지금 너보다도 더 적은 나이였는데 그때 무슨말을 했는진 몰라도 지금 생각하니 괜히 쪽발리네
그 어록들을 다 정리했다면 참 볼만했을 텐데.. 아쉽군요. 그뿐이겠습니까? 경재 형도 처음 봤을 때 지금의 제 나이였으니. 강산이 바뀐다는 10년! 그 속에 세상도 마음도 많이 흘러온 것 같습니다. 다 기억할 수 없어도 분명한 것은 그때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제 뼈와 살 어딘가에 아직도 박혀 있다는 것일 겁니다.
바람밭 , 그거 빨리 빼내라, 고름이다
헉... 오래된 고름에 대해서 제가 잘 알지요. 내가 군대 있을 때 고래를 잡았는데, 글쎄 거기가 뭔 구슬 넣어 놓은 것처럼 탱글탱글 하더니, 무려 8년 뒤에 붓기도 하고 해서 병원 갔더마는, 고름이 안에서 안 빠지고 뭉친 거라고.. 그래서 고래를 두 번 잡았지요. 그 고름이 곳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