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눈을 뜨자 엎드린 채 창밖을 바라보며 외쳤답니다.
"오늘은 내가 이 화순을 넘어와서 가장 평안한 날이다."
지난 여름부터 올 가을까지 행사를 목표로 세우고 부수고 깎고 조여서
끌고 보듬고 지고 이고 메고 다니던 그 모든 수고를 포기한 날이며
호미며 삽이며 쇠스랑 도끼 망치 톱같은 온갖 공구들을 다 잊는 날이기도 하다는!!
남겨둔 가회의 아까운 장면들을 다시 꺼내어 카페에 나왔습니다.
간밤에 태운 것들이 거실 바닥이며 안방 공간을 훈훈하게 데워 여간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일 뒹굴 생각으로 또 화목보일러 화실에
갤러리 짓고 남은 나무 똥가리들을 밀어 넣었죠.
잊지 못할 그래서 두고두고 추억이 될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찍혀주어서 감사합니다.
휴일에 비가 내리니 쫓기던 일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뒷터에서 콩단도 잘라와야 하고 나무도 옮겨 심고 땔감도 나르고
또 자잘한 것들에 쫓겨 종일 허리가 굽어있었을 것을...!
이런 날이 오리라 믿었지요.
더욱이 혼자라면 오늘은 저 천태산 개천산을 향해 좌복을 틀고 앉았겠습니다
죽비 하나 단단히 벼러두고 생각이 끊어질 수도 있는 저 성성적적한 세계를 향해 허리를 폈겠습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시끌덤벙하고 부산한 주방 때문에 글렀습니다.
그제 왔다 어제 다녀 간 아들놈 음식장만하느라 내 밥도 못 얻어먹다가 닁큼 혼자 떼웠어요.
된장이 그럭저럭 잘 만들어져 이럴 때 무밭에서 잎사귀 몇 채반에 올려놓아 아귀쌈을 해도 해야겠지만
딸애에게 심부름 보내는 시간에 맞추기가 쉽지가 않은 모양인데 그런 마누라더러
국이 짭네 찬이 싱겁네를 함부로 해야할 말이겠습니까?
딸은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어딜 봐도 참 이쁜데 짜임새 있는 등신의 분할비와
걀상하여 여성스러운 곡선미 하며 무얼 입어도 잘 어울리는 미대출신의 맵시 맞는데
나갈 때마다 지 엄마에게 요리조리 돌면서 '어쩌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어미와 딸의 그것은 늘 내가 잘 모르는 언어와 기호로 그 상황을 웃거나 끄덕이거나 고쳐주어서
제 바라보기 참 행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닌가봐요. 바빠서 아빠 밥도 못 차릴 정도인데 또
엉덩이 맵시를 물었는지 윗옷과 아래가 잘 노는 지를 물었는지 어쩄는지 지 엄마가 빽 소리를 지릅니다.
"암시랑도 않구만 자꾸 물어봐싼다"는 거.
그 틈에도 날더러 어제 사온 고로깨 맛은 좋습디여? 하고 묻습니다.
도통 과자며 빵을 잘 안 사는 우리집 문화에, 딸은 늘 그 빈 구석을 채워줍니다.
그런 딸을 내가 간간이 나무라며 몸에 좋은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여 억지로 귓불에 대줍니다.
일상은 늘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소한 것들이 모여 커다란 사건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면서
커다란 것들만을 따라 이 소소한 것들을 놓치는 일도 허다하단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이 모든 일상이 지난 2-3년 속에 다 중요하였습니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그림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행복의 밑그림이며 보물지도이고 본디말 같은 삶의 언어입니다.
이것들이 다 모였을 때 떡국을 끓이거나 핫케이크를 지져 먹거나 뭔 만두피를 말기를 좋아하죠.
그도 아니 되면 데리고 나가 아무 외식이라도 합니다. 차를 타기 전부터 묻다가
차 안에서도 또 물어 함께 먹을 메뉴를 고민고민해요.
아들이 그놈의 공부만 하느라 여자친구도 못 사귀면 어쩔까...
딸이 돈 번다고 돌아댕기다 혼기를 놓치면 어쩔까...
아닌 걱정거리가 이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기분을 타고 오목가슴께를 치고 들어옵니다.
그젯밤은 아들이 조금 싱글벙글하여 물으니 근래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생겼나 보고,
어젯밤은 딸이 누구와 톡을 하여 그걸로 지 엄마랑 시시덕거리는 걸 보니 제가 내심 반갑기도 하였어요.
차암 나는 고등학교 때 이미 까져서 공부는 모르고 연애질만 가득히 행복하였는데,
이것들은 어느 행성에서 뚝 떨어져 나무에 대롱거리는 별인지 바라보기 아슬아슬해요.
잘 만나야 하는 것이 먼저이긴 하죠.
그런데 무엇이 잘 만나는 것인지는 어른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고
가격도 달라서 아무 간섭을 않는데, 적어도 전 애들 연애는 걱정해본 적이 없었죠.
애들 혼기가 차니 이래저래 잡다한 생각이 밀려들어 머리가 앞산의 비구름처럼 자욱합니다.
이 한가로움도 결코 길게 가진 않겠군...
방금 이장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내년 비료 신청해야 하는디 얼마나 신청할까요?
ㅎ 시골에 오니 이런 전화가 반갑고 어렵고 귀하고 고맙기만 합니다...
오른쪽 빨간 티의 이장님은 전에 1년 동안 도암중에서 만났다고는 하나
이런 없던 변화에 적응하시느라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실까. 암튼 나도 뭘 잘 해야쓰겄는디,,,
첫댓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저만 없군요.
아흑-,.-;; 먼지만도 못한 인생이라니...
윽, 갑자기 놀랐넹. 이 일을 위해 남몰래 애쓰신 분들은 거실에서 설거지를하거나 음식배달을 준비하거나 안내하거나 대기하거나 아님 양순씨처럼 사진을 찍거나죠. 그러고보니 한 화면 떼어 국장님을 대서특필해야 할 타이틀을 놓친 거에요. 얼굴을 내는 사회자나 소개 받은 손을 제외하고는 제가 다 아쉬워요. 두 시간 동안 한 마디도 없이 보냈다가 인사도 변변찮게 떠났으니 그냥 막걸리 파티만도 못했나봐요. 그러면 술병 한나 들고 메뚜기처럼 이 자리 저 자리 다니면서 한잔 걸치고 두 잔 붓고 석 잔 부르르 딸아드릴 것을! 미안해요 양순씨~ 태석아우랑 엊그제 집에서 한 잔 했으면 삼치가 참 좋아했을 것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