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 PD 의 페이스북 글에서 고 지정환 신부를 추모하는 글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2574586462586523
지정환 池正煥
원어이름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 Didier t'Serstevens
교구 전주교구
성직
사제서품 1958년 4월 27일
출생이름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 Didier t'Serstevens
출생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브뤼셀
선종 2019년 4월 13일 (87세)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안장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
국적 벨기에, 대한민국
교파 가톨릭
가족 3남 2녀 중 막내
지정환(池正煥, 본명: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네덜란드어: Didier t'Serstevens), 1931년 12월 5일 ~ 2019년 4월 13일)은 벨기에 출신의 대한민국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
생애[편집]
1959년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대한민국에 입국해 1961년 전라북도 부안성당에 부임, 3년간 간척지 100 헥타르를 조성해 농민에게 제공하는 등 가난한 농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1967년에는 전라북도 임실군에 국내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
다발성 경화증 치료를 위해 1981년 벨기에로 떠났다가 3년 뒤 귀국하여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 공동체 ‘무지개가족’을 만들었다. 2002년 치즈 산업을 일구고 장애인 복지에 힘쓴 공로로 호암상을 받았고 상금 1억원을 기반으로 2007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했다.
2004년에 천주교 사제에서 은퇴했고 2016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봉사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창성창본을 허락받으면서 임실 지씨(任實 池氏)의 시조가 되었다. 2019년 지정환 신부의 가족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전수했다.
학력[편집]
1950년 7월 브뤼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SAM(전교협조회) 입회
1952년 7월 루뱅 대학교 철학과 졸업
1954년 ~ 1958년 7월 루뱅 예수회 성 알베르토 신학교 졸업
정의가 환해질 때까지 지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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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옛날 일을 끌어와 오늘날에 빗대는 형식이었지만 2017년부터 우리 역사의 여러 인물들을 특정한 주제로 엮어서 이야기를 풀어 보는 것으로 바꾸었다. (곧 '딸에게 들려주는 한국사 인물전'으로 나올 예정 -깨알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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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우리를 도운 이방인들’이라는 챕터가 있다. 활동 중인 의병 사진을 거의 유일하게 찍었던 매킨지와 대한매일신문의 베델, 독립운동가들을 열정적으로 도왔던 후세 다쓰지와 독립운동가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 등을 얘기했는데 빼먹은 사람들이 많아 아쉽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지정환 신부님도 그 중의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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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서 신부가 되어 멀고 먼 나라 한국, 그것도 심심산골에 부임하여 임실 치즈의 대부가 됐던 그의 일생은 매스컴에 널리 소개돼 다시 말하면 중언부언이 될 것이다. 더하여 그분은 한국이 가장 살벌하고 참혹한 겨울 공화국이었을 때 우리에게 온기를 안겨 주었던 ‘우리가 된 이방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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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9일.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아홉 명의 생목숨이 사라지던 날. 그 날은 대법원의 사형 선고 다음 날이었다. 전날인 4월 8일 대법원장 민복기,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이완용과 사돈지간이던 민병석의 아들인 대법원장 민복기의 사형 선고는 모기 소리만큼이나 작았다고 한다. 꼴에 양심에는 찔려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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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약한 사형 선고 다음 날 가족들은 재심 청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려다가 사형이 집행됐다는 날벼락을 맞는다. 사형이 집행된 건 오늘날 독립공원이 된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당시 인혁당 사건 관련자 가족들과 함께 했던 문정현 신부의 증언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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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과 상의해 시신을 명동성당내 지하 성당에 안치하기로 하고 유족들과 함께 서대문구치소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박정권은 이들의 시신을 뒤로 빼돌려 화장했다. 겨우 송상진씨 시신만 확보했다. (여정남씨까지 두 구라는 말도 있다)” 그렇게 겨우 살려낸(?) 시신을 모시고 향한 곳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으로 시무하던 응암동 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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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대문 형무소에서 응암동으로 가는 길목의 녹번동 삼거리, 갑자기 경찰들이 나타난다. 크레인 등 중장비까지 동원한 수백 명의 대병력이었다. 그들은 영구차를 막아섰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끌어낸 뒤 관을 탈취한다. 시신들을 빼돌린 건 고문으로 엉망이 된 시신들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창자가 빠져나오고 열 손가락 손톱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니 이해(?)가 간다고나 할까. 이때 문정현 신부는 크레인에 올라가 절규하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다. 그분이 평생 다리가 불편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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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들마저 빼앗겼을 때 격노한 성직자들은 더 있었다. 시노트 신부는 경찰들에게 거세게 항의하다가 경찰들에게 사지가 들려 끌려 나왔다. 시노트 신부는 인터뷰에서 ‘감리교에서 나온 미국 여성’을 얘기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우리는 이 영구차를 빼앗기지 않겠어. 저들이 영구차를 탈취하도록 놔 두지 않겠어.” 영어였을까. 우리 말이었을까. 이윽고 시노트 신부 말대로 ‘전투’가 벌어졌다. 아버지의, 남편의 시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유가족들과 그들과 함께한 성직자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외국인들과 우악스런 한국 공권력과의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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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앞서 시신이 빼돌려졌던 서대문 구치소 뒷문에서도 일대 전투가 벌어졌던 것 같다. 그나마 성당으로 향하던 시신 외에는 모두 벽제 화장장으로 직행돼 뼛가루만 유족들에게 돌아왔는데 그 시신들을 싣고 나가는 트럭 밑에 기어들어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지정환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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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유족한테 고문한 자리를 안 보여주려고 트럭에 싣고 서대문 형무소 뒷문으로 나가는데 지 신부님이 그 트럭 앞바퀴 밑에 들어간 거예요. 못 간다….” (심상봉씨 인터뷰, KBS 전주 2019.4.14) 몸을 던져 항의하다가 개처럼 끌려나오고 두들겨 맞고 차 바퀴 밑에 들어가 사람 살려내라고,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 주라고, 이 사형은 범죄라고 절규하던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벽안의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은인이었고, 곧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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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년 뒤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지정환 신부는 임실에서 우유를 가득 싣고 광주로 향한다. 이미 광주의 피바람이 지나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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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갔을 땐 진압이 된 뒤였어요. 몸과 마음을 다친 그분들에게 달리 해드릴 게 없으니 우유라도 드리고 오고 싶었지요. 병원에 들어갔는데 외부인을 경계하며 공포와 원망에 가득 차 있던 그분들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어요.” (경향신문 2018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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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환 신부의 한국 이름을 지어 준 것은 한국인 신부였고 ‘지’씨는 지정환 신부의 벨기에 이름 ‘디디에’에서 따온 것인데 이름 정환은 ‘정의가 환해진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정환 신부는 자신을 막아서는 경찰들에게 이렇게 일갈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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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지정환인지 알아요? 정의가 환해질때까지 지랄한다고 지정환이야.” 그러고 나니 지씨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미안해지더라는 벨기에계 한국인 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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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일대기가 여러 매체에 소개됐으니 한 번씩 읽어 보시면 좋겠다. 우리 역사는 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으나 그 가운데 우리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보다도 더 우리의 정의를 갈망했던 우리가 된 이방인들이 있었다. 지정환 신부의 명복을 빈다. 정의가 환해졌노라 자신할 수 없는 세월이지만 그래도 당신같은 분이 계셨기에 오늘날 이만큼이나 우리가 환해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