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린 시조 귀화 광동진씨(廣東陳氏) 진영소(陳泳素)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노량해전 열흘 전, 진린 도독이 적극적으로 왜적을 공격하자고 제안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진린이 출병하기 전 요동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선조가 보낸 선물을 보고 '아직 전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선물을 받겠느냐'며 돌려보낸 적도 있고, 한양을 떠난 지 한 달 후 선조가 선물을 보냈는데, 돗자리와 종이만 받고 많은 선물을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있으니 뇌물로 얼룩진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영화에서 진린은 자기보다 두살 어린 이순신 장군에게 '노야(老爺)'라는 호칭을 쓴다. '야'(爺)는 윗사람에게만 쓰는 극존칭이다. 영화 노량에서 만날 수 있듯이 진린은 백절불굴의 이순신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좋아한 것이 분명하다
진린은 함께싸운 노량해전 이순신의 전사소식에 몸을 던져 통곡할 정도로 크게 슬퍼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준 것을 사례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은 "이순신의 죽음을 듣자 진린은 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함께 일할 이가 없구나'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의 야사로 유명한 '제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따르면 진린이 한양으로 향하던 중 이순신 장군의 고향에 들러 곡하고 그 아내와 아들을 조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진린은 명나라로 돌아가서도 많은 공을 세운다. 그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진구경의 아들 진영소(陳泳素)는 명나라가 과거 1644년에 멸망하고 얼마 뒤에 할아버지 진린의 유언에 따라 가족들을 데리고 조선에 귀화했다. 진영소의 후손들은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 광동을 본관으로 하고, 진린을 시조로 모시는 광동진씨(廣東陳氏) 집성촌을 이뤘다. 진린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