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의 이순신' 최무선 화포 무장한 전함 개발 왜선 300척 섬멸시켜
화약제조 첫 건의 땐 사기꾼 취급받아 아들도 무기 전문가, 태종 때 대활약
최무선(崔茂宣·?~1395년)은 영주(永州·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사람으로 일찍부터 무관(武官)의 길을 걸었다. 그가 살았던 고려 말은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무장으로서 그의 경력도 왜구 퇴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최무선은 일찍부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구를 제어하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는데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의 아버지 최동순은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냈다. 광흥창이란 관리들의 녹봉을 주관하는 기관이다. 전국에서 쌀 등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왜구로부터 큰 피해를 입다 보니 최무선은 어려서부터 왜구 퇴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은 원나라에서 고려를 찾는 상인들 중에 화약을 아는 이를 찾아 동분서주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이원(李元)이라는 중국사람을 만나 화약 만드는 법을 알게 된다. 이원을 자기 집에 데려가 수십일 동안 극진히 대접한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이때가 우왕 2년(1376년)이었다. 그는 즉각 화약제조를 조정에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사기꾼 취급을 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는 최무선의 계속된 건의에 감동한 조정은 이듬해 화약 및 화기제작을 담당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책임자인 제조(提調)로 임명했다. 이미 준비된 화포기술자였던 최무선은 얼마 안 가서 대장군포(大將軍砲) 이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질려포(�u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 다양한 포와 화약을 이용한 화살 등을 선보였다. 그 중 주화(走火·달리는 불)는 로켓포의 뿌리로 간주된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최무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각종 포를 배에 장착한 전함(戰艦)의 제도까지 만들어냈다.
우왕 6년(1380년) 가을 500여척을 동원한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심덕부를 도원수로 하고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직접 화포와 전함을 실험토록 했다. 전함 100여척의 고려수군은 금강 하구에 집결해 있던 왜선 300여척을 일거에 화포로 섬멸시켰다. 살아서 육지로 도망친 왜구들은 병마도원수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사들에게 지리산 자락 운봉에서 전멸당했다. 그것이 바로 이성계가 전라도 남원에서 거둔 황산대첩이다. 이후 왜구의 침략은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다. 이때의 공으로 최무선은 영성군(永城君)에 봉해진다. 최무선은 '고려의 이순신'이었다.
여말선초의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 최무선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개국공신에는 들지 못했지만 조선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그를 명예직 참찬(參贊·정2품)에 제수하고 139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성계가 "깊이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국세력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나 보인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당시 이성계세력과 최무선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최무선이 공을 들였던 화통도감이 1389년(창왕원년) 이성계의 핵심측근인 대사헌 조준의 상소에 의해 폐지됐다는 것이다. 논리는 임시기구인 화통도감을 군기시(軍器寺)에 귀속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 이성계가 전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준의 상소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도감 폐지로 인해 최무선의 실망감은 컸을 것이다.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난 최무선은 초야에 묻혀 지내며 못다 한 화약 및 화기 연구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은 죽으면서 부인에게 화약제조법을 기록한 책을 건네주며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고 당부했다.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1380년~1443년)은 실제로 화약과 화포에 관한 비법을 익혀 1400년 태종 즉위와 함께 군기시에 특채된다. 아버지를 닮았던지 최해산도 신무기 개발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태종은 또 최무선에게는 우의정 및 영성부원군으로 추증했다.
최해산이 군기시에 들어갔을 때 조선의 화약은 4근4냥, 화기 200여기에 불과했으나 태종이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한 세종 1년 화약 6900여근에 화기 1만3000여기로 늘어났다. 불과 2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최해산이 당대 실세 이숙번을 도와 이룩한 성과였다. 게다가 화기개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종으로부터도 깊은 총애를 받아 그의 관직은 병조참판을 거쳐 중추부 동지사(종2품)에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