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Concerto No.5 in E flat major op.73 "Emperor" 00:00 1. Allegro 20:08 2. Adagio un poco mosso 28:13 3. Rondo. Allegro Hélène Grimaud Vladimir Jurowski Staatskapelle Dresden Recording:December,2006,Dresden
나폴레옹의 빈 함락 시기에 작곡된 이 곡은 베토벤의 시대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 wikipedia>
1809년 베토벤이 38세 때의 작품으로 그의 원숙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이 곡은 루돌프 공에게 헌정되었다. 초연은 리이프찌히에서 1811년 11월 28일 이루어졌다.
초연 당시의 독주자는 당시 라이프찌히 파울리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시나이더 였으며
성공적인 연주였다. 하지만 비엔나에서 그 이듬해 체르니가 연주했을때는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황제"란 이름은 곡상이 장대하고 숭고하며 그 구성이 호탕함에 비추어 마치 왕의 품격이 있다하여
그같은 별명으로 통한다. 말하자면 피아노협주곡에서 최고라는 뜻에서 그같이 불리워 졌다.
오케스트라의 취급이 때로는 그 구성이 웅장하여 마치 교향곡을 연상케하는 부분도 있다.
독주에 있어서도 마지막까지 관현악을 상대로 자신의 표현 수단을 피력했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는 베토벤의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의 최후를 장식하는 곡으로 작풍은
원숙하고, 구성은 웅대하며 내용은 장엄한 최대의 걸작이다. 1809년(38세)의 작품이다.
베토벤은 35세에서 40세에 걸친 5년동안에 비참한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하였다.
그러나 강직했던 그는 일단 정착한 빈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그 전쟁이란 1805년과 1809년 2회에 걸친 나폴레옹 군과의 싸움으로서 두 번 다 오스트리아
군은 참패했고, 빈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1809년 전쟁 때에는 약 20만의
오스트리아군이 명장 칼 대공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웠으나, "대육군"을 자랑하는 나폴레옹군의
교묘한 작전과 기동력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5월 8일에 빈의 쇤브룬에 들어왔고, 13일에는 입성식이 거행되었다.
하이든이 빈에서 77세의 생애를 마친것은 그로부터 18일 후인 5월 31일의 일이었다.
프랑스 장교와 길에서 엇갈릴 때,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만약 전술을 대위법만큼 잘 알고 있었다면, 한 번 혼을 내줬을텐데 말이야"
이런 혼란 속에서 "황제"는 완성되었다. "교향곡 제5번", "제6번"을 완성한 다음 해이니만큼,
베토벤의 왕성한 창작력은 설사 육체나 정신이 흔들리기는했지만, 결코 그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뒤에도 신변의 사정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베토벤은
점점 더 마음 깊숙이 정신을 가라앉히게 되며 "고별" 소나타등을 써서 기술적 원숙에서
정신적 성숙으로 일단 전진한다. 이른바 후기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협주곡은 그런 점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명인적 연주 기교의 정점에 도달
하여 압도적 역감을 보였던 시기, 그러면서도 내일에의 불안이 항상 존재했던 시기의 작품이다.
외관이 크고 호방하며, 기교에 있어서 치밀한 것들이 높은 경지에서 균형이 잡혀 극적인 전개로서 효과를 돋우고 있다.
이 곡의 초연은 1811년 11월 28일 라이프찌히에서 행해졌다. 그 때의 피아노 연주자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시나이더(J. F. Schneider)였는데 매우 호평이었다. 빈에서는 이듬해 2월 15일에
피아노 교과서로 유명한 체르니의 독주로 연주되었는데, 그 날의 평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제4번"과 마찬가지로 베토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연주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곡의 폭발적이고 중후한 울림이 당시의 청중에게는
저항감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곡은 구성상 몇가지 특색이 있다.
앞의 "제1번"에서 독주 피아노로서 시작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바 있는 베토벤은 여기서는 제2악장 서두를 독주 피아노의 카덴짜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아주 호화로운 인상을 준다. 또 보통은 독주자의 즉흥에 맡기는 카덴짜를
전체의 통일을 위해 스스로 적어 넣고 있다.
그 밖에 제2악장에서 쉬지 않고, 제3악장으로 넘어가는 등 대담한 수법은
그 뛰어난 내용과 더불어 훌륭히 결실되어 있다.
Zimerman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 Allegro
Zimerman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I Adagio
Zimerman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II Rondo
I. Allegro (20:31)
소나타 형식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화음이 베토벤 특유의 고뇌와 완벽함으로 웅장하고
근엄하게 서주부가 시작된다. 관현악은 독주 악기보다 비중이 크고 피아노
연주는 치밀하며 섬세하게, 화려한 분산 화음으로 서정적이며카덴차 풍으로 연주된다. 멜로디도 밝고 명쾌하며 참으로 아름답다.
II. Adagio un poco mosso (7:24)
이 악장은 이 곡의 가장 뛰어난 악장으로 마음을
흔드는 황홀경, 절정에 이른 절묘(絶妙)한 아름다움과 피아노의 느리게 연주되는 부분은 우아한 아름다움이 어느 곡과도 비교할 수없는 걸작이다. 엄숙한 종교적인 색채와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으로
박진감 있게 연주,침통하리만큼애절하며 또한 밝고 감동적인 악장이다.
II. Rondo Allegro
론도 형식. 피아노 연주 주법의 극치와 색채의 아름다움과 웅장한 기상이 힘차게약동하며, 경쾌하고 밝고 호쾌한 분위기의 흥겨운 악장으로 관현악 연주의 정수(精髓)를 느끼게 한다.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이 작곡된 것은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아 포성이 빈을 뒤흔들었던 무렵으로 1809년 2월부터 10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곡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유달리 남성적이고 스케일이 크고 호탕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와 같은 사회정세도 일부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곡의 황제라는 호칭은 나폴레옹과 결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나폴레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황제란 이름은 이 곡의 곡상이 장대하고 숭고하며 그 구성이 호화롭고 위풍당당하여 마치 황제의 품격을 연상케 한다는 것과, 이 곡의 규모나 내용 모두가 고금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최고라는 뜻으로, 후세 사람들이 황제 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셀제로 이 곡의 제1악장의 당당한 전개를 들어보면 '황제'라는 호칭의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곡은 모두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호탕한 제1악장에 이어진 명상적인 제2악장과 활기찬 제3악장이 모두 음악적인 맛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베토벤은 피아니스트로서도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었으므로 피아노 협주곡 제4번까지는 자신의 연주로 첫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이 곡은 제자인 체르니가 담당했는데, 이 무렵에 베토벤의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어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사를 망라하여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여러 작곡가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작품들 만큼 작곡 패턴 역시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가령 바흐나 슈베르트 등은 내용 면에서도 뛰어나지만 그 방대한 양의 작품 수에서 우선 놀라게 된다. 반면에 무소르그스키나 뒤파르크 같은 작곡가들은 소수의 남아있는 걸작들로 우리에게 그들의 이름을 기억시켜주고 있다. 또 샘솟는 영감으로 삽시간에 작품을 완성해 낸 모차르트, 로시니 등이 있었는가 하면 브람스 같은 장고파 작곡가들도 적지 않았던 것을 보면 위대한 음악가가 되는 길은 하나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에게서 기어코 아주 중요한 공통점을 하나 발견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작품이 각자가 걸어온 인생 역정의 과정과 발자취를 어떤 방법으로든 투사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악성 베토벤이 남긴 많은 작품들은 그의 숱한 고난과 그 역경을 뛰어넘는 더욱 강한 의지로 인해 ‘운명아 길을 비켜라’ 라는 식의 슬로건으로 지금껏 대변해 오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에게 닥쳐온 여러 시련들이 존재했기에 그의 작품이 뜨거운 피가 흐르고 살아있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는 강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도 한시도 바람 잘 날 없었던 베토벤의 인생의 한 고비에서 씌어졌다. 1809년 나폴레옹 군은 18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비엔나를 침공했고 도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베토벤의 강력한 후원자이며 학생이기도 했던 루돌프 대공은 피난을 떠났고, 77세의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것도 이 해 5월이었다. 그 와중에도 베토벤은 외롭게 비엔나에 머물면서 창작에 열중했는데, 이 때 테어난 작품이 이 피아노 협주곡 ‘황제’와 가곡 <피델리오>, 그리고 루돌프 대공과의 이별과 재회를 묘사한 피아노 소나타 ‘고별’ 등이다.
‘황제’ 협주곡은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유럽 사회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다시 말해 낭만과 보수, 개혁과 수구의 중간에서 결코 그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던 작곡가 베토벤의 모습을 극명히 나타내준다.
제 4번 G Major아 비교해 더욱 대담해진 악상과 확대된 형식, 카덴차의 파격적인 생략 등은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그의 예술이 겉과 속, 즉 형식과 내용이 혼연 일치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작품 전체를 흐르는 그 당당한 승리자적 위용은, 가히 협주곡의 황제라 부를 만 한데,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 정작 베토벤은 이 표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곡의 배경 등에서 떠오르는 황제는 아무래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인데 베토벤은 그가 황제에 등극한 뒤부터 그를 폭군이라 부르며 경멸했던 바 있다.
또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출신은 아니었지만 “내가 병법에 대해 대위법 만큼만 알고 있었더라면 오스트리아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지고 있는 바, 고집스럽고 타협을 모르던 베토벤의 남자다운 기백이 느껴지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베토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적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독주 피아노의 솟구쳐 오르는 듯한 본산화음으로 시작하는 제 1악장의 첫머리는 고금의 협주곡 가운데 가장 위엄있는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긴 도입부에 실려 등장하는 제 1주제나 가볍고 명쾌한 제 2주제의 대조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관례이던 1악장 말미의 카덴차가 생략된 것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피아노의 화려함은 카덴차가 없이도 충분히 발휘되며, 반음계적인 진행과 당시로서는 심한 도약음 등으로 흥미로운 전개를 보인다.
제 2악장은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으로, 지금까지 베토벤이 만들었던 완서 악장 중 가장 가요성이 풍부한 악장이다. 현악기군의 피치카토와 함께 등장하는 피아노의 변주가 보석과 같이 아름답다.
제 3악장의 오프닝은 이미 2악장의 끝부분에서 예견되었으며, 쉬지않고 종악장으로 이어진다. 독주 피아노이 상쾌하고 박력있는 주제는 여러 번 조성을 바꿔 가면서 잔잔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반복되는데 이런 큰 스케일을 담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의 숨은 역량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 마지막 코다 직전에 등장하는 팀파니 만의 휴지부 역시 거인적인 규모와 스케일을 가진 이 협주곡의 엔딩을 돋보이게 하는 필요적절한 대목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