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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과 잇단 사고로 미국 야구의 꿈을 접어야했던 정석은 이제 사업가로 변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
-미국 진출 당시의 상황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1997년 대표 선수 생활을 할 때 여러 팀에서 러브콜이 들어와.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던 다저스와 계약했다. 군인 신분이라 접촉하는 것 등 여러 가지 힘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잘 도와줄 수 있는 스티브 김(당시 박찬호 에이전트)에게 일임해서 다저스 입단이 성사됐다..
-당시 상무 소속이었는데 어떤 대회에서 기량을 발휘해 메이저리그에 스카우트가 됐나.
▶96년 올림픽에서 꼴찌인가 하는 바람에 97년에는 우리가 세계선수권대회에 못 나갔다. 그러나 97년 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고, 또 가을에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국제 선수권 대회가 오사카돔에서 있었는데 그 때 우리가 쿠바와 일본을 꺾고 1차 대회 우승을 했었다. 그때 아주 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쿠바의 콘트레라스와 일본의 우에하라 등을 보러 왔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제일 잘했다.
-당시 성적은.
▶2승인가 했는데 일본과 결승전에서 승리 투수가 됐다. 우에하라와 붙어서 승리했었다.
-스카우트들이 커브를 많이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내가 봐도 좋았다. 팔각도가 높은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아주 위력이 있었다. 그 당시는 체인지업을 몰랐다. 그래서 직구와 커브볼 그리고 패스트볼을 변형해서 던졌는데 싱커로 알았던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그 투심이 일본을 꺾은 원동력이었다는데.
▶당시 일본팀에는 후쿠도메, 아베 등 왼손 타자들이 아주 많았다. 타자들이 오른쪽 다리를 들고 배트를 세운 다음에 나가면서 공을 때렸다, 특히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해 아주 힘들었다. 그런데 투심이 왼손 타자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니까 꼼짝을 못했다.
그 전에 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우에하라와 붙어 일본을 또 꺾었다.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거푸 꺾어 일본 킬러라고 불렸다.
그런데 호텔에서 일본 선수들을 만나니 내 팔을 만져보면서 이럴게 얇은 팔로 그런 공을 어떻게 던지느냐며 신기해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는 오릭스, 긴테츠 등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접촉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브레이브스와 마리너스, 다저스 등이 연락을 해왔다.
-대학을 마치고 프로에 가지 않았는데.
▶동국대를 나왔는데 사실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 2차에 겨우 지명이 됐다. 그렇지만 당시까지 나는 성숙하지 못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계약금 조금 받고 프로에 가서 운동하고 남들 다 그렇듯이 군대 문제도 해결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정강희씨)가 나를 부르셨다. 야구 선수로서 어느 정도까지 할지 모르지만 인생을 살면서 순리를 역행하면 언젠가는 후회한다. 그러니까 일단 상무에 테스트를 받아라. 거기서 떨어지면 현역으로 갈 수는 없으니 그때 프로를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테스트를 받았는데 당시 1순위가 국가대표, 2순위가 상비군, 그리고 3순위가 대학 선수들일 정도로 정말 들어가기 힘든 곳이 상무팀이었다. 나는 국가대표도 아니고 그저 대학 선수였는데 열심히 테스트를 받아 다행히 상무팀에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군부대보단 프로로 가고 싶은 당연히 마음도 있었을텐데.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나를 지명한 프로팀과 아버님이 뒤늦게 딱 한번 만나 입단 협상을 했다. 그런데 한 5분 만에 아버님이 나오셨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아버님께서 ‘봐라, 이게 너의 현재 모습이다. 넌 3류 선수이고, 그래서 아버지도 3류 아버지다. 아버지가 너를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지만 현실은 그렇다. 내가 1류 아버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아들만큼은 1류 선수가 되면 좋겠다. 상무에서 더 열심히 하고 프로에 갈 때 다시 한번 평가를 받아라. 최선을 다해 능력을 발휘해봐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가 95년말 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각오를 다졌다. 군대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야구 선수로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다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왼쪽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성공'이라는 두 글자를 쓴 헝겊을 품에 안고 입대했다.
-상무에 가서는 야구가 잘 풀렸나.
▶그렇진 않다. 워낙 대표급의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 나는 주전자(후보)였다. 당시 상무는 아마 최강팀이었다. 현대도 프로로 가기전이라 정말 강했고 실업팀들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난 무조건 야구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했다. 남들보다 한두 시간 먼저 나가서 뛰고 훈련하고, 또 단체 훈련이 끝나면 남아서 혼자 훈련을 했다. 남들은 대학 무명 선수이던 내가 발악하는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더라. 그리고 노력을 하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미래도 바뀐다고 했다. 정말 많이 던지고 많이 달렸다. 처음에는 달리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진짜 잘 뛰었다. 제대할 때쯤에는 1600미터 육상대회에서 구기종목 전체 선수 중에서 2등을 했을 정도였다. 매일 포리스트검프 만큼, 20km 이상 뛰었던 것 같다.
팔굽혀 펴기랑 윗몸 일으키기도 열심히 했다. 처음엔 팔굽혀 펴기는 30번도 겨우 하고 윗몸 일으키기는 50번을 채우지 못했다. 내무반에 보드를 하나 붙여놓고 1일, 주간, 월간, 연간 계획표를 모두 만들고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면 잠을 자지 말자고 다짐했다. 군대 26개월 동안 한번도 계획을 어기지 않았다. 매일 한 개씩 숫자를 늘여갔는데 제대할 때는 윗몸 일으키기는 15kg짜리 쇠를 머리 뒤에 매고 200번 이상 했고, 팔굽혀 펴기도 300번쯤씩 매일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땐 참 열심히 했다.
다저스에 입단했을 당시의 정석(좌)과 싱글A에서 재기를 노리던 모습. |
-상무에서 주전으로 기회가 온 것은 언제인가.
▶계속 후보였던 나를 김정택 감독님이 조금씩 눈여겨보시는 것 같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니 공도 갈수록 좋아졌다. 봄 대회 때는 경기에 나가지도 못했는데 초여름 백호기대회를 앞두고 나를 부르시더니 ‘첫 경기 경희대전에 선발로 내보내겠다, 잘 던지면 중간에 빼지도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당시 경희대는 봄 대학대회 4강에 홍성흔이 주축인 좋은 팀이었다. 그 경기에서 난 성남 고등학교 이후에 첫 완투승을 거뒀다. 삼진도 10개 이상 잡고 4-1로 이겼다. 처음으로 정석이라는 이름이 조금 알려졌고, 그 때 내 야구의 2막이 시작됐던 것 같다.
-대학 때까지는 어떤 투수였나.
▶늘 가능성은 아주 많았는데 마음이 약해서 알루미늄 배트를 겁내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던 약한 선수였다. 아마 때도 150km까지 던지고 다저스에 가서도 94마일까지 던졌다.
그러나 그 경기(경희대전) 이후에 정말 많이 달라졌다. 당시 김정택 감독님과 박치왕 타격 코치님, 그리고 포수였던 김지훈이 내 야구 인생을 바꿔 놓은 고마운 분들이다. 감독님은 내게 기회를 주셨고 박코치님은 선수로서 성숙해지고 좋은 선수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정신력을 키워주셨다.
당시 주전 포수이던 김지훈은 현재 기아 타이거스 배터리 코치인데 나더러 공이 좋은데 왜 몸쪽 공을 못 던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말했더니 그러지 말고 몸쪽을 던져보고 또 떨어지는 공도 던져보라고 했다. 그래서 몸쪽 떨어지는 공을 어떻게 던지느냐고 했더니 싱커라며 설명을 했는데 그것이 투심이었다. 그러더니 대회에 나가서도 계속 인코스 사인을 냈다. 홈런을 맞을까봐 안 던지겠다고 하면 계속 몸쪽 사인만 내고 다른 사인을 아예 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게 통하기 시작했다.
상병이 된 후부터는 상무팀이 거의 전승을 했고, 나는 늘 대회와 대표팀 차출 등으로 분주한 날을 보냈다.
-지명했던 프로팀에서도 적극적으로 영입을 추진했을텐데.
▶참 좋은 대우도 보장해주시고 감사했지만 난 상무에서 국가대표의 내 꿈을 이뤘기에 미국 야구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저스 입단을 결정했고 100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기로 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대하고 이틀 후였으니 1998년 2월초였다. 찬호랑 함께 캠프에 갔고 같은 조에서 훈련을 했다. (정석과 박찬호는 생일이 하루 차이인 동갑내기다.)
-나이도 적지 않았는데 미국에 가자마자 인생의 큰 시련에 부딪혔다.
▶만으로 25세였으니 나이가 많았지만 그만큼 다저스에서는 빨리 빅리그에서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1차 지명권에 해당하는 계약금도 제시했고, 스프링 캠프에 처음 도착하니 커브를 칭찬하면서 슬라이더를 못 던지게 하고 체인지업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그런데 누구나 하는 신체검사를 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통증도 없고 몸도 너무 좋고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어깨의 관절 근육이 찢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큰 부상은 아니지만 수술을 하거나 아니면 재활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다저스에서는 그런 계약금을 줄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부상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와중에 자이언츠와 마리너스에서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그쪽도 공을 좋은데 부상 위험이 크니 돈은 많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스티브형과 귀국을 할 것인지, 미국에 남을 것인지 등을 놓고 상의를 했다. 결국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고, 계약금은 대폭 깎였지만 다저스에서는 나름대로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배려를 해줬다.
-심정이 참담했을텐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고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이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정말 많이 던졌던 것 같다. 1년에 200이닝 이상을, 그것도 단기전에서 집중적으로 4게임 연속 등판 등으로 혹사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
처음엔 재활을 택했다. 다저스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샌버나디노 스탬피 싱글A팀에 가서 당시 투수코치이던 챨리 허프에게 체인지업도 배우면서 조심스럽게 재활을 하기로 했다. 너클볼 투수로 유명하지만 체인지업도 아주 잘 던졌다.
그런데 부상 위험 때문에 소극적이 되고 투구폼도 무너지자 구단에 수술을 받겠다고 했다. 5월에 조브 박사의 집도로 어깨 수술을 했다. 그리고 샌디에이고의 재활원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해는 재활로 보냈다.
-그 후에도 재기가 쉽지는 않았다.
▶회복이 생각보다 더뎠다. 다시 94마일을 던지는데 13개월이 걸렸다. 99년 6월에야 실전에 나갈 수 있었고, 다시 샌버나디노로 가서 몸 관리를 하면서 선발로 던졌다.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잘 던졌고 팀도 우승을 했다. 시즌 끝나고 교육 리그도 가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국내 팀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다시 오기도 했었다.
-확실히 재기했어야할 2000년에도 불운이 겹쳤는데.
▶스프링 캠프에 가기 직전에 LA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내리막길에서 막혀 서 있는데 픽업트럭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넘으면서 내 차의 뒤를 받았다. 큰 부상은 없었는데도 캠프에 가니 공이 제대로 안 들어가고 힘들었다. 당시 다저스는 완전히 변하고 있었다. 팜시스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케빈 브라운 등 FA 거물들 영입에만 몰두했다. 그 때 아주 친했던 투수 테드 릴리를 포함해 유망주들이 많이 다저스를 떠났다. 그래서 고민 끝에 독립리그에 가서 재기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우스 다코타주에 있는 독립 리그에서 뛰기로 결정을 했다.
-두 번째는 더 큰 사고였다.
▶당시 통역이던 토미 김과 함께 운전을 해서 독립리그로 떠났다. 일단 덴버에서 하루를 자고 가기로 했는데 덴버 도착 1.6마일을 남기고 내가 깜빡 조는 바람에 언덕길에서 차가 전복돼서 구르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간신히 서는 큰 사고가 났다. 폐차가 됐는데도 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 구급 대원들이 그 정도의 사고에서 다치지 않은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의사 말을 들으니 그런 사고가 나면 뼈와 뼈를 잡고 있는 근육과 인대 등이 모두 풀어졌다가 다시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그래서 MRI 등을 찍어도 나오지 않지만 후유증은 계속 남는다고 했다.
아마 지금의 제2의 인생을 살라고 그때 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동차가 구르다가 가드레일을 받았는데 바퀴 쪽으로 부딪히며 충격이 흡수돼 살았다고 했다. 조금 더 충격이 컸으면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고 후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호텔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몸에 마비 증상이 오기도 했다. 시계를 보면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 4시간이 걸렸고, 그러면서 겨우 혼자서 몸을 움직여 일어났다.
-그래서 포기한건가.
▶아니 그리고 나서 곧바로 팀에 합류했다. 그런데 가서 훈련을 해도 되질 않았다. 한 경기는 전력으로 던질 수 있었는데 그리고 나면 며칠 동안 허리, 목 등 온 몸이 아프고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재활을 택했다. 당시에는 금방 재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력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고를 당하고 나니 어깨 수술의 재활과는 또 틀리더라. 교통사고 후유증의 재활은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당시 국내 복귀설도 나오지 않았나.
▶내 사고 소식을 아무도 몰랐었기 때문에 상당히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들어오라는 제안도 있었다. 그렇지만 돈만 받고 제대로 공도 못 던지고 빌빌거리다 사라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신체검사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겠지만 금방 알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큰 돈이었지만 난 떳떳하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재활을 했다. 2000년에는 미국에서, 그리고 2001년에는 한국에서 계속 훈련을 했다.
추억의 사진 한장. 왼쪽부터 조진호, 정석, 김선우. 정석은 은퇴 후 사업가로 그리고 조진호와 김선우는 국내 야구 복귀했습니다. |
-결국 야구를 접은 계기가 있었을텐데.
▶2001년 겨울에 제주도에서 (조)진호, (송)승준이 등과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을 딱 보는데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너무 안타깝더라. 안되는 것을 아는데 끈을 놓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다.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거울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내게 물었다. ‘더 할래 말래, 미련 있니, 후회 있니, 자신 있니?’ 근데 내게 돌아오는 건 ‘그만하자. 수고했다.’ 그런 말이었다.
-미련은 분명히 있었을텐데.
▶미련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후회는 없다고 본다. 10년 20년 후에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자문했는데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와 아버님에게 말씀드렸다.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뭐라고 하시던가.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니 속초인가 여행을 3일 다녀오셨다. 많이 울고 오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라.’고 한마디만 하셨다. 그래서 그 때부터 곧바로 스티브 형의 사무실에 출근을 시작했고 다른 인생이 시작됐다.
-참 힘든 미국 야구 도전이었는데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미국에 가면 미국의 문화를 배우고, 빨리 자기를 버려서 미국 사람이 되고 한국은 잊어야하고 그런 말들도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장인 정신에 입각해서 야구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구 선수로 미국에 갈 생각은 버려야 한다. 수많은 기로에서 흔들릴 수 있지만 장인정신을 가진 야구인이 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은퇴 이후도, 야구하기 이전도 생각할 것 없다. 지금 야구하는 동안 야구인으로서 무엇을 할까만 생각하면 된다. 어린 선수들은 당장보다는 더 멀리 보고 야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론 국내 프로 선수들도 미국에 도전해 성공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야구를 그만 두고는 어떻게 살았나.
▶사업도 많이 배웠고, 후배들 지도도 해봤고, 또 공부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초 지금 SK에 있는 양승학 선수의 재활을 도와주다가 천안북일고와 인연이 되서 1주일에 2,3일씩 투수 인스트럭터를 했는데 내가 꽃피우지 못했던 것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전국 대회 4관왕을 이루는 너무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그 때 기념 반지를 받았다. 내가 두개의 야구 반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마이너리그 우승 반지고 또 하나가 천안북일고 4관왕 반지다.
그 후에 연세대(2004년)와 서울고(2006년)에서도 투수 인스트럭터로 한 시즌씩 일하기도 했다. 야구를 즐겁게 하는 법, 야구를
왜 하는가 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기술적으로 체인지업 등도 전수했다. 안영명, 유원상, 김창훈, 임태훈, 이형종 등 좋은 후배들은 많이 만나 행운이었다.
그러면서 2004년에는 MLB 코리아.com에서 인터넷 중계를 했고, 2005년에는 ‘S2스포츠’를 설립해 MLB 경기들을 인터넷과 모바일에 중계했다. 상당히 좋은 발전을 하고 있었는데 복잡한 사정으로 계속할 수 없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많은 인생 공부를 했다. MLB쪽의 일방적인 불합리한 처세에 대해서는 현재 소송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좋은 지도자의 자질이 보이는데 계속할 생각은 없나.
▶지도자의 길이 특히 아마에서는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내 정열을 받치기에는 보수 문제를 떠나서 아마추어의 현실이 너무나 낙후돼 있다.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일용직이고, 지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보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참 힘들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스포츠 심리학 쪽으로 공부해서 나처럼 힘들어하는 선수들을 도와주고 싶다. 올 봄에 모교인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첫 학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업 계획도 세워놓고 올해부터 다시 시작한다.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5년 정도의 계획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운동선수 출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들을 하고 싶다.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일을 하든지 경기 외적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되고 싶다.
앞으로 5년간 계획을 따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무언가를 이루면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40대 이후에는 내 앞의 수식어가 ‘비운의 투수’ 정석이 아닌 다른 수식어가 붙는 정석이 되고 싶다. 물론 비운의 투수란 운이 나빴을 뿐이지 나쁜 뜻은 아니지만, 이제 그 수식어를 바꾸고 싶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비록 미국에서는 실패한 투수였지만(그는 성공 아니면 실패 둘 중의 하나만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루지 못했으니 실패라고 말했다.) 다른 모습으로 일어설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