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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강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사이프(SIFE : Student In Free Enterprise) 의 강의 요청인데, 강의 내용도 주제도 마음대로. 이거 꽤 재미있는 조건인 겁니다. 일반적으로 강의에서 이런 형태로 마음대로 이야기를 던질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거든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짧게 고민해봤습니다만, 역시 이 주제가 가장 나은 듯 합니다. <왜 대학생은 더 이상 문화시장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 결국 듣기 싫을 만한 이야기를 조금 하게 될 듯 합니다만, 어쨌거나 강의 내용을 러프하게 정리하는 느낌으로 우선 글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블로그에 지금까지 이런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계속 했던 주제이긴 합니다만)
우선, 가장 먼저 꼽는 대학 문화의 변화요인은, '더 이상 당신들은 문화/예술의 생산주체 & 소비대상군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 말은, 사실, 욕입니다. 지금의 대학생들과, 그들의 선배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라고 하면 어떨까요.
물론, 저도 대학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 까마득해보이는 인상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다. 지난 10년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학의 문화는 그야말로, 퇴보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란 무엇인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문화가 무엇인지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라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데나 뒤에 -문화를 붙이면 말이 되어버리는 경향성도 있지요. (얼마전에 모 신문의 사설에서 '보수 문화' 라는 말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별개로, 그저 가져다 붙이면 되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서라도, 나름 문화를 한 마디의 명징한 문장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낍니다. 한 번 해보지요. 좀 뻔한 이야기입니다만.
문화란, 특정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 공통적으로 상호영향을 받아 동질화를 이루는 예술, 기술적 현상이다.
자, 이제 이 말을 좀 풀어보겠습니다. 특정한 사회. 라는 말은 '사회' 라는 말이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 글의 주된 주제인 '대학 사회' 역시 사회이며, 그 안에는 '대학 여성 사회', '대학 교수 사회', 전통적인 'NL 사회', 'PD 사회', '1학년 사회', '졸업반 사회' 그리고 각 과별, 동아리별 사회 시스템이 잔뜩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 중 몇 가지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게 됩니다.
자, 이런 '사회' 는 개인으로 구성됩니다. 조직이라는 거나 사회라는 거나 달랑 혼자서는 못 만듭니다. 독립된 개인이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이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요. 주장은 대개 개인이 하는 경향이 ㅡ크긴 합니다만(마르크스부터 푸코까지 참 많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들' 이 필요합니다.
이 '개인' 이 '개인들' 이 되기 위해 공통적으로 필요한 '특징' 이 있습니다. 남/녀, 1/2/3/4학년, 대학원 1/2/3/4 학기... 학과, 전공, XX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듣지 않는 학생, 장기하와 얼굴들을 좋아하는/좋아하지 않는, 황신혜밴드를 아는/모르는... 이런 특징들은 '공통적인' 영향 요소를 갖게 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이러한 '공통적인' 영향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들=사회' 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사회화'는 필연적으로 동질화를 불러옵니다. 그것 역시 수없이 많은 형태로 나타나고, 대개는 그 사회 구조에 계속 들어있기 위한 일종의 '규칙' 처럼 구성됩니다. 예를 들자면, XX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듣지 않는 학생에서 '듣는 학생' 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이 있지요. 수업시간을 빼먹지 말 것, 과제를 제 시간에 제출할 것, 조 단위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 등등등등등등. 이 중 몇 가지를, 어느 수준 이상으로 이루지 않으면 '듣지 않는' 또는, '들었지만 소용없는' 학생이 됩니다. W거나 F거나 하는 기호로 그 결과는 내 개인의 정보 - 성적표 - 에 추가됩니다. A~D의 학점 역시 마찬가지지요. 내가 그 사회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가. 의 척도가 학점이라고 봐도, 많이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는, 이러한 '동질화의 기준' 이 예술이거나 기술적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농업 문화의 근간은 농부의 '일' 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이를 위하여, 농부가 되고 싶다면 그 나름대로 여러가지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하지요. 근래 유행중인 귀농이 갖는 문제가, '가서 그냥 열심히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싹 정리해서 내려가신 분들이, 이러한 '새로운 동질화의 기준' 을 익히는 데 고생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는 겁니다. 대학 동아리들도 이러한 기준들을 가지고 있고, 이 중 몇 가지는 형태적으로 고정되어 있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동아리에 들면 자동적으로 민중가요 몇 가지쯤은 외게 된다든가, 어떤 동호회에서는 이러저러한 것을 배우게 된다든가.
여담스럽지만, 요즘도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 같은 '신고식' 을 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신고식' 도 이러한 사회 구성원의 동질성을 구성하기 위한 형태가 왜곡되고, 그게 오래 되다 보면 그 자체로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는 좋은 예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그놈의 '신고식' 이 갖는 거의 자학 수준의 동질화가 너무 싫어서 그런 거 안 하는 단체에서만 있었습니다만.
예술적, 기술적 현상이라는 표현은, 그 형태가 음악, 미술, 영화, 만화, 디자인 등의 문화적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문화적 소비 형태로 나타나지요. 뭐 특성상 생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연극 동아리를 생각해보세요), 대부분은 소비자로서 기능하지요. 대부분의 '사회' 는 이러한 소비를 전제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 전제와 유지, 발전에 그러한 '소비' 가 주요한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지요.
자. 이제 이야기하려는 주제에 좀 다가간 느낌입니다.
대학생은 왜 자신의 (소비) 문화를 갖추지 못했는가
제가 이야기 처음에 1990년대 중반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 저는 96학번입니다 - 의 이야기를 한 것은, 그 당시에는 '대학 문화' 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실 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 여러분은 나이가 너무 어렸으려나요?)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하는 밴드 문화의 융성기이자,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 까페 문화, 영화 시장의 융성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 당시의 대학생들은 이러한 문화 시장의 적극적인 소비자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기능이 가능했던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TV의 문화적 전파력을 벗어난 새로운 문화 세력의 융성
'페이퍼'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전파 도구의 발달이 일어났습니다. 홍대의 클럽문화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새로운 개념은 문화의 '가치'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MR 반주로 노래하는 '가수' 와 '연주자' 의 차이를 보여준답시고 TV에서 화면 왼쪽 위에 카세트 테이프를 그려넣던 시기이지요. 이러한 현상은 동시에 'TV에 출연하지 않는' 가수들을 대거 양산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잡도록 만들었습니다.
2. 대학 문화의 새로운 경향성 - 문화생산자로의 전환
대학 단위에서의 문화 기획이 융성하였습니다. 저도 연세대학교에서 그러한 문화 기획 단위에 있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분명히 기획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여력이 있었어요. 저도 96년 처음 문화 기획일을 시작해서, 97년부터 99년까지 정말 '하고 싶은 건 다 해볼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김창완 강연/연주회>, <신세기 에반게리온 전회 연속상영>, <황신혜밴드 콘서트>, <홍대 언더그라운드 밴드 연속 공연>, 기존의 대학 축제 공연의 전환으로 'TV에서는 볼 수 없는' 밴드들로 이루어진 공연, <로보트 태권V 상영회> 등등. 당시 제 가 있던 대학 뿐만 아니라,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다른 곳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대학 문화가 사회의 문화 상품 구조와는 달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일 수도 있지만, 다양성에 대한 소비 시장의 가능성이 보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3. 일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유입의 증대와 소비 증대
당시, 최고의 유행은 다름 아니라 재패니메이션이었습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상영회는 대학 마다 몇 번 씩은 매년 있었고, 언더그라운드 애니메이션, OVA 등이 아주 다양하게 소개되었죠. 지금이야 정품도 구할 수 있고, 불법적으로야 P2P에서 얼마든지 다운로드 받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비디오테이프로 유통되는 이러한 작품들의 상영회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제가 기획했던 <에반게리온 전회 상영회>의 경우는 17시간이라는 상영 시간에도 행사 시작 시점에서 490명, 끝날 때 210명이라는 높은 참여율을 자랑했었더랍니다. 또한, '헐리웃 영화' 의 반대항으로서의 예술영화 소비층의 증대, 유럽 영화의 유입 등으로 인한 문화적 계급화 현상까지, 다양한 문화들이 새로이 들어온지라, 선택하여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 이 때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만, 이 때 들어서야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요.
1990년대 중반 대학 사회의 강력한 문화 전파의 원인들
이런 변화에는, 당연히 원인이 있습니다. 이 원인도 세 가지 정도 되겠네요.
1. 학생운동의 자멸
연세대학교 - 특정 학교가 계속 나오는 건 좀 죄송합니다만 - 에서 1996년 8월에 일어난 '한총련 사태' 는 기존 대학 사회의 마지막 학생운동 형태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근 1개월에 가까운 농성 기간 동안 언론은 열심히 '이런 정신 못차리는 미친 대학생들' 을 매일 방영했고, 마찬가지로 '이런 개념없는 경찰들' 은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대응했었지요. (뭐 요즘만 하겠습니까만) 이 당시 학생운동은 그 힘을 완전히 잃고 대학 사회에서 와해되었는데, 이는 이러한 학생운동세력이 갖는 그들의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대학 1학년 1학기인 1996년 4월, 교내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 에 참석했다가, 교문을 나가는 순간 '김영삼 정권 퇴진하라' 로 구호가 바뀌는 걸 목격하고, 그 날 하루 종일 경찰에 쫒기고, 그 다음 날 아침 95학번 선배 하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 학생운동을 집어치웠고, 이후 문화운동으로의 전환을 내적으로 이룰 때 까지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고민으로 몇 달을 겉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뭐 원래 편협한 인간은 자신의 경험이 절대적인지라, 제 개인적인 평가로는 이런 방식이 학생운동을 죽인 독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웃기는 것은, 그 내부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겠지만, 사회라는 게 그렇잖아요. 내부에서 그 사회를 벗어나는 다른 시스템이 나타나는 것. 성공하면 변화요 변혁이고, 실패하면 유행인(지나가니까요) 그런 거 말입니다.
어쨌거나, 학생운동의 부재는 '다른 몰두할 것' 의 필요성을 불러왔습니다. 이 자리에 '문화' 가 자리잡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러한 '문화' 의 융성은 새로이 몰두할 것들을 눈 앞에 선보이기 시작했고, 팬클럽 문화라든가, 매니아 (라고 쓰고 오타쿠라고 읽어도 되는) 문화의 형성은 이런 '몰두할 것들' 이 필요한 상황과 잘 부합했습니다.
2. 인문학의 유지
물론, 지금이야 인문학이 한 번 죽었다가 부활을 시작한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아직 많이 미약하지요) 이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책 좀 읽었어요. 토론도 꽤 했고요. 요즘 대학교에서 강의나 기타 등등의 일로 지나다닐 때마다 보면서 아쉬운 것이, 조별 수업을 제외하고 개인적인 '토론' 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거의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저 시절에는, 당시 과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제대로 '수다' 를 떨기 위해서는 푸코 정도는 읽고 있어야 했어요. 맑스를 읽거나, 헤겔을 읽거나, 포퍼를 읽거나 차이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보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를 찾는 데 다들 몰두해 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헌 책방에 가서 책 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1년에 교재를 제외하고 책 100권 정도 읽어서는 '조금 읽었네' 수준에 지나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은 몰락했지만, 선배들은 여전히 높은 '공력' 을 지니고 있었죠. 4학년쯤 된 학생들은 1학년 학생들에게 '강의' 를 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으니까요. 여담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대학 교육의 핵심은 전공 영역에 대한 지식 습득이 아닙니다. 그건 어짜피 실무 영역으로 나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 아니라 거의 전부에요. 대학에서 실제로 배우는 것은 자율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는 것과, 자신이 무언가를 공부하고자 할 때 어떤 책을 찾아 읽음으로서 그것을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확인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4년에 등록금 4,000만원이 넘는 돈의 용도는 사실 이것 뿐이랍니다. 어쨌거나, 서로 싸워가며 논쟁하며 떠들어가며 이러한 단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인문학 영역들이 마구 성장했어요. 문화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은 이 당시에 매우 인기가 높았지요. 무언가 '이해하기 위한 도구' 들이 필요했던 시기거든요.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투쟁으로서의 세계' 가 사라지면서, 그 대신 무언가 다른 눈금이 필요헀던 겁니다.
3. 불안감의 증대와 성의식의 변화
어쨌거나,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는 또 다른 강타가 하나 날아옵니다. IMF. 사실 IMF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어느 순간 환상이 한 번에 깨져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나름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열어 보자마자 안에 커다란 공동이 보이는 충격 같은 것이었지요. 이런 충격은 가히 대단한 것이긴 했지만, 사실 그 징후가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1996년 연세대학교 졸업생 중 취업 확정자 비율은 10.2% 였습니다. 지금? 비슷할걸요. IMF때? 비슷했어요. 그런데, 언론에서 '취업이 안된다'라든가, '신용불량 대학생 증가' 라든가, 이런 이야기를 펑펑펑 써내니 정말 그런 '현상' 이 처음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이런 '홍보' 는 실제로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름 아니라, '뭐 졸업하면 뭐하나' 라는 인식을 불러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어짜피 취직도 어려운데 공부해서 뭐해. 라는 이런 인식은 이전 선배들은 갖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대학 때 화염병 열심히 던지고, 토론회에서 불을 뿜어도, 졸업과 동시에 기업에 취업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했던 '386' 세대와 그 이후 세대 사이의 단절이죠. 학생운동의 몰락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한 이런 '변화' 는 사실 지금도 게속되고 있지요.
이 대항마로 발달한 것이 성의식 영역에서의 자유도입니다. 사회적으로 '낙태가 문제다' 라든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이고, 피임약이 일반 판매되는 것에 대한 난리블루스를 쳤던 시기도 이 시기입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이런 대사가 나오죠. "내 아랫도리 가지고 왜 나라가 이래라 저래라야?" 이러한 상황적 변화에서, 자유로운 의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전파되었고, 마광수 교수님 사건이라든가, 장정일씨에 대한 압박, 기타등등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경직성은 강화되었고, 이는 다시 말해 현실상에서의 성의식은 상대적으로 매우 유연해졌다는 결론으로 정리됩니다.
혼란스러움은 늘 도움이 된다
이러한 세 가지 상황 외에도, 이 시기의 대학에는 그야말로 '안전한 것' 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1990년대 중반 학번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에 대해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대부분의 경우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됩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언제나 상황이 안 좋을수록 고민은 깊어지고 행동은 빨라지는 법이랍니다. 결단력은 시간의 노예라는 말도 마찬가지고. 그 덕분에, 당시 대학생들은 스스로에게 '좋은 것' 을 찾아내고, 그것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스스로의 문화를 갖지 못하는 이유
이제 겨우겨우 주제에 연관된 이야기가 나갑니다. 사설이 길었어요. 어쨌거나 앞에서 든 수 많은 이유들이, 여기서 반복적으로 나타날겁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이렇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이유들 때문이구나' 라고 나름 정리해서 알고 있습니다만, 설명해도 다들 알아듣지 못하는 인상을 자주 받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런 기회가 왔으니, 다시 한 번 설명해 보도록 하지요.
1.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취직. 이지요.
지금 대학생들, 제가 보기에는 참 여유가 없습니다. 대학교 2학년만 되어도 토익 공부에 뭐에 뭐에 학원 뛰어다니기 바쁘더군요. 기업의 시험을 준비하는 동아리에 들어가기도 하고, 이걸 배운다, 저거 자격증 딴다... 어쨌거나, 고등학교가 7년으로 늘어난 듯 보입니다. 그리고는, '남들보다 떨어지지는 말아야죠' 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를 듭니다. 정말로, 충심으로 말씀드리는데, 그거 다 쓰잘데기 없어요. 숙명여대라고 기억하는데, 졸업할 때 토익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졸업이 가능하다더구만요. 그래서, 학생들은 열심히 학원을 다니더군요. 저는 이해가 안 가는데, 이런 상황이면, 학교에다가 '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토익 교육을 제공하라' 고 해야 하는 겁니다. 그냥 '어쩔 수 없어요' 가 아니라. 적어도 졸업에 필요한 조건이라면, 당연히 방법도 제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못 그러고 있을까요? 제 생각에 이유는 단지 한 가지 뿐입니다. 다름 아니라, 자신의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을 '경쟁 상대' 로만 인식하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인은 생각 해 볼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저 놔두고 있는 것 뿐입니다. 보고 있으면 참 갑갑해요. 네.
2. '나' 에 대한 환상이 너무 강해요.
게다가, '공통의 목적의식' 으로 모여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서 계속 느끼는 것인데, '나' 라는 '주체' 를 설정하는 데 굉장한 수준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난 그래요' 라든가, '나는 남들과 달라요' 라든가. 마치 이 모든 선택이 '나'의 것인 양 말입니다.
그거, 당신들을 소비자로 만들기 위한 시스템의 '장대한 사기' 의 결과입니다. 개인에게 선택의 주체인 것 처럼 만드는 방식은 마케팅의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1980년대 TV를 중심으로 하는 마케팅 형식이 망가지고 나서, 새로운 전략으로 가장 먼저 제시된 흐름이 바로 이 '개인화' 의 신화이지요.
이제, 구매를 통해서 '나' 를 완성시키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렇지 않았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전에는 구매가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었지요. 구매와 소비가 무슨 차이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구매는 단순한 소유권의 점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는 구매는 그저 쌓아놓기에 지나지 않지요. 자신이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을 구매하는 것이야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지만, 이전에는 '왜' 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명확하기는 했어요. 지금은 '왜' 에 대해 '내가 좋으니까' 이상의 이야기가 잘 안 나옵니다.
다시 말해, 명품을 사는 것에 대한 호/불호,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 '나는 그렇다' 거나, '된장남녀'라거나 하는 논쟁이 나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커피 프랜차이즈 시장이나 명품 시장의 한국에서의 놀라운 성장률은 이러한 '구매 = 나' 라는, 브랜드에 종속된 소비습관이 불러온 것이지요. 그러나, 그에 비해 스스로에 대해 잘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예전만 못합니다.
3. 개별의 목표의식은 있지만 공통의 목적의식은 못 만들어요.
이러한 '나' 에 대한 정체성의 근거부족 현상은 결국 공통선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즉, '우리'의 생존을 위한 방법론같은 것 보다는 내 목표의식이 더 중요하고, 사회가 경쟁사회라는 논리를 배경에 깔아놓으면서, 스스로를 파놉티콘의 죄수로 만듭니다. 마케팅은 이러한 파놉티콘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곳에서 서로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 그러므로 연대하지 못하는 - 개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지요.
그리고, 어른들은 당신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더욱 비정하며, 극도로 잔인하답니다. 자세히 관찰해서 찾은 약점을 공격하고, 그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단물을 짜내는 데 집중하고 있지요. 설마 그럴까? 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그런 여러분들의 약점을 찾아 그 부분을 공략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데요. 뭐. 마케팅이라는 거, 그런 거랍니다. 마케팅적으로 진정성을 요구하는 세스 고딘 같은 구루도 있지만, 그 역시 소비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는 스토리로서의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구글의 모토가 'Don't be evil' 이랍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이 개인으로 파편화되면 될수록 여러분들은 취약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난 이거 좋아해', '난 옛날부터 이거 좋아했어' 라고 하면서, 새로운 소비할만한 문화를 찾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왜 그러느냐 물으면, '바빠서' 인 거지요.
고등학생의 문화와 30대의 문화 빌려 소비하기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맞는 문화를 소비하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시장에서 여러분들을 위한 문화상품을 만드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굳이 만들 필요가 없기 떄문입니다. 돈이 안 되기도 하고, 다른 것도 잘 소화하거든요.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경우, 사실 그 드라마의 타겟은 고등학생이라고 봐야 합니다. 발끈하실지도 모르지만, <미워도 다시한번>의 스토리 수준은 고등학생에게도 너무 쉽습니다. 빅뱅이라든가, 소녀시대, 원더걸스 역시 고등학생을 타겟으로 만들어진 문화상품들입니다. 주말에는 <개콘>은 본방사수해야 하는 대학생들에게 뭐하러 새로운 걸 만들어주겠느냐구요. 중학생부터 대학생, 30대까지 알아서 보는데. 그저 중학생 수준만 맞춰 주면 됩니다.
상대적으로, <무한도전>의 경우는 타겟팅을 좀 색다르게 해서 살아남는 경우입니다. <무한도전>의 자막, 연출 자체가 이미 인터넷 공간의 패러디로 가득하지요. <무도>는 인터넷 상에서 이런 저런 재미있는 거리를 찾아다니는 데 익숙한 대상들을 상대로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1등 해먹는 겁니다.
요즘도 개인기에 목숨 거는 학생들이 꽤 있더라구요. 그 '개인기술' 의 정체는, 사실, TV의 반복적 복제. 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TV를 충분히 봐야 몸에 익힐 수 있지만, TV를 충분히 봐야 그걸 보고 재미있어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떤 개인기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습니다. TV를 거의 안 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모창과 성대모사는 아주 다릅니다. 모창의 경우에는 그 가수의 특별한 요소들 - 단순히 음정 뿐만 아니라, 박자, 호흡, 음의 떨림 등을 복제해 내는 것이지요. 송창식 선생님이 모창의 소재가 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그가 탁월한 보컬리스트이자 특징적인 요소를 상당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픽하이는 모창이 쉽습니다. 랩이긴 하지만, 각 단위별로 들어가고 나가는 게 명확하고, 훅도 확실한 위치에서만 걸리기 떄문이지요. 타이거 JK나 JP 모창 해보세요. 죽습니다. 아예 보컬 자체의 특성이 극화된 자우림이나 이소라의 모창을 해보세요. 그 '맛' 을 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요즘 시쳇말로 '뜬'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사실 이러한 요소를 굉장히 전략적으로 잘 가지고 간 형태라고 봐야 합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새 밴드가 하나 나왔는데(사실 신인도 아니지만), 20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20대란 말입니다. 그런데, 형식은 30대-40대의 것을 차용해왔어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의 랩도 아니고 중얼거림도 아닌 묘한 그 부분을 노래방에서 직접 불러보세요. 그 훅, 박자 맞추려면 수백 번은 따라 불러 보아야 할 겁니다. 이들의 음악적 뿌리가 산울림이나 건아들, 김민기 등의 80년대 초중반 정서를 계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 시스템적으로 보자면, 10대는 용돈을 쪼개서 음반을 사고, 시간을 쪼개서 (게다가 대개의 경우 부모님과 싸워가며 - 또는 DMB 등으로 피해가며) TV를 봅니다. 그래서 원더걸스는 데뷔 이제 3년차인데 앨범이 10장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그녀들이 발표한 곡수 다 합쳐봐야 30곡이 안 됩니다. 리패키지 앨범, 리믹스, 기타등등으로 앨범 장수만 늘려가면 돈이 벌리는데, 뭐하러 힘들게 새로 노래 만들고 곡 쓰겠어요.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AR 제거 음원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미약한 보컬의 힘 - 듣다 보면 안스러울 수준의 - 를 보고 웃기 위해서지만, 그렇다고 팬클럽들이 '에에 뭐야. 소희 노래 못하네' 하고 팬클럽을 그만두겠어요? 그들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이미 원더걸스가 한 축으로 들어온 상태로 정리가 되어있는데 말이죠. 팬클럽 안의 친구들이 사라지면 생기는 공백 때문에라도 못 그만두는 겁니다. 시간 나시면 <So Hot> AR 제거버전 들어보세요. 이 꼬꼬마들 숨 쉬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저 몸매에 저렇게 춤추면서 노래할 폐활량이 안되는 거죠. 아, 저는 이 꼬꼬마들에게는 아무 악감정이 없어요. 예쁘기만 하구만요 뭘. 단지, 그 백그라운드에서 꼬꼬마들을 시장으로 내놓는 기획자들에게는 조금 따져묻고 싶은 게 있지만 말이죠.
30대는 현명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할 줄 안다. 그들은 이미 안다.
이런 걸 보면서 30대의 문화소비자는 굳이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에 목을 맬 필요가 없어집니다. 뭐 귀엽고 예쁘기는 하니 관심이 없지는 않지만, 굳이 앨범을 사줄 필요성은 못 느끼는 겁니다. 들어서 좋은 음악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기 떄문이지요. 이들은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앨범을 사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 장씩 사긴 했습니다만) 30대의 문화적 취향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음반을 소비할 수 있고, 비싼 콘서트에도 갈 수 있습니다. 10대는 용돈을 두 달 모아서 가고, 30대는 카드로 지릅니다. 요즘의 공연을 보면, 카드사의 할인혜택이 없는 경우는 거의 보기 어렵죠.
이에 비해, 하루 3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온다는 이은미 누님을 보시면, 이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어 버리죠. (이은미가 너무 '늙은' 가수여서 취향이 아니겠다 싶으시면, 2007년 발매한 <Twelve Songs> 앨범을 들어보세요. 그럼 닭치게 될 겁니다) 전인권씨가 그렇게 난리블루스를 쳐도, 여전히 파괴력이 유지되는 것은 그가 가지는 음악적 힘 때문이겠죠. 아우라라고 해야 하나. 신해철이 막말을 하든, 그가 하는 말이 궤변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것도, 그가 적어도 음악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도를 계속 주는 데 성공해왔고, 그 덕에 앨범이 나오면 닭치고 사 주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것 떄문일 겁니다. 김창완 선생님이 산울림을 정리하면서 낸 17장의 전집 <The Story of Sanullim>의 가격은 220,000원입니다. 30대에게도 만만치 않은 가격입니다만, 초판은 이미 다 팔렸어요.
장기하와 얼굴들은 이런 경향성의 상징과 같습니다. 이들의 앨범을 실제 구매하는 계층은 30대에요. 10대, 20대는 그저 인터넷에서 소비할 뿐이고, 이건 장기하와 얼굴들에게 단 한 푼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싱글 앨범 <싸구려 커피>의 경우 홍대의 몇몇 음반매장에서만 판매했음에도, 정규 앨범 1집을 낼 돈을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벌 수 있었는데, 이는 저같은 놈이 가서 한 번에 몇 장씩 사기 때문이지요. 저는 세 번 가서 13장을 샀습니다. 12장은 선물이나 지인의 부탁으로 산 것이구요, 이들 모두 30대네요. 몇몇 친구들은 4,000원짜리 앨범을 사 준 댓가로 제게 목살에 소주를 샀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요. 그러나, 문화적 관점에서는 훌륭합니다. 얻어먹은 입장에서 그렇게 말해야지 어쩌겠어요.
문화적으로도 틈새에 끼어버린 <88만원 세대>
20대 대학생은 이 중간에 낀 <88만원 세대>가 되어버린겁니다. 문화적으로도 말입니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두들기는 이 글 역시 이 책의 영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만. 20대는 지속적으로 이런 현상 속에 놓일 겁니다. 지금의 10대들은 20대가 되어서도 10대 시절의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고, TV는 이런 현상을 가속화합니다. 적어도,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 문화기획을 할 때는 'TV에서 보여주는 거 뭐하러 여기서 하나' 가 먹혔고, 그래서 굳이 축제 시즌에 TV에 나오는 가수들 부르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거든요. 요즘은 보아하니 TV를 재현하는 게 가장 큰 목표인 것 같은데, 그런 걸 보고 싶다면 그저 방청객 신청하면 됩니다. 10대 여고생과의 경쟁은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죠.
사실, 진정한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문화 생산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에 있습니다. 뭐하러 20대를 대상으로 상품을 만들어요. 10대 대상으로 가든, 30대 대상으로 가든, 그쪽에서 돈 내주는 데 말이죠.
문화 생산자 = 예술가 + 기획자
이 공식에 의거할 때, 20대 예술가들은 10대, 30대를 위한 상품을 내 놓는 데 주력합니다. 저도 몇 년 동안 일했던 <희망시장> 이 10대 소비자를 위한 팬시상품 시장이 되어버린 것, 대학로의 연극 시장이 30대를 타겟으로 하여 변화하는 것, 홍대의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주된 구축 세력이 20대 후반 - 30대 초반으로 재편되는 것 모두가 이런 경향성의 반영이지요. 출판 시장은 완전히 30대 대상 시장이 된 지 오래구요. 알랭 드 보통, 주제 사라마구 등의 작가들도 30대에게 주로 팔립니다. 20대는 책 읽는 버릇조차 잃은지 오래거든요. 20대에게는 자기개발서나 팔아먹고, 취업대책, 토익책만 팔아도 충분한데 뭐하러 20대에게 문화적 감수성을 요구하겠어요. 그게 훨씬 쉬운데 말입니다.
20대의 문화소비에 대한 대안 - 적극적으로 연대할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것
대학교는, 이런 대안을 만들기 참 좋은 공간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하다가 좀 망해도 괜찮다는 장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건 사회 시스템에서는 아예 꿈도 못 꿀 일이거든요. 대학교는 실패가 용인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사회시스템과는 독립된, '상아탑' 의 기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공할 경우에는 사회적 관점에서의 성공으로 받아들여지는, 상당히 특이한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부탁하건대, 문화 생산자가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붓 잡고 그림을 그리거나, 기타를 잡고 멜로디를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요. 능동적 소비자가 되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3단계를 고민해보시면 됩니다.
1.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한 단어로 답해보라.
주어진 질문에 대한 결론은 단 한 개의 단어로 뽑힐 때 까지 압축해보는 겁니다. 이 질문만 가지고도 대학 4년 충분히 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노트 펴 놓고 좋아하는 걸 다 적어보세요. 몇 장은 나올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찾아보세요. 하다 보면 한 개의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그 때까지 반복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이루는 데 시간을 쓰라고 있는게 대학교입니다. 1주일에 고작해야 20시간 공부하면서 바쁘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구요.
레포트니 뭐니 바빠요. 라고 말해도 제가 보기에는 웃기는 수준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제 나이 또래에 지금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레포트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글 쓰는 데 실력이 모자란 겁니다. 책 읽고 글 쓰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그건 자연스레 빨라집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약 4시간째 쓰고 있는데, 이 글의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하는 데는 약 1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물론, 다른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 생각하는 것이지, 이 글을 쓰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 정좌하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글에는 지금까지 대충 4-5권 정도의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고, 약 5권 쯤 되는 짧은 인용이 된 책들이 있지만, 저는 굳이 그 책들을 펴서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책들은 읽어두었습니다.
무언가 '잘 하려면' 그 정도는 해 놓아야 하는 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1만 시간을 사용하면, 그 일을 '잘 한다' 고 합니다. 하루 8시간이면 1년이면 2,920시간이고, 3.42년이 걸립니다. 기업에서 대리 승진에 5년 걸리는 게 당연합니다. 근무 시간 수로 대충 1만 시간 찍으면 승진시켜주는 겁니다.
제 이야기 잠깐 해 볼까요? 저는 문화기획자로 공부를 시작한 지 13년이 되었고, 2년 조금 넘는 군 생활을 제외하더라도 11년인데, 하루 8시간 이하로 일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하루 14시간 정도 일하네요. 이전보다는 좀 줄었습니다. 물론, 책을 보거나, 새로운 콘텐츠를 확인하거나 하는 시간은 모두 포함됩니다. 새로운 콘텐츠 확인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포함됩니다. <AION> 수호성 35렙 찍기, <스트리트 파이터 4> 전 캐릭터 엔딩 보기, 일본 드라마 <러브 셔플>, 미국 드라마 <24> 7시즌 보기, 15권 정도의 책 읽기, 특히 이번 달에는 문화마케팅 영역에서의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는 달이라, 디자인 이론서와 관련 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안그라픽스 책은 참 비싸요. 좋은 대신) 8장 정도의 앨범 듣기, 특히 이번 달에는 Jethro Tull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듣고 있지요.
2. 나는 얼마면 살 수 있는가? 최소 금액을 산정해보라.
제 경우는, 학비를 제외하고, 방학 때면 8만원, 학기 중에는 17만원이면 한 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 끊고, 학교 밥 제일 싼 거 먹고, 가끔 굶고. 뭐 남자라서 갖는 어드밴티지도 물론 있습니다. 생리대 값만 해도 참 비싸죠. 여성은 남성보다 더 소비를 많이 하는 구조라는 데에는 불만 없습니다만. 저는 2001년 10월에 처음 회사라는 거에 입사해봤는데, 그 때 한 달 월급은 85만원이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책값 등의 문화 콘텐츠에 한 달에 20만원 이상은 매달 썼습니다. 제가 재미있어 하는 것이니 소비에 부담도 없었고 말이지요.
지금은 그 때에 비해 돈 많이 씁니다. 대충 뽑아보면, 보통의 생활비(식비, 통신비, 세금, 기타등등)이 월 100만원 정도. 집안의 경제주체이므로 관련해서 월 150만원 정도. 이동을 주로 택시로 하다보니 교통비가 월 60만원-80만원 왔다갔다. 문화 콘텐츠 구매/소비에 월 50-70만원 정도 소비하는 듯 합니다. 대충 합산하면 월 400만원 정도 소비하는 셈입니다. 물론, 그 이상 버니까 이게 가능하겠지요. 하하.
그냥 잘 하게 되는 건 없습니다.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실질적인 '실물' 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지요. 저는 책을 빌려보거나 빌려주지 않습니다. 사 보거나, 그 자리에서 다 읽거나 둘 중 하나만 합니다. 필요하다면 속독을 배우면 됩니다. 사실, 속독은 배울 필요 없고, 하다 보면 누구나 됩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약 1년 동안 남는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습니다. 1년 중 초반 6개월 간 하루에 2권 정도, 후반 6개월 간 하루에 3-4권을 읽을 수 있더군요. 그렇다고 다른 거 안 한 건 아닙니다. 문화기획 일도 계속 하고 있었고, 연애도 잘 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모든 문화 콘텐츠의 가장 근간은 스토리이며, 그 스토리를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형태가 활자화를 통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책만큼 쉽고 빠르게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을 쌓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디지털 시대에 책이 없어지네 어쩌네 했던 사람들 수도 없이 많지만, 요즘 책 잘 팔려요. 돈은 없고, 뭐라고 해야 하는 시절에서는 제일 좋은 게 다시 책이거든요.
3. 시간을 늘려 쓰기 위한 방법을 최대한 모색하라.
'나는 하루 8시간 자야 한다' 라는 분도 있을 게고, '나는 아침에 잘 못 일어나요' 라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는 좀 문제죠. 그러면, 나머지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으세요. 필요하다면 도구도 갖추시고(노트북, PDA폰 등은 잘 사용하면 시간을 매우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필요하다면 훈련도 하세요. 자신 스스로를 재화이자 자원으로 보고, 얼마나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쓸 것인지를 고민하세요. 외부 환경도 마찬가지로,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찾으세요. 시간은 늘려 쓰기로 맘먹으면 상당히 늘려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충 해도 될 것과, 정말 '잘 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분리하세요. 대표적인 '대충 해도 될 것' 이 바로 학점입니다. 평균 학점이 4점을 넘든, 2점 중후반이든 졸업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왜 4점 넘기는 데 목숨을 거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학금이 목표라면, 4점 이상을 받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계산해서 판단하는 습관이 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심지어는 대학 졸업도 안 했어요. 별로 필요가 없어서. 뭐 그로 인해 이제서야 불편한 것이 조금씩 생기는지라 나름 해결책을 모색중입니다만.
어쨌거나, 시간을 늘려 쓰는 건 익혀 놓아서 손해볼 게 전혀 없습니다. 글은 빨리 잘 쓰도록 훈련하고, (근래의 블로그는 그런 면에서 참 좋은 도구입니다) 텍스트를 빨리 읽고 주제를 파악하는 능력은 익혀 놓으면 정보량을 늘리는 데 매우 도움이 되며, 대화에서 요점을 빨리 찾고 상대방을 관찰하는 스킬은 사람 만나서 일할 시간을 줄여주지요. 개인적인 효율은 아무리 늘려놔도 지나칠 게 없습니다. 남는 시간은?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죠. 내적 만족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4. 느슨하게 연대하라.
저도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 문화 기획 동호회 - 그래봐야 달랑 4명 뿐이었지만 - 사람들과 너무 친하긴 했어요. 매일 모여서 공부하고, 일하고, 술먹고 놀기까지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4명밖에 안 되는 작은 조직이었고, 그 4명 모두 지금 이 쪽 일을 할 정도로 진정성이 있었다는 게,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쩄거나, 사회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일이 많아집니다. 대개는 그 구성 목적과는 상관 없는 일들이 많아지지요. 제 추천은, 숫자를 줄이거나, 아니면 관계를 줄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말라. 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선을 잘 그어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술 마시면서 토론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라면, 사실 토론이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제일 쓰잘데기 없는 것 중 하나가 MT 가서 세미나, 토론회 하는거에요. 그럴 거면 그냥 따로 집중적으로 하고, MT 가서는 걍 잘 놀다 오는 게 낫습니다.
5. 표현하라.
그리고, 무어라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더 많은 사람들을 느슨한 논의의 틀에 집어넣는 연습을 반복하는 겁니다.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든, 대학교의 자원을 이용한 문화행사를 만들어보든, 지금 이 강연처럼 모여서 강사에게 와달라고 해보든, 뭐든 좋습니다. 그러다보면, 관객 1천 명이 넘는 공연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고, 기업에서 스폰서쉽을 받아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라고 하면 그건 또 다른 긴 이야기가 필요할 테니 넘어가겠습니다만, 어쨌거나 뭐로든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 중에는 혼자 만들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느슨하게 연대해서 만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 이 있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과정들이 - 이걸 '공부' 라고 하지요 - 필요합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잘 하는 사람과 잘 못 하는 사람들이 갈리지요. 그러면 잘 하는 사람들끼리만 다시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굳이 학교라는 시스템에 목 매고 있을 필요도 없어지지요. 그냥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새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알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이 순간이 빠를 수록, 그 뒤의 인생이 편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인생은 참 운이 좋은데, 가장 운이 좋은 건 대학교 1학년 겨울에 이걸 정했고, 지금까지 바뀌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는 표현. 에는 필요하다면, 사회 시스템에 대한 표현도 들어있습니다. 요즘은 학교 안에서는 시위 잘 안하죠? 촛불을 들고 나가기는 해도 말입니다. 학교 안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명박의 정책들이 문제라면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처음부터 따져보는 겁니다. 그리고, 동조자를 모아보는거죠. 정치적 활동 역시 문화활동의 일환입니다.
문화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문화라는 것이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은 수십 가지는 될 겁니다. 굳이 제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지 않아도 좋을 정도지요. 예술이라면 몰라도, 문화는 기본적으로 사회라는 시스템에 기생합니다. 그래서,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라는 측면에도 눈을 대고 있을 수 밖에 없지요. 대학 내의 문화라는 측면과, 20대라는 사회적 관점에서, 지금의 대학생들은 참 불행합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사실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선배들이 만들고 있는 현상이라고 해야겠지요. 오늘 이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질문에 해당합니다. 그 답이야, 제가 찾을 것은 아니지요. 저는 30대 중반에 접어든, 인생 멋대로 살아도 되는 나이가 되어버린 아저씨인걸요.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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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신 분이 저작권에 대한 명시를 안하셔서, 또 비상업적 펌은 허용하신다길래 냉큼 퍼왔습니다.
후배님들, 대학 생활 많이 짧습니다. 취업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인생을 가치있게 보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대학 때 많이 배우세요~`. 독서하는 습관만 제대로 들여도 많이 배운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