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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만주출병-여진의 성장..........(1)
번호 192 글쓴이 닉 조회 191 점수 10 등록일 2006-11-23 23:44 대문 0 톡톡 0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까지 우리의 역사에 포함된 사람들이었지만, 거란이 발해를
멸망 시킨 이후로 우리 역사 영역에서 제외되었다.
본래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체계에 있었던 종족으로써, 특별히 한반도 사람들과는 다른 계통의 사람들은 아니였다. 같다면, 같다고 할수있는 사람들이 여진족이었다.
발해가 거란이 세운 요에 의해서 멸망 당한 이후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던 발해인들은
정식으로 고려에 편입되지 않은 채 , 거란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으며, 우리와의 다른 길을
가면서 여진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본래의 선조는 같으나, 여러가지 요인으로 우리와 다른 길을 간 것이다.
만주의 여진인들은 거란의 통제하에 있었고, 한반도 북부의 여진인들은 한반도 남쪽에 있던 고려왕조에 조공을 하면서 복속되어 고려 조정의 통제도 받았다.
그러다가, 여진의 한 부족인 완안부가 세력을 크게 키우면서 주변의 여진부락을 통합하기 시작하여 거란과 고려의 새로운 위협세력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고려는 자신들에게 복속된 한반도 북부의 여진부락들이 완안부에 의해서 전부 점령당하고 천리장성까지 위협당하니 , 안보상의 불안이 거란침략 이후로 다시 찾아왔다.
결국 고려는 (거란의 묵인하에 )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7만 병력을 출동시켜 여진을 공격하여 완안부의 패권에 제동을 걸었고, 잠시 여진족에게는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고려 내부 사정으로 인해 고려와의 화해에 성공한 여진은 재정비를 하면 세력을 더욱 키워 한반도가 아닌 대륙으로 눈을 돌려 거란을 공격하였다.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여진족은 통일을 이룩었고, 만주도 몽땅 차지했고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金이었다.
여진족을 지휘했던 아골타는 일개 완안부 추장에서 대금 황제로 등극했고,宋과 대등한 관계에서 거란과 협공을 했으면, 고려한테서 兄의 대접을 받았다.
거란과의 전쟁 직전까지 고려조정에 조공을 받쳤던 여진이 대제국으로 성장하니,당시 고려 문벌귀족의 심정은 어떤 했을까?!
금을 세운 아골타은 그 선조가 고려인이고, 대개 여진족들이 고구려, 발해의 후신이었지만,
선조라는 고려인은 본디 신라황실의 후손인지라 금나라는 고구려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비록 송과 협공을 하여 거란을 멸망시켰지만, 송나라한테서 제대로 된 군사적 도움을 받지 못해 , 거의 단독으로 거란을 쳐서 멸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금나라는 모든 것 다 혼자 해결했다. 그런 과정에서 송의 약한 군사력을 파악했고, 송이 다시 이이제이로 멸망한 요나라 유민들과 결탁하자 금나라는 주저없이 송을 쳐서 화북지방을 지배했다.
송나라은 그 길로 자신들의 국왕 명칭을 황제에서 보통 王으로 여진족에게 불리게 되었고,
수십만냥의 은과 수십만필의 비단이 세폐로 받치는 치욕을 당했다. 송나라가 금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즉 금나라가 그 당시 동아시아의 中華였던 것이다.
그런 영광의 생활을 100년 정도 보낸 여진족은 몽고족의 공격을 받고 패망을 하고 중국에서
쫓겨나 만주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원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몽고가 주원장이 세운 명에 의해서 몽고 사막으로 쫓겨난 후에 만주에 있던 여진족은
독립의 시간이 찾아 날아왔지만, 분열되어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진 상황이므로 그런 기회를
잡지 못하고 명나라에 의해서 간접 통치를 받는다.
조선의 만주출병-여진의 성장.........(2)
번호 193 글쓴이 닉 조회 120 점수 10 등록일 2006-11-23 23:46 대문 0 톡톡 0
명나라는 원을 세운 몽고족과 금을 세운 여진족때문에 漢족들이 가지는 중화라는 자존심이 깔아뭉게졌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크게 주목을 하여 이들 이민족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대막의 몽고족들에게 강력한 국가가 출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명나라는 자주 몽고 大漠으로 원정을 하는 무력 정책을 쓰거나, 책봉과 조공무역을 전개하는 유화정책을 동시에 썼다.
몽고의 분열과 자신들의 질서에 편입시켜 안보상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경책과 유화책 모두 명나라는 실패를 보았다.
명나라 최고의 황제 영락제는 자신의 쿠데타의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입증하기 위해서 몽고에
수차례 원정을 갔지만, 한고조, 한무제같은 역대 중국황제들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역대 한인 황제중에 당태종만은 유일하게 성공했다.) 오히려 마지막 원정 길에 가는 도중에 원정의
피로를 못 이기고 병사했다.
더구나 그의 손자 명나라 정통제 영종시기에는 몽고 사막에서 에센이라는 자가 원나라 황실 후예를 칸으로 추대하고 몽고전체를 지배하고, 만주까지 손을 뻗쳐 여진의 일부를 지배하더니
조공무역의 확대를 요구하여 명나라가 거부하자, 국경지대에서 약탈행위를 심하게 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실권을 지고 있던 환관이 황제까지 강제로 친정시키면 몽고에 원정을 갔지만, 토목의 변을 당하여 명나라 군사들은 전멸당하고, 황제는 몽고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명나라는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어 명나라 수도 자금성이 포위당하는 위기까지 발생하였다. 그 후에 명나라는 청나라에 멸망당하는 그 날까지 몽고족에 의해서 국경은 빈번하게 약탈당했다.
조공무역이라는 다른 방식도 큰 효과도 보지 못하여 끝없이 요구해 오는 몽고족의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다 보니 재정약화가 왔고, 전부 들어주지 못하니 몽고족의 약탈도 전보다 더 심해졌다.
몽고족들은 잠시 뭉쳤다가 서로의 이익으로 흩어져 오래동안 분열되어 칭기스칸의 몽고처럼
명나라에 국운을 생각할 만큼의 위협을 주지 않았지만, 명나라의 대몽고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는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의 정책을 알아보자.
명나라는 분열된 여진에 대해서 손쉽게 지배를 했다. 다만 직접적인 지배를 피하고
간접 지배방식으로 여진족을 통제했다.
그 지배방식을 보자.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여순,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서쪽으로는 산해관에 이르는
요동과 요서를 직할령으로 삼아 요동도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고,
여진족의 출입을 막았다. 여진족의 경제적 욕구를 통제하기 위한 정책이며
약탈을 막기 위해서다.
그 요동도사의 동쪽의 만주지역은 노아간도사라는 것을 두어 여진족을 간접 지배했다.
즉 노아간도사 아래에는 위소라는 행정기구를 두어 위소의 우두머리를 여진족으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다만, 관원의 임명, 여진족 사이의 분쟁에는 직접 개입하여
아골타 같은 대세력가가 나타나는 것을 막았다.
.노아간도사 휘하의 여진부족은 해서, 건주, 야인 여진으로 나우어 진다.
한마디로 여진족은 명나라에 의해서 분할되어 간접지배를 받았다
조선과 맞대은 여진은 평안도에 건주이고, 함경도는 야인여진이다.
대체적으로 해서 여진은 몽고와 가깝기 때문에 몽고족과의 혼혈이 있어 순수한 여진족이 아니면 여진 세력중에 가장 호전적이며 反明 감정이 가장 심하다.
건주여진은 명나라와 자주 조공무역을 했기 때문에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심하지 않은 편이며
수렵과 농사를 같이 겸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된 부족이다.
야인여진은 명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고, 북쪽에 위치한 관계로 중국문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채 농사도 짓지 않고 순수하게 수렵생활을 하며 가장 야만스럽고 원시생활을 하던 부족이다.
명나라 초기에는 농경에 서툴렀던 여진은 곡물이나 소금 면포 농기구등의 생필품을 자급하지
못하여 명에게 의존을 하였다.
당시 여진은 백두산 일대에서 캔 산삼과 수렵생활을 통해 얻은 모피, 연해주 지역의 담수호에서 양식한 진주로 명나라 상인들과 조공무역이라는 형태로 문물교환을 한다.
그것도 명나라 황제가 인정하는 무역증서를 통해서만 교역을 하는 제한된 무역이었다.
무역증서를 가진 여진족들은 누구겠는가? 명나라에 아부하는 여진의 유력자들이다.
결국 이런 조공무역은 명나라가 여진인들을 통제하려는 명 정부의 통제장치였다.
여진족 세력가가 만일 명나라의 말을 안 들으면 무역을 폐지시켜 여진족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은 이런 여진족들을 길들였다
초창기에는 명나라의 여진족에 대한 정책은 성공을 했다.
하지만, 몽고와의 전쟁에도 여진족들을 동원하기도 했던 명나라는 그 후, 몽고족에 의한 국경지대의 혼란과 내부 사정으로 점차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15세기 중반부터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면서 여진족들의
국경 침략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명나라의 대책은 국경을 강화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 강화 및 군대를 보내 자주 토벌작전을 벌이는 것이다. 또한 이이제이라는 원칙을 이용하여 조선을 통해 여진을 압박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 세조, 성종시대에 여러 차례 명나라는 조선정부에 건주여진을 치게 군대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조선은 군대를 보내 명나라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여진을 토벌했다.
형식상 조선과 명의 연합작전이지만, 실상은 조선군의 단독작전이었다. 이때 여진의 토벌로
용맹을 떨친 사람은 태종의 외손자 남이장군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도 여진의 국경 침탈을 막지 못했다.
그 후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여진족 사회에서는 서서히 커다란 변화가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중심은 바로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다.
그는 1559년에 건주여진에 속하는 어느 여진족 부족에서 타쿠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어버지 교창가는 그 당시 부족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타쿠시는 그의 후계자였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형제들이 많기 때문에 부족을 이끄는 차세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경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머리와 용맹으로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면서
타쿠시의 뒷을 이을 제 3의 후계자가 된다.
누르하치가 속한 부족은 명나라의 통제하에 용병으로 먹고 사는 부족이었다.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그 지위에 만족하며 살지만, 누르하치 본인 자신은
그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누르하치에게 인생이 바뀌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서여진의 아타이가 명나라에 반항을 하면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이성량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토벌케 했다.
이성량은 누구인가?
바로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정간 이여송의 아버지였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조선인이었지만 죄를 짓고 명나라로 도망가 그 곳에서 명군에 들어가 활동을 한 자였다.
그런 관계로 이성량 집안은 요동에서 군대 밥을 먹는 무인집안이 된 조선족 출신의 가정이었다.
그 이성량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그 반란군을 치기 위해서 명군 뿐만 아니라 건주여진 출신
용병들도 이끌고 출전했다. 당연히 누르하치를 포함하여 그의 아비, 조부까지 끼었다.
명과 건주의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어 아타이를 거의 생포하기 하는 직전까지 갔었다.
거의 승리가 다 되어가는 순간에 사건은 발생했다.
당시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는 같은 여진족 출신의 아타이에게 동정심이 생기게 되었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항복을 설득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의 아들 타쿠시하고 같이 반란군 진영으로 찾아갔다.
그렇지만, 설득하는 과정에서 명군은 이들을 무시하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이들 부자는그 과정에서 사망했다.
명군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누르하치의 속마음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는 대놓고 명군사령관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였다.
난감해진 것은 이성량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량은 미안한 마음에 누르하치에게 무역 증서
60통을 주었다.
보통 유력 여진족 세력가들이 갖은 무역 증서는 1장내지 2장 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한
수치였다.
이 무역증서는 명 정부의 통제장치로써 작용도 하지만, 거꾸로 이것을 소지한 여진족은
떼돈을 벌 수 있었다. 60 통이나 되는 무역증서를 갖게 된 누르하치는 건주여진과
명나라 상인들간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명과의 무역에서 그는 경제적인 이익을 많이 챙겼다. 이렇게 얻은 엄청난 부로
인해서 주변의 여진부족들은 자발적으로 누르하치의 지배에 들어갔다.
또한 경제적인 부로 인해서 군사력도 강해지니, 누르하치는 무력으로 또는 회유 작전으로
1583년경부터 건주 여진부족들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1588년 정도에는 건주 여진 대부분을
통일했다.
잠깐 사이에 누르하치가 큰 세력가로 성장하자, 명나라는 깜작 놀랐다.
이에 명나라는 강경 토벌책보다 회유책을 써 그를 견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건주위도독첨사라는 벼슬을 내려 명의 관료 체계 안에 묶어둠으로써 누르하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밖에 안되어 누르하치는 오히려 이 직함을
이용하여 다른 여진부족이 갖지 못하는 정치적 우세를 획득하여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1589년에는 이렇게 커진 자신의 세력을 믿고 그는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명나라의 관심이 조선으로 돌리자, 그 틈에
누르하치는 주변세력을 공략하는데 박착을 가했다.
그에게 임진왜란은 분명 호기였다. 이런 그의 자신감은 곧 조선에게로 전해졌다.
1592년 9월 , 1598년 1월 에 두차례 걸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제의를 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두번 다 거절했지만, 여진족들은 자신들의 무좀으로
여겼던 조선으로써 큰 충격이었다.
(* 무좀이라는 표현은 16세기 전반기에 어느 사대부가 자신의 저서에서 했던 말이다.
즉 무좀은 인간에게는 큰 병은 아니지만, 자주 가리우니 신경이 자주 가는 존재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진족은 조선에게는 큰 위협은 아니지만, 자주 국경을 넘어 약탈을
하니 귀찮은 존재였다.
그런 관계로 그 조선의 사대부는 여진족을 무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1599년은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더니 1605년에는 국호를 지명을 따서 건주국이라
칭했다. 여진족으로서 독자적인 자의식은 점점 커져가고 , 자신들을 교묘히 견제했던
명에 대해서 반감이 증폭되었다.
1607년에는 누르하치는 조선의 선조에게 국서를 보내와 " 천조와 너희 조선, 우리 달자 삼국" 표현을 써서 조선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얼마 전까지 조선조정에 벼슬을 내려 달라는 요구를 했던 누르하치가 이렇게 나가니
조선인의 심정은 격세지감을 느껼 수 것이다.
1616년에 완전히 아니지만, 거의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옛 금국의 과거를
재현한다는 명분아래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칸의 지위에 오른다.
이것은 완전 명나라에 대한 대외적인 도전이었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세력을 키워갔을 때 명나라는 도대체 무엇 했을까?
명나라는 왜란을 전후하여 당쟁이 격화되고 환관들은 미쳐 날뛰어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그 전 시기보다도 더 혼란한 시기였다.
에스파냐 함대가 영국 함대에 패해 이후로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동양무역은 크게 쇠퇴했고,
그 시점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던 많은 은들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 여파로 인해서 은에 의존했던 명의 경제는 심한 타격을 입었고, 임진왜란을 비롯한
대외 원정, 대화재 이후의 복구사업, 연례적인 국방비, 황태자의 결혼식등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 국가재정은 파탄이 났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명나라 조정은 결국 광세니 상세니 하고 불리는 세금으로 거두니 자연히 민심은 돌아서고, 조직적인 반란은 중원대륙을 휩쓸었다.
명 내부에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으니 누르하치를 어떻게 신경을 쓰겠는가!
조선의 만주출병-여진에 대비하는 조선(3)
번호 194 글쓴이 닉 조회 96 점수 5 등록일 2006-11-23 23:47 대문 0 톡톡 0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조선정부는 평안도 국경지대에서 보내오는
장계를 통해서 여진의 급격한 변화를 알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을 포함하여 조선대신들은 여진의 변화에 그렇게 주목하지는
않했다. 다만, 율곡 이이만이 조선의 앞날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
할 뿐이었다. 실상 10만 양병설은 남쪽 일본보다는 북쪽의 여진 오랑캐에
더 뜻을 둔 시책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조선 조정은 의주로 피난가서 그 곳에서 임시수도로
정하고 對日 전쟁을 수행했다.
그런 국경도시에 뜻하지 않는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누르하치가 보낸 사신인 것이다. 누르하치는 조선 조정에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제안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의주에서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여진이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스스로 자청하니 국왕 선조는 어떤 기분일까?
결국 조선이 거부하면서 사건은 일단 끝나지만, 이때부터 선조는 여진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조선 사대부처럼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빠진 사람이 아닌 현실의 눈으로 여진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주라는 곳이 국경도시인 만큼, 이러 저러한 계기를 통해 선조는
물론이요, 세자 광해군 까지 여진의 힘에 감을 잡게 되었다. 특히 명나라 장수들과의
교류를 통해 여진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 제일이 아니지라도, 손에 꼽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 때문에 여진의 문제로 조정 대신들과의 대책회의 때마다, 신하들 보다
뛰어난 식견으로 회의를 주도했다니 충분히 공감가는 사실이다.
선조 국왕은 임진왜란부터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선조는 여진과 조선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여진족들을 회유
하고 달래는 정책을 썼다.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러 오는 여진족들을 조선인들이 전부 살해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지방수령에게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했고, 국경지역의 여진족에게 면
포같은 생필품을 선사하는 등 여진과의 마찰을 되도록 피했다.
피하는 것외에도 여진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 건주 여진으로 들어가는 명나라 사절단에
조선인 역관을 동행시키기도 했고, 직접 사절단을 파견하여 여진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도
했다. 이때, 무관 신충일이란 인물은 조선 국경부터 그들 지역에 이르는 지리적 개황과
생활상을 지도에 곁들인 상세한 보고서로 작성해 올렸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건주기정도기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대일외교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에, 또 다른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자기
반성에서 나온 결과가 아닐까?
마찰을 피하고, 정보도 수집하는 것외에 여진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하는 대책도 세웠다.
" 그들은 막강하므로 우리의 정예병 10만으로는 맞받아 칠 수 없다"고 신하들에
설파하는 선조는 여진이 쳐들어 오면 청야작전을 쓰고 산성에서 저항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진군에게 평원에서 정면충돌을 해봐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조총을 잘 쏘고, 칼을 잘 쓰는 항왜들을 북방에 배치시켜,
유사시 그들과의 전투에 대비하기도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혼란의 와중에도 선조는 일본군과의 싸우는 남쪽 전선에 도체찰사( 민
과 군을 총괄했던 벼슬)을 파견하는 동시에 북쪽에도 야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도체찰사를 파견했다.
평소에 우리가 생각했던 선조의 모습이 아니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략가이자, 군사 전문가로 변신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의 만주출병-여진에 대비하는 조선(4)
번호 195 글쓴이 닉 조회 76 점수 5 등록일 2006-11-23 23:49 대문 0 톡톡 0
선조의 견제와 정실 소생의 동생 영창대군의 탄생, 명의 딴지 걸기, 反광해군파 신하들의
공격으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데 시련이 많았다.
결국 선조의 갑자스러운 죽음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이이첨,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파들의 도움
으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선왕이 남긴 과제는 그를 왕위 기간내내 힘들게 했다.
임진왜란을 겪어 황폐해진 조선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와 북방에서 불고있는 여진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부왕 선조가 남긴 대표적인 과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광해군을 힘들게 만든 것이 바로 여진의 위협에 대한 대책이었다.
광해군이 누르하치의 여진에 취했던 대응책은 기본적으로 기미책이었다.
쉽게 말한다면,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을 피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지난 시점에서 전후복구에도 힘들 판인데, 사나운 후금과 일일이
맞대응할 여력이 없었데서 나온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광해군은 신하들이 모르는 후금과의 연락망을 갖추었다.
당시 일부 소수의 신하들만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찬성 할 뿐, 조정에서 대다수의 신하들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는 대북파는 후금과 명에 대해서 중립외교선을 했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광해군과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고분분투 했지, 대북파의 대부분은 인조시기의
서인의 강경파들과 별다른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인조시기엔 서인들 중에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자는 온건파들이 있어, 대북파보다는 어쩌면 서인들이 실리적일
수 있었다. 광해군의 충신 이이첨은 외교 라인에서만 앞장 서서 광해군의 반대편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런 관계로 광해군은 후금과의 비밀 연락망을 갖추어 명나라와 후금과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적절하게 이용했다. 의주부윤이 후금과의 연락을 취하고, 그것을 평안감사에 보고했고, 평안감사는 다시 광해군에게 보고하는 이 형태은 광해군의 대외 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던 시스템이었다. ( 물론 역으로 할 수도 있다.)
명의 요구로 어쩔수 없이 조선이 만주로 병력을 파견했다가 명군과 함께 대패를 하고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도, 광해군은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연락을 취해 적절히 타협을 봐,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을 했다.
또한 모문룡이 이끄는 명군이 조선 내륙에서 활동을 하면서 후금을 긴장시켰을때도,
광해군은 그를 평안도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한 섬 가도에 물러나게 만들었다.
또한 후금 사자가 조선에 방문했을때의 극진한 대접, 무역을 통해 여진의 욕구 충족,
후금에 보낼 국서의 형식을 놓고 신하들과의 논쟁, 명의 재징병 요구 거절등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 약화를 피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 관계로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은 후금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 어느
쌍방에 원한을 맺지 않고, 그들과의 전쟁에 휘말리지도 않아 조선은 한동안에
평화를 지속했다.
조선의 만주출병-여진에 대비하는 조선(5)
번호 197 글쓴이 닉 조회 68 점수 5 등록일 2006-11-23 23:52 대문 0 톡톡 0
광해군이 기미책을 써서 여진을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는 자강책도 실시했다.
여진의 침략 근성은 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유연하게만 대처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르하치 진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반 누르하치 부족에게 면포 등을 공급하여 환심을 산 뒤 정보를 수집했고, 여진어 역관등을
양성하여 적절하게 첩자로 써먹었다.
여진땅에 억류되었다가 풀려 나온 역관 하세관을 관직을 주어 후금에서의 경험을 활용했고,
명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패전하고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을 이용하여 후금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도 했다. 강홍립은 탈출하는 조선군 포로를 통해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 정보를 알려줬던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역관을 양성하여 이들을 첩자로 쓰는 동시에 수시로 누르하치 영토로 들여보내 그들과의 연락을 취했고 , 그 과정에서 여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힘을 썼다.
이렇게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보 유출을 차단하는 것도 신경을 써 야 했다.
조정의 중요한 결정 사항을 조보( 나라가 발행하는 신문)에 싣지 못하게 했고, 변경지역의 여진인들을 엄중히 감시하고, 조선에 망명온 여진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만주의 귀환을 막았다.
당시 여진인들은 생산기반이 없기 때문에 약탈과 수렵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생존의
차원에서 정보가 필요했다. 그때문에 여진인들의 첩보와 간첩 활동은 명나라 인사들까지 인정하는 높은 수준이었다.
그것을 아는 광해군으로써 정보 유출을 그렇게 막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전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군사적인 대책을 세웠다.
국왕 자신부터 국방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에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밤이나 낮이나 상관없이 아뢰도록 했고, 군사관계 행사를 수시로 열었다.
즉 진법 연습장면을 참 관하고, 관무재( 병사들의 무예 실력을 점거하는 시험)을 열어
직접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강화, 수원, 죽산, 용인등 서울 주변의 요충지에
수시로 어사를 파견하여 방어태세를 점검했다.
무기 확보에도 열을 올랐다. 누르하치 기마병들을 막는데, 화포가 제일이라는 인식 아래,
그것을 제작하고, 사격술을 연마하는데, 주력했다.
당시 여진군들은 명과의 전투에서 지금까지 보여줬던 북방민족의 공격 방식에서 탈피하여
평원에 있던 성들을 공략했다. 즉 선두의 기마대가 돌이나 흙을 담은 자루를 들고 질풍같이
달려와 성 밑에 그것을 쌓는다. 그것을 반복하여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면, 본대의 기마대가
그것을 밟고 성을 넘어 들어가 공격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훈련해온 농성법으로
저항했던 명군은 새로운 방식이 나타나자, 적응도 못하고, 그 위력앞에 무너져, 결국 평지에
있는 성들을 하나 둘씩 무너졌던 것이다.물론 평원에서 전면전은 더 말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 관계로 조선의 전략은 평원에서 맞서는 작전보다는 산성에 들어가 화포로 쏘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의 결론이다고 광해군은 결론을 내려던 것이다.
조선은 1613년에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한 뒤 다른 비용을 줄여가면서 파진포등
각종 화포를 생산하게 했다.
화포에 중요한 화약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조선은 염초를 명에
연례로 가는 사절단을 통해 대량수입해 갔다. (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염초 제조법을 알려고 했지만, 명의 통제로 알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염초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급할 수준은 아니였다. )
화포외에도 활, 화살, 창검등 재래식 무기의 제작과 확보에 열을 올렸고, 조총도 대량 생산했다.
일본에 통해서도 일본산 장검과 조총을 수입했다.
이런 무기 제작과 확보 이외에도 우수한 장수와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출신의 곽재우를 발탁하여 북병사로 올려 보냈고, 변방 수령의 대부분을
무인으로 교체했으며, 내수사(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 소속의 노비들을 정식 군인으로 선발하고, 승군을 정비했으며 수시로 무과을 실시하여 합격자들을 변방에 나아가도록 했다.
이런 광해군의 노력들은 왜란 직후 광해군 시대의 국가목표가 무엇보다도 생존문제에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선의 만주출병-여진에 대비하는 조선(5)
번호 197 글쓴이 닉 조회 68 점수 5 등록일 2006-11-23 23:52 대문 0 톡톡 0
광해군이 기미책을 써서 여진을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는 자강책도 실시했다.
여진의 침략 근성은 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유연하게만 대처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르하치 진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반 누르하치 부족에게 면포 등을 공급하여 환심을 산 뒤 정보를 수집했고, 여진어 역관등을
양성하여 적절하게 첩자로 써먹었다.
여진땅에 억류되었다가 풀려 나온 역관 하세관을 관직을 주어 후금에서의 경험을 활용했고,
명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패전하고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을 이용하여 후금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도 했다. 강홍립은 탈출하는 조선군 포로를 통해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 정보를 알려줬던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역관을 양성하여 이들을 첩자로 쓰는 동시에 수시로 누르하치 영토로 들여보내 그들과의 연락을 취했고 , 그 과정에서 여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힘을 썼다.
이렇게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보 유출을 차단하는 것도 신경을 써 야 했다.
조정의 중요한 결정 사항을 조보( 나라가 발행하는 신문)에 싣지 못하게 했고, 변경지역의 여진인들을 엄중히 감시하고, 조선에 망명온 여진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만주의 귀환을 막았다.
당시 여진인들은 생산기반이 없기 때문에 약탈과 수렵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생존의
차원에서 정보가 필요했다. 그때문에 여진인들의 첩보와 간첩 활동은 명나라 인사들까지 인정하는 높은 수준이었다.
그것을 아는 광해군으로써 정보 유출을 그렇게 막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전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군사적인 대책을 세웠다.
국왕 자신부터 국방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에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밤이나 낮이나 상관없이 아뢰도록 했고, 군사관계 행사를 수시로 열었다.
즉 진법 연습장면을 참 관하고, 관무재( 병사들의 무예 실력을 점거하는 시험)을 열어
직접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강화, 수원, 죽산, 용인등 서울 주변의 요충지에
수시로 어사를 파견하여 방어태세를 점검했다.
무기 확보에도 열을 올랐다. 누르하치 기마병들을 막는데, 화포가 제일이라는 인식 아래,
그것을 제작하고, 사격술을 연마하는데, 주력했다.
당시 여진군들은 명과의 전투에서 지금까지 보여줬던 북방민족의 공격 방식에서 탈피하여
평원에 있던 성들을 공략했다. 즉 선두의 기마대가 돌이나 흙을 담은 자루를 들고 질풍같이
달려와 성 밑에 그것을 쌓는다. 그것을 반복하여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면, 본대의 기마대가
그것을 밟고 성을 넘어 들어가 공격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훈련해온 농성법으로
저항했던 명군은 새로운 방식이 나타나자, 적응도 못하고, 그 위력앞에 무너져, 결국 평지에
있는 성들을 하나 둘씩 무너졌던 것이다.물론 평원에서 전면전은 더 말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 관계로 조선의 전략은 평원에서 맞서는 작전보다는 산성에 들어가 화포로 쏘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의 결론이다고 광해군은 결론을 내려던 것이다.
조선은 1613년에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한 뒤 다른 비용을 줄여가면서 파진포등
각종 화포를 생산하게 했다.
화포에 중요한 화약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조선은 염초를 명에
연례로 가는 사절단을 통해 대량수입해 갔다. (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염초 제조법을 알려고 했지만, 명의 통제로 알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염초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급할 수준은 아니였다. )
화포외에도 활, 화살, 창검등 재래식 무기의 제작과 확보에 열을 올렸고, 조총도 대량 생산했다.
일본에 통해서도 일본산 장검과 조총을 수입했다.
이런 무기 제작과 확보 이외에도 우수한 장수와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출신의 곽재우를 발탁하여 북병사로 올려 보냈고, 변방 수령의 대부분을
무인으로 교체했으며, 내수사(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 소속의 노비들을 정식 군인으로 선발하고, 승군을 정비했으며 수시로 무과을 실시하여 합격자들을 변방에 나아가도록 했다.
이런 광해군의 노력들은 왜란 직후 광해군 시대의 국가목표가 무엇보다도 생존문제에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선의 만주출병-명나라에 대한 후금의 도전(6)
번호 198 글쓴이 닉 조회 58 점수 5 등록일 2006-11-23 23:54 대문 0 톡톡 0
누르하치는 1616년에 홍경노성에서 나라 이름을 후금으로 하고, 칸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후금으로 한 것은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차지한 금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겠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대내외적인 선전포고다.
이때 후금은 일부 부족만 제외하고 여진을 통일한 상태라 마음놓고 명에 대해
전쟁을 할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는 2년 뒤 후금은 행동을 옮긴다.
후금군이 명나라 요동의 무순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이 공격으로 명나라와 여진족간의
장기간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17세기의 동아시아의 혼란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명에 대해 7가지의 원한을 토로한 뒤, 군사 1만을 이끌고
무순성을 공격했다. 무순지역은 철를 많이 나는 지역이며,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교역의 중심지였다. 후금의 철기 기병 1만의 위용에 놀란 무순성의 성주 이영방은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했다. 후금군 1만은 무순성을 점령하자, 이곳의 재물이나
사람들을 만주 내지로 다 옮기고, 그 곳을 황폐화 시키고,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어, 후금군은 요동총병관 장승음(張承蔭)이 이끄는 구원군 1만이 근처에 도착하자,
쉴 기회도 주지않고 단번에 공격하여 대패시켰다.
그 열세를 몰아 후금군은 더욱 남하하여 주변 부락을 약탈하고는 점령한 지역을
포기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명나라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이전부터 국경문제, 무역문제로 여진과
명은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충돌은 없었다. 누르하치의 성장이 우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안의 상황은 그래도 참을 만 했다. 여진 내부의 전쟁이 발생했을 뿐
이지, 명나라를 직접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이 무순지역은 여진족들이 생필품을 구입하던 교역장소이기 때문에 이 곳을 누르하치가
쳤다는 것은 사생결단하고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을 뜻한다.
명나라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명의 조야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술렁거리면서 이 기회에 후금을 손봐줘야 한다고
한다는 내용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군이 편성하였다.
조선의 만주출병-조선에 원병을 요구하는 명(7)
번호 199 글쓴이 닉 조회 58 점수 5 등록일 2006-11-23 23:55 대문 0 톡톡 0
명나라는 이 기회에 후금을 손 봐주기 위해서 원정군을 편성하면서 조선과 북관에 원병을
청했다. 여기에서 북관은 누르하치에게 밀려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던 해서여진의 예혜 부족이 그들이다.
오랑캐는 오랑캐로 친다는 전통적인 주변정책인 이이제이로 명나라는 원병을 청한 것이다.
명나라 내부 사정이 안 좋기 때문에 명군은 말 잘 듣는 오랑캐인 북관, 조선을
동원하여 말 안 듣는 오랑캐 후금을 치겠다는 발생이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이다.
이이제이의 차원에서 이렇게 조선에 원병을 요구하는 명나라는 이런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지 허풍은 쳤다. 명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한다는 등, 요동을 잃어도
명나라는 영토가 크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그러나 조선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상국이 조선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라등 이상한 헛 소리를 하면서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 내부에서는 이런 명의 요구에 두파로 나누어 설전이 오갔다.
광해군을 비롯한 소수의 인물들만이 반대했고, 신하들 대부분은 찬성했다.
명나라 병력으로는 후금의 병력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광해군으로써
조선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수 없는 처지다.
이 사실은 진짜 조선보다도 요동에 주둔하는 명나라 군사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명나라는 재조지은 이라는 명분으로 압박했고, 조선 내부에서도 같은 명분으로
명을 도와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광해군은 명의 요구에 대해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막기로 했다.
원병을 요구하는 명나라 주체는 황제가 아닌 요동도사라는 것을 문제삼아 칙서가 없는 이상
보낼 수 없다고 맞섰다.
또한 나약한 군사력, 조선의 피폐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 북경으로 사절단들을
여러 차례 보냈다. 사절단을 보낼 때마다, 국서에는 조선의 내부 사정으로 도저히
병력을 파견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한결같이 강조하였다.
광해군이 보낸 4번의 사절단중에 3번은 원정군 총사령관 양호에게 걸려 발이 묶였고,
하나의 사절단만 북경에 들어가 소식을 전했지만, 명나라 조정은 조선의 사정을 무시하고
원병을 보내라고만 성화였다. 결국, 그 사절단은 황제의 칙서만 가지고 조선에
돌아오면서 광해군의 외교적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소수의 사람만 반대하고, 대부분의 신료들이 찬성하는 분위기라서 황제의 칙서가 조선에
날아오자, 신료들은 더욱 채근에 힘을 가했다. 결국 안팎으로 협공당하는 입장에 처한
광해군은 결국 출병을 결정한다.
당시 조선 신료 대부분이 광해군의 편에 섰다면, 아마도 광해군은 명에 병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명이 먼저 조선을 치겠다는 협박을 한다고 해도, 조선은 병력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외부보다는 내부의 반발에 결국 항복하고 만 것이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북파 대부분이 출병에 찬성했다는 사실은 광해군에게는 꽤나 큰
실망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의 반대는 광해군이 그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만주출병-조선의 원정군 준비(8)
번호 200 글쓴이 닉 조회 60 점수 10 등록일 2006-11-23 23:56 대문 0 톡톡 0
광해군은 출병을 결정하고 나서 조선군 총사령관으로 강홍립을 임명한다.
강홍립은 어전통사( 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인물이었다. 통역관 출신의
문관을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문관이 군의 수반이 되는 조선의 전통에 따른 것지만,
속은 다르다.
광해군 생각에 원정군의 사령관은 군사적인 재능보다는 장차 마주치게 될 명군과 후금군
사이에서 유연하고 무리없이 행동할 수 있어야 할 인물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명군과
말이 통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선택한 것은 탁월했고,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증명했다.
1만명의 전투병을 뽑기 위해서 조선 정부는 평안도 3500, 전라도 2500, 황해도 2000,
충청도 2000명을 징발했다. 병력을 징집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각 도에 관원들은 파견하고
뽑아 놓은 장정들은 서울로 불러 모으는 과정에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
스러워졌다.
병력만 뽑으면 뭐 하나! 군수품도 마련해야 했다.
군량으로 들어갈 쌀과 잡곡은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거두어들였다. 또,
명나라가 요구한 말 1천필은 주로 제주도에서 충당했다.
원정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시기는 겨울철 이기 때문에 방한복을 준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재료인 면포를 마련하는 비용은 서울과 개성에 사는 백성들의 몫으로
돌렸다.
이렇게 요동으로 파견할 병력을 모으는 과정은 조선 팔도 전체를 난리통으로 만들었다.
1만의 병력을 모으는 것이 이렇게 힘든가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의
경제가 피폐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200년 전의 조선군이 대마도의 왜구나 북쪽의 야인들을 토벌하러 갔을때에 파병된
병력이 거의 15000-17000명인 상태지만,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아니였고 일반 백성들도
파견한 것 조차 몰랐던 것와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조선이 원정군을 준비하는데, 왜 힘들었을까?
첫째는 임진왜란의 여파로 인해서 조선의 경제는 피폐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이 막 끝난 당시에 전결은 174만결에서 30만결로 줄어들었고, 인구도 1/3로
줄어든 상황이라서 20년이 지난 후에도 완전 회복이 안된 상황이었다. 약간의
회복만 했을 뿐이니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광해군의 궁궐 공사로 인해서다.
조선 말기에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했지만, 그 여파로 자신은 실각 당하게 될
명분을 줄 수 뿐만아니라, 조선 경제를 망쳐놓았다.
조선 말기에 대궐 공사가 이럴진대, 당시에 더 어떻게는가!
광해군은 십년간 토목공사를 자주 벌여 경복궁 이외에 불탄 궁궐을 대부분 재건했고,
또 새로운 궁궐들도 완성했거나 진행중이었다.
특히 인경궁은 경복궁의 칸 수에서 10배나 되는 대규모 공사이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은 큰 편이었다.
이런 광해군의 궁궐 공사는 조선의 재정을 압박했고, 민중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을때, 원정군을 소집한다는 것은 더 조선의 경제를
힘들게 했고, 조정대신들은 토목공사의 중지를 건의했다고 한다.
세번째는 명나라 사신에게 들어가는 접대비도 문제였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 정부에 은을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명으로 흘러들어가는 銀은 엄청 많았다.
매번 명나라 사신들이 올때마다 조선은 그들에게 많은 양의 은을 제공했다.
특히 일정한 뇌물 수준의 은이 아니라 나라 재정의 1/3 정도 되는 막대한 규모의 은이
한번 방문하는 중국 사신에게 들어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절단도 명나라 고위 관료들에게 받칠 은을 가지고 갔다고 하니
조선은 銀으로 인해서 망국론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광해군 시절에는 특히 심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조선의 경제는 망할 대로 망한 상황에 1만 정도의 원정군을
준비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몇 개월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원정군을 편성했다.
총사령관은 앞서 말한 대로 강홍립이었고, 부사령관은 김경서다.
김경서의 본래 이름은 김응서인데, 그는 임진왜란때 일본군과의 전투에 여러 차례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용장이다. 그가 실질 원정군을 운영할 사람이다.
원정군은 전투병 1만을 포함하여 비전투병까지 합치면 대략 13000-15000 정도 된다.
삼수병 시스템으로 된 조선군은 좌영, 우영, 중영의 3영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병력은 조선군 가운데서도 정예병들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임진왜란 이후로
오랜 세월을 공들여 키운 조총수 5000명은 광해군으로써는 더더욱 아까웠다.
오랜 시간을 끌면서 조선에 머물던 강홍립의 조선군은 결국 명나라의 채근으로 1619년
2월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만주출병-명군에 합류한 조선군(9)
번호 201 글쓴이 닉 조회 59 점수 5 등록일 2006-11-24 00:00 대문 0 톡톡 0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간 다음에 광해군은 또 다른 부대 2만명을 후금과 접해 있는 국경에 배치시켜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
조선군의 보급을 책임지는 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압록강에 배치하여 만주에서 전투를 치르는
조선 원정군의 보급을 담당한다.
광해군이 만반의 준비를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조선 원정군은 만주로 들어가 명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요청으로 조선군이 가져온 말 1000필은 명군에 인계했다.
명나라는 이 원정을 위해 역전의 명장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총사령관 양호, 좌익 북로군 이여백, 우익남로군 사령관 유정이 그들이었다. 양호는 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면서 울산전투를 지휘했고,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 마림, 유정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이다.
이때 참가한 명나라의 병력은 대략 7만 전후했고, 조선과 북관에서 온 병력 25000명까지 합치면 10만 정도 된다.
명군은 47만이니, 20만 이니 허풍을 떨어지만, 실제 병력이 이 정도이니 기가 막혔다.
당시 후금은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대략 5-6만의 병력을 운영하면 결전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수비군 보다 공격자 수가 3배 이상이 되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명나라는자체 병력이 모지라니 조선과 해서여진의 객병들을 끌어다가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명나라 병졸들의 자질 또한 열악했다. 여진기병들은 단체 생활과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정예병들이었다. 이들에 비해 명나라 기병은 그냥 말탄 보병으로 불렸다. 이미 무순 전투에서 경험한
관계로 말탄 보병이 철기의 여진군과 싸우면 개박살되는 것이 상식이 된지 오래다.
명군은 원정을 하기 위해서 각지에서 어중이 떠중이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병졸들은
훈련마저 제대로 시키지 않아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강홍립이 광해군에 올린 장계에서는 당시 조선군이 합류한 유정의 군대에서는 대포가 하나도 없는 것로 되어 있다.
유일한 우세무기인 화력마저 없다는 사실과 함께 명군이 조선군만 믿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와 광해군은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당시 유정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의 유일한 화력이 바로 조선군의 조총수 5000명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군 지휘부가 가장 탐냈던 병력이 바로 조선의 조총수들이었다. 기병이 대부분인
명군이 후금의 철기 기병들과 정면에서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명군에서는
후금의 돌파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화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조선군 조총수들은 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미 요동에서 구원병 요청을 처음 했을때에도 처음 했던 요구가 조총수 7000명을 확보하여
대비하라는 것이었고, 원정군이 강을 건너기 전부터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조총수부터
빨리 들여보내라고 성화였다. 조선 원정군은 우익 남로군 유정 휘하에 편입되지만,
좌익중로군 사령관 두송은 조선 조총수들을 데려갈려고 안달이었다. 결국 조총수 일부가
두송의 부대에 배치되어 최전방에 섰다고 전한다.
원정을 주도할 명군이 수천의 조선 조총수에게 화력을 기대했다는 것은 명군의 한계이며
전쟁에서 패할 처지였다.
명군은 화력이외에도 착용하고 있는 장비에서도 문제점을 노출되었는데, 훗날
여진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 지휘관들의 전사장면이 이것을 증명해주었다.
두송과 반종안은 각각 머리와 등에 적의 화살이 무수히 박혔다는 사실은 명나라 대신
서광계를 경악했다. 지휘관들의 투구와 갑옷이 형편 없다는 점에 충격을 받고, 그 아래의
장졸들의 무장 수준도 ' 더 말을 해 무엇이겠는가!' 라고 한탄했다.
그 뿐만 아니라 각 군의 장수들간의 인화가 이뤄지지 않아 명군은 싸움하기 전부터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당시 명군의 전략을 알아보자.
양호는 두송과 마림 휘하의 북로군과 중로군을 서북의 방향으로부터 누르하치의
수도인 흥경노성을 향해 전진시키고, 이여백은 심양으로부터 흥경노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했으며, 유정에게는 조선군을 이끌고 남동의 압록강 방향으로 적을 치도록
했다.
삼면으로 동시에 후금을 협공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이런 명측의 움직임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점령하고 있던 성곽과 요새를 포기한 채 명군의 주 침공 경로상에 있는 사르후와 자이피안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내선(內線)의 이점을 살리는 각개격파였고, 항복한 명의 장수인 이영방은 명군이 복수의 경로를 취할 경우, 병력을 집중시켜 그 중 하나의 경로만을 두들기면 된다고 누르하치에게 진언하였다.
조선의 만주출병-후금의 팔기군제도(10)
번호 202 글쓴이 닉 조회 95 점수 5 등록일 2006-11-24 00:01 대문 0 톡톡 0
후금의 통치 제도이자 군대 동원 제도는 「팔기(八旗)」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수렵민의 사회 제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민을 8개의 구사(固山, 기[旗])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8개의 군단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팔기는 깃발의 색깔에 따라 정황(正黃), 정홍(正紅), 양홍(鑲紅), 정남(正藍) (이상 좌익), 양황(鑲黃), 정백(正白), 양백(鑲白), 양남(鑲藍) (이상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양[鑲]’은 깃발의 테두리를 가리킨다).
팔기 제도의 최소 단위는 니루(牛彔, 좌익)라고 하며, 각 니루로부터 명목상 최대 300명의 갑사(甲士)를 동원할 수 있었다. 니루 다섯에 잘란 하나를 두고, 잘란 다섯을 모아서 구사 하나가 두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대로 되지는 않아서, 각 구사 휘하의 니루의 수가 반드시 25개였던 것은 아니었다.
니루에는 지도자로서 니루 어전(牛彔額眞)이, 잘란에는 잘란 어전(甲喇額眞)이, 구사에는 구사 어전(固山額眞)이 두어져 있었다. 이들은 행정의 장이면서 동시에 군대의 장교이기도 하였다. 또한 각 구사는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손자, 조카인 버일러(貝勒, 기왕[旗王])에게 속해 있었고, 버일러는 구사 하나의 병력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 군의 부사령관으로서 분견대를 지휘할 때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군대를 동원할 것인가는, 각 니루로부터 몇 명의 갑사들을 동원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명목상의 상한선은 300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건국 초기에는 각 니루로부터 50명의 갑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심양(瀋陽)·요양(遼陽) 전투 이후에는 100명의 갑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외에 구사의 버일러는 구사 휘하의 니루로부터 선발된 바야라 병(兵)이라고 불리는 100여 명의 정예 병사들을 친위대로서 보유하고 있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얼마만큼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1만 명에서 6만 명에 이르기까지 제법 편차가 있지만, 이 전역(戰役)에는 후금의 존망이 걸려 있었던 것만큼, 최대한의 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하나의 니루로부터 동원된 병사들의 수는, 동고로(路)에 배치된 500명의 병사들을 세 명의 니루 어전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00명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후금이 동원한 병력은 약 2만 몇 천 명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후금군은 아직 화기를 장비하고 있지 않았고, 냉병기(冷兵器)를 주 무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인 갑사는 중장기병으로 병사들은 갑옷을 착용하였고(마갑은 없었음), 활과 화살을 반드시 장비하였으며, 긴 무기로서 큰 칼과 창을, 짧은 무기로서 단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후금군이 장기로 하는 전술은 기병에 의한 포위 전술과, 화살을 연사하면서 기병 돌격을 실시하는 것이었지만, 누르하치는 명군이 사용하는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도보 전투 공병으로서 이용한다는 전술을 고안해 두었다.
조선의 만주출병-심하전투(11)
번호 203 글쓴이 닉 조회 93 점수 5 등록일 2006-11-24 00:04 대문 0 톡톡 0
명나라 유정이 이끄는 우익 남로군에 합류한 조선군은 처음 보는 만주땅이라 행군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명군에 따라 행군하기 시작했다.
공격목표인 흥경노성까지의 행군로는 만만치가 않았다. 조선군이 국경을 넘어 명군에
따라 진군했을때 숙영하면서 지나야 했던 앵아구(2월 24일) 양마전( 2.25일) 배동갈령(2.27일)
우모채 (2월 28일) 마가채( 3월 1일) 심하 ( 3.2- 3.3일) 부차 (3월 4일)로 이어지는 지역에는
험준한 산과 강이 널려 있었다. 때로는 하늘을 가릴 만큼 나무가 들어찬 밀림을 헤쳐나가야
했다. 배동갈령에 도착한 2월 27일에는 말의 배 부분까지 물이 차오르는 강을 네번이나
건너야 했다.
날씨마저 원정군의 편이 아니였던지 워낙 추위가 심해 2월 25-26일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병사들의 옷과 군장이 모두 젖었다. 갈수록 체력소모가 심해지는데, 군량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병사들의 모습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홍립은 조선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유정에게 연락하여 행군을 늦쳐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유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군이 관망하는 자세가 보일 것이고, 느릿느릿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던지 군기를 잡을 생각으로 유정은 아예 조선군 진영에 명군 장교
두명을 파견하여 감시를 하였다.
유정은 이들에게 조선군이 고분고분하지 않을 경우 군법으로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감시관 명나라 장교들은 조선군에 대해 의심이 심했다. 걸핏하면 칼을 빼들어 위협했고,
총사령관 강홍립조차도 그렇게 대했다.
강홍립은 힘들게 가는 조선군에게 전진하라는 말밖에 못했다.
광해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라고 당부했지만, 만주로 들어선 이후로 그렇게 쉽게는
되지 않았다.
명군의 대부분은 기병이고, 조선군은 대부분은 보병들이었다. 그러니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꼴이 되니 조선 병사들은 그들이 짐어 지고 가는 물품들을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이 군량이었다. 군량 보급도 재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휴대한 군량마저
버리니 얼마 안 지나 조선군은 체력도 고갈되는 상황에 빠졌다. 몸이 피로하니
전의도 상실했다.
2월 28일에 우모채에 도착한 조선군은 일부 진영에서 군량이 바닥나자, 명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명군은 무시했다. 하는 수 없이 조선군은 여진부락을 약탈해서 양식을 얻어
해결했다. 당시 조선군은 보급부대를 따로 두어 원정군의 보급 지원을 담당했지만,
군량을 싣고 압록강을 건널 배가 부족한데다 원정군의 전진속도가 빨라 따라 잡지 못했다.
전진하던 조선군은 3월 2일날 심하에서 후금군과 조우했다.
당시 조선군을 기습공격을 가한 후금군은 대략 기마병 600명인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조총수들의 사격으로 이들을 패주시켰다.
이때는 후금이 소수의 병력을 출동시켜 조선군의 전진을 늦추게 하고, 피로를 쌓게 할
목적인것 같았다.
가벼운 승리에 도취할 겨를도 없이 얼마 안 지나 조선군은 또 다른 전투를 치러야 했는데,
그것을 허기와의 전투라 했다. 이때도 소수의 적군이 출몰하여 진군을 막았는데,
조선군이 위협 사격과 함께 적군 기병대에 돌진을 하자, 적군도 얼마간 싸우다가
퇴각했다. 적을 패주시킨 후에 조선군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인근 부락을 약탈하여
양식을 찾아내 그것로 빻아 가루로 만들고 죽을 끓여 겨우 허기를 채웠다.
군량지원도 받지 못하고, 소유한 군량도 별로 없는 관계로 조선군은 행군 도중에 민간에서
약탈한 식량으로 의존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3월 4일 먼저 전진했던 유정군을 따라가던 조선군은 부차에 도착할 당시에 후금군 3만명의
기습을 받는다. 조심스레 나아가던 조선군이 전방에서 울리는 대포 소리를 들었을 때,
유정 휘하의 명군은 이미 기습을 받고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이런 결과가 되었을까?
조선의 만주출병-심하전투(12)
번호 204 글쓴이 닉 조회 84 점수 5 등록일 2006-11-24 00:07 대문 0 톡톡 0
본래 명나라 각 진영은 3월 1일부터 동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주력을 지휘하는 두송은 전공을 탐낸 나머지, 다른 부대와 연계하지 않고 하루 일찍 먼저 행동을 개시하였다.
두송은 북쪽 변방에서 공적을 세운 장군으로서,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상관의 통제를 듣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었다.
3월 1일 두송의 부대가 접근하자, 후금의 축성 부대는 자이피안 산에서 철수하였다. 두송은 물이 불어난 혼하(渾河)를 건널 수 없는 차영(車營)을 후방에 남겨둔 채, 차가운 강을 건너 사르후 산을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한 번 혼하를 건너 자이피안 산을 공격하였다. 후금의 호위 부대는 저항하면서 후방의 키린하다로 후퇴하였다.
8시경, 명군이 침공해 왔다는 보고를 받은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집결한 주력에 출격을 명하였다. 후금군은 다이샨의 정홍·양홍기를 선두로 하여 속속 팔기의 각 부대가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누르하치가 사르후와 키린하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레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다이샨과 버일러, 그리고 중신들은 키린하다를 구원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키린하다에 증원 부대로서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들의 작전을 들은 누르하치는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하면 다른 명군도 동요할 것이라고 보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한다고 결정하였다.
사르후 공격 부대는 좌익의 4기에 우익의 2기(양황, 양남)를 더한 것이었고, 정백과 양백의 2기는 자이피안의 명군을 감시하였다. 6기의 장병들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것을 틈타, 사르후 산을 습격하였다. 사르후의 명군은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데다 시계가 저하된 시간대에 습격을 받았기에, 화기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근접전에 말려들어 괴멸되고 말았다.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한 뒤, 사르후를 공격하였던 6기와 감시를 맡았던 2기, 그리고 키린하다의 부대가 세 방향에서 두송의 주력부대를 합동 공격하였다. 세 방향에서 기병의 습격을 받은 두송의 부대는 혼하를 두 번이나 건너면서 전투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상태였고, 어스름한 어둠 중에는 역시 화기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괴멸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두송, 왕선, 조몽린 등 간부들도 전사하였다.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을 무렵, 마림의 부대는 샹갼하다로 진출해 있었다. 마림은 명장 마방(馬芳)의 아들로서 요동총병관을 맡은 경험이 있었지만, 시나 글씨에 뛰어난 문인으로서 알려진 장군이었다. 명군 장수 반종안은 마림이 겁쟁이이기 때문에 다른 장군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양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마림의 용병술은 신중하고 견실하였기에 이 점이 반종안에게는 다른 맹장들에게 비교해 보았을 때 겁쟁이라고 비쳤던 것이었겠지만, 마림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강적과 맞선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3월 2일 북로군의 접근을 알게 된 후금군에서는, 다이샨이 300명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마림은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날 밤의 숙영지까지 후퇴하였다. 그 곳에서 3중의 참호를 파고 호 밖에는 대포를 배치하였으며, 그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배치하여 사방 어디로부터의 습격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엄중한 진형을 펼쳤다. 이와 같이 엄중한 포진을 본 다이샨은 누르하치에게 지원군을 계속 요청하였다. 제 2부대를 지휘하는 반종안은 1.6Km 정도 떨어진 피에훈 산에 진형을 펼쳤다.
그 날 아침, 혼하를 건너지 않았던 좌측 중로군의 공염수, 이희필이 이끄는 차영과 기병 등 약 2천 명의 부대가 와훔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은 마림의 부대와 맞서게 한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정백기)와 함께 1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이 부대를 급습하였다.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여 수비를 단단히 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공병으로서 투입하여 전차의 방어선을 돌파하도록 하였고, 그 뒤를 이어 기병으로 습격하여 중로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다이샨으로부터의 급보를 받은 누르하치는 병력을 뒤에 남겨둔 채 소수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왔다. 누르하치는 명군의 진형을 관찰한 뒤, 근처의 산을 점령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를 알아챈 마림이 병사들을 그 산으로 이동시키면서 양군이 격돌하기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좌익의 2기를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지만, 명군의 움직임이 빨랐기에 다이샨은 말에 올라탄 채 명군에 대하여 돌격을 감행하였고, 전투는 격렬한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승패를 판가름한 것은 증원군이었다. 후금군의 경우 6기가 대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전장에 도착하는 자부터 속속 전장에 투입된 것에 반해, 명군의 경우 지원군이 없었고 피에훈 산의 명군은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패주하였고, 극심한 추격을 받았다. 마림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유격 마암(麻岩) 등 다수의 장수와 병사들이 쓰러졌다.
반종안은 용기는 있었지만 장수로서의 자질이 없었고, 교전 중의 마림군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산 속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은 채 단지 전차를 늘어세운 방어진만을 펼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력을 재집결시킨 뒤 피에훈 산을 공격하였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먼저 나아가게 하고, 말을 탄 병사들이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전차 뒤에서 사격을 퍼붓던 명군에 대하여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돌입하여 전차를 제거하였고, 그 곳으로 기병들이 돌입하여 반종안의 부대를 섬멸하였다.
북관의 지원군은 중고성(中固城)까지 진출한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서 철수하고 말았다.
북로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누르하치가 병력을 재집결시키고 있을 무렵, 명군이 동고·후란로를 따라 진격중이라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누르하치는 전군을 허투알라로 철수시킨 뒤 다음 목표를 남로군으로 잡았고, 우측 중로군에 대응하기 위해 허투알라에 4천 명의 정예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측군의 괴멸을 알게 된 양호는 우측의 양군에 대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로군을 이끌고 있던 유정에게는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임진왜란이나 사천(四川) 지역의 반란 진압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무게가 120근(약 72Kg)에 달하는 큰 칼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도(劉大刀)」라는 별칭을 가진 맹장이었다. 유정이 평소에 구사하는 전술은 부대에 녹각목(鹿角木)을 보유하도록 한 뒤 순간적으로 녹각목을 늘어세워 적의 습격을 저지하고, 이렇게 하여 벌어둔 시간에 배치한 화기를 사용하여 적의 전위 부대를 격파한 뒤 기병으로 역습을 가한다는 것으로서, 그는 화기의 운용에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였다.
남로군의 이동 경로는 다른 부대와 비교할 때 길었고, 유정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조선군의 보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기에,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유정의 부대는 마을을 불태우며 전진하였고, 2일에는 동고로에서 토보 등이 이끄는 후금의 경계 부대 500명과 교전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거둔 뒤, 두송이 허투알라로 앞서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두송이 전공을 독차지하지 않을까 하고 유정은 초조해 했고, 4일 녹각목을 버린 채 포위 공격 장비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강응건의 부대, 강홍립의 조선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무렵 다르한 히야(정황기)가 이끄는 후금군의 선발대가 토보의 패잔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서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당시 유정의 명군은 주변의 여진부락을 약탈하느라 미처 대오를 갖추지도 못한 상태이다.
유정은 조금 후퇴한 뒤 아부다리 언덕 위에 포진하고서 다른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 다이샨은 홍타이지(정백기)에게 우익의 지휘를 맡긴 뒤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로부터 아부다리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자기 자신은 좌익을 이끌고 서쪽으로부터 진격하였으며, 후방으로부터는 다르한 히야의 복병이 습격을 가해 왔다. 명군은 삼면으로부터의 돌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전멸하였고, 유정은 전사하였다.
유정의 부대가 전멸하였을 무렵, 부하 장수인 강응건의 부대는 조선군과 함께 부차 들판에서 천천히 전진 중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다이샨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홍타이지를 선두로 하여 부차로 나아갔고 강응건의 부대와 대치하였다. 강응건의 부대는 장창(낭선[狼筅])과 화기가 층을 이룬 채 포진하고 있었다. 명군의 화기 사격이 시작되었을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고, 화약 연기가 명군에게 불어 닥쳤다. 이것을 호기로 삼은 후금의 기병들이 화살을 연발하면서 돌격하여 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강응건은 수백 기를 이끌고 달아났다. 나머지 휘하의 장졸들은 후금의 포로가 되었거나
전사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후금부대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홍립의 조선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만주출병-심하전투(13)
번호 205 글쓴이 닉 조회 103 점수 10 등록일 2006-11-24 00:08 대문 0 톡톡 0
근처의 명군이 기습당한 사실이 인지한 강홍립은 각 진영의 대오를 정돈했다.
자신은 중영을 이끌고 행군로의 좌측 언덕으로 올라가고, 좌영은 그보다 앞서 있던 또 다른 언덕에 진을 치게 했다. 우영은 남쪽의 언덕에 진을 치게 했다. 좌영은 벌판에 머물다가
강홍립의 명령으로 진을 옮기는 사이에 후금의 기마대의 기습을 받았다.
강홍립은 우영 소속의 병력을 보내 좌영을 구원케 했다. 조선군의 감시관인 명나라 장교 두명이
명군 진영갔다가 돌아오면서 명군의 전멸 소식을 알렸다. 좌우 두 진영에서 전투태세를 갖출 무렵 조선군 진영으로 역풍이 불면서 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명군의 상황이 조선군에게도 재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그 틈에 후금군의 기마대가 들이닥쳤다. 조선군의 포수들이 총을 일제히 뽐아 내어 후금군 병사들이 쓰러졌다. 갑자기 기습공격을 당한 입장이라 기마대의 전진을 막는 장애물들을 설치하지
않아 적군의 기마대들은 사상자가 생겼어도 빠른 속도로 조선군 진영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바람에 조선군의 특기인 조총수들의 사격이 소용없게 되었고, 순식간에 좌우영 병력들은
거의 함몰되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후금의 철기들을 맞이한 조선 보병들의 저항은 있으나
마나였다.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 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등 지휘관들뿐 만아니라 수천 명의
조선군들이 전사했다. 우영장 이일원은 겨우 몸을 빼서 중영으로 도망쳐왔다.
이렇게 조선군의 두영이 무너졌지만, 어째든 이유인지 후금군은 나머지 중영의 조선군을
공격하지 않했다.
도망 못 가게 포위만 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항복을 하고만다.
그러나 항복하는 과정에서 여러 견해가 있었다.
[광해군 일기]나 그 당시 출전한 장수 이민환의 저서[ 책중일록]에는 내용이 약간은
틀리지만, 후금이 먼저 역관을 찾고 강화를 맺자고 요청을 해오자, 조선군은 어쩔수 없이
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강홍립의 조선군이 먼저 항복을 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째거나 조선군이 패전하고, 그 결과 후금과 항복 논의를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3.4일 밤 항복 논의가 오고가는 과정에서 조선군 진영에서는 적의 포위망을 뚫어보자는
제의가 나왔다. 하지만, 포위를 뚫을 조선군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후금군의 기마대가 추격할 것이고 그러면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조선군 수뇌부들은
무시해 버렸다.
결국 이날 밤 조선군 부사령관 김경서는 화의를 논하면서 후금장수와 같은 방에서 잤다.
예상 밖으로 후금 지휘부들은 조선 장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며 적대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것을 본 조선군은 결국 항복의 결심을 굳혔고 그 다음날 조선군은
정식으로 항복했다.
이때, 총사령관 양호가 내린 퇴각 명령은 이여백에게는 도달하였다. 부장 하세현은 남로군을 구원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이여백은 퇴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여백의 부대는 후금의 초계 부대 20명을 보고 도주하는 등 동요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온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군의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누르하치의 내선을 이용한 교묘한 작전 지휘로 인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후금의 전과는 명이 공식 발표한 것만 하더라도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 무기의 손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고 한다. 명과 후금의 최초의 결전은 후금의 대승리로 끝났다.
역사학계는 조선군이 후금군과 전투를 벌인 심하전투를 포함하여 당시 조선, 명의 연합군과
후금군이 벌였던 전투 전체를 보통 살리호 전투라고 부른다. 역사학계에서는 보통 이 전투를 명청교체의 분수령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3월 5일 강홍립과 김경서는 후금의 호위속에 흥경노성으로 들어가
누르하치를 알현했다.
조선군 장수들을 제외한 나머지 장졸들을 후금군은 분류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윤기나는 사람들은 먼저 뽑아서 이들을 후금군은 모두 죽여버렸다.
양반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을 후금군이 죽여 버린 이유은 유교적인 지식을 쌓은 이들 때문에 나중에 말썽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그런 것같다.
또 건장한 사람들을 뽑아 이들을 자신의 병력으로 충원했고, 나머지는 농작에 종사시킬 요량으로 농장으로 보냈다. 한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그들에게 조선군 포로 수천명은 적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 후금군에 조선군 포로들이 편입했다는 사실은 1624년 모문룡이 이끄는 가도의 명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함경도 지역의 국경까지 진군하여 그 근처에서 후금의 포로를 잡아 심문한
결과 심하전투에서 항복한 조선군출신이라는 것을 알아내 밝혀졌다.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걸치면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청국으로 끌려갔고, 그 결과
많은 수의 조선인 장정들이 청국의 병력에 편입되 조선인 팔기가 창설된다.
청의 사료에 기록된 조선인 팔기의 명단 인원만해도 3000명이라는 것만 봐도 대단한 수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조선의 조총을 만드는 기술과 조총을 쏘는 인력들이 여진에 흡수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억류된 조선군중에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간 사람은 겨우 1400명 밖에 안되었다.
대부분은 탈영으로 조선땅에 밟은 사람들이고, 중간급 장수들 일부만 송환 형식으로
조선에 돌아갔고, 10명 정도의 상위급 장수들과 장졸들은 그대로 억류되었다.
대략 10% 조선인만 조선 땅에 들어오니 조선에 미칠 파장은 굉장히 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역사학계에서는 심하전투에 출전했던 조선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주로 조선군이
애초부터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 그에 관련된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를 했는지의 사실에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의 사망숫자가 최고 9000명에 가까웠고,대략 5000명이 살아남은 것을
추측한 결과 , 애초부터 미리 항복을 할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어째든 이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이 전투로 인해 명나라, 후금, 조선이 겪을 파장이 더 중요한 것이다.
조선의 만주 출병 - 출병 이후의 조선의 내부 변화. 마지막편.(14)
번호 206 글쓴이 닉 조회 164 점수 20 등록일 2006-11-24 00:09 대문 0 톡톡 0
광해군은 이 심하전투 이후로 외교적으로 성공을 했을 망정,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였다.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서다.
원병을 보낸 이후로, 광해군이 예상한 것과 같이 조선 사회에 심각한 사회경제적 악영향을 끼쳤다.
원정군에 동원된 장정들 중에 10%만 조선에 들어와기 때문에 그 나머지 1만명이 넘은
장정들이 죽거나 억류 당해 조선의 심각한 인력난을 겪게 했다.
그 당시 조선인구 가운데서 1만여명의 장정들이 사라져 버린 후유증은 만만치가 않했다.
특히 평안도를 비록한 서북지방의 사정은 여의치 않아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고을마다
많게는 400-500명, 적게는 100-200명에 이르렀다. 평안도의 각 고을에서는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평안도가 입은 피해는 다른 지방으로 도미노 처럼 퍼져, 평안도의 서부 방어에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병력을 뽑아 평안도로 올려보냈다.
남도 병사들이 북도에서 근무하다보면, 북도 병사들과 풍속, 언어 차이가 나 트러블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서로 다툼이 생겼고, 이 와중에 대규모 탈영, 자살 같은 문제점이 생겼다.
정묘호란 당시에 후금군이 잡은 조선군 포로중에 남도 병사들은 모두 학살했고, 북도 병사들을 후금군에 편입시킨 것도 이 지역적인 감정을 이용한 것이다.
평안도 수령에 시달리고, 북도 병사들과 다툼이 생기니 그 여파는 다시 남도 병사들에 의해서 생긴 민간인 피해로 이어진다.
이런 인력난외에도 조선에서는 심하전투 이후로 여진이 조선을 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다녀,
서북지방과 서울, 경기도 지역은 피난, 탈영, 약탈등의 조짐이 보여 혼란했다.
만주 출병과 후에 그 후금에 대한 방어대책으로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더 거두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 충청도 , 도성 주변은 그 여파로 화적까지 날뛰었다.
또한 박박 긁어 모아 보낸 병력이 만주에서 죽거나 억류당했을 때, 아버지나 형제를 읽은 고아, 남편을 빼앗긴 과부 등 이산 가족이 속출하여 조선사회는 슬픔의 한 소리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궁궐 밖의 조선 사회는 만주출병 전후하여 그것에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골머리를
앓았지만, 궁궐 안에서의 정치적인 문제도 만만치가 않했다.
광해군은 심하 전투를 계기로 외교에서 목소리가 확실히 커졌다.
" 거 봐라, 나는 이미 애초부터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적들은 40년동안
군대를 길러와 아제 한창 기세가 오르는 판이다. 그런데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군대를
호랑이 속으로 밀어넣었으니 전군이 패하여 항복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다."
대충 광해군이 신료들에게 퍼부은 질타는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선경지명에 대한 자신감과 신료들에 대한 냉소의 분위기가 묻어 있었다. 하여튼 광해군은 이 심하 전투 사건 이후로 외교에서 거의 주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광해군은 미묘한 변화를 이끌었다.
위기가 닥쳐오면 인재가 아쉬운 법이다. 원병을 보내라는 명의 요구와 후금과의 관계등의
전반적인 대외정책과 내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의 대북파로는
한계이니, 서인과 소북파, 남인 계통의 사람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 非대북파 인물들을 측근으로 기용하여 정치판에 새로운 변화를 꾀기 시작했다.
비대해진 대북파를 견제하는 심리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이때 , 중용된 이귀나 이서, 김류등 서인들이 1년 후 인조반정을 통해서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부터 쿠데타를 모의해왔던 서인들이므로 광해군 정부에서의 중용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킨 꼴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분위기와 함께 산림에 있는 재야 유림 세력들은 심하 전투 이후로
완전히 광해군에게 등을 돌렸다.
자신들의 세계관에 반대되는 일을 한 광해군을 그들은 임금으로 보지 않았다.
폐모 사건과 함께 광해군이 해온 외교적인 정책들이 그들을 조정으로 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었던 것이다. 인조 반정이 성공한 이후 대다수의 양반들이 지지를 벌여 온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 광해군은 심하 전투를 계기로 생긴 외부 변화와 내부 변화중에 전자는 잘 대처했지만,
내부 변화에는 실패하여 결국 몰락하고 만다.
조선군이 파병되어 싸운 심하전투는 우리에게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였다.
이 전투이후의 영향으로 조선은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투 자체만으로 광해군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 영향때문에 광해군은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게 된것이다.
가뜩이나 광해군이 추진했던 궁궐 공사로 인해서 민심은 원망이 심했는데, 심하 전투 이후
경제, 사회적으로 더 피폐해져 인심은 완전히 광해군에게 등을 돌렸다.
재야의 양반들도 광해군이 등극 한 이래로 버려 놓은 국책 사업과 폐모 사건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심하 전투를 계기로 광해군이 주도로 하는 외교 정책에 더욱 반감이
사 이들도 하층민과 같이 조정에 등을 돌렸다.
거기에 심하 전투로 계기로 자신의 외교 행보에 제동을 거는 대북파에 실망한
광해군은 견제하기 시작했고, 서로간의 밀착이 깨지기 시작했다.
당시 광해군은 고립된 상황이었다. 자신의 핵심 세력과 균열이 있었고, 민심과 유림도
떠난 이때에 광해군은 서인들이 이끄는 수백명의 반정군에 의해서 쉽게 무너졌다.
결국 심하 전투로 광해군의 생명이 단축된 것이다.
* 한명기의 저서 [광해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및 기타 여러 인터넷에서 찾아낸 문서를 참고로 하여 이 글을 썼습니다.
[1/2] 지나가다 작성일 2006년11월24일 07시57분
쭉~~ 읽어보니 광해군시대나 지금이나 꼴통새끼들의 사고는 변동이 없다.
사대주의에 찌들어버린 새끼들이 나라걱정보다 대국의 위상을 더 생각하고 자빠졌으니 결국 병자호란이 생겼고 지금의 이라크파병과 북한침공설이 나오는 것이다.
노무현이 광해군 입장이라더니 틀린말이 아니다.
미국과 꼴통새끼들의 압력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이럭저럭 유지해나가는 노무현이 대한하다.
결국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김용갑, 송영선, 좆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이것들을 역사가 심판할 것이지만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도 통탄스럽다.
생각같아서는 저것들을 그냥 모조리 몰살시켜버려도 속이 시원치않을거같다.
[2/2] 이사금스 작성일 2006년11월24일 21시30분
현대사의 전신인 근대사, 근대사의 전신인 조선 중기사. 20세기 일백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원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임란과 명군참전이 빌미를 제공했지만 결국 인조반정 ( 물론 성공한 반란자들의 변명) 이 이후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근원적인 사건이 아니었나 합니다. 이후에 전개된 서인-노론-척사위정 정책론이 결국 국망-식민지-분단-좌우상쟁-전쟁-남북이질화에 이르렀습니다.
광해왕이 실권하게 된 현실적 요인인 '심하전투'에 대한 깊은 분석과 대중성을 고려한 史料 전개, 잘 읽djT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대중성에 맞춰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읽기 편케 시리즈화 하고 간격을 넓혀 주시는 배려는 고마우나, 한 편의 대중성 논문이 되기 위해선 길더라도 한 편으로 함이 어떨까 합니다. 이 곳 역사문화방에 들리는 분들은 아마 한 편의 완전한 글 읽기를 즐겨하리라 생각합니다.
史實에 근거한 새롭고 깊은 사관을 가진 사학자이신듯 한데. 앞으로 서프에서도 님의 글을 계속해서 볼 수 있길 바라며, 그간의 사관을 정리한 글들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서재 소개도 해주심이 어떨까 합니다. 건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