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5가해96-2-1.zip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 阿僧祇 世界七寶로 持用布施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하여 持於此經하고 乃至四句偈等하여 受持讀誦하여서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것으로써 칠보를 가지고 보시할지라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 이 경전을 가지되 이에 네 줄의 글귀인 게송 등에 이르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사람들을 위해 연설해 준다면 그 복이 저보다 뛰어나니라.”
淸峯:함이 있는(有爲) 복은 덧없는(無常) 것이요, 샘이 없는(無漏) 공덕은 항상(有常)한 것이고 끝이 없음을 마지막 강조하신 부분이다. 아승지는 수로써 셀 수 없는 무한대의 수량을 말한다. 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자비심의 발로로 보살의 대승심인 자비희사의 마음을 스스로 내게 되어 일체중생을 위해 이 오묘한 불법(眞理)을 설해 주게 되며 그 공덕은 한량이 없는 것이다.
圭峰:偈에 云하되 化身示現福은 非無無盡福이라하며 論에 云하되 雖諸佛이 自然化身作業이나 而彼諸佛의 化身說法이 有無量無盡無漏功德이라하다 二는 明說法不染이라.
규봉:게송에 이르기를 “化身을 드러내 보이는 복은 다함 없는 복이 없지 않다” 하셨으며, 논에 이르기를 “비록 모든 부처님이 자연히 化身으로 業을 지으나(교화하는 일) 저 모든 부처님의 화신 설법이 한량없고 다함 없으며 샘이 없는 공덕이 있다” 했다.
(2)는 說法의 물들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云何爲人演說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위해 연설해야 하는 것인가?
冶父:要說有甚難이리오 卽今便請하노니 諦聽諦聽하라
說誼:只如四句要說함에 有甚難이리오 卽今便請하노니 諦聽諦聽하다.
야부:說하고자 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지금 곧 청하노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설의:다만 四句를 설하고자 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지금 곧 청하노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冶父:行住坐臥와 是非人我며 忽喜忽嗔이 不離這箇이나 ?這箇驀面唾하리라 平生肝膽一時傾하니 四句妙門都說破로다
說誼:日用行住坐臥와 瞋喜是非가 畢竟承誰恩力인가 要之總不離這介이니 只這介이라 堂堂?面露規模하니 了了圓成無比格이로다 然雖如是나 莫作這介會이니 若作這介會하면 便是眼中屑로다 不作這介會하여 方得契如如리니 比如淸?池四面皆可入이며 亦如猛火聚四面不可入이로다 妙門은 諒斯在하니 如今에 都說破로다.
야부:다니고 머무르고 앉고 누우며 옳고 그르며 사람과 내며
문득 기뻐하고 문득 성냄이, 이것을 여의지 않았으나
다만 이것이라 하면 당장 낯에 침을 뱉으리라
평생의 肝膽을 일시에 쏟아 놓으니
四句의 묘한 법문을 모두 설파했도다.
설의:날마다 쓰는, 다니고 머무르고 앉고 누우며 화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름은 필경 누구의 은혜의 힘을 받은 것인가? 요컨대 모두 이것을 여의지 않음이 다만 이것이라. 당당히 눈 앞에서 보아 규모를 드러내니 명확하게(了了)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라 비교할 데가 없도다.
그러나 비록 그렇긴 하나 이것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지니, 만약 이것이라는 알음알이를 지으면 문득 이것은 눈 속의 티로다 이것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아야 바야흐로 如如함에 계합할 수 있으리니 비유컨대 맑고 깨끗한 못에는 사면으로 모두 들어갈 수 있음과 같으며 또한 맹렬한 불구덩이에는 사면으로 들어갈 수 없음과 같으니라. 묘한 법문(妙門)은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지금 모두 설파했음이로다.
청봉착어:일체 처 일체 시에 낱낱이 이를 여의지 못하니
이것을 이것이라 하면 어긋남은
본래 이름도 없고 상이 없으니
한 물건도 없어 식정(識情)으로 가릴 수 없음이로다.
不取於相하여 如如不動하느니라.
상을 취하지 않아서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아야 하느니라.
淸峯:법을 설하되 상견(相見)으로 설하지 않으며 무념으로 설해야만 한다는 말씀이다.
說誼:法界는 本無說이로되 對緣而有說이라 說法이 無自性하나 終不離法界니 若是法界體이면 爲有인가 爲空인가 爲非空有인가 有空은 不空이요 空有하면 不有니 旣非空有이면 中亦非中이니라 是知法界體上에 三相이 元來空寂이니 云何演說하여 得與法界相應去在이리오 說理而卽事이나 不取於空을 說事而卽理라 不取於有이며 說中而卽邊이라 不取於中이니라 故로 云하되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라하니 合卽法非法之二相이요 開卽有無中之三相이라 離三相而安住實際하고 坐一如而曾不動搖이니 說是經者가 妙造乎此則不見有我爲能度하며 有生爲所度하며 不見有法爲可說有人爲能說이니라 所以로 道하되 始從鹿野苑으로 終至跋提河에 於是二中間에 未曾說一字라하니 伊?則內絶己躬하고 外無可化이니 終日度生하되 未曾度生이요 舌頭無骨하고 語下無迹이라 終日說示하되 未曾說示니라 雖彌天敎海와 滿地葛藤이라도 如紅爐上一點殘雪이니 如是解者는 是眞正解이며 如是說者가 是眞實說이니라.
설의:법계는 본래 말할 것이 없는 것이로되 인연에 대함에 말함이 있게 되도다. 설법이 자성이 없으나 마침내 법계를 떠나지 않으니 만약 이것이 법계의 體라면 있는 것인가? 空한 것인가? 空한 것도 있는 것도 아닌 것인가? 空이 있으면 空이 아님이요 有가 空하면 有가 아닌 것이니 이미 空도 有도 아니라면 그 중간도 또한 중간이 아닌 것이니라.
알지어다. 법계의 바탕(體)위에 三相(空, 有, 非空有)이 원래 공적한 것이니 어떻게 연설하여야 법계와 더불어 상응할 수 있으리오. 진리(理)를 말하는 것이 곧 속제(事)인 것이나, 空을 취하지 않음을 방편(事)으로 설함이 곧 진제(理)인 것이라 有를 취하지 않는 것이, 가운데를 설하면 곧 邊인 것이라 가운데를 취하지 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응당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 하셨으니, 합하면 곧 法과 非法의 二相이요, 열면 곧 有, 無, 中의 三相이로다. 三相을 여의고 實際에 편안히 머물러 一如(한결같은 여여부동)하게 앉아서 일찍이 동요치 않음이니 이 경을 설하는 자가 妙하게 이에 나아간즉 내가 있어서 능히 제도한다는 것으로 보지(소견) 않으며 衆生이 있어서 제도할 바라고 보지(소견) 않으며, 法을 가히 설할 것이 있으며 사람이 있어 능히 설한다고 보지 않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이르되 "처음 녹야원으로부터 마침내 발제하(구시라)에 이르기까지 이 두 중간(그 사이)에 일찍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하시니, 이러한즉 안으로는 자기를 끊고 밖으로는 가히 교화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이니 종일토록 중생을 제도하되 일찍이 중생을 제도하지 않음인 것이요, 혀끝에는 뼈가 없고 말 아래 자취가 없음이라. 종일토록 설하여 보이되 일찍이 설하여 보이지 않음인 것이니라. 비록 하늘에 가득한 가르침 바다와 땅에 가득한 뒤엉킨 말(言)들(葛藤)이라도 붉게 타는 화로 위에 한 점 멸해버리는 눈덩이와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참으로 바르게 아는 것이며 이와 같이 설하는 이것이 참으로 실다움을 설하는 것이니라.
청봉착어:법성의 세계는 본래 설할 것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방편을 지어 드러내 보이니
설하는 법이 자성이 없고 이 법계를 여의지도 않으니
설하여 제도한다는 것은 불꽃에 떨어진 눈송이와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