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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이씨방 원문보기 글쓴이: 광이24민영
고려귀부 반대 저항한 칠원(漆原. 당시는 칠토 칠제국, 가야지역)의 자성이족
1. 칠원(漆原)은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昌原)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김해(金海)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초기에 칠원현으로 고친 후,
선조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 때 현(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관할의 칠원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원, 칠서, 칠북의 3면으로 편성되어
함안군(咸安郡) 칠원면이 되었다.
칠원읍(漆原邑)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안군의 읍이다. 함안군의 동북에 위치하며,
북으로 칠서면, 칠북면과 접하고, 동남쪽으로 창원시에 인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끼고, 남쪽으로 창원시와 인접하고 있다.
칠서면, 칠북면과 함께
삼칠 (三漆, 칠원 (漆原), 칠서 (漆西), 칠북 (漆北)에서 칠 (漆) 자만 따서 만들어진 말)권을 이루고 있다.
칠원은 삼한시대에 변진 12개국의 하나인 접도국이었으며, 가야시대에 와서는 칠포국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칠토현이라 하였으나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칠제현으로 개칭되었다.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칠원으로 칭하였으며, 1018년 현종 9년에 금주(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906년 함안군과 합병되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칠원면이라 칭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칠북면 운서리 및 운곡리의 4개마을이 편입되었고, 2000년 9월 29일 무기리 무기마을을 무기1리, 무기2리 마을로 분동하였다.(10개리 26개마을)
2.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
8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 보이는 골포국(骨浦國 : 지금의 昌原 또는 馬山), 칠포국(柒浦國 : 지금의 咸安郡 漆原), 고사포국(古史浦國 : 지금의 鎭海 또는 固城),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에 나오는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泗川), 고자국(古自國 : 지금의 固城, 고사포국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보라국(保羅國 : 위치 미상) 등이 이에 속한다.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국역삼국사기』(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
•「복원가야사」 상(천관우, 『문학과 지성』 28, 1977)
3.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눌지왕때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가야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와 연결을 시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넘어온 왜를 격퇴하고, 가야까지 침공하면서 전기 6가야 연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왜곡하고, 그것을 예로 들어 일본이 가야 또는 백제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가야사에 있어 일본이 점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고성군의 연혁
삼한시대에 변진12국 중의 고자미동국 또는 포상8국 중의 고자국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6가야 중 소가야국이었으며,
그 유적으로 보이는 고분군이 고성읍과 동해면 등에 남아 있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고자군(또는 고자국)을 두었으며, 757년에는 고성군으로 고쳐 강주(진주)에 속했다. 이때 영현으로 사수현(사천시)·상선현(뒤에 영선현 지금의 영현면 일대)을 거느렸다. 고려에 들어 995년에 고주자사를 두었다가 1018년 현령으로 강등시켰다. 1266년 지주사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고성현은 현재의 통영시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고성군보다 넓은 영역을 관할했다. 또한 당시 남해안의 방어상 중요한 요지였음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입증되어, 1604년 거제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현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이전했다가 두룡포가 1617년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으며 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0년 통제영이 있던 고성군 남쪽 지역을 분할하여 진남군을 신설함으로써 고성군의 영역이 대폭 줄어들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진주의 두입지였던 문선면·남양면·영현면·영이곡면·오읍곡면·개주면 등이 편입되어 면적이 다소 넓어졌으나, 남양면(지금의 사천시 중심가)은 1912년 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었다.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함안군 咸安郡
동쪽은 창원시, 서쪽은 의령군·진주시,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의령군과 창녕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8°16′∼128°35′, 북위 35°09′∼35°23′에 위치한다. 면적은 416.64㎢이고, 인구는 6만 915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8개 면, 248개 행정리(88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 있다.
역사
이 지역은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강의 유역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함안면·칠원읍·군북면 등지의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으며, 그 분포 지역과 양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활발했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삼한시대에는 변진 안야국(弁辰安耶國)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아라가야(阿羅加耶), 즉 6가야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력한 나라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현재 가야읍 말산리·도항리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그들이 남긴 유적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함안군은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아시라국(阿尸良國, 阿那加耶라고도 함)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郡)을 삼은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법흥왕 때의 신라 세력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시량국은 경주에 가까운 지방의 이름과 혼동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라가야가 멸망한 시기에 대하여도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신라가 창녕지방에 진출하였던 진흥왕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이곳을 함안군으로 개칭하고 현무(玄武)·의령(宜寧) 등 2개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본래 현무현은 소삼현(召彡縣)이고 의령현은 장함현(獐含縣)인데, 이 때 각각 개칭한 것이다. 한편, 지금의 칠원지방은 본래 칠토현(漆吐縣)인데 이 때 칠제현(漆隄縣)으로 개칭하여 의안군(義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983년(성종 2)함주(咸州)로 개칭하여 자사(刺史)라는 지방관을 두었다가 1018년(현종 9)함안군으로 환원하여 금주(金州: 지금의 金海)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를 설치했다가 1373년(공민왕 22) 군으로 환원하였다. 칠제현은 고려 초에 칠원(漆原 또는 漆園)으로 개칭하고 1018년금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현에 감무를 두었는데 이 때 금주의 영현이었던 구산현(龜山縣)이 칠원의 영현으로 편입되었다. 현무현은 소삼부곡(召彡部曲)으로 강등되었는데, 그 상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413년(태종 13)칠원현에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함안도호부(咸安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음 해 군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수는 함안군 732호 3,266인, 칠원현 337호 1,330인, 구산현 104호 300인이었다.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는 명망이 높은 선비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이곳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곳 출신으로 중종 때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은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43년(중종 38)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의 紹修書院)을 세웠다. 1587년(선조 20) 문명이 높았던 정구(鄭逑)는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방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그 때 사귄 인사와 문인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적지 않다. 『함주지(咸州誌)』는 그가 군수 재임 시 편찬한 읍지이다.
임진왜란 후 칠원현은 읍세가 약해져 1601년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 병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지금의 창원시 삼진지방(진동면·진전면·진북면)은 1601년(선조 34)∼1617년, 1629년(인조 7)∼1639년의 2차에 걸쳐 함안군에 편입되었다가 창원부로 복귀하는 등의 복잡한 변동을 겪었다. 『함안군읍지』와 『칠원현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 수는 함안군 5,198호 2만 5362인, 칠원현 2,567호 1만 953인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칠원현이 군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칠원군은 함안군에 통합되고, 진주군의 상봉·하봉·사봉 등 3개 면을 편입하였으며, 구산면이 창원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주군에서 편입된 3개 면이 다시 진주군으로 이관되고, 1933년죽남면이 군북면에 편입(10개 면)되었다. 1944년여항면에 산서출장소를 설치하여 10개 면·1 출장소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낙동강방어선의 최전선으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 지역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전란 후인 1954년 군청을 함안면에서 현 위치인 가야읍으로 이전하였다. 1969년 이후 낙동강 및 남강 상류에 다목적댐이 계속 건설되면서 지역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1977년에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이 지역 교통사정이 크게 개선되었다.
1971년 5월 10일여항면에 산서(山西)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대산면 산서리가 가야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가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군북면에 월촌(月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2월 15일칠북면 운서리와 운곡리가 칠원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여항면 산서출장소가 의창군(지금의 창원시) 진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99년군북면 월촌출장소 폐지하였고 2015년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8면의 행정구역으로 오늘날까지 이른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인 군북면 하림리의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 보물 제159호)은 801년(애장왕 2)의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어서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군북면 사촌리의 원효암칠성각(元曉庵七星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호), 함안면의 함안대산리석불(보물 제71호),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석조여래좌상(長春寺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장춘사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장춘사대웅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호), 함안면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咸安主吏寺址獅子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들이다.
함안면 봉성리의 함안향교(咸安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1호)와 칠원읍 용정리의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이 있다. 또한, 함안면 괴산리의 무진정(無盡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조려의 손자 참(參)이 은퇴 후 정자를 세우고 연당을 파서 꾸민 한국식 정원이다.
이 밖에도 대산면 장암리의 낙동강변에 반구정(伴鷗亭),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합강정(合江亭), 군북면 원북리에 채미정(菜薇亭) 등 유서 깊은 정자가 많이 있다. 산인면 운곡리에 오비각(五備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2호), 대산면 서촌리에 악양루(岳陽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0호) 등이 있다.
함안면 봉성리·괴산리, 칠원읍 예곡리, 군북면 동촌리, 칠서면 회산리 등지에 지석묘들이 남아 있다. 가야시대의 유적은 가야읍의 함안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함안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가야리고분군 등이 있는데, 말산리 제3·4호분은 1917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 서원의 창설자인 주세붕을 모신 주세붕묘역(周世鵬墓域, 경상남도 기념물 제33호)은 칠서면 계내리에 있고, 주세붕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은 무릉리의 무산사(武山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에 봉안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많은 전적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잡고책판 및 수구집·구봉집책판(武陵雜稿冊板·守口集龜峰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가야읍 신음리의(謹齋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대산면 장암리의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澗松文集冊板·金羅傳信錄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산인면 모곡리의 백운래홍첩(白雲來鴻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칠원읍 무기리의 국담문집책판(菊潭文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등이 대표적이다.
칠북면 화천리와 검단리에는(咸安化川農樂,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 등이 전해 온다.
칠원읍에는 함안무기리연당(咸安舞沂里蓮塘, 중요민속자료 제208호)·함안무기리주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 군북면 원북리에는 조선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생가인 어계생가(漁溪生家,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하림리에는 그 일가 5대의 부부묘가 한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조안묘소(趙安墓所, 경상남도 기념물 제34호)와 동산정(東山亭)이 있다.
『함주지』에서는 아라가야의 옛 궁터를 가야읍의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다. 산성으로는 함안면과 가야읍에 걸쳐 있는 함안성산산성(사적 제67호)을 비롯하여, 함안면 대산리의 동지산성(冬只山城), 가야읍 사내리의 봉산성(蓬山城),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산성 등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들이 있으며, 함안면의 함안읍성은 삼포왜란에 대비하기 위해 1510년(중종 5)에 축성한 것이다.
가야읍 검암리에는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8호)가 있다. 군북면 명관리에는 도천재단서죽백(道川齋丹書竹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산인면 내인리에는 박진영장군유품(朴震英將軍遺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다.
또한 칠원읍 용산리에 있는 함안층의 새발자국화석(咸安層――化石, 천연기념물 제222호), 칠북면 영동리의 함안칠북면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9호), 법수면 대송리의 함안법수면의 늪지식물(천연기념물 제346호), 여항면의 함안외암리공룡발자국화석(경상남도 기념물 제68호)과 산인면 모곡리의 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들이다.
민속
이 고장에는 씨름·그네뛰기·소싸움·백중놀이·두레삼·유두놀이·달불놀이 등 농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민속놀이들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단옷날에는 씨름대회나 그네뛰기가 성대히 열리며, 특히 소싸움은 중부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기를 모으는 놀이이다. 백중은 이 지역에서 농부날·초연(草宴)·풋굿·호미씻기 등으로 불리며, 이 날 농사가 잘 된 집의 머슴을 우두머리로 삼아 삿갓을 씌우고 황소를 태워 마을을 돌게 하고 주인은 주식을 푸짐하게 낸다.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두레삼의 양속은 현재 그 흔적을 찾기 힘드나 두레삼의 각종 민요는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다. 유두에는 유두연(流頭宴)이라 하여 이웃·친척들이 냇가나 계곡에 나가 술과 음식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대산면 대사리에서는 마을사람들이 정월 대보름날 안곡산성(安谷山城)에 모여 달불놀이를 즐긴다.
삼칠지역(칠원읍·칠서면·칠북면)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인 삼칠민속줄다리기는 윗줄과 아랫줄로 팀을 구성하여 3전2선승제로 진행되며, 윗줄은 구성·유원·장남·오곡·예곡·용정·무기리 주민으로 구성하고 아랫줄은 용산·운서·운곡리와 칠북면 및 칠서면 주민으로 구성된다.
이 고장에서는 음력 10월 10일이나 정월 보름날 주로 노거수를 중심으로 동제를 지낸다. 그 대표적인 예를 칠북면 영동리의 회화나무, 가야읍 검암리와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 칠서면 무릉리의 은행나무 등에 대한 동제에서 찾을 수 있으며, 특히 함안면 봉성리의 느티나무는 수나무로서 득남의 영험이 있다 하여 이를 바라는 부녀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무릉리의 은행나무는 주세붕이 심은 것이라 전하며 위인전설과 습합되어 제사의 대상이 된다. 대산면 장암리 장포(長浦)마을의 왕버들나무는 이무기의 승천설화를 간직한 것으로, 가뭄이 계속되면 동민들이 이 나무를 중심으로 기우제를 올린다. 그 밖에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는 잎의 발아를 보고 농사의 길흉을 점칠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 옛말에 ‘울고 왔다 울고 가는 함안 원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임하는 도중에 험한 산세를 보고 낙심하지만 살아보면 순후한 풍속과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서 이 고장을 떠나게 될 때에는 도리어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경상남도 사람들은 함안군을 두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고들 한다. 즉, 이 고장은 서북쪽이 낮고 동남쪽이 높은 까닭에 물줄기가 모두 남강이 있는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때문에 왕조시대에는 이 고장을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불경스런 땅인 ‘역수(逆水)의 고장’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무척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 고장에는 서부 경상남도처럼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는 구비전승보다 윤리적이고 교화적인 내용의 설화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가령 늙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삶아서 바쳤는데 나중에 보니 동자삼(童子蔘)이더라는 효도담이나, 병든 시어머니가 겨울에 전복을 원하자 하늘의 덕으로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는 「복정유래담(鰒井由來譚)」(산인면), 늙은 어머니를 위해 효자가 심은 앵두나무가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효자나무전설」(가야읍), 왜구가 겁탈하려고 달려들자 죽음으로 정조를 지킨 처녀의 화신이라는「절부목전설[節婦木(乳木)傳說]」(군북면) 등의 설화가 그 예이다.
또한 시화류에 자주 등장하는 장성기생 노아(蘆兒)의 이야기도 있는데, 고을 수령들이 노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나라에서 탄핵사를 파견, 치죄하려 했으나 오히려 노아의 꾐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이를 ‘함안차사’라고 하는 것은 ‘함흥차사’고사에서 음과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상남도 전역에 퍼져 있는 「재산을 아끼기 위하여 지세를 바꾸다 망한 이야기」가 산인면 입곡리의 하천과 연결되어 전승되고 있으며, 칠원읍의 「장사바위전설」은 두 장사의 힘겨루기 유형을 표본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운지복(開運之福), 파수(巴水)곶감에 얽힌 전설(傳說), 파산익삼(巴山翼蔘), 동자삼과 외아들, 부자공씨와 도사, 상사나무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에는 논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따라서 농업노동요가 발달하였는데, 이 고장에서는 모내기노래를 「정자」라고 한다. 점심참이 올 때가 되어 독촉하며 부르는 「모내기노래」를 들어 보면 “삼동이야 삼동이야 맛보느라 늦었는가/ 뒤축없는 신을신고 끄이느라 늦었는가……남산이라 저모롱이 점심이라 더디오네/ 미나리라 시금초라 맛보니라 더디온다/……늦었다오 늦었다오 점심참이 늦었다오……”처럼 부른다. “외와내자 외와내자 이모판을 외와내자/ 들어내자 들어내자 이모판을 들어내자……”는 「모찌기노래」이다.
「보리타작노래」는 구(句)마다 ‘에호’라는 뒷소리를 붙여 부르는데 “일꾼들/ 어이/ 도리깨 들게/ 어이/ 보리타작 우리하세/ 어이/ 에호에호 에호에호/ 에호/ 어깨가 지쑥/ 에호/ 오김이 주춤/ 에호/ 힘써 때거라/ 에호/ 넘어간다 보리도/ 에호/ 여기도 알보리/ 에호/ 저기도 알보리/ 에호/……뒤으로 물러서/ 에호/ 발로 골라라/ 에호/ 도리깨 돌려라/ 에호/ 에호에호 에호에호/ 자 우리 쉬어가지고 한잔 먹고 합시다.”처럼 한다. 앞소리꾼이 노동의 리듬에 맞추어 흥을 돋우기도 하고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면서 앞소리를 메긴다.
이 고장에서 불리는 「망께소리」를 들어보면 “어이여라차/ 천근망께는 공중에 놀고/ 어이여라차/ 망께소리를 잘도하면은/ 술을 많이 준단다……”처럼 부른다. 부녀자들의 「베틀노래」는 “바람은 솔솔 부는날 구름은 둥실 뜨는날/ 월궁에 노던선녀 옥황님께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와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하실일이 전혀없어 금사한필 짜자하고/ 월궁으로 치치달아……”처럼 부른다.
경상남도 일원에서 전승되는 「담바귀타령」이 이 고장에서도 불리는데 “귀야귀야 담바귀야/ 너국을랑 어디두고 조선국에 나왔노/ 조선국이 병이많아 약줄라고 내가왔다/ 그씨좋다 씨를받아 담장안에 모를 붓고/ 단장안에 웽기내여 애숭대숭 전잎따서/ 애양애양 엮어내어 쎄글안에 걸었다가……살림맛이 요만하면 패가할이 뉘있을고……”처럼 담배씨를 재배하여 피우기까지의 정황을 노래하고 있다.
읍·면
1. 가야읍(伽倻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42.21㎢, 인구 1만 940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말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여항산 바깥쪽이 되므로 산외면(山外面)이라 하여 말산리 등 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곡면(牛谷面)·산내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아라가야의 옛터가 되므로 가야면이라 하였다. 1954년 군청이 함안면에서 가야면 말산리로 이전되면서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73년대산면 산서리가 편입되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에는 조남산(鳥南山, 139m), 북서부에는 천제봉(天祭峰, 225m)·계티고개·장고개, 동북부에는 배나무실고개가 있어 읍의 경계를 이룬다. 검안천이 읍의 동쪽으로 흐르고 광정천(廣井川)이 중앙을, 신음천(新音川)이 북서부를 각각 북류한다.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며 수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수도작이 발달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그 밖에 채소류와 참깨·들깨 등의 특용작물 재배와 배·복숭아·사과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최근에는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 등 시설원예 농업으로 경제작물을 재배하여 수출에 활기를 띠고 있다. 교통은 읍의 북부를 남해고속도로가, 남부를 지방도 및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달리고 있다.
문화유적은 말산리와 가야리의 고분군, 광정리의 성산산성, 사내리의 봉산성, 검안리의 조순장군비·동산정, 신음리의 근재집책판 등이 있다.
말산(末山)·검암(儉巖)·광정(廣井)·도항(道項)·신음(新音)·설곡(舌谷)·춘곡(春谷)·사내(沙內)·가야(伽倻)·묘사(苗沙)·산서(山西) 등 11개 리가 있다.
2. 칠원읍(漆原邑)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0.61㎢, 인구 2만 10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성리이다. 본래 칠원군의 지역으로 칠원현청이 있었으므로 현상리면(縣上里面)이라 하여 용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원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 회문리·신산리의 각 일부와 내서면(內西面) 예곡리를 합하여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83년칠북면의 운서·운곡 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지형상 면의 동부와 서부가 모두 산지이며 중부에 있는 약간의 평탄지역으로 광로천이 흘러간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산지에서는 고령토가 약간 산출될 뿐 특산물은 없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예곡리의 지석묘, 구성리의 성지·삼층석탑, 용산리의 사지, 무기리의 사지·석조부도·삼층석탑·연당·주씨고가·국담문집책판, 용정리의 덕연서원 등이 있으며, 용산리에 천연기념물인 새발자국 화석이 있다.
구성(龜城)·용산(龍山)·유원(柳原)·장암(藏巖)·오곡(梧谷)·예곡(禮谷)·용정(龍亭)·무기(舞沂)·운서(雲西)·운곡(雲谷) 등 10개 리, 26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3. 군북면(郡北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0.47㎢, 인구 6,79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대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안도면(安道面)이라 하여 중촌리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곡면(大谷面)의 신창리 등 7개 리와 남산면(南山面)의 봉남리 등 2개 리를 합하여 군북면이라 하였다. 1933년 죽남면(竹南面)의 10개 리가 편입되었고, 1980년 월촌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진주 경계인 남쪽에는 오봉산·괘방산(掛榜山, 451m) 등이 있어 대체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남강유역으로서 평야지대를 이룬다. 이 평야지대의 최저지대가 유현리의 유전늪인데 지금은 이 늪도 매립하여 공장이 들어서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배추·무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의령∼마산간 국가지원지방도 67호선, 지방도 1004호선등과 연계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문화유적은 동촌리의 지석묘군, 명관리의 지석묘군과 도천재단서죽백, 하림리의 방어산성·조안묘소·방어산마애불, 사촌리의 원효암 칠성각·심원사지·삼층석탑, 영운리의 송방사지(松放寺址)·송방사지오층석탑, 원북리의 어계생가·채미정 등이 있다.
덕대(德垈)·중암(中闇)·소포(小浦)·동촌(東村)·사촌(舍村)·오곡(烏谷)·명관(明館)·모로(慕老)·사도(沙道)·장지(長池)·유현(柳峴)·월촌(月村)·박곡(朴谷)·수곡(藪谷)·영운(迎運)·하림(下林)·원북(院北) 등 17개 리, 37개동 120반 92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4. 대산면(代山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56㎢, 인구 3,94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평림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내대산면(內代山面)이라 하여 평림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대산면(外代山面)의 산서리 등 6개 리를 합하여 대산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산서리가 가야읍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남쪽은 안국산(安國山, 338m) 등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에 면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토질이 사질 퇴적토로 이루어진 평야지대로서 수박하우스 재배지로는 천혜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655㏊ 수박하우스 집단재배지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다. 교통은 칠원면∼의령군 부림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사리의 안곡산성(安谷山城), 서촌리의 아현사지(阿峴寺址)·악양루, 장암리의 합강정·반구정과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 등이 있다.
평림(平林)·부목(富木)·대사(大沙)·옥열(玉悅)·하기(下基)·서촌(西村)·구혜(九惠)·장암(長巖) 등 8개 리가 있다.
5. 법수면(法守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4.61㎢, 인구 3,19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대산면(大山面)이라고 하여 걸산리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륜면(馬侖面)의 내(內)·외(外)·주물(主勿)·우거(于巨) 등 4개 리를 합하여 법수산의 이름을 따서 법수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하였다. 면의 남쪽에 천제봉 줄기의 산지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북부를 남강이 둘러싸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의령군 정곡면 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강주리에 조려묘, 윤내리에 한극검(韓克儉)의 정려가 있으며, 대송리에 천연기념물인 늪지식물이 있다.
우거(于巨)·강주(江州)·윤내(輪內)·윤외(輪外)·주물(主勿)·대송(大松)·백산(白山)·사정(沙亭)·황사(篁沙) 등 9개 리가 있다.
6. 산인면(山仁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6.89㎢, 인구 2,888(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모곡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화개산 아래라 하여 산익면(山翼面)이라 하고 입곡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인면(安仁面)의 송정리 등 5개 리와 외대산면(外大山面)의 산서리와 옥지리 일부, 산외면(山外面)의 검암리 일부를 합하여 산익과 안인의 이름을 따서 산인면이라 하고 7개 리로 개편하였다. 대체로 동·남·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고, 서부는 약간의 평야지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농공병진된 지역으로 2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동부에는 1991년 산인특별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에는 수리시설이 용이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비닐하우스 시설을 통하여 각종 원예작물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면의 중앙을 횡단하고 있으며, 남해고속도로와 의령∼마산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내인리의 박진영장군유품, 신산리의 포덕산성(飽德山城), 모곡리의 백운래홍첩·고려동유적지·문암산성(門巖山城), 입곡리의 성점산성(城岾山城)·자미정(紫薇亭) 등이 있다.
모곡(茅谷)·입곡(入谷)·신산(新山)·송정(松汀)·내인(內仁)·부봉(釜峰)·운곡(雲谷) 등 7개 리가 있다.
7. 여항면(艅航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8.35㎢, 인구 9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암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두 골짜기의 물이 합친다 하여 병곡면(幷谷面)이라 하고 주동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비곡면(比谷面)의 6개 리와 양전면(良田面)의 일부를 합하여 면 내의 산 이름을 딴 여항면이라 하고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71년 산서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 산서출장소가 의창군 진전면(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편입되었다. 동부에 광려산(匡廬山, 720m), 남부에 서북산(西北山, 739m)·봉화산, 북부에 여항산 등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주동리에서 발원한 쌍계천은 검암천의 상류로 남강의 지류가 된다. 여항산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토를 지켜주었던 요충지로 호국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성산이다.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이 고장은 농작물 수확이 다른 면에 비하여 뒤떨어지며 특산물도 없다. 수도작과 축산업이 주민의 주 소득원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주서리의 주리사지(主吏寺址), 외암리의 조곡사지(朝谷寺址)·조곡사지삼층석탑 및 공룡발자국화석 등이 있다.
외암(外巖)·내곡(內谷)·주동(主東)·주서(主西) 등 4개 리가 있다.
8. 칠북면(漆北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32㎢, 인구 2,11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검단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북면(北面)이라 하여 봉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북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의 구포리 일부, 칠원면 죽청리와 영산군 길곡면(吉谷面)의 사촌리를 합하여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83년운서·운곡 등 2개 리가 칠원면으로 편입되었다. 동쪽과 남쪽은 작대산 등 산지가 많고 북쪽은 낙동강에 면하여 약간의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에서 흘러온 광로천이 칠서면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낮은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복숭아와 단감은 군내에서 생산량 제1위를 차지한다. 교통은 면내를 잇는 군도가 있을 뿐이어서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남리의 성지, 영동리의 장춘사·장춘사석조여래좌상·장춘사오층석탑과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있다. 특히 1919년 3월 9일 이령 연개장터 일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했던 곳으로 1976년 독립기념비를 세워 매년 기념, 문화행사 등을 실시하고 있다.
검단(檢丹)·화천(化川)·덕남(德南)·이령(二靈)·봉촌(鳳村)·가연(佳淵)·영동(榮東) 등 7개 리가 있다.
9. 칠서면(漆西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95㎢, 인구 6,1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계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서면(西面)이라고 하여 용중리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서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남북으로 긴 모양으로 남쪽에 약간의 산지가 있고, 낙동강과 면한 지역은 평야지대를 이루어 농산물의 산출이 많다. 이 지역은 대치리, 계내리 일대 107만평 규모의 칠서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함안군을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의 산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특히 복숭아·포도 등의 과일 생산이 많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회산리의 지석묘, 구포리의 고분, 계내리의 주세붕묘역, 무릉리의 무릉산성·주세붕영정·무산사와 무릉잡고 및 수구집·구봉집책판 등이 있다.
천계(天界)·회산(會山)·무릉(武陵)·구포(龜浦)·태곡(泰谷)·대치(大峙)·계내(溪內)·용성(龍城)·이룡(二龍) 등 9개 리가 있다.
10. 함안면(咸安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8.92㎢, 인구 2,6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성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상리면(上里面)이라 하여 신교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내면(山內面)의 동촌리 등 5개 리를 합하여 읍내면(邑內面)이라고 하여 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8년함안면으로 개칭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동부와 남부가 신지로서 여항산·광로산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발원한 하천이 봉성리를 거쳐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로 마늘의 생산이 많다. 그리고 주요 특산물은 파수곶감으로 이 고장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 하고 있다. 파수농공단지 등에 29개 기업체가 입주하여 가동되고 있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함안읍성을 비롯하여 괴산리의 지석묘, 봉성리의 지석묘군, 대산리의 동지산성·사지·석불, 강명리의 영대암지(靈臺庵址),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 봉성리의 함안향교, 괴산리의 무진정 등이 있다.
봉성(鳳城)·북촌(北村)·괴산(槐山)·대산(大山)·강명(康命)·파수(巴水) 등 6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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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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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통계연보』(함안군,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함안군지』(함안군지편찬위원회, 1992)
•『아라의 얼과 향기』(함안군, 1988)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남교육사』(경상남도교육위원회, 1980)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0)
•『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8)
•함안군(www.㏊man.go.kr)
가야(加耶)의 멸망(滅亡)과 그 영토의 후속처리 문제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투항해왔다.
540년에 신라가 대병으로 아시랑국(阿羅加耶:咸安)을 멸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 다음해인 16년(555)에 비화가야(非火加耶)인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561년에는 진흥왕이 하주(下州)인 창녕에 친행하였는데 현재에도 화왕산성과 목마산성 밑에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사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멸하였다.
정약용의 {강역고}에는 지증왕 6년(505)에 신라가 이사부를 보내 소가야를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천관우(千寬宇)는 이 년대가 잘못된 것으로 고성의 소가야는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할때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본다.
백제가 가야와 동맹관게를 구축하게 된것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왜에게 공격 당한 신라를 구하고 그들의 후원세력인 금관가야를 공격하고
404년에는 일본의 구주와 본토를 공략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야의 전기연맹이 무너지고 후기연맹이 성립되고 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당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공주(公州)로 천도하였다.
그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신라는 내물왕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으며 실성왕 11년(412)에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왕 8년(424)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눌지왕 34년(450)에 고구려의 변장이 실직원에서 사냥하자 하슬라성주가 군사를 보내 그를 공격해 죽인이후 38년(454)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해 왔다.
이로서 여제동맹은 깨어지고 39년(455)에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신라가 군원병을 보냄으로서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성립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내물왕은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인 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으며 고구려의 세력을 업고 귀국한 실성에게 피살되었는데 왕위에 오른 실성은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미사흔은 왜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도피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는 실성왕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극복하려고 나제동맹을 결성하게된 것이다. 소지왕 3년(481)에는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백제와 가야가 구원병을 보낸 사실을 보면 신라, 백제, 가야가 동맹관계를 유지해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있음을 볼때
백제와 가야가 동맹관계 유지해 오다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나고자하는 신라가 이들과 제휴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난 신라는 의성, 안동, 경산, 대구, 칠곡, 성주, 선산, 창녕, 울산, 양산, 부산(동래)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나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조여들어왔다.
이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가야는 백제와 계속적으로 결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밀어낸후 백제의 한강 유역마저 빼았음으로서 나제동맹이 결렬되고 백제(百濟)의 성왕이 554년에 신라의 관산성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에 가야, 왜의 구원병이 참전하고 있음을 볼때 가야(加耶)는 백제, 왜와 연결된 동맹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부터 562년 대가야가 멸망 당하기까지 신라가 가야의 서쪽을 조여왔는데 대가야가 멸망당한 후 그 땅은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으로 변하게된다.백제의 무왕 3년에 신라의 아막산성(雲峰)을 공격하였고 17년에는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공격했다.
25년네 신라의 석함(咸陽) 등 6성을 쳐서 빼았았다.의자왕 2년 7월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았았으며 8월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陜川)을 쳐서 성주 품석을 죽였다.
4년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5년 신라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7년 백제의 의직 장군이 신라의 무산성(무주군 무풍면)에 밑에 진군하여 감물(금릉군 개녕면),동잠성을 쳤으나 김유신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가야가 멸망한후 신라(新羅)는 합천, 거창, 고령, 함양, 고성, 함안, 창녕, 김해지방을
백제(百濟)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장수, 구례, 무주, 진주, 남해, 하동를 차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백제가 신라가 차지한 옛 가야 땅의 가장 깊숙히 침공해 들어간 것은 신라 40개의 성을 빼았은 후 합천에서 벌어진 대야성(大耶城) 전투였다. 이것은 이미 차지한 함양과 남쪽의 거점인 진주에서 공격한 것으로 40개의 성은 주로 이들 지역과 합천 중간에 위치한 거창과 산청지역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씨조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황(尹璜)은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냈는데, 이후의 수대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고려에서 칠원현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라 말기의 반란과 호족
지방 호족세력
고려 귀부 경순왕(敬順王. ? ~ 978년)
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1]
신라 김씨(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追尊)된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그의 친척 동생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워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
본관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 초기
경순왕은 이름이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3]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 '김실홍'(金實虹. 일명 仁慶)-추존
신흥왕 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강제적으로 목숨을 끊게 되고,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 당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大阿飡) 효종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4]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4]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편집]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왕자는 양국(讓國) 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황(굉,나주김씨)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고려 귀순 후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영조 22) 10월 14일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 연천군 장남면)에서 경순왕의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1월 29일에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1]
경순왕릉비는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있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 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비문 내용은 10여자 정도 남아 있는데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1] 이후 한국전쟁 당시 경순왕릉에서 300m 떨어진 고랑포리 시가 지역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65cm, 두께 16cm 이며, 상태는 1면만 겨우 남아 10여개의 문자만 판독되고,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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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귀부반대 경순왕 왕자(敬順王 王子) (마의태자)
, 912년? ~ ?)는 신라 하대의 왕족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죽방부인(竹方夫人)
소생의 첫째 왕자(王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왕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태자(太子) 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왕자(王子)가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
그의 동생 덕지(德摯) 및 이순유(李純由) 등도 이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아래와 같이 말을 하며,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이에 그는 통곡(痛哭)을 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를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도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었는데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고 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에는 경순왕에게 '왕자(王子)가 있었다'고 할 뿐, 그가 세칭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기록은 없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도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서(史書)에 이름은 전하지 않고 다만 왕자(王子)라 하며,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왕자 이름 대두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근기한 《김은열 묘지문》과 이를 원용하여 1785년 김사목(金思穆)이 경주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추기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제1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 한다.[1] [2]
이후부터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는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이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또 작금에 와서는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을 마의 태자(麻衣 太子)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시조로 표기해 놓고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적자가 세칭 마의태자이신 분이고 둘째(막내)가 범공이다(-국사편찬위원회).
사서(史書)에 신라가 망할 때 태자(太子)가 몇 살이었고, 부인과 자식이 누구인가 하는 것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만약 그때 처자(妻子)를 죽이지 않았다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후손을 두었을 것이고 그 후손들은 본관 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을 가진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3]
김은열 묘지문 진위 여부
《김은열 묘지문》에 등장하는 경순왕 제1자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묘지명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일부 내용도 왜곡되어 있다.
또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죽은 해와 장례일, 형제와 아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친(母親) 관계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제2자 '김황'과 제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유공지신(有功之臣)이어서 특사장지(特賜葬地)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 건립 때 각 성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에, 그의 증조부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명》을 모두 배척하고 있으며, 여기에도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 조선조 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도 《김은열 묘지문》을 원용하여 추기하면서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을 별도 인물인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
후세 평가
왕자(王子)의 이름은 역사서에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는 태자(太子)의 신분으로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부왕 경순왕과 고려에 맞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선의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자수(金自粹)의 《상촌집(桑村集)》과 조선 중기 문인들인 신흠(申欽)· 윤증(尹拯)등은 그의 행적에 대해 읊었던 한시 작품에서 '초의(草衣)' 또는 '신라 왕자'로만 서술하고 칭찬하였을 뿐, '마의 태자'(麻衣 太子) 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운(吳澐)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 왕자(王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778년(정조 2)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태자(太子)가 없었더라면 천년의 군자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을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이후 '마의 태자'(麻衣 太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부흥 운동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이외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 태자(麻衣 太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관련한 민간 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는데,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이후에 위패에 새로 추가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스스로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4]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시로,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그 누이동생 덕주 공주(德主 公主)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 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 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 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5]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 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 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정종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 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의태자가 등장한 작품//이광수, 「마의태자」(1930년) var articleno = "18";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09/2012020901977.html
신라 멸망 직후 부흥운동 소고
935년에 후삼국시대의 패권이 고려 쪽으로 흘러가자,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했다.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는 마의태자 등 신라의 고려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한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도 1000년 간 국체를 존속한 신라를 하루아침에 없앤 데에 대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고 옛 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에선 고려에 대항하는 일부 계층들의 반란』들도 있었지만,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 후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이미 이런 일을 아주 일찍부터 예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요소요소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었고, 때문에 소소한 소요 사태에 그치고 만다. 2.2. 경주 별초군의 난 2.3. 동경의 반란(동경민란) 동경에서 6, 7차례에 걸쳐 일어난 반란으로 주도자는 이비, 패좌 등이 알려져 있다. 2.4. 김사미 · 효심의 난,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십팔자위왕 소문에 의거해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이의민과 내통하여 일어난 반란.
궁예(金弓裔)
(金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의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2]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 한다.[3]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고, 별명은 미륵(彌勒), 일목대왕(一目大王[4][5])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 으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불교 세력,유학자들과 갈등하던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 의해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생애 초반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국왕 헌안왕(혹은 신라 제48대 국왕 경문왕)의 빈어(嬪御) 소생, 즉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김궁예'다.[6]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경참문에 의하면 궁예는 丑년생인데 그러면 857년생, 혹은 869년생인걸 알수 있다. 궁예가 891년 절을 떠나 처음 봉기에 참여한 시기로 미루어 짐작할때 869년생, 그러니까 경문왕의 서자인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음력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며,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이 안 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고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니 슬프다." 라고 했다. 궁예는 울면서 "그러면 제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와서, 세달사(世達寺)에 몸을 기탁해 스스로 성명을 선종(善宗)이라 했다.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그가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고 전해, 견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예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작하고 왜곡했어도 그의 승려 시절의 모습과 이후 그가 출가해 혁명가로서 활동할때의 초반 행적들에 대해서만큼은 미흡하나마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에는 궁예 정권의 핵심인물로서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즉위한 지 7일만에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와 함께 주벌된 소판 종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젊어서 승려가 되었던 자"라고 적고 있어, 일찍부터 궁예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종간이 궁예의 승려 시절, 즉 세달사에서 궁예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7]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가 어느 날 재(齋)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이때부터 궁예는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8]
출사
진성여왕 5년(891년)부터 신라의 각지에서는 거듭되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 징수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도적이 된 자들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궁예도 절을 떠나서
죽주(竹州)의 적수(賊帥) 기훤(箕萱)을 찾아가 그의 휘하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기훤이 궁예에게 오만하고 무례한 자세로 대하자 이에 반발해, 다시 죽주를 떠나
북원(北原)의 적수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갔다.
《삼국사기》는 이때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이 궁예를 따라 함께 북원으로 왔다고 적고 있다.
기훤과는 달리 양길은 궁예를 신임해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며 북원 동쪽 땅의 경략을 맡겼고,
궁예 자신은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에 머무르며 진성여왕 6년(892년)까지 주천(酒泉) · 내성(奈城) · 어진 등 명주 관내의 10여 군현(《삼국사기》 신라본기. 같은 책 궁예전에는 주천과 내성, 울오, 어진의 4개 군만이 기술되어 있으며 시점도 본기와 열전에 차이가 있다)을
공략하여 모두 항복시켰으며,
진성여왕 8년(894년)에는 드디어 명주를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전은 이때 궁예가 거느린 무리가 3,500인(신라본기에는 600인)에 이르렀으며[9], 궁예는 이를 14대(隊)로 나누어 편재하고 김대(金大) · 검모(黔毛) · 흔장(昕長) · 귀평(貴平) · 장일(張一)[10] 등을 뽑아 사상(舍上), 즉 부장으로서 임명하여 지휘하였다고 적었다. 나아가 궁예는 명주에 들어간 뒤부터 장군(將軍)을 자칭하였는데, 하대 신라에서 반란의 지도자나 호족 세력이 장군을 자칭한 것은 궁예가 최초였다.[11]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라 자처했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지만,
궁예가 이때부터 자신을 미륵으로 여겼다는 학계 일부의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때의 궁예는 아직 양길의 부하로 있었던 시절이었고, 또 명주를 장악한 후
황제나 왕도 아닌 장군만 자처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미륵으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명주를 장악한 궁예는 진성여왕 9년(895년),
동해를 끼고 북상해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저족, 성주(화천), 부약(금화), 금성(금화군),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
즉위와 전쟁[편집]
후고구려 선포[편집]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浿西),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송악(松嶽)의 해상 호족이었던 왕륭 · 왕건 부자가 진성여왕 10년(896년)에 궁예에게 투항해 오자
궁예는 세조의 아들인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했다.
왕륭의 제의를 받아들인 궁예는 효공왕 2년(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淸州)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겨울 11월에 궁예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효공왕 3년(899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3월에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하지만
거꾸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다.[4]
비뇌성에서 양길을 패배시킨 뒤인 효공왕 4년(900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 국원경(충주) · 청주 · 당성(唐城) · 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여[4]
광주를 우선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 · 괴양의 적수 청길(淸吉) · 신훤(莘萱)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효공왕 5년(901년) 7월에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하였다
(《삼국유사》 연표에는 고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당병을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한 궁예의 발언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분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고,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칼로 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다.
효공왕 6년(902년)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해 당시 후백제의 해상으로의 대중 교역로를 차단하게 했고,
효공왕 7년(903년) 3월, 수군으로 후백제의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 지역)지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나아가 왕건은 금성 공략과 함께 양주(良州)의 호족이었던 김인훈(金忍訓)을 구하여
돌아온 공으로 궁예로부터 알찬의 관등을 받았다.
마진
신라 효공왕 7년(904년) 7월에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참작해 관직을 설치하고, 국호를 마진[12] 으로 고쳤으며 연호를 정하여 무태(武泰)라 했다. 또한 공주(公州) 지역의 호족으로 장군을 칭하고 있던 홍기가 궁예에게 귀부했다.
이보다 앞선 903년부터 궁예는 수도를 이미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과 부양 등지를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청주의 민호 1천여 호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무태 2년(905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13]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터는 구 철원 북쪽 30리,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의 지명은 풍천원(楓川原)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철원의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바뀌었다.
또한 평양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했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 ·
황의(黃衣)의 도적 명귀(明貴) 등이 복속해 왔는데,
《삼국사기》는 이때부터 궁예가 강성해졌다며 자만하고는 신라를 병탄하고자 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면서 신라에서부터 귀순해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고 적고 있다.
성책 2년(906년), 궁예는 왕건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맞아 싸우게 했고
왕건의 군대는 견훤의 군대와 여러차례 치열하게 싸워 결국 크게 이겼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궁예 성책 5년(909년) 다시 나주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지금의 영산강 하에서 영광 서쪽 해안인 염해현까지 진격하였다.
6월에 왕건의 수군이 광주(光州)의 진도(珍島)를 쳐서 차지하고 고이도(皐夷島)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의 수군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했으며,
압해현의 해상 호족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붙잡혀 궁예에게 보내져 처형되었다.
성책 6년(910년) 후백제의 견훤이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내어 나주를 포위 공격하자,
궁예는 포위 공격 10일 만에 수군을 내어 견훤을 쳐서 몰아내고
나주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
서북으로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남도 남부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태봉[편집]
911년(효공왕 14년) :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12]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 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 ·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또한 직접 불교 경전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總)이라는 승려가 이 불경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서 입에 담기도 어렵다"고 혹평했고,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말았다.
이 외에도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궁예 정권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의 벼슬이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역시 왕건의 집권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이였던 송함홍,백탁,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덕만세 3년(913년)
왕건을 파진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해[14]
수도로 불러들인지 1년만인 정개 원년(914년)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14]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했던 것이다.[14]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와 나주 지역의 해상 군소 해상 세력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해전과 해상 무역에 대한 계책들을 진언하자,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며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4]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개 2년(915년),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康)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쇠꼬챙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14]
정변과 죽음[편집]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을묘일), 궁예의 숙청에 위기의식과 반감을 느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의,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 세력들이 주동이 되어서
패서 지역(경기도 북부와 황해도,평양과 평안남도 남부 지역의 옛 고구려계 지역) 호족들과
최응,송함홍,백탁,허원 등의 유학자 관료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15]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삼국사기》는 화전민들에게 발각되고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15],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했지만,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친궁예 세력들이 건재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은 처음에는 왕건의 정변에 적극 가담해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아내의 권고를 받고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아내의 권고를 받고
환선길이 그의 동생과 함께 왕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왕건의 정변 성공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소외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의 동생과 함께 왕건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그의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고,
이후 궁예 정권 말기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써 웅주(熊州)를 쳐서 차지하고 주둔하
이흔암은 천수 원년(918년) 6월 왕건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고 정변을 일으킬 목적으로
부임지인 웅주를 무단이탈해 당시 수도인 철원으로 마음대로 돌아왔고,
이후 한찬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이었던 염장(閻萇) 등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음을 탐지해 밀고했다.
이에 이흔암은 시장 바닥에 끌려나가 공개 참형을 당했고,
2개월 뒤 공주는 운주(運州) 등 10여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해 버렸다.
9월에는 순군리였던 임춘길(林春吉)과 그의 일당들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했고
그 다음달인 10월달에는 청주의 진선과
선장 형제도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대부분 공주, 또는 청주 지역의 옛 백제계 지역 호족들이었다.
명주의 성주 김순식도 왕건이 즉위한 뒤로도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아,
왕건이 천수 4년(922년) 7월에 김순식의 아버지로 승려로서 출가해 있던 허월(許越)을 보내 타일렀을 때에도
장자 수원(守元)만 보내고 자신은 오지 않았다.
천수 9년(927년) 8월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 장명(長命)만을 보내어
숙위하게 했을 뿐 김순식 자신은 오지 않다가,
이듬해 1월에야 직접 왕건을 찾아와 알현함으로서 완전히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전설[편집]
《삼국사기》 및 《고려사》는 궁예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 또는 그 텍스트를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다. 특히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 미복차림으로 도망치던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민간의 전승에서는 궁예가 오히려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하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유명한 것이 포천 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 전설로,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해서 산새들이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폈다는 망무봉의 지명 유래담이 내려오고 있다.[16]
또한,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한 고을이라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평가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대부분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를 저본자료로 삼은 것이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흥망사관에 입각해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그 쿠데타로 인해 추방된 궁예가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하였으며
의심을 많이 품었고 폭정을 일삼았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궁예 자신의 개인적인 결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기존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전제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신라 정책과 신라 출신 귀순자들의 학살
우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부터,
기존의 학설은 《삼국사기》 궁예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나아가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궁예의 행동에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궁예가 처음 거병할 당시의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 초적들은 극심한 천재지변에 신라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장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
개인적인 신격화[편집]
궁예가 지은 경전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 교훈거리가 될 수 없다."고 혹평하여
궁예에게 살해된 석총이라는 승려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해, "진표의 제자인 석충(釋忠)이 간자 108개를 태조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석총과 《왕대종족기》의 석충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궁예가 지향했던 불교와 석총의 불교가 같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궁예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중심이었던 데 반해서 석총은 미륵보살, 지장보살 중심이었던 차이점이 지적되어,
양자간에 알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적어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울컥해서 죽이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앞서 이야기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석총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종파를 떠나서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정통 불교의 승려로서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외에도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궁예 정권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의 벼슬이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역시 왕건의 집권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이였던 송함홍,백탁,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건과의 관계
《삼국사기》에는 궁예와 왕건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마침 처벌된 자들로부터 몰수한 물품들을 점검하고 있던 궁예는 왕건을 보자 성난 표정으로
"경이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고,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이 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스스로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지나갔고, 왕건은 곧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경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며 왕건에게 주연까지 베풀어 주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 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흔히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기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처자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청광과 신광이라 불린 아들은 강씨 소생인 것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철원 궁씨가 궁예의 아들이라는 신광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순천 김씨나 광산 이씨도 궁예의 후손을 자처했다.
가계[편집]
헌안왕(憲安王)
경문왕)(景文王) 후궁 장씨
(後宮 張氏)[17]
궁예(태봉 1대)(弓裔) 강비(康氏)
김청광(金淸光) 김신광(金神光) 김순백(金順百)
발해, 대위해 (895년 - 907년)
대인선 (907년 - 926년)
신라 효공왕 (897년 - 912년)
신덕왕 (912년 - 917년)
경명왕 (917년 - 924년)
후백제 견훤 (900년 - 935년)
===========
각주[편집]
1.이동 ↑ 김궁예(金弓裔)의 어머니가 장보고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2.이동 ↑ 《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궁예편. 궁예에 관하여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여기서 인용되는 문장은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이곳에서 인용된 것이다.
3.이동 ↑ “궁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3년 9월 5일에 확인함.
4.↑ 이동: 가 나 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3.html
5.이동 ↑ 20세기 초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붙인 별명이다.
6.이동 ↑ 신라왕의 서자이긴 하지만 정확히 어느 왕의 서자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헌안왕설을 채택했고, 전남대학교 정청주 교수 또한 아들이 없고 딸만 두 명이었기에 맏사위였던 응렴(경문왕)이 즉위하게 된 상황에서 궁예가 태어났으며 이때 응렴의 아버지로 앞서 헌안왕의 즉위에도 힘을 보탠 바 있는 시중 계명(啓明)이 자신의 아들인 응렴을 즉위시키기 위해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를 제거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궁예와 호족 세력」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 P.65~67. 1996). 한편 2000년~2002년에 방송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의 왕자로 설정하였다.
7.이동 ↑ 정청주, 같은 책, p.75
8.이동 ↑ 궁예가 승려로서 출가한 세달사는《삼국사기》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 흥교동 대화산 서상복에 그 절터가 남아 있다(정영호, 「신라 사자산 흥녕사지 연구」 『백산학보』7, 1969, p.27). 또한 세달사는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도 등장하며 《삼국유사》의 세규사(世逵寺)와 같은 곳으로(김상현 「신라 화엄학승의 계보와 그 활동」 『신라문화』1, 1984, p.56) 정청주는 세규사의 장원이 위치해 있던 명주(溟州) 나리군(奈李郡)을 나성군(柰城郡)으로 보고, 세규사(세달사)가 위치해 있었던 소백산(小白山)과 당시 나리군의 태수(이기백 「신라 정토신앙의 다른 유형들」 『신라사상사연구』 1986, p.164)였던 김흔(金昕) 집안(김주원계 강릉 김씨)과의 연고를 들어, 지금의 영월과 그 인근 지역인 평창 · 단양 · 제천 등지에 장원을 가지고 있었던 세규사에서 멀지 않은 명주 지역의 강릉 김씨 일족으로 김흔의 방계에 해당하는 후손들이 일찍부터 궁예와 연결되어 그를 비호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까마귀가 '왕' 자가 적힌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세달사에서 그가 왕자 출신임을 알아본 세달사의 사원세력, 또는 영월 일대의 호족 세력들이 궁예에게 장차 거병하여 왕이 될 것을 부추긴 한 일화로서 해석되고 있다. 이후 궁예가 명주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던 것이나, 궁예가 축출되고 명주가 한동안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정청주, 같은 책, p.71~74, p.78~79).
9.이동 ↑ 궁예의 이 병력은 당시 실직(삼척)에 배치되어 있던 옛 신라군도 가담했을 가능성이 이기백에 의해 지적되었으며(이기백, 「고려경군고」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1956 ; 『고려병제사연구』, 1968, p.47 ; 「고려 초기 중앙군의 조직과 역할」, 『고려병제사』, 1983, p.20) 처음 명주를 출발할 때의 수가 600이고 명주에 들어가 모집하여 증가한 수가 3,500이라는 해석도 있다(박한설, 「궁예성명고 - 고구려 계승 표방과 관련하여」, 『이선근박사고희기념 한국학논총』, 1974).
10.이동 ↑ 정청주는 이들 인명을 김대검(金大黔) · 모흔장(毛昕長) · 귀평 · 장일로 떼어 읽었는데, 귀평의 경우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의 음기(陰記)에 「귀평 일길간 제주(貴平一吉干提州)」로 되어 있는 점을 들어 당시 제주 지역의 호족으로, 김대검(김대)의 경우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당시 강원도 평창군의 토성(土姓)으로서 김씨가 등장하는 점을 들어 평창(당시에는 나성군의 영현이었던 백오현) 출신의 호족으로 추정하고, 나아가 김대검(김대)가 몰락한 김흔계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하였다(정청주, 같은 책, p.75~76).
11.이동 ↑ 궁예 외에 장군을 지칭한 것은 904년과 905년에 공주장군(公州將軍)을 칭한 홍기(弘奇)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을 칭한 검용(黔用)을 제외하면 경명왕 2년(918년)까지 거의 20년이 넘도록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장군은 신라에서는 당(幢)이나 정(停) 등의 군단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으로서 진골 귀족이 독점했던 무관직이기에 함부로 자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궁예가 이를 자칭한 것은 그가 신라 왕족, 즉 진골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정청주, 같은 책, p.77).
12.↑ 이동: 가 나 안정복은 궁예의 국호 '마진'에 대해서 당시 후고구려 북쪽에 있던 발해(진국震國)를 의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마진을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로 보아,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뜻하는 것으로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4.html
13.이동 ↑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굳이 청주의 민호를 택해서 사민한 것에 대해서는 당시 새로운 왕도가 될 철원의 문화적 수준을 고려해 과거 신라의 지방 행정 중심지인 소경(小京)이 설치되어 있던 청주(서원경)를 택한 것이라는 설(김광수, 「나말여초의 지방학교 문제」, 『한국사연구』7, 1972, p.121)과 함께, 과거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던 청주를 완전히 지배하여 후백제에 붙지 못하게 한다는 일종의 '집단 인질'의 성격을 띤 사민이었다는 설(김갑동, 「고려 건국기의 청주 세력과 왕건」, 『한국사연구』 48, 1985, pp.36~42), 과거 신라의 몰락한 귀족들이 낙향해 왔던 곳이기도 한 소경의 옛 신라계 호족세력을 끌어들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정청주, 같은 책, p.83~86) 등이 있다.
14.↑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페이지
15.↑ 이동: 가 나 《고려사》권1, 태조 총서
16.이동 ↑ 유인순, 《전설에 나타난 궁예왕》, 2006
17.이동 ↑ 김궁예(金弓裔)의 어머니가 장보고(張保皐)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참고 서적[편집]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동사강목
•신채호, 《일목대왕의 철추》(19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외부 링크[편집]
후백제 견훤왕
後百濟 甄萱王
견훤(甄萱, 867년~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935년 음력 3월)은 후백제를 건국한 후백제의 시조이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여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 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일으킨
거병으로 후백제는 끝내 멸망하였고 등창을 앓던 그는
그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훙서하였다.
「甄」의 읽는 법에 대하여
조선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견훤의 거병을 기록하면서
「남해(南海)의 수졸(戍卒)인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고 적고,
견훤의 이름에서 「견(甄)의 음은 진(眞)이다」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견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견, 질그릇장인 진 두가지이고, 병음은 전(Zhen)이라는 설이다.
출생 및 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사로 먹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일컬었다고 하며,
견훤 자신의 성도 원래 이씨(李氏)였으나 뒤에 견씨(甄氏)로 고쳤다고 한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왕비인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 夫人)이다. 셋째 아들은 구륜공(仇輪公)이고, 그 아들은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이고, 선품의 아들은 각간(角干) 작진(酌珍)이다. 작진의 아내 왕교파리(王咬巴里)가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장자가 바로 상보(尙父) 훤(萱)이고,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李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 諡曰白 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珍 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爲阿慈介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蓋 四子寶蓋 五子將軍小蓋 一女大主刀金
이같이 《삼국유사》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에 대해 《이제가기》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계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아자개가 거병했다는 광계 연간은 서기로 885년에서 887년에 해당하며, 889년에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나는 등 신라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시기와 겹치며, 아자개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지배계층의 성씨로 호족의 일원(6촌성, 경주 이씨)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견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견훤이 아직 아기였을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는데, 그 사이 범이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여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와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상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고 기록해, 궁예와 마찬가지로 비록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적이어서 그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또 많은 부분들에서 사실과 달리 나쁜 쪽으로 조작하고 폄하했지만, 이 부분과 이후 견훤의 해적 토벌 부분만큼은 미흡하게나마 그의 영웅적인 면들을 인정했다. 견훤이 태어난 상주 가은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 2리 아차(아채) 마을로, 문경에는 오늘날에도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고 읊고 있는데, 실제로 견훤이 태어났을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주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생설화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 조에 다음과 같은 견훤의 출생담을 적고 있다.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어느 부호에게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의 방에 와서 동침하고 새벽이 되면 사라졌다. 딸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딸에게 밤에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남자의 옷에 몰래 실을 꿰어 둔 바늘을 꽂아두라고 당부했고,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아버지는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 보았는데,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밤마다 딸을 찾아온 남자의 정체는 바로 지렁이였던 것이다). 이후 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견훤이었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 당(唐)은 소종(昭宗) 경복(景福) 1년이었다.
이러한 류의 설화는
야래자(夜來者)형 설화로 분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까지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의 함경북도 회령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를 비롯해,
일본 《고사기》의 오호타나네코(意富多多泥古),
《일본서기》의 오오모노누시 신(大物主神) 신화, 서구의 에로스 프시케 신화가 대표적인 야래자형 설화로 꼽힌다.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이 지렁이의 자식으로 묘사한
《삼국유사》의 설화와 관련해서 금하굴(金霞窟)이라는 이름의 동굴이 남아 있다.
후백제 견훤에 관련 전설이나 설화 견훤구인생설화 문서 참고
신라군 생활
견훤은 장성하여 군을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고, 서남해(西南海)의 방수(防戍)에 배정되었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잘때도 창을 배고 적을 대비했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을 앞섰으므로."라고 적었고, 이후 "이러한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고 적어서 그가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했을때 매우 뛰어난 군인의 자질을 보였다고 인정했고, 또 실제 전투에서도 뛰어난 공로들을 세웠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견훤이 임명된 '비장'이라는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장군의 보좌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단순히 보좌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장군 예하의 부장(副將)이나 장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견훤이 복무한 서남해에 대해서도, 견훤이 처음 거병했을 때 무진주 동남쪽의 군현이 일제히 그에게 항복하여 따랐다는 기록이나, 견훤 자신의 측근 세력이자 혼인관계까지 맺은 인척이었던 무진주(武珍州) 성주 지훤(池萱)과 순천 출신 박영규(朴英規), 그리고 인가별감(引駕別監) 김총(金摠) 등이 모두 지금의 전라도 광주와 순천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체로 순천과 여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순천은 신라 시대에는 승평(昇平)이라고도 불리며 남단 내륙교통의 요충지이자 대중국 교역의 주요 항로였으며, 광주 및 나주, 목포 지역과 지금의 경상남도 연안을 연결하는 위치로 무진주(광주)에서 서라벌(경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땅이기도 했다.
거병과 후백제 개창
견훤의 거병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에 있었는데, 《삼국유사》에는 900년이라고도 적고 있다. 이 해는 신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난 때로, 이 기록을 따른다면 견훤은 원종과 애노의 난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신라 조정으로부터 군사적인 독립을 이룬뒤,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신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수립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는 그가 처음 거병한지 열흘 만에 5천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무진주를 점령한 견훤은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를 칭하였다.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
후고구려와의 전쟁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북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 후고구려는 한국의 현대 역사학자들이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만든 용어에 불과할뿐, 실제로 당시 궁예가 처음으로 나라를 정식으로 건국하면서 정한 국호는 5세기때부터 고구려라는 국명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고구려를 부르던 용어인 '고려.'였고, 궁예의 멸망후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면서 선포한 국호인 '고 려.'도 궁예의 고려와 같은 뜻이였다.)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후고구려의 해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나주 지역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되어서 후고구려와 신라 방면으로 세력을 마음대로 확장할 수 없다는 것 이외에 자칫하면 후고구려에게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고, 또 바다를 통해 중국과 외교 교섭과 무역을 주고 받고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는 후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외교 교섭과 무역 거래,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의 중계 무역까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태로서 후백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었다. 실제로 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의 사신은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 나아가 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를 장악하였다. 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를 포위하기도 했다. 왕건의 선단은 911년에 나주를 거쳐 무진주로 진격했지만, 견훤의 사위였던 지훤에게 막혀 물러나야 했다. 912년 덕진포(德津浦)[4]에서 왕건(王建)의 화공에 패하고 견훤 자신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도주하였다고 한다. 궁예와 왕건의 이러한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은 고려 시대 당시와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에게서 왕건의 고려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받고 있으나, 실제로 이후의 후고구려,고려와 후백제의 쟁패 과정을 보면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의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우선, 후백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은 일이 없었고, 해상 봉쇄를 통한 후백제의 외교적,경제적 고립과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 우려를 견훤에게 심어줘, 후백제의 신라 지역과 후고구려 지역 진출을 억제해 후백제의 국력을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 이외에, 기존의 후백제의 국력을 근본적으로 쇠퇴시키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는 궁예 시절과는 달리 중국과의 자유로운 교역에 성공했고, 심지어 중국뿐만이 아니라 북방의 거란과도 자유롭게 교역을 하는 모습을 보여, 애초의 나주 지역 점령의 가장 중대한 목적중 하나였던 후백제의 외교적,경제적 고립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여전히 나주 지역을 고려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궁예 시절보다 훨씬 국력이 강해져서 신라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해 결국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함락시켰고, 이 직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왕건의 친정군까지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전멸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 929년 후백제의 나주 지역 탈환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후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보였고, 후백제는 나주를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창 전투 대패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또 고려는 929년에 나주를 후백제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당시 신검의 쿠데타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을 구출해 고려로 데려올려는 목적으로 나주 지역을 공격해 탈환하기전까지 6년 동안 나주 지역을 탈환할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과, 936년, 왕건이 견훤을 대동하고 고려의 국력을 총동원해 신라의 낙동강 지역을 통한 최후의 후백제 공격때 1년 전에 점령한 나주 지역을 이용해 낙동강 지역과의 대규모 동시 협공 공격을 시도하지 않은 점 등으로 봐서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의 군사적,경제적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918년 6월에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한편으로 오월에도 즉각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고, 오월은 답례로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상주의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대야성에 이어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다시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한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중, 애선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냈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거센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양측이 서로 화친을 하기로 결정하고(여기서 누가 먼저 화친을 요청했는지는 기록들에 따라 서로 엇갈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왕건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오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국서를 주고 받은 문서에서는 이때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현재 한국 역사학사들 다수의 의견은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이 먼저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조차 견훤과 왕건이 서로 주고받은 국서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는 것으로 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2]
고려와의 전쟁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자신이 보냈던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고, 이에 왕건은 웃으며 견훤이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주었다고 역사 기록들에 전한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6].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산 전투
본문은 공산 동수 전
927년 정월에 왕건은 후백제의 세력권인 용주(龍州)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고, 견훤은 후백제에서 죽은 왕신의 시신을 고려로 송환하였다. 3월에 고려는 다시 운주성주 긍준(兢俊)의 군을 격파하고 이로부터 사흘 뒤에 근암성을 함락시킴으로서 죽령의 길뿐 아니라 계립령의 길을 장악하였다.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康州)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을 쳐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사흘 뒤 왕건이 웅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지만, 7월에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金樂)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강주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에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고 있다. 이 순행에서 또한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을 비롯해 흥달을 감시하기 위해 견훤이 현지에 파견했던 후백제 관리들까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사갈이성의 고려 귀부는 고려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수운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수운교통로를 끊기 위해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쳐서 파괴하고 고울부(영천)을 함락시켰다. 당시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왕건의 군이 오기도 전에 단숨에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쳤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적었다. 또한 왕의 외종제인 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견훤 자신은 왕건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이때의 일을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태조)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宗社)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었기에,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둘러서, 백관들에게는 밝은 해에 맹세코 6부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득하리라 했는데, 뜻밖에도 간신은 도망가고 임금(경애왕)께서는 돌아가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명왕의 표제이며 헌강왕의 외손 되시는 분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니, 위태로운 나라가 다시 세워졌고 없던 임금이 다시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7]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킨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함께 보냈다. 이 글은 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거두었던 승전 사실들을 열거하며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며 응수하고 있다.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에서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의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 왕건은 공격 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4월에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김훤, 애식, 한장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왕건은 8월에 충주(忠州)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맞서 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차지하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일대의 정찰을 명하고 있다.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고려사》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왕궁 구정에 불러모으고 양지와 명식 등 여섯 장수의 처자식들을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뒤 저자에서 참형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2]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1개월여간의 대회전 끝에 견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여명에 이르렀고, 자신의 참모인 시랑 김악이 고려군에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이후로 계속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8]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해 왕건은 그해 7월에 군대를 거느리고 일모산성을 직접 공격해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켰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격파당했고 이후 다시는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내해와 섬들, 육지를 침략하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 대한 정사들인 삼국사기 견훤 열전,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932년 9월과 10월 이후 후백제 해군의 고려 내해와 섬들,내지의 침공 사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긴 나주 지역을 탈환했다고 나온다. 933년 5월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의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함락 위기에 몰리자,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당시 의성부(경북 의성)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고, 유금필은 당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중 급히 추려 출정한 결사대 80명의 병력과 사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위치한 여울)을 건너 신검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사대의 지휘관인 유금필은 두렵지 않고 그의 부하 병력들만 매우 두려워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유금필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부하 병력들보다 유금필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해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고, 이후 유금필과 그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에 사탄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신검의 후백제군이 자도에서 유금필과 그가 거느린 80명의 결사대를 공격했지만 금달,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고 그외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사로잡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다시 당했고, 자도에서의 유금필군의 전설적인 승전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유금필에게 매우 크게 감탄했다고 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934년 9월, 왕건이 운주 일대를 빼앗을려고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명을 뽑아 운주로 진군했지만 고려군의 기세가 강성해 승산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군이 자신의 영토를 빼앗을려고 진군해왔는데도 화의를 청해, 평소의 패기 있고 자신만만해하던 견훤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근본적으로 930년 고창 전투때부터 지금까지 고려군에게 전체적으로 패배를 거듭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후백제군과 견훤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고려군에게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견훤의 이런 약해진 모습을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에게 견훤군을 공격할 것을 요청해 왕건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유금필은 강력한 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해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대패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고, 후백제군 30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웅진 근처의 30여개의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2]
후사벌과의 전투
929년에는 박언창을 공격하여 후사벌국을 멸망시켰다. 917년 신라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후 사벌대군 박언창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나라를 세워 자치 정권을 운영하였다.
생애 후반
신검의 정변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9]
고려 망명
4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6월에 고려로 망명하였다(이 해 4월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한 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10살이 더 많다하여 견훤을 상부(尙父)로 부르고 별궁인 남궁을 주었으며 '정승.'으로 봉해 직위를 백관들은 물론 심지어 태자인 왕무보다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10]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1월에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순한데 이어,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도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6월에는 견훤이 직접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태자 무(武)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건은 3군을 이끌고 9월에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삼국사기》),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고려사》)이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과 견훤이 함께 출정한 것을 본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투항한 후백제 장군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후백제군의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었으며 후백제군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본심이 아닌 능환과 양검,용검 등의 협박(?)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하지만, 2000년~2002년까지 KBS 1TV에서 최고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조 왕건.'의 마지막회의 나래이션에서도 나왔듯이 학계에서는 신검이 비록 벼슬을 제수받았다고는 하지만 동생들인 양검과 용검이 항복한 이후, 왕건에 의해 진주로 귀양갔다가 얼마뒤에 모두 처형된 점, 신검 자신도 왕건에게 투항해서 벼슬을 받은 이후의 행적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같은 고려시대를 다룬 권위있는 역사서들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고려하면 신검 역시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투항한지 얼마후 동생들과 같이 처형되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죽음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의 경우 항우와 손권의 참모였던 범증과 육손의 경우를 비롯해 극도의 분노와 울분으로 인해 단기간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사망한 사례들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무신 정권기의 청렴하고 유능한 무신 권력자였던 두경승과 구한말의 이준 등의 경우들이 있어서 실제로 있었음직하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견훤이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로 왕묘를 견훤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가족 관계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게는 장남 견훤(甄萱) 외에도 능애(能哀),
용개(龍盖), 보개(寶盖), 소개(小盖)의 아들과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삼남 용개(龍盖)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이들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능애(能哀)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百濟)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高麗)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11]
《삼국유사》에는 10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12], 그리고 고려(高麗)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쇠복(哀福)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과 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13]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10남 2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14].
아버지 : 아자개(阿慈介)
어머니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국왕 : 견훤(甄萱, 867~936) 재위:892?/900?~935)
왕비 : 왕비 박씨(王后 朴氏) 장남 : 견신검(神劍,885~936 재위:935~936)
차남 : 견양검(良劍, ? ~936)
3남 : 견용검(龍劍, ? ~936)
장녀 : 국대부인 견씨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차녀 : 견애복(衰福),정령공주(貞逞公主)
사위 : 지훤(池萱)
후궁 : 고비(古比女)
4남 : 견금강(金剛, ? ~935)
막내 : 견능예(能乂)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지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가
현전하는 견훤 관련 기록 대부분은 그와 적대했던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견훤을 가리켜 원래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그가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수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난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마찬가지로 「(숱한 악을 행하느라) 태조(왕건)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관련 문화재[편집]
전 견훤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상주 견훤사당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