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군 가조면,가북면에 산재한 산들은 백두산 천지를 연상하리만큼 아름다운 병풍을 쳐 놓은 듯 펼쳐저 있다. 모내기를 한 물논에 寶海山이 물그림자로 나타나 그 영상이 아름답다. 아침 해돋이 후 풍경 남쪽으로 멀리 미녀봉이 펼쳐진 풍경 용산 숲과 飛鷄山 정산이 닭이 회를 치듯 솟아오럴 듯 한 모습이다. 소나무 용산 숲 미녀봉 박유산 가야산 마지막 줄기의 봉우리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용천으로 내리고 있는 듯한 풍수설화이다. 미녀봉 아침 박유산 비계산 거창군 가조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장기리, 창촌을 지나 계속 가다가 병산(屛山) 마을 앞의 다리를 건너면 가북면(加北面) 용산리(龍山里)이다. 용산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 뒤의 가야산(伽倻山) 줄기인 정봉(正峰)이 용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용산은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고 기름진 들이 펼쳐지고 북천(北川)과 동천(東川)이 합류하여 예로부터 경관이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난 마을이다. 이 마을엔 인재도 끊이지 않았으니 아림부자라고 불리는 모계 문위와 팔송 정필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팔송(八松) 정필달(鄭必達)은 본관이 진주(晉州)로 은열공 신열(臣烈)의 후예이다. 팔송의 증조 방(房)이 창녕 조씨 언명(彦明)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는데, 처가에 대를 이를 자손이 없자 외손봉사를 위해 거창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진양 정씨들이 용산마을의 대성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팔송 정필달이라고 할 수 있다. 팔송은 1611년 4월 13일 아버지 준(浚)과 어머니 함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자질이 총명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지을 줄 알았다. 8세 때 합천 야로에서 문경진(文景震)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13세 때는 부친을 따라 진주로 와서 능허 박민에게 공부를 배웠다. 능허는 남명의 제자 수우당에서 글을 배운 진주 선비로 항상 남명에게 글을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팔송이 능허에게 글을 배운 것은 남명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16세 때는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에게도 글을 배웠는데, 오계는 합천 출신으로 남명 선생을 사숙한 선비로 남명의 제자 도촌 조응인의 아들이다. 도촌은 한강 정구의 천거로 선조 때 왕자사부로 임명된 학식이 높은 선비였다. 거창에 살면서 인근 이름난 선비들을 찾아 학문을 익힌 팔송은 안음별시(安陰別試) 상주감시(尙州監試) 금산 동당시(金山 東堂試) 고령별시(高靈別試) 등에서 차례로 급제를 했다.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각종 과거에 급제를 하자 팔송의 명성이 고을에 자자했으며 서울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팔송은 특히 시를 잘 지었다. 20세 때 가야산에 올라 ‘左手掃天雲 右手奉天月’ 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왼손으로 구름을 깨끗이 하고 오른손으로는 달을 받드네” 라는 뜻으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때 거창 선비 박유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왕건의 출사 부탁을 거절하고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산을 후세사람들은 ‘박유산’이라고 한다. 팔송이 박유의 지조를 기리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高士與高山 高高高孰譬 山名以士傳 山未高於士(학덕이 높은 선비가 높은 산과 더불어 있으니 높은 것 위에 더 높은 것을 무엇으로 비유하리. 산의 이름이 선비의 이름으로 전해지니 산이 선비보다 높지 않네)’이다. 29세 때 팔송은 동계 정온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학문을 익힌다. 이때 동계는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부모상을 당해 용산으로 내려와 여막을 지키고 있었다. 동계는 팔송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 기뻐하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어 당시 거창에 내려온 용주 조경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용주 조경은 남명선생의 신도비를 지은 선비이다. 아림부자라고 일컫는 모계 문위에게도 학문을 전수 받았다. 34세에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했다. 사재감참봉, 봉상시 직장 등의 벼슬을 거쳐, 전적겸 사학교수,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다. 이후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팔송정(八松亭)을 창건하여 제자들을 모으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세상사람들이 그를 ‘팔송선생’이라고 불렀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팔송을 조정에서 다시 불렀다. 팔송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다시 출사의 길로 나선다. 전적, 형조정랑, 예조정랑 봉상시첨정, 단양군수 등의 벼슬을 지내고 물러나 양양에 있는 금곡이라는 곳이 산수가 수려해 말년을 보내기 적합하다고 생각해 집을 짓고 기거를 했다. 숙종조에 다시 직강, 봉상시부정, 사예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빙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정이 당파싸움으로 시끄러웠다. 팔송은 벼슬에 나가기 보다는 임금에서 상소를 올려 폐단을 고칠 것을 주장했다. “과거(科擧)는 인재를 가리기 위한 방법인데, 지금의 선비들은 학업을 닦는 데에 힘쓰지 않고 나아가 벼슬하는 것만을 서둘러, 과거가 있을 것으로 정하여지면 반드시 먼저 누가 시험을 주관하는 지 물어서 연줄을 따라 몰래 넌지시 약속하고,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도 함께 응하되 태연하여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으며, 이밖에 시험장 바깥에서 대리 시험하는 따위는 그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과장(科場)이 파하기도 전에 방목(榜目)이 이미 전하여지니, 먼 지방의 순박하고 둔한 선비로서 불평을 품고 풀지 못하여 종신토록 떠드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당시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올린 이 글을 보고 임금이 팔송의 직언을 칭찬하면서 호피를 내렸다. 또 팔송은 숙종에게 정치를 서두르면 안된다는 뜻을 상소로 올리기도 했다. 팔송의 평소생활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바르게 앉아 항상 반성하는 자세로 일과를 보냈다. 제자들에게는 “먼저 큰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라”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팔송은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면우 곽종석, 교우 윤주하 등 거창의 선비들은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문집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용산리의 落帽臺(낙모대) 팔송이 시를 읊조리며 풍광을 감상했던 용산마을 앞 낙모대는 용산팔경(龍山八景) 중의 하나이다. 용산 마을안에는 용천정사(龍泉精舍)와 용원서원(龍源書院)이 있어서 동계 선생과 모계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낙모대(落帽臺)는 중국 고사에서 인용한 것인데, 종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노닐다가 모자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낙모대의 주인은 동계 선생이다. 동계 선생은 층층 암석으로 높이 솟은 낙모대 위에 범국정(泛菊亭)을 짓고 거기서 영남 일대의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했다는 기록이 있다. 팔송 정필달도 동계와 낙모대에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지금은 예전같은 풍광은 찾을 길 없고 비석만 남아 옛 흔적을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