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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존 에드워즈(John Edwards)는 “하나님이 전해 주시는 충만의 일부는 그분의 행복 안에 있다. 이 행복은 그분 자신을 즐기고 기뻐하는 것 안에 존재하며, 피조물들의 행복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말했다.3)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행복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행복하시다는 기쁜 소식이다.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하나님과 영원을 보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불행하시다면 복음의 목적은 행복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전혀 복음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행복한 하나님과 영원을 보내라는 초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시고 죽으신 것은 그의 기쁨(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 15:11; 17:13). 그러므로 복음은 “행복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인 것이다.
본 장에서 내가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복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아들로 인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행복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유이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의 주권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종 된 모습에서도 기뻐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사 42:1). 마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증거하는 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였고, 이를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예수님의 사역의 온유함에 관련시켰다.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리라(마 12:18-20)”
아버지의 영혼이 그 아들의 종과 같은 온유함과 동정심으로 인해
기쁨으로 넘치는 것이다. 갈대가 구부러져 꺾어질 때, 종의 심정을 가진 아들은 부드러운 손길로 상한 갈대를 다시 바로 세우실 것이다. 촛불의 심지가 가물거리고 열기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때, 종 되신 예수님은 그것을 잘라버리지 않고 손을 컵 모양으로 하셔서 다시 불꽃을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내 영혼에 기뻐하는 나의 종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그의 위엄이나 그의 온유함의 어느 하나에만 원인이 있지 않고 그것들이 완벽한 비율로 섞여진 것으로 말미암는다.
*1734-1735년 사이 뉴잉글랜드 지방의 대각성 운동에 불을 지피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탁월성” 이라는 설교가 있다. 거기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양한 탁월성들의 놀라운 결합” 이란 표현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묘사했다. 그 본문은 계시록 5:5-6인데 사자이며 양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다양한 탁월성들의 연합을 설명하였다. 그는 한 사람 안에서 결코 양립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특성을 그리스도께서 연합하는 것이 어떻게 그 분의 영광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높음과 낮춤이, 무한한 공의와 은혜가, 무한한 영광과 가장 낮은 겸손이, 무한한 위엄과 초월적인 온유함이 만난다고 말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가장 깊은 경외와 하나님과의 동등함이, 선한 것의 가치와 악의 고통을 참는 가장 큰 인내가, 위대한 순종의 정신과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권이, 절대 주권과 완전한 포기가, 자급자족함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함이 만남을 말했다.
*그들의 친밀도와 교제는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께서는 아버지에 관해 그처럼 전례가 없는 친애와 친밀함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의 적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그의 마음 전체를 열어 보일 정도의 친밀함을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 그는 그 아들에게 축복을 거두지 않으셨고 한량없이 그의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4-35), 아들이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수행해 나가는 동안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을 위한 점점 더 강렬한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 아버지께서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대해 가지신 넘치는 존중은 그 아들을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까지 미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의 사랑의 대상인 아들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반대 논리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활용하셨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욕되게 하는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10:29).
*하늘에 있는 어떠한 천사도 아들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영원 전부터 받은 그러한 영예와 사랑을 받은 경우는 없다. 천사가 위대하고 놀라운 존재이긴 하지만 아들에 비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히 1:5).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히 1:13). 요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가 아니다. 가장 높은 천사장조차도 아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천군 천사가 드리는 모든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하나님 자신도 아들을 축하하는 데서 제외되시지 않으셨다. 그는 아들의 위대함과 선함과 승리함으로 인해 감격하신다. 그는 아들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다(빌 2:9); 그는 아들을 존귀로 관 씌우신다(히 2:9), 그리고 그는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로써 자신의 앞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요 17:5),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대해 가지신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이 한정이 없는 애정을 로마서 8:32 의 논리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말할 수 없이 귀한 구절의 요지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힘든 일을 기꺼이 하셨다면(즉 그의 소중한 아들을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셨다면), 힘든 것처럼 보이는 일도(그리스도인에게 하늘의 모든 축복을 내려 주시는 일) 하나님께는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구절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광대함이다. 바울의 가정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심”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울이 골로새서 1:13 에 간략하게 표현한 것과 같이, “그의 사랑의 아들이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에 사랑의 열정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아들을 위한 열정일 것이다. 토저(A. W. Tozer)는 “하나님은 결코 기분이 변하시거나 애정이 식어지거나 열심을 잃는 분이 아니시다” 라고 말했다. 만약 하나님에게 어떠한 참된 열심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을 위한 그의 열심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식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열정과 열심으로 불타오른다. 그러므로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에 찬성한다. “아버지의 무한한 행복은 그의 아들을 즐기는 데 있다.”
*.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사람을 택해 신으로 승격시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신성의 충만을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인성으로 덧입히셨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인(the God-Man)이며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나사렛 예수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친구들과 적들이 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반복해서 어리둥절하게 된 이유이다. 다른 사람과 보기에 전혀 다를 바 없이 길을 걸어 가다가 돌아서서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느니라” 혹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식의 말씀을 그분은 하셨을 것이다. 또는 신성 모독으로 고소당한 후 매우 침착하게 “인자는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간단하게 “일어나라" 또는 “나오너라” 라고 말씀하셨고, 그러면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한 덩이의 빵에는 “천명을 먹일 만큼 되어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즉시 그것은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라고 대답하셨다. 아무도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도 이 사람처럼 살며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이 사람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기 때문이다.
*브레이너드가 “홀로”라고 말한 것은 창조 이선에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의 아들과 아무런 교제가 없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을 어떠한 창조물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서 만족하셨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으셨다. 브레이너드는 이것이 기쁜 소식임을 온 마음을 다해 믿었다. 가장 단순한 신자들도 이것을 들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큰 부분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참된 종교적인 경험의 중심이었다
내 마음이 뉴저지의 숲속의 장면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진리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강조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궁지에 몰리거나 또는 어떤 예견하지 못했거나 계획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함정에 빠진 것처럼 마지못해 하시거나 어떤 외부적인 강압에 눌려 행하시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삼위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완전하시고 너무도 행복하시며 만족감으로 넘치시기 때문에 그가 하시는 모든 것은 자유롭고 강요된 것이 아니다. 그의 행위는 자신의 기쁨의 흘러넘침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행하신다고 했을 때의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기쁨, 즉 그가 그 자신에 대해 가지신 기쁨 외의 어떤 것도 그의 선택과 그의 행위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자유 가운데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부족함을 보충하려는 필요에서가 아니라 그의 기쁨의 풍성함을 표현하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자유의 의미이다. 나는 이것을 주권적인 자유라고 칭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살펴본 세 군데의 본문 모두에서 다 이 주제 즉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기쁨을 다 행하신다는 것 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로우시고 외부적인 힘에 의해 방해받음이 없이 그의 즐거움대로 행하실 수 있다는 점에서 주권적이시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는 주권적인 자유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인격 안에 비친 자신의 완전함의 전경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바라보실 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능력의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장면이다. 그의 행복은 자신의 무한한 능력의 완전함을 포함한 그의 완전성에서부터 나온다. 이 측정할 수 없는 능력이 그가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 그의 기쁨은 자기 아들의 인격에 비친 그 자신의 영광에 대해 그가 가지는 기쁨이다. 그리고 무한한 능력은 그 영광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독특한 기능은 창조와 구속 사역 가운데 그의 기쁨이 흘러넘칠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의 능력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성취하는 데 장애가 되는 어떤 방해물도(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제거해버린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선언은 그의 능력의 선언이다. 이것이 여기서 의미하는 주권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그 선한 기쁨에 따라 그의 완전성이 표현될 수 있게 길을 예비한다.
*이로부터 나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하나님께 아무런 기쁨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하나님은 가학성 변태 성욕자가 아니다. 그는 사악하거나 피에 굶주린 분이 아니다. 반역적이고 악하며 믿지 않는 사람이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은 진리와 의로움의 고양이며 그 자신의 영예와 영광의 입증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으면 주께서 그들을 망하게 하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경고했을 때(신 28:63), 그가 의미한 바는 주를 거역하고 회개의 선을 넘어간 자들이 전능자를 비참하게 만든 사실로 인해 흡족해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심판의 승리에서 패배하신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모세는 그들이 심판을 받을 때, 부지중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무한한 가치와 공의와 능력의 나타남으로(롬 9:22-23)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경고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조롱을 당하지 않으신다. 그는 궁지에 몰리거나 함정에 빠지거나 강요당하지 않으신다. 갈보리로 가는 길에서조차 그는 휘하에 천사의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목숨)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 자신의 선한 기쁨으로, 그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우주의 역사 속에서 한순간에 하나님이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관할하며 그가 기뻐하시는 바로 그것 당신과 나와 같은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죽으심을 행하셨다.
*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보다 더 영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순수한 영적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신 적이 없다. 그것이 그가 빵이나 포도주 같은 물질적인 것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새 생명을 넣어주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것이 다소 조야(粗野)하며 비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는 먹을 것을 만드셨다. 그는 물질을 좋아하신다. 그가 그것을 만드셨다…나는 어떤 멍청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가 섹스나 육체의 즐거움 그 전체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그러나 잘못 알고 있다. 기독교는 아마도 주요 종교들 중 육체를 철저히 승인하며 물질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단 하나의 종교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한때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며, 천국에서조차 어떤 종류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며, 그 몸이 우리의 행복과 아름다움과 에너지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내가 달의 아름다움 아래 앉아 있거나 이른 아침 호수를 내다보거나 거목의 나이와 든든함에 놀랄 때, 이렇게 큰 기쁨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올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으로 씨름하곤 한다.
*창조물의 메시지는 이러하다. 이 모든 놀라운 우주의 배후에는 영광과 능력과 관대함의 위대한 하나님이 계시다. 당신은 그에게 속해 있다. 그분은 당신의 순종치 않는 삶을 지속시키시며 당신에 대해 인내하신다. 돌아서서 당신의 소망을 그에게 두며 그가 손으로 만든 것들이 아닌 그분 자신을 기뻐하라. 낮은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눈부시게 밝은 해와 푸른 하늘과 구름과 눈에 보이는 온갖 모양과 색깔의 모든 것을 통해 말할 것이다. 밤은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거대한 짙은 허공과 여름의 달과 셀 수 없는 별들과 이상한 소리와 시원한 바람과 북극광을 통해 같은 메시지의 '지식'을 전할 것이다. 밤과 낮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을 기뻐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이다. 창조물속에 자신의 영광이 반영되는 것을 그는 보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을 기뻐하셔도 우상 숭배자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은 그의 지혜의 표현들을 기뻐하신다. 이 우주는 지혜와 질서의 걸작이다. 우주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의 몸을 보라. 얼마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작품인가? 누가 인간의 두뇌를 이해하며 몸과 정신이 함께 일하는 신비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가까이 보거나 멀게 보거나 큰 것을 보거나 작은 것을 보거나 자연의 경이는 그 모든 자연 속에 누벼져 있는 지혜로 마음을 찌른다.
당신은 알려져 있는 규조류 종류가 만 개라는 것을 아는가? 보통
호수의 물 한 숟가락 안에는 이 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식물이 백만개는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 극미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동안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 그것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그것들은 물속에 있는 동물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몇 톤의 산소를 만들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차 있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시편 기자는 어떻게 모든 것이 그토록 지혜롭게 되어 나가는지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작품들이 그 자신들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들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창조의 작품을 인해 놀라며 경이감을 가지길 원하신다. 그러나 창조물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창조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길 원하신다: “단지 그의 손가락(시 8:3)으로 만드신 것이 이처럼 지혜와 능력과 위대함과 장엄함과 이름다움으로 가득 찬다면 하나님 그 자체는 도대체 어떤 분이시겠는가?”
이것들은 단지 그의 영광의 뒷모습이며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이 아닌 창조주 자신을 직접 뵙는다면 그것은 어떠하겠는가? 십억의 은하계도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혼의 목적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나님을 즐기는 것만이 우리 영혼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완전히 즐기는 것이 여기서 가장 즐거운 편의보다 무한하게 낫다...(이것들은) 단지 그림자이나 하나님은 실체이다. 이것들은 단지 흩어진 빛이나 하나님은 태양이시다. 이것
들은 단지 강물의 줄기이나 하나님은 바다이시다.
*성장한다는 것의 비극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사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안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떠오르는 태양의 붉음, 달의 둥글다는 것, 눈의 흰 것, 비의 축축함, 하늘의 푸르름, 벌들의 윙윙거림,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심장과 격막의 무의식적인 일정함, 코와 눈의 이상한 모습, 해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 결코 쉬지 않는 셀 수 없는 파도의 부딪힘, 왕의 옷을 입은 무수한 꽃들의 피어남, 그리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수풀과 계곡 등을 보며 그것들의 시듦에 대해 익숙해졌다면, 그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나도 클라이드 킬비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시각의 신선함”을 채울 것을 부탁하며, 목적 없는 진화론적 우연으로 축적된 수천 년 간의 공허한 산물(어떤 어린이도 거기에 대해 꿈꾸지 않는)이 아닌 육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신 무한하게 강하고 창조적이며 윤기 왕성한 예술가의 개인적인 수공품을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나는 당신에게 (마치 어린 아이가 믿는 것처럼) “오늘, 바로 이 날, 우주의 화판에 한 붓놀림이 더해진 것을 믿으며 머지않아 그 붓놀림이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부르는 화가에 의해 되어진 것을 당신이 기쁨으로 이해하게 될 것”을 부탁드린다.
*본 장 초고에 나는 “그의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지금도 그 제목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십 년에 걸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위하여” 일을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첫 번째요 또 가장 중요한 기도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도록 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 위대한 열정과 일치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주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해주소서.” 즉 그의 이름을 존중하고 사모하며 존경하고 아끼며 우대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선교사의 기도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단지 이름이 아니라 명성에 더 강조점을 두는 것이 옳게 여겨졌다. 명성이란 잘 알려진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그가 참으로 누구인가, 특별히 그가 우리에게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본 장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실체대로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인 평판을 사랑하신다.
*이 구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을 갖지 않아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이다. 왕을 원하는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소망과 두려워하지 않음의 가장 깊은 기초는 아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가? 사무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의 가장 깊은 이유는 그 자신의 이름에 대한 그의 우선적인 헌신 때문이다. 우리의 용서와 대담함과 기쁨의 최저 기초는 자기의 크신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이다. 첫 번째로, 그는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행하시는 데 헌신하셨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데 헌신하신 것이다.
사무엘상 12:22에서 사무엘은 어떻게 그 둘을 연결하는가? 왜 그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떻게 자기 이름에 대한 그의 헌신이 이 백성에 대한 헌신을 일으키는가?
22 절 처음 부분이 그 대답을 해준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에 그의 이름을 거실 정도로 당신을 그 자신에게 결합시키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당신이 어떻게 되느냐가 하나님의 이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당신을 소유하시는 것이 그분의 선하신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인하여 그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사무엘상 12:22에서 사무엘은 어떻게 그 둘을 연결하는가? 왜 그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떻게 자기 이름에 대한 그의 헌신이 이 백성에 대한 헌신을 일으키는가? 22 절 처음 부분이 그 대답을 해준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에 그의 이름을 거실 정도로 당신을 그 자신에게 결합시키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당신이 어떻게 되느냐가 하나님의 이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당신을 소유하시는 것이 그분의 선하신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인하여 그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상 12:22 이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그의 주목적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며 그의 명성이 퍼져나가는 주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을 그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셨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를 위한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는 수단으로 그들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기쁨의 근저와 배후에는 더 기본적인 기쁨, 즉 자기의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당신은 동일한 복음의 논리가 여기서도 작용하는 것을 보는가? 이것은 사무엘상 12:22에서 살펴본 동일하게 소중한 논리이다. 거기에서 보면 죄악 된 백성이 왕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노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의 크신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죄악 된 백성이 홍해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엄청난 능력으로 구원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같은 대답, 즉 그 이름을 인하여 그 큰 권능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첫 번째 사랑은 죄스런 백성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이름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죄스런 백성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구원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주의가 복음의 근거임을 보는가?
이 하나님 중심적인 복음의 논리를 이해하고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그 논리를 하나님의 죄스런 백성을 위해 탄원하는 데 사용한 여호수아를 또 다른 예로서 살펴보자. 여호수아 7장에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며 여리고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아이성에서 패배를 경험했다. 여호수아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가장 필사적인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수 7.8-9)”
모든 하나님 중심적인 주님의 종들에게 언제나 소망의 위대한 근거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열방 가운데 그 크신 이름을 오랫동안 더럽히게 내버려 두실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며 가장 기초적인 확신이었다. 다른 것은 변하지만 그러나 그 “크신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은 변하지 않는다.
*소망의 위대한 근거, 기도해야 할 위대한 동기, 자비의 위대한 샘은 자기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멋진 헌신이다. 그의 명성에 대해 그가 가지신 기쁨은 하나님의 깃발을 들며 그의 약속과 자비의 품에 자신들을 내던지는 자들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기꺼움의 서약이며 열정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용서에 관한 그들의 소망을 그들의 공로나 외적인 의식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의 크신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자비를 구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 25:11).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렘 14:7, 9).
* … 예수께서는 “예수를 인한 용서가 “하나님의 이름을 인한 용서와 같은 의미가 되게끔 그렇게 죽으셨다.
우리는 이를 로마서 3:25-26에서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으며(5:43)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하신다(10:25),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으며(17:6) 또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7:26), 따라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요한복음 12:27-28에서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히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죽음 직전에 기도하고 계신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의 죽음의 때는 임박했고 그때에 그가 온 목적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아버지께서 죄인을 용서함으로 인해 받는 모든 불의의 비난으로부터 자기 이름 -자기 명성-의 정당함을 용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이름의 명성에 대한 기쁨을 잃는다면 용서의 기초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자기 명성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들의 용서의 기초일 뿐 아니라 우리의 순종과 봉사와 선교의 기초이기도 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 23:3) 것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또한 예수께서는 에베소에 있는 인내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또 네가 참고 네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계 2:3)라며 칭찬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그 주인을 마땅히 공경할 자로 여길 것을 권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하려”(딤전 6:1)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아마도 골로새 3:17에서 전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음의 말들로 요약했을 때 의미한 바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즉 당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그에게 선한 평판을 돌리며 그의 명성을 전하기 위해 살라는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세상의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을 가져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믿음과 순종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 이름을 위하여” 이다. 그리스도의 명성, 그리스도의 평판,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불탔던 것이다. 열방들의 믿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지상 명령을 위한 열정으로 그를 채웠던 것이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행 9:16) 말씀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명성을 위해서는 고난 받음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그는 여전히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행 21:13)라고 말할 수 있었다. 로마서 15:19에서 바울은 자신이 선교에 헌신한 것에 대해 묘사한다. 이 구절은 바울과 같은 유형의 선교사가 무엇에 헌신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택을 하나님의 창조하심이나 생성하심에 비교함으로써 선택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를 암시하였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사 44: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지으셨다.” 이 둘은 다 사실인데, 왜냐하면 택함은 너무도 특별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일이어서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창조이며 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는 또 말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사 43:1).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사43:15).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사 45:11).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실제적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나 창조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세도 본질적으로 같은 말을 한다. “우매 부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 32: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때 바로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 4 22-23 호 11:1을 보라). 유사하게 선지자 말라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을 아버지 또는 창조자에서 하신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니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말2:10; 1:6도보라),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토기와 토기장이 사이의 관계에 비교로 가장 강한 말을 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나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7-8).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택에 있어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도덕적 적절성에 감동을 받아서 그를 낳는 것이 아니며, 토기장이가 존재하지 않는 토기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아 그것을 만들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도적인 적절성에 영향을 받지 않으셨다. 이것이 무조건적인 선택의 의미이다.
*아들을 낳았을 때, 둘 중 오직 하나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약속의 자식으로 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해 그의 택한 백성의 계통을 잇게 하셨다. 각 경우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에 있어서 주권적인 자유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행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너무 늙어 자녀를 가질 수 없을 때, 기적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삭이 탄생했다. 요점은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의 능력이나 무능력에 제한을 받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가 기뻐하는 자는 누구든지 택하실 수 있도록 자유로우시다. 비록 그가 기적적인 탄생에 의해 아이를 창조해야 했어도 말이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경고하면서 의미했던 진리였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이라는 어떤 인간적인 특징 때문에 너희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필요하다면, 돌들로도 그들을 창조하실 수 있으시다. 그의 택한 은혜를 당연시하는 잘못을 조심하라. 그것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는 방법에서 같은 요점을 강조했다. 그들의 경우 하나님은 모든 보편적인 관습과 인간의 기대에 의하면 택하지 않아야 하는 나이 어린 아들을 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택에 대한 그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시도도 훼손할 작정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적 특징에 의해 제한되거나 강요받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0-13에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이 자유롭고 무조건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유대인됨이나 장자됨이나 선이나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완전히 자비롭고 은혜롭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
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으니“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식들(롬 9:8)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게끔 택하셨다는 것이다. 선택이 무조건 적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세 가지 면으로 설명한다. 1) 야곱과 에서는 이삭과 이스마엘과는 달리 같은 부모를 가졌다(10절). 그러므로 출신이 야곱의 선택을 더 나은 후보자로 만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2) 선택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졌다(11절). 따라서 선택은 출생의 순서에 근거하지 않았다. 실제로 하나님은 순서를 바꾸어서 어린 자를 택했다. 3) 야곱의 선택은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요점은 명백한 것 같다. 선택은 어떤 사람이 출생 후에 한 것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롭고 무조건적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세 번이나 그 선택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이 위대한 목적을 알린다. 이것은 모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4-6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11-12절에서 그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한다. 셋째로, 14절에서 그는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한다. 이 세 경우에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한 위대한 궁극적인 목적 즉 그의 은혜의 영광이 뜨거운 사랑으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시는 것을 위해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보증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을 기뻐하시는 이유이다. 인간의 자기 의존의 마지막 피난처를 제거하고 그를 흔들리지 않는 언약 사랑의 반석에 맡기게 하는 것은 자유로운 은혜의 이 위대한 처음 사역이다.
*선택은 우리가 말(馬)에서 떨어지지 않게 우리를 지켜준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총은 창세전에 그 사랑의 자유로운 행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값없이 주시기로 선택한 것을 우리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롬 9:11), 그것은 또한 우리가 값없이 주시는 사랑을 받고 영원토록 안전하기 위해서는 순종은 필요한 것이 아닌 선택적인 것이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또한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위한 동기는 그 절박성을 유지하는데, 왜냐하면 거룩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히 1:14). 그러나 그것이 율법적인 짐이 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섬기기 때문이다(벧전 4:11; 고전 15:10; 롬 15:18도 보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 하다는(마 7:14) 것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 11:30)의 두 말씀이 다 사실이다. 선택의 진리는 성경적인 순종의 절박성과 자유 둘 다를 보전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해 위대한 정열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드러난 곤란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죄인인 사람들을 우대하고 축복하시며 높이고 계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하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 비뚤어졌다. 자기 영광의 위대함과 자기 이름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데 무한히 헌신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의 대적들을 영원한 기쁨과 존귀로 인도하는 데 그 온 힘을 다하여 일하시고 계신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로마서 3:23은 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바울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존경하는 데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 즉 그 영광의 그림자들, 예를 들어 새 집이나 차나 비디오나 컴퓨터나 휴가 기간이나 인상적인 이력서나 그 외의 하나님의 영광의 경이보다 더 우리의 심장을 울리는 어떤 것으로 바꾸었다.
*나는 우리가 이 긴장 상태를 느끼기 시작하기까지 성경의 중심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성경은, 불협화음이 조화에의 어떤 마지막 해결을 요구하는 음악과 같다. 구속의 역사는 두 개의 주제를 가진 교향곡과 같다. 즉 자기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열정의 주제, 그리고 바로 그 영광을 모욕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택하신 사랑의 주제이다. 전체 성경을 통해 반복해서 역사의 교향곡은 이 두 위대한 주제를 실어간다. 그것들은 서로 뒤섞이며 서로 파고든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우리는 해결의 화음을 듣지 못했다. 그 화음은 우리를 언제나 피해 간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의 교향곡의 해결이다. 예수의 죽음에 자기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두 주제가 조화를 이룬다. 모든 좋은 교향곡에서처럼 최종적 해결의 암시가 있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53 장에 기록된 것이다.
자기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과 죄인들에게 선을 행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아들을 상하게 함에 대한 그의 기쁨에서 서로 만나 하나를 이룬다. 이사야 53:10을 인용하기 전에 내가 이 구절을 번역하는 데 영향을 준 두 본문을 보여주려 한다.
*구속 역사의 불협화음을 해결하는 데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가 그를 다치게 하셨다.” 어느 사역자 친구는 설교 중 매우 강렬한 순간에 대해 내게 말해주었다. 그는 일리노이 주의 감옥에서 성주간(Holy Week)의 목요일에 설교를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다가 설교를 멈추고 죄수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는가?” 한 사람이 “유대인들"이라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이 “군인들" 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이 빌라도”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유다”라고 했다. 내 친구는 “당신들의 말은 틀렸소" 라고 말했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를 죽였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 후 그는 성경을 읽었다.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가 그를 다치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제력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로 인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 의해 상함을 당하신 것이다. 또는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행 2:23) 되셨다. 이 충격적인 진리가 죄수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불의하고 성난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고 상함을 입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는지 듣기를 간절히 원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상하게 하셨으며 그를 다치게 했는가? 그는 자기 영광에 대한 그의 사람과 죄인들에 대한 그의 사랑 사이의 불협화음을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 이사야 53:6에서 이것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라. 일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문제는 죄악임을 주목하라. 아들이 상함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가 무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것이 무시될 수 없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으로 제쳐두지 못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의 영예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영광을 훼손하는 죄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듯 행동하실 수 없으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위대한 것도 위험에 처하지 않는 듯 우주의 양탄자 밑에 그저 쓸어 넣을 수 없다. 온 세상의 재판장이 바르게 할 것이다(창 18:25). 그가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이다(시 9:8).
*기독교 복음의 중심부에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4:5)라는 문장이 있다. 그가 죄인을 방면하신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옳은 일인가?
로마서 3:24은 부분적인 대답을 해준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에서 일어난 신적 거래에 근거해서 불의한 자가 방면(의롭게 됨)되었다고 말한다. 이 거래는 “구속" 이라고 불리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구속은 예수의 죽음으로 값이 지불된 일종의 매매 또는 속전을 지칭한다. 너무도 엄청난 일이 예수의 죽음 안에서 일어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셀 수 없는 죄인들의 방면의 근거로 사용된다. 이 구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죽었을 때 일어난 신적 매매는 무엇인가? 바울은 25-26 절에서 대답해 준다.
먼저 우리는(사 53:10 처럼) 예수를 죽게 하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본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를 인하여…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25절), 그를 상하게 하신 것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다. 다음에 우리는 그 아들을 죽음에 내어준 이유는 “화목 제물을 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본다. 이 오래된 말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속죄”와 “대속의 제물"과 같은 다른 단어들은 이 단어에 있는 ‘진노를 달래다' 라는 의미를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요점은 경건치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했던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해 있고, 이 진노를 돌이키는 방법이 반드시 발견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것이 화목 제물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진노를 돌이키셨다.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시고 심판하시지 않을 때, 그의 의로우심이 비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 죄가 그의 영광의 가치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자기 영광의 가치를 옹호하고 온 세상에 그의 명성을 선전하시는 데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헌신이다. 죄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취급될 때 하나님의 영광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실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이 보인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의 무한한 가치를 부인하는 식으로 행하신다면, 그는 궁극적인 불법을 범하시는 것이다. 그는 무한히 성스러운 것을 모독하며 무한히 거룩한 것을 더럽힌다. 그는 로마서 1:23의 죄인들에 합류하며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영광으로 바꾼다. 이 전망은 너무 끔찍해서 만약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면 복음도 없고 소망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죄인들을 선택하셨다. 그는 그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그들을 그의 존전에 데려오며 그들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려고 작정하셨다. 그는 그들의 죄가 자기 영광을 더럽혔지만 이 일을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 자기 영광의 가치를 옹호하며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시는가? 로마서 3:25-26은 이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대답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즉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을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자기 영광의 가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헌신)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유다가 마지막 만찬장을 떠나고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 1331)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수난의 마지막 시간에 일어난 기본적인 거래였다. 요한복음 17 장의 예수님의 위대한 기도에서 그는 자기의 죽음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예수님의 모든 일은 그 아버지의 영광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예수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당하신 고난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과 굴욕과 불명예는 아버지의 영광을 크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무한한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 그러한 손실을 당해야만 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완전 무죄 하시고 무한히 가치 있으신 하나님 아들의 죽음과 파멸의 고통을 바라볼 때, 그리고 죄인들에 의해 더렵혀진 그 아버지의 영광이 회복되기 위하여 모든 고통을 참으셨던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의 가치를 부인하시지 않으신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불성실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고 영예를 옹호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는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제 이사야 53:10에 묘사된 하나님의 기쁨에 관한 우리의 묵상으로 되돌아간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벌어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위대한 거래는 아버지의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그를 상하게 하신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 또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 이었다(엡 5:2). 그래서 이제 우리가 더 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희생을 기뻐하실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대답의 한 부분이 10절 끝에 강조되었다. 즉 하나님의 기쁨은 죽음으로 아들이 성취한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기쁨이 그의 손으로 더해질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기쁨이 자기 아들의 죽음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그의 고난 가운데 성취한 위대한 성공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게 될 때 그가 그 후손을 보게 되며 그날은 길어질 것이다. 주님의 기쁨이 그의 손으로 더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께서 영적 후손을 낳으며 그가 그들보다 먼저 영원으로 가셔서 그 날을 영원토록 길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히브리서 2:13의 말을 빌자면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 아들의 손으로 증가된 방법은 소위 “십자가의 후손”을 창조함에 의해서이다. .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
이사야 53:11은 로마서 3:24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된 사실상 같은 말로 그들이 누구인가를 묘사한다. 그들은 의롭게 된 죄인들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경건치 않은 자의 칭의, 그것이 하나님의 종 예수의 손으로 더해지게 된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의 상함을 기뻐하신 이유에 대한 대답의 첫 번째 부분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려 십자가의 저주에 넘겨주며 그의 고통을 제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그 아들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이 지셨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으로 넘기신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의 고통의 깊이가 아버지의 영광에 대한 자기 아들의 사랑의 척도임을 아셨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하나님은 가장 깊은 기쁨을 취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신비한 사건이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저주가 되셨다(갈 3:13).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가 가장 무겁게 예수님께 머물렀던 그 순간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폭발적인 정도에 도달했다. 이것이 예수께서 그의 마지막 숨을 쉬시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이유이다. 비록 그는 아버지의 진노가 자기에게 퍼부어지는 줄을 알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견뎌야 함도 알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께서 자기를 사랑하심도 알았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저주였던 그 고난에 대해 아들에게 상을 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 2:9; 빌 2:9도 보라).
예수께서는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했으며 그 아버지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자기 이름을 높이는 데 넘치는 기쁨을 가지시고 자기를 위해 죄인들을 선택하시는 데 한없는 기쁨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 두 위대한 신적 기쁨이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일이 일어난, 자기 아들의 상함을 기뻐하시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선을 행하기(역자 주, 렘 32:39 41 에서
한글 개역 판에 “복을 주신다”는 말을 저자는 “선을 행하심” 으로 번역하였음) 위하여 당신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선을 행하실 것이다.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때는 선을 행하시고 또 다른 때는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 선을 행하시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를 결코 중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일이 “악” 하게 될 때에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기를 중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어떤 것들의 자리를 이동시켜 제자리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그를 계속해서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 8:28). “여호와 하나님은…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사 38:1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참조)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되” (렘 32:41)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네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리라”(신 30:9, 저자의 번역), 그는 우리에게 마지못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행에는 일종의 열심이 있다. 그는 우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는 우리를 찾아 나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를 뒤쫓으신다. 그것이 시편 23:6의 문자적인 번역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는 어떤 훌륭한 교사가 그 구절에 대해 설명한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지 고속도로 순찰 경찰관처럼 빛을 번쩍이며 사이렌을 울리며 당신을 멈추게 하기 위해 당신 뒤를 쫓는다. 딱지를 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좋은 소식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어서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를 사랑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선을 행하려는 욕구에서 주저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모호하시지 않다. 그의 분노는 단단한 안전 자물쇠에 의해 방출되어야 하지만 그의 자비는 민감하기 그지없는 촉발 방아쇠를 갖고 있다. 그것이 그가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말했을 때 의미한 바이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요점은 그의 분노의 더딤과 그의 사랑의 넘침 사이에 보여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기쁨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자기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거나 아름답게 함으로써 그들에게서 기쁨을 취하신다. 그는 성령의 열매 -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 라고 불리는 놀라운 은혜의 일 가운데서 지금 부분적으로 그것을 하신다(갈5:22). 그리고 그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롬 8:21)를 경축하기 위해 일어서며 모든 신자들이 “그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때”(마 13:43), 곧 부활의 때에 그 아름답게 하는 과정을 완성하실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경험했던 어떤 기쁨도,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이든 간에, 자기 백성들을 아름답게 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자기 백성을 아름답게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든 고통과 슬픔과 불행을 제거하시며, 그것을 또한 즐거워하실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9)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땅에 있는 동안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 이에 대한 훌륭한 이유들이 있고, 그것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이유들이다.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 시험에 합격되고 방학이 시작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그가 눈물도, 고통도, 흠도 장애도 결함도 없는 완전한 우리의 모습을 볼 때 그에게서 노래가 터져 나올 것이다. 새 땅과 우리의 새 몸과 완전한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즐거움에 대한 기쁨일 것이다.
*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죄인들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호소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자기 이름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사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자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일서 1:9에 있는 “의로우사" 라는 간단한 말의 의미하는 바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본문은 만약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는 무자비할 뿐 아니라 불의한 분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왜 용서가 자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의의 문제인가?
그 대답은 예수께서 그 죄를 고백하고 그 안에 피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의로운 보상을 하기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셨으므로(요일 1:7)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지 않으면 불의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죄 없는 삶에 의해 그를 영광스럽게 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 안에 피난처를 삼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고 그 이름의 영광을 옹호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뿐만 아니라 공의에 의해 예수의 가치에 자신의 삶을 거는 모든 자들을 반드시 용서해야만 하는 것이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라고 요한은 말했다.
* 앞에서 요구 자체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반응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그 대답은 그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간절하고 깊은 느낌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로움이 없는 죄인으로서 자족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인자함을 바라라!” 라는 명령보다 더 듣기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그린랜드의 빙판에 몰려 있는 것과 같다. 우리의 위치는 너무도 불안정해서 숨만 깊게 들이마셔도 멸망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너를 구원하겠고 이 폭풍에서 너를 보호하겠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가슴은 가라앉는다. 당신은 그 조건을 이룰 수 없을 줄 안다. 당신은 패배하고 있음을 느낀다. 만약 당신이 입술만 움직여도 당신은 떨어질 것을 안다.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그때 그는 복음의 명령을 하신다. “내 요구는 네가 나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나는 묻는다.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닌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을 바라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그가 요구하는 것의 전부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죄인인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만이 아니다. 이 요구를 우리에게 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을 바랄 때, 당신은 그가 강하며 당신이 약하고, 그가 부유하며 당신은 가난하고, 그가 충만하며 당신은 비어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바랄 때, 당신은 하나님이 아닌 당신이 궁핍함을 가진 자임을 보여준다(시 50:10-15; 71:4-6, 14). 당신은 환자이며 그가 의사이다. 당신은 수풀속의 목마른 사슴이며 그는 흘러넘치는 샘이다. 당신은 잃어버린 양이며 그는 선한 목자이시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간단한 요구(하나님을 바라라!) 안에서
우리가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 간단한 소망의 행위로 그의 은혜는 영화롭게 되며 죄인들은 구원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 - 그와 우리의 감정의 중심 - 에 두는 복음의 명령이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욥기 39:19-25)”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홀로 만드신 말의 힘을 기뻐하신다. 욥은 말의 놀라운 힘을 자신의 공로로 삼을 수 없었다. 요점은 이 영광스러운 동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이것이다. 전쟁 때에 사람들은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대신 말에게 둔다. 그러나 잠언 21:31 은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편 20:7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편 33:17은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좋은 것들인 사람의 다리와 말의 힘을
불쾌해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의 말들과 그들의 다리에 소망을 두는 자들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는 예를 들어 미사일이나 화장, 탱크나 일광욕, 폭탄이나 육체미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을 불쾌해 하신다. 회사 효율, 또는 수지 균형, 복지 제도, 새 항체, 교육, 능변, 예술적 탁월성, 또는 법적 조치 등이 우리가 바라는 보물이거나 우리가 자랑하는 업적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게서 아무런 기쁨도 취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이나 사람의 다리에 사랑을 둘 때, 하나님이 아닌 그것들이 영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해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다는 것은 곧 그의 사랑에 소망을 둔 사람들을 그가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정당한 위치인 복음의 중심에 거하시게 되는데, 이곳은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의 자리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알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놀라운 언약의 일부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조건이다. 그 조건은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피난처와 보물인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이 반응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증대시키며 우리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께는 내가 채워 드려야 할 궁핍함이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충족시켜 드려야만 되는 결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그 자신으로 완전하시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행복으로 충만하시다. 이것의 요지는 하나님은 물통이 아니고 산 속의 샘이라는 것이다. 산 속의 샘은 스스로 채워진다. 그것은 계속 흘러 넘쳐 다른 것에 물을 공급한다. 그러나 물통은 펌프나 두레박으로 채워야 한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물통의 가치를 영광스럽게 하기 원한다면, 그것이 가득차고 유용하게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샘의 가치를 영광스럽게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무릎을 꿇고 당신 마음의 만족을 위해 마시면 된다. 그러고 나서 힘과 원기를 얻어 계곡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찾은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당신은 의무적으로 아래에 있는 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것을 산속의
샘에 부음으로써 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펴본 것은 하나님은 물통이 아닌 산 속의 샘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해, 물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시기 위해 그에게 오는 것임을 성경에서 배워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강해진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가장 만족을 느낄 때, 우리에게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잠언 15:8에서부터 시작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나는 이 장이 당신으로 기도하게끔 격려할 뿐 아니라 값없는 은혜의 샘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이 재확인되는 효과를 가지기를 바란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구하기보다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가장 깊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기도는 우리 가난함의 정도와 그의 은혜의 부유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큰 기쁨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부가 더 크게 되며 우리 영혼의 궁핍함이 채워지는 놀라운 거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왜 하나님께서 악인의 제사를 미워하시며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시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검토함으로써 잠시 잠언 15:8을 묵상하도록 하자. 내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레위기에 인정하신 하나님께 대한 제사같이 좋은 것이 주께 가증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잠언 15:8의 전반부는 이렇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이에 대한 대답은, 어떤 것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라도 잘못된 내적 동기에서 행할 때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경건하게 보이는 외적 행위가 하나님의 눈에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그 경건한 행위가 잘못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포된 원리는 이런 것처럼 생각된다.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행위의 아름다움은 내적인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행위이며, 행위의 추함은 내적 추함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므로( 삼상 16:7), 그는 우리의 외적 행위를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고 우리의 속을 보기 위한 연장으로 본다. 우리의 행위가 도적질하거나 거짓말하거나 간음하는 것 같이 부도덕하거나 교회 출석이나 지역사회 봉사 같이 도덕적이거나 간에 마음이 바르지 못한다면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불일치를 미워하신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악한 자가 하나님께 와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면 그의 제사는 열납된다. 그것이 속건제의 목적이다. 주 중에 죄를 범한 사람도 상하고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오면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의 제사를 미워하시는 이유가 단지 주중의 외적 행위들의 불일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죄로 인해 상한 마음이 없이, 또 그 죄를 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상태가 그들의 제사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이유인 것이다. 제사는 죄인을 위한 용서의 기회로 의도된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죄 그 자체가 그들의 제사가 거부당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결론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악한 자의 제사는 가증스러운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마음의 연장이나 귀결로 보기 때문이다. 마음이 악하면 그것이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그 행위도 악하다.
*정직한 마음의 첫 번째 표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떤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사야 66 장에서 보는데,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문제를 다룬다. 이사야 66:3은 제물을 가져온 악인에 대해 묘사한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그들의 제사는 살인과 다름없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4절에 하나님의 대답이 있다.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2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며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이로부터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는 정직한 자의 첫
번째 표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떠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사람들이 주께서 보시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직한 자의 기도는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마음으로부터 온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너무도 멀리 있고 그의 심판에 너무도 상처받기 쉬우며 자신의 실패로 인해 너무도 무력하며 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정직한 자” 또는 “의로운 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쉽게 범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로운 자나 정직한 자는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 죄를 미워하여 하나님께서 용서와 도움을 주실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중의 하나는 시편 32 편이다. 그것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완전한 사람이 아닌 용서받은 죄인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편의 끝에는 악인과 의롭고 정직한 자가 구별되어 있다. 무엇이 차이점인가? 10절과 11절은 그것을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라고 묘사한다.
10 절은 “악인”과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를 대조한다. 그리고 나서 11절은 그들을 의롭고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시편에서 정직한 자는 죄가 없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복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죄로 인해 상한 마음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온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정직한 자”로 생각해야만 한다.
시편 32편에서 “정직한 으로 번역된 말은 잠언 15:8의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에서도 사용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어도 정직한 마음의 이 두 가지 중요한 표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첫 번째로,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떤다. 그것은 불안함과 무력함을 느끼며 자비의 엄청난 필요를 인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마음은 용서하고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한다.
*이 시대는 교회를 전시 체제 하에 두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 선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고난 받기를 감수하는 강한 군대와 의기양양한 결의로 전진하여 세상을 강습하여 빼앗는 교회의 투쟁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모험하며 하나님 한 분을 믿고 나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 대답은 그것이 평화 시대의 정신 자세에 삼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악마적인 폭탄 투하 소리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총알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희게 된 추수 곡식 속에서 지옥의 화학 약품 냄새를 맡지 않는다. 그들은 매 주 멸망하는 수천명을 위해 슬퍼하거나 울지 않는다. 또한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의 악한 영적 군대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어둡지 않다고 말한다. 밝고 안락하고 유쾌하다고 말한다. 내 집과 차와 사무실과 선실과 보트를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 새로운 디스크 플레이어를 들어보고 새로운 비디오 장비를 보라고 말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세계적인 전시 정신 자세이다. 내가 “전시”라고 한 이유는 삶은 전쟁이기 때문이며(딤전 6:12; 엡 6:10; 고후 10:3-5), “세계적”이라고 한 이유는 “전쟁터는 세상”이기 때문이다(마 13:38). 그리고 수천의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들이 이 지구상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순종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불순종은 두려움의 대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5:24에서 사울은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울은 왜 하나님 대신 백성의 말을 들었는가? 그는 죄의 신적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순종의 인간적 결과를 더 두려워했다. 그는 하나님의 불쾌감보다 백성들의 불쾌감을 더 두려워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이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 백성들에게 두 번씩이나 “오직 그 여호와)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14, 24)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백성의 지도자가 사람을 두려워하며 돌이켜 주님을 따르지 아니한 것이다(삼상 15:11).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그것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성경적인 진리이다. 이사야 8:12-13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사울이 범한 바로 그 실수에 대해 경고한다.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둘째, 하나님께서 순종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불순종은 잘못된 대상을 기뻐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사무엘이 “어찌하여 왕이…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라고 한 것은 백성들이 그 모든 고기가 주는 기쁨에 대한 과도한 욕구에 의해 움직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기쁨의 대상이 잘못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미소와 교제를 기뻐하기보다 양과 소의 고기를 더 기뻐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 큰 모욕이며 따라서 그의 보시기에도 매우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놀라운 임재의 전망을 보고 불순종의 지나가는 기쁨보다 그것을 더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영예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기뻐하신다.
*셋째, 하나님께서 순종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불순종은 잘못된 대상을 찬양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울이 아말렉 족속들을 물리치고서 처음으로 행한 일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이었다. 사무엘상 15:12에서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라고 말한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내는 것보다 자기 이름을 내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찬양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 두었다.
*넷째,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순종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불순종은 사술(形)의 죄와 같기 때문이다.
… 왜 거역이나 불순종이 사술의 죄와 같은가? 사술은 하나님의 권고와 말씀을 무시하면서 무엇을 할까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도하심을 불신하며, 그것들을 틀렸거나 충분치 못하다고 여긴다. 그것이 정확하게 불순종의 기초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면 우리는 “나는 다른 지혜의 공급원에게서 조언을 구해야겠다” 라고 말한다. 사술의 경우에 첨가된 지혜의 공급원은 무당이나 점쟁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의 경우에 첨가된 지혜의 공급원은 중종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의 지혜를 두는 것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혜의 공급원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순종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불순종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우리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고, 따라서 사술의 죄를 범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지시보다 우리 마음의 지시를 존중했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최악의 사실은 그 우상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기뻐하시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면에서 그의 영광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보다 물건에 대한 기쁨을 더 높인다. 하나님을 위한 이름 대신에 그것 자신을 위한 이름을 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안식하는 대신에,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외에 다른 인도자를 찾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보다 자신의 지시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며, 인간 의지의 우상에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폐위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순종은 정반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그를 존경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크게 기뻐하신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강한 팔이 배후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용맹스럽게 행할 때 그 아버지가 미소를 짓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보시고 미소를 지으신다.
*아가서 5:6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한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구원할 수 없는 죽은 믿음이다. 야고보서 2:17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순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순종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복음이며, 이 믿음의 순종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롬 1:5과 14:23 을 보라).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은혜의 이름으로 일종의 2단계 기독교를 장려하지만 실제로는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천국에 가는 데 필요한 믿음의 단계가 있으며, 천국에 가는 데에는 순종의 단계가 필요하지 않다고 (아마 천국에서 상을 얻기 위해서는 순종의 단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순종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은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적인 삶 전체는 점차 믿음으로 영위되는 삶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경험으로 변화된다. 순종을 선택적인 것으로 만들고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서 순종에서부터 믿음의 뿌리를 잘라버렸으므로, 실제로 그들은 순종의 삶을 효과적인 구원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야 하는 행위들의 삶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믿음이 아닌 다른 능력에 의해 순종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은혜의 결과가 아니다.
*이 실수의 근원적인 이유는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은혜는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용서해 주는 단순한 자비가 아니다. 은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는 단지 용서가 아니라 능력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10을 보면 명백하다. 바울은 은혜를 그의 사역에 능력을 부여하는 힘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니 하나님의 은혜로라."
단지 바울의 죄를 사해주신 것이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순종 가운데 밀어붙이는 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는 노력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된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며 “범사에…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벧전 4:11).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에 의지하여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쁨을 주는 순종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순종이다.
*그 이유는 성화가 구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그리스도인 삶의 제1단계로 그리고 성화(또는 거룩함 또는 순종)를 제2단계로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구원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한 현재 과거 미래의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역사를 묘사하는 성경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구원 받았고”(엡 2:8) “구원 받고 있으며”(고전 1:18), “구원 받을 것”이다(롬 13:11; 벧전 1:5). 구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고 성화는 그것의 한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13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전 4:7-8; 벧전 1:2도 보라).
두 가지에 주목하라. 첫째, 우리는 성화를 떠나서 구원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부분이지 구원 후의 선택적인 단계가 아니다. 두 번째로, 성화를 통한 구원의 이 과정은 “진리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즉 성화는 믿음으로 된다. 그것을 가장 명백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고 믿음의 순종은 구원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성화를 통해, 즉 믿음의 순종을 통해 구원받도록 택함을 입었다.
*내가 여기서 분명히 하려는 요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기 때문에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넘쳐흐르는 행복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으로 행복해하신다.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쁨의 열매일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배임을 순종함으로 증명할 때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은 순종하라는 명령이 곧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라는 명령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기 어려운 만큼 하나님의 명령은 순종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
*반면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불쾌하게 여긴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분명히 나타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며, 주님을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자랑을 폐한다. 그러나 교만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심오한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과 자족감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업적을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가장 중요한 실체인 하나님이 빠진 세상의 구조물에 불과하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지혜는 하나님으로 시작되지 않으며, 하나님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바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거부한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뽐내는데,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다. 이 지혜는 인간적인 자만심에 이용되며, 현저한 업적들을 가지고 그것을 유지한다. 누가복음 10:21 과 고린도전서 1:21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을 감추신다.
*이제 하나님(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과 아들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을 기뻐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답해 보자. “어린아이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인간의 자족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족감을 강조해준다. “어린아이들”은 자족을 포기하고, 자신의 죄악 됨과 무력함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동기는, 그것이 하나님은 계시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의지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지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마음은 인간의 자결 능력과 자족함을 찬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린아이들에게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유지하고 나타내시는 데서 기쁨을 느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누구 지혜로운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 에게나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택하실 사람을 지시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꾸준히 지혜로운 자의 교만과 어리석은 자의 교만을 폐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무시함으로써 지혜로운 사람들의 입을 막으신다. 그러나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유를 알게 하시려고 몇몇 지혜로운 사람들을 택하신다. 하나님은 어리석거나 무식한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비율을 거스르실 것이며, 그럼으로써 사람의 지적인 업적이나 약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을 “어린아이들”로 만드실 수 있다.
만일 어떤 무식한 사람이 자신에게 값없이 주시는 계시를 받을 자격을 부여해준 것은 자신의 무식함이었다고 자랑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도 간과하실 것이다. 무지하다고 해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성찬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시며,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은 지혜로운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 모두를 “어린아이들”로 만드시며, 그들은 믿음에 의해 은혜에 합당한 그릇들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인간의 조건은 지혜나 무지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의존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르심의 결과이다.
*세 번째로 “주다”라는 단어를 고려해 보자.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은 너희에게 왕국을 파시기를, 또는 매매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너희에게 왕국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앞 장에서 반복해서 하나님은 산속의 샘이지 물통이 아님을 살펴 보았다. 그는 흘러 넘치기를 주고 주고 또 주기를 –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두레박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실 사람들을 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힘이 아니고 갈증이다. 우리에게 값없이 나라를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다.
그것은 사거나 물물교환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지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것은 복음의 방법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다. 그는 스크루지가 아니다. 그는 욕심 많거나 탐욕스런 분이 아니다. 그는 관대하며 후하며 아끼지 않으며 풍부하시다.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는 것은 그의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나라"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제한의 기쁨은 그의 선물의 위대함에 의해 증명된다. 그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5)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인기나 명성이나 사람들의 존경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2)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심지어 이 생의 안전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 21:16-17)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선물의 크기는 그것의 말로 할 수 없는 특권들이 주된 상에 부수되는 것임을 우리가 인식할 때 느껴진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땅과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이다(마 5:5; 롬 4:13). 그 나라에서 우리는 천사를 심판할 것이나, 이것 역시 부차적이다(고전 6:2-3).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며 만국들을 다스리는 권력을 소유할 것이다(딤후 2:12; 계 2:26-28). 우리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에서 열매를 먹을 것이다(계 2:7). 늑대가 양과 함께 거하며, 사자가 소와 같이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사 11:6-8). 우리는 칼로 보습을 만들며, 창으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다(미 4:3).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를 것이다(암 5:24). 우리의 몸이 새롭게 변화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눈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며, 죽음이 다시 없고, 우는 것이나 고통이나 죄나 두려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계 21:4). 우리는 만왕의 왕의 바로 그 보좌에 앉을 것이다(계 3:21).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나라의 부차적인 특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라의 주된 상은, 모든 다른 상 위에 있으며 모든 다른 상 가운데 있는 그 상은, 우리가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며 그 영광을 하나님의 기쁨으로 즐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생의 큰 실망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볼 때에도 기쁨을 수용하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 적음으로 천국의 계시와 우리 마음의 반응 사이의 부조화로 신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룩한 백성의 위대한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 영광을 무한한 만족 - 이 세상의 부분적인 기쁨이 아닌 것 - 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기쁨으로 음미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모든 소망 가운데 가장 높은 이 소망은,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이
장차 그 나라에서 그의 적은 무리에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4, 26).
예수님은 아버지께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부탁하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을 부탁하셨다. 예수께서는 상상 가능한 가장 높은 특권과 기쁨을 위해 기도하셨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서 자기 아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를 가득 채우며 그것이 그 아들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들 자신이 우리 안에 있을 것과 그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가지신 무한한 기쁨으로 우리를 채우실 것을 기도하셨다. 이것이 영혼의 목적이다. 이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은 상상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무한하고 영원하며 상호적이고 거룩한 사랑과 기쁨의 에너지가 성령 하나님 안에서 흘러넘치며 측량할 수 없고 영구한 기쁨으로 구속받은 영혼들을 채우는 것이다.